1980년 초 결성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단체 이름에서부터 기존 미술판에 충격파를 던졌고 그해 10월17일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산하 미술회관에서 창립전 대관을 하루 전날 일방취소하면서 빚어진 ‘촛불전시회’ 사태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은 82년 서울 덕수미술관에서 열린 ‘현발’의 세번째 정기 작품전 ‘행복의 모습’ 때로, 왼쪽과 가운데 두 그림이 고 김용태 선생의 출품작이다.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현발’ 창립때 야인풍모 그와 첫 대면
토론땐 경청, 뒤풀이선 좌중 압도

 

80년 창립전 ‘전시불가’ 통보
전기 차단하자 촛불 들고 관람
매년 ‘주제전’ 열어 세상 향한 발언
84년 용태형 ‘DMZ’는 불후의 명작

 

‘붉은색 들어갔으니 용공작품’
전두환 정권 노골적 탄압
오윤 세상 떠나고 몇몇은 유학
10년만에 해산…구심점 ‘민미협’으로

 

■ 현실과 발언의 태동

 

나와 ‘용태 형’의 인연은 순전히 1979년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에서 시작됐다. 바로 전까지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일한 그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새로운 동인 활동과 관련해, 맨 처음 나를 찾아온 이들은 그해 가을 최민과 오윤이었다. ‘부마항쟁’ 등 유신 말기의 어수선하던 시절 새로운 미술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같이하자고 권유했다. 그들과는 이래저래 자주 어울리는 사이라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는 동의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누가 누가 같이하는가?”

 

‘미술과 생활’에 자주 기고하던 평론가 원동석이 80년 ‘4·19혁명’ 20돌을 맞아 미술 분야에서도 기념 전시회를 열자며 처음 모임을 발의했다고 했다. 그 취지에 동의한 이들은 서울대 쪽으로 최민·성완경·김경인·오수환·오윤·최민 등과 홍대 쪽으로 손장섭·김정수 등이라고 했다. 그밖에 ‘미술과 생활’ 출신으로 윤범모는 알겠는데, 주재환, 김용태는 생소했다.

 

그해 12월 초 ‘현발’ 첫 회합이 있었다. 주재환과 김용태는 첫눈에 봐도 온갖 풍상을 겪은 야인의 풍모였다. 우리는 곧 의기투합했다. 물론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했던 무렵이라 만나도 제대로 교분을 쌓을 틈도 없이 헤어지곤 했다.

 

그러다 80년 초 ‘현발’이라는 명칭과 ‘새로운 미술’을 선언하는 창립 취지문이 완성되면서 자연히 모임은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단어 자체로 제도권 미술에 일격을 가한 명칭 ‘현발’은 이론가들의 작품이었다. 특히 원동석·최민·성완경·윤범모의 활약이 컸지만 아마도 69년 서울미대 시절 오윤 등이 시도했다 좌절된 ‘현실동인’의 영향도 컸으리라. 특히 내게 ‘발언’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와우~ 미술이 발언한다?” 기껏해야 ‘미술은 표현’이라는 정도에 머물러 있던 나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 무렵 회원 추천을 통해 심정수·권순철·백수남·노원희·김건희·임옥상 등 8명이 새로 가세했다. 그 가운데 이상국, 여운 등이 탈퇴한 대신 뒤이어 이태호·강요배·이청운 등이 가입했다.

 

 

■ 현발 회원들의 의식화

 

80년 초 동인 회원들이 확정되자 현발은 정기 모임이나 야외로 엠티(MT)를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 때는 주로 ‘현실’과 ‘발언’에 대해 이론가들이 발제하고 전체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미대 시절에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의식화하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미술에 인문학이 접속되는 순간이었다. 예컨대 원동석의 ‘현실과 미술의 만남’이나 성완경의 ‘발언의 독점과 관용구의 타락’ 등이 대표적으로 회원들의 정신세계를 무장시키는 주제였다.

