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중 대통령 후보와 후보 비서실장으로 인연을 맺은 백기완(맨오른쪽) 소장과 김용태(오른쪽 둘째) 선생이

2013년 4월 고 김영수 작가 추모 사진전에서 함께 한 모습. 사진작가 장영신 제공


백선본 비서실장 맡았던 용태형에
백선생, 유일하게 “이놈아~” 부르고
‘존칭생략’ 용태형은 깍듯이 “선생님”


“용태 형아~ 이놈아!” “네~ 선생님.” 누구한테나 두번째 만나면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한 채 맞먹거나 ‘형 노릇’을 하기로 이골이 난 김용태 선생을 유일하게 이렇게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러면 용태 형 역시 이처럼 깍듯하게 모시는 ‘어르신’이 있었다.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용태 형과 언제부터 아는 사이냐고? 워낙은 김윤수 교수하고 그림쟁이 주재환이랑 먼저 알았지 아마. 그러다 그때 내 비서실장을 했잖아? 그림쟁이랑 맞아떨어지는 일은 아니었잖아? 근데 매사 적극적이고 수틀리면 들이받을 줄도 알고 저돌적이고 ‘앗쌀’한 게 나랑 아주 배짱이 잘 맞았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선본) 때 시작된 셈이다. 당시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동시 출마 선언 이후 야권의 패배를 우려한 재야와 노동운동 등 진보진영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범국민 대통령 단일후보 추대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지도자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으로!’ 86년 ‘5·3인천투쟁’ 직후 노동해방 노선을 표방하며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일부가 갈라져 나와 형성된 이른바 제헌의회(CA)그룹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처음엔 그런 젊은이들이 민중후보가 되어 달라고 찾아왔드랬어. 그담엔 서울고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권후보 단일화 요구 대회에 와달래서 갔더니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지지 편지를 발표하기도 했었지. 그때마다 내 대답은 이랬어. ‘누구한테 차비 한 푼 빌릴 재주도 없는데 무슨 출마냐’고.”


계속 거부하던 백 선생은 결국 ‘민중 대통령 후보 전국추대위’(위원장 이애주)의 요구를 수락해 그해 11월23일 마감 직전 후보 등록을 했다. 백 선생은 그 직후 꾸려진 선거대책본부 때부터 용태 형이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기억했다.


안타깝게도 김용태 선생이 생전에 ‘백선본’ 참여 동기나 의도에 대해 직접 밝힌 기록은 없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실린 구술대담에도 이 대목은 빠져 있다. 대담을 정리한 큐레이터 전승보는 “미처 물어보지 않은 까닭에 선생의 뜻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선거와 정치운동의 경험과 그때 이뤄진 광범위한 인맥이 곧바로 88년 민예총 창립의 동력이 됐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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