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문영태 화백의 장녀 지민이가 시집갔다.
지난 3일 오후6시, 장재순여사의 장녀 문지민양과
기노준, 이연화씨의 장남 기선호군의 결혼식이 충무로 ‘한국의 집’ 마당에서 열렸다.

좀 늦어 식전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전통혼례의 멋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기럭아비로부터 기러기를 전달 받은 신랑이 신부 방 앞에다 두고 큰절을 하니 장재순여사가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린 신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는데, 수모가 부축은 하지만 행여 넘어질까 불안했다.

요즘이야 결혼 전에 만나는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하는 커플들도 많겠지만,

백년해로할 상대를 두고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정갈한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후, 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는데,

상 밑으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은근한 눈길이 사랑으로 가득했다. 건네주는 술잔에도 정념이 넘쳤다.

마치 속으로 “넌 오늘 죽었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집’ 전통혼례는 옛 격식 그대로 진행되는데다, 고풍스러운 한옥 마당에서 치러 져

일반예식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이날도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오랜만에 우리문화의 정수를 느끼는 좋은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아는 분으로는 장재순여사 가족을 비롯하여 화가 이인철 내외와 홍선웅, 정영신씨 등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혼은 예식장에서 치루는 것 보다, 우리의 멋을 제대로 느끼는 전통혼례가 바람직하다.

특히 외국인 신랑신부를 맞는 혼주들이 선호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우리 전통혼례를 한 번 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전통혼례를 치루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선조들의 결혼관과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요즘처럼 이혼을 밥 먹듯 하지는 않을 것이란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웃이 가까워 신랑신부를 잘 알아 소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요즘은 다들 바쁘게 사니 새로 맞이하는 신랑이나 신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혼례가 끝난 후 하객들에게 인사드리며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도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지민이 결혼으로 온 가족은 물론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 문영태화백이 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코 끝이 찡했다.

그나저나 아들 지함에 이어 딸 지민이 까지 시집보내는 장재순 여사의 외로움은 또 어찌할고?

예전의 대가족제처럼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민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라.
네 아버지가 저승에서 지켜보며, 싱글벙글 좋아하실 것이다.
부디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한국의 집’ 전통혼례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 하시길...

전통혼레 비용은 기본비용이 1.200,000원이고, 선택사항으로 미용과 사진촬영 등 부대비용을 백 만원 이상 잡아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 혼례복 대여비가 50만원, 수모 인건비가 20만원, 폐백비용도 50만 원정도 소요된다. 식전공연으로는 부채춤이 50만원, 사물놀이는 40만원, 판소리는 10만원으로 선택사항이다. 피로연 비용은 일인당 4만원부터 6만원까지 세 종류가 있다.




설날이 기다려진 기억은 아득한 어린 시절뿐이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항상 걱정거리였다.
늘 마이너스 살림이라 나갈 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통하게 잘 버텨 왔는데,
인생 말년이 되니, 걱정거리가 바뀌었다.

돈보다는 소외감이다.
다들 가족과 지내니,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밥도 사 먹을 수 없다.
밥이야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 지낼 합동 제사에서 얻어먹겠지만,
조상님 뵐 면목이 없는 것이다. 아마 자식 잘 못 둔 죄를 통탄 하실 것 같다.
이런 저런 허망함에 빠졌는데, 화가 이인철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절 전에 촬영한 수고비를 준다며, 인사동 ‘민예사랑“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민예사랑’에는 장재순씨와 이인철, 류충렬씨도 와 계셨다. 뜻밖의 반가운 만남이었다.
문영태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씨로 부터 편지까지 쓰 넣은 예쁜 돈 봉투를 받으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양했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떡 본김에 제사지내듯이, 정영신씨를 불러냈다.
만나 삼계탕 사 주러 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화가 장흥래씨였다.
어떻게 우리 마음을 알았는지, 바쁘지 않으면 삼계탕 먹으러 가자신다.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몇 개월 전 열렸던 무의도 축제에서 다.
‘한국녹색미술회’ 소속으로 그림 설치전에 참가한 분인데, 사진도 잘 찍었다.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몇 장 찍었는데, 보는 눈이 칼 같더라.
방송국PD로 정년퇴임한 후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이제 여든을 넘겨셨으니, 그림 그린지도 오래되었다.
대충 즐기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외국에 나가 미술공부까지 한 열성파였다.
주로 사실적인 인물화를 그렸는데, 하나같이 살아있는 모습 같았다.
나를 한 번 만나려 했던 것은, 그 때 찍은 내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방구석에서 의욕 없이 티비나 껴안고 사실 연세에 퍽 재미있게 사는 분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니 늘 바쁜 것이다.
소주 두병을 단숨에 해치우고는 이차로 맥주 집에 가자신다.
그러나 정영신씨와 내 방에 갈 일이 있어 헤어져야 했다.
동자동에 같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프린트기 사용법을 몰라서다.