 

그러나 현발의 진면목은 이런 토론을 통한 의식화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육화시키는 뒤풀이 자리였다고 하겠다. 그 뒤풀이에서 오윤과 ‘용태 형’이 슬슬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윤의 뒤풀이 재능은 익히 알았지만 새 인물이 나섰으니 바로 그가 ‘용태 형’이었다. 오윤처럼 레퍼토리가 많지도 않았다. 오로지 ‘산포도 처녀’ 노래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밖에도 심정수의 샹송, 민정기의 ‘무너진 사랑탑’, 주재환의 ‘여보야 당신아…’, 임옥상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등 회원들의 육화된 장기들은 끝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현발 회원들이 곧잘 벌이던 토론 때 ‘용태 형’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대신 그는 행동에는 빨랐다. 현발의 야외 엠티나 지식산업사에서 했던 정기 모임이나 뒤풀이 술자리는 모두 그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입담이 세고 다들 한가락씩 하는 회원들을 이끄는 모습은 탁월한 야전사령관을 연상케 했다. 그의 친화력은 야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그 무렵 밥벌이로 <조경>이라는 전문잡지사에서 출판 일을 하고 있었는데 현발의 전시회 팸플릿이나 회지 <그림과 말>, 다이어리 <’85 그림일지>, 오윤의 전시회 도록과 판화달력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출판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 20세기 첫 촛불 전시회

 

현발은 80년 초 출범 때 이미 10월17일 창립전을 열기로 하고 문예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미술회관(지금의 아르코미술관)을 전시공간으로 대관해두었다. 바로 그 유명한 ‘촛불 전시회’다.

 

마침내 개막 전날 회원들은 저마다 설치할 작품을 들고 미술회관에 모여들었다. 진열 장소를 배정하고 하나둘 작품을 개봉하고 있는데 대표 자격으로 관장을 만나고 온 심정수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전시 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추상화가 아무개씨가 “어찌 이런 단체의 전시를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관장이 긴급조처를 내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회원들의 항의에 관장은 다음날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공식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튿날 운영위원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상계엄하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시회를 찾아온 적잖은 지인과 관객들은 미술회관에서 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급히 마련된 촛불을 들고 마치 순례자들처럼 전시장을 돌 수밖에 없었다. 아마 20세기 최초의 촛불 전시회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창립전은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3주 뒤 다시 열 수 있었는데 화랑주 박주환 사장의 호의 덕분이었다.

 

아무튼 현발의 창립전은 모더니즘 단색 계열의 추상화가 판을 치던 미술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특히 미대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이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세대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80년대 초반 수없이 생겨난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젊은 미술단체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로도 현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엠티를 통해 서로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81년 <도시와 시각전>을 비롯해 <행복의 모습전>, <6·25전> 등 해마다 주제전을 열어 미술계를 향해 또한 세상을 향해 발언을 퍼부었다.

 

‘용태 형’도 그 시절엔 해마다 유화 등으로 회원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워낙 강렬한 작품들이 쏟아진 탓에 도드라지게 주목을 받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84년 ‘6·25전’에서 불후의 명작이 나왔으니, 바로 동두천 사진을 모아 만든 ‘디엠제트’(DMZ)다.

 

초기 현발의 주제전이 사회 현실을 집중 조명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였다면, 82년부터는 분과별로 소그룹을 나눠 그 결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판화분과에서는 <현실과 발언 판화전>을 열었고, 주재환·김용태가 속한 출판분과에서는 처음으로 회지인 <그림과 말>과 열화당의 호의로 무크지 <시각과 언어 1, 2>를 펴냈으며, 내가 속했던 벽화분과는 공주교도소 안에 <꿈과 기도>라는 대형 벽화(3m×30m)를 그렸다. 이런 시도는 모두 소통 부재의 미술계에 대중매체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과 해산

 

창립전부터 제도권 미술계의 ‘눈엣가시’로 찍힌 현발은 전두환 정권에는 이미 불온한 집단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82년 정기회원전 <행복의 모습전>을 열 무렵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문공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주무 국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현발 회원들을 중심으로 안기부에서 미술인들 내사를 해왔는데 불온한 작품들에 대해 조처를 취해야 되겠다’고 협박성 통보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으로부터 우리 작품에 대한 유권해석도 이미 받아놓았다고도 했다 . 붉은색만 들어가면 거의 용공작품이라는 식이니, 참 황당무계했다. 해당 작가는, 회원으로는 임옥상, 신경호, 노원희 등이고 비회원으로는 김경인, 강광, 홍성담 등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표가 나서서 더 이상 다치지 않게 문제 작품들을 자진해서 문공부에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당신이 해당 작가들에게 직접 요구하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그 국장과 해당 작가들이 모여 협의를 했고, 수사를 종결하는 대신 작품을 문공부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일종의 강압적인 압수보관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와 신경호 등 대학교수 회원들에게 교육부를 통해 경고장이 날아왔다. 공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위의 김정헌은 ‘추상표현주의’를 표방하는 불온한 단체에서 활동하여… 이를 엄중 경고 조치하고 보고할 것.” 그때 현대미술관에 압수보관당했던 작품들은 몇해 전에야 작가들 품으로 돌아왔다. ‘압수보관 작품 반환 기념전’이라도 열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 아쉽다.

 

그 뒤로 현발은 해가 거듭할수록 동력이 줄어들었다. 82년 박재동, 83년 안창홍·정동석·박세형·최병민·김호득, 85~86년 박불똥·안규철 등 해마다 신입 회원이 들어오긴 했지만 최민, 임옥상, 백수남 등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오윤은 86년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렇지만 후배 그룹들이 새로운 집단 동인 활동을 벌이자, 긴장한 정권은 85년 서울미술공동체에서 주관한 <힘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현발 회원들도 미술운동의 선배로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체가 바로 민중미술운동의 구심체로 결성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였다. 김용태, 원동석, 손장섭, 주재환 그리고 내가 민미협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그때부터 ‘용태 형’은 민중미술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마침내 88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설의 주역으로 나아갔다. 현발에서 주로 뒤풀이를 조직했던 그는 민예총의 건설과 운영에서 앞풀이 내지 본풀이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86년 <제6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이어 88년의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전>을 마지막으로 <민중미술을 향하여>라는 거창한 보고서를 출판한 현발은 10년 만에 자진 해산했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고 김용태 선생 특유의 ‘형·아우 화법’은 이질적인 예술인들을 한데 모이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사진은 1983년 1월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로 엠티를 가기 위해 행정선을 타고 대청댐을 건너고 있는 ‘현실과 발언’ 동호인들로, 왼쪽부터 김용태, 한 사람 건너 민정기, 이태호씨의 모습. 사진 김정헌 이사장 제공

 

경상도 사나이의 화법…누구하고나 ‘형님, 아우’

 

 

 

‘용태 형’ 매력은 친근감 있는 호칭
상대에 존칭 붙일때는 되레 긴장

 

“나에게 김용태 선생님은 언제나 ‘용태 형’이었다. 10년이나 선배였는데도 언제나 ‘형’이라 부를 수 있었던 건, ‘선생님’이란 명칭이 주는 거리감, 민중운동이 줄 수밖에 없는 거대한 무게를 ‘용태 형’이라는 친근한 호칭이 단칼에 없애버렸기 때문이었고, 형도 그런 느낌으로 후배들을 대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미술평론가 심광현) “용태 형은 두번째 만나는 사람에게는 선배건 후배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김없이 반말 투로 내려서 형, 동생처럼 친밀감을 증폭시켰다.”(판화가 홍선웅)

 

“고등학교 교직생활을 20년 넘게 했던 까닭에 ‘선생님’이란 호칭이 습관이 된 내게 ‘흥순아~!’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용태 형이었다. (…) 가끔은 ‘내 나이가 몇인데’라며 불평하는 후배의 소리도 들었지만 결국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만다.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을 우리 진영에 끌어들인 ‘용태 형’의 매력과 흡인력이 바로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화가 박흥순) “과연 명실상부하게 ‘형님’이라 대접할 만한 인품을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오직 단 두 명밖에 만나지 못했으니, 그중 손위가 바로 김용태다.”(화가 박불똥)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43명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 김용태 선생에 대한 첫인상과 함께 호칭부터 남다른 그만의 화법을 회고한다. ‘용태 형’, 1980~90년대 민중문화운동판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라고들 한다. 그 시절 사석에서 한번이라도 그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그렇게 불렀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도 “그는 발이 넓고 사람 사귀는 데 천재였다. 나는 김용태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누구하고나 형님, 아우였다”고 기억했다.

 

 

그래서인지 이름과 얽힌 재미난 일화도 여럿 남겼다. 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초기 정기모임에 종종 어울린 화가 노원희는 어느 날 뒤풀이 찻집에서 나눈 ‘말린 음식 이야기’를 책에 소개해놓았다. “용태 형이 뭐라 뭐라 떠들 때였겠지, 갑자기 오윤 선배가 특유의 장난기 담은 눈빛과 배시시 웃음 띤 얼굴로 ‘용태야, 니 용 말린 거 용태 아이가?’ 한다. 일순 좌중에 웃음보가 터지고 용태 형은 말이 막혔다.”

 

김용태는 왜 이런 화법을 구사했을까. 지난해 투병 중 내내 구술을 진행했던 큐레이터 전승보는 “그 이유를 용태 형이 직접 설명한 적은 없다”며 “아마도 ‘부산 사나이 기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경상도식 친근감의 표시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용태 형’이 갑자기 상대를 존칭을 붙여 부를 때는 “겁나는 사태”가 빚어지곤 해 모두들 긴장했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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