몇 일전 이주용교수께서 복합 프린트기 ‘EPSON L220’을 선물했는데,

도저히 컴퓨터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데려 간 그 역시 한 시간 넘게 씨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에 문의하여 방법을 알아내겠다지만, 언제 될지 기약 없다.

동내에서 만나는 분마다 사진은 언제 주느냐고 묻는데, 또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찍는 즉시 프린트해 주면 별 일 아닌데, 이제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 뽑는 일도 만만찮다.
따뜻한 봄이 오면 공원에 펼쳐놓고, 나누어 드릴 작정이다.

한 해 잘 놀았으니, 다시 봄을 기다려보자.

“다들 새해에는 더 재미있게 사세요. 건강 잘 챙기시고...”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부터 이박 삼일 동안 서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고 문영태화백 자택에서 놀았다. 

2018년에 열릴 그의 추모전을 대비한 유작을 촬영하기 위한 나들이였는데, 지난 늦가을에 이어 두 번째 걸음이었다.

지난번에는 문화백의 자료들만 찍었고, 이번에는 그의 모든 작품을 찍으러 갔다.

추모전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인철씨와 장경호씨가 동행한 자리에서 김진하, 홍선웅씨도 만났다.

장재순여사가 맡긴 카드로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간 크게도 옆에 있는 장어 집에 들어 간 것이다.

인근에는 식당이 그 뿐이기도 하지만, 은근히 몸 보신한다는 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돈 생각해서 그런지, 맛은 없더라. 반가운 분들과 소주 한 잔하는 맛이 더 죽였다.

오후부터 시작된 촬영 작업은 순조로웠으나, 이튿날은 달랐다.
대부분 유리 없는 액자들인데, 작품에 먼지투성이였다.
붓으로 먼지 털어 낸 장경호씨와 이인철씨는 가루 좀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에 핀 곰팡이 자국은 지울 수가 없었다.




유리 속에 든 작품들은 더 심했다.
상장이나 일기장까지 다 챙겨두는 꼼꼼한 그가
작품들은 왜 이렇게 허술하게 보관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연 속에 풍화되어가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촬영 덕분에 이틀 밤을 술로 지냈다.
첫 날밤은 인천의 ‘광장, 환대의 문지방’전 개막식에 가서 시동을 걸었고,
둘째 밤은 강화읍내까지 원정 가 퍼 마셨다. 화가 최경태씨 까지 불러내어...
대리운전에 끌려 들어오다,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박 건씨와 함께 들어왔는데,
그 뒤는 술이 취해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인 토요일은 광화문광장에 가야하는 날이라 마음이 바빴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일의 진척이 안 나갔다. 찍긴 찍었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더라.
안 돼면, 다시 한 번 쳐들어가야지 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북한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한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의 고 문영태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짱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던, 그의 추모전을 위한 자료와 작품들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 달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제안으로 평소 가까운 지인 아홉 명이 문영태화백 추모전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추진위원장을 맡은 민미협 회장 이인철씨로 부터 연락 받은 것이다.

약속대로 금능역에서 이인철씨를 만나 함께 떠났는데, 꼬불꼬불 낮 익은 길 따라가니,

미망인 장재순여사는 정원을 가꾸고 계셨고, 류충렬화백이 먼저 와 계셨다.
붉은 단풍잎들이 곳곳에 흩어 진 고인의 저택은 처연했다.

문형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곳에서 삶의 무상함을 본 것이다. 도대체 사는 게 무엇인지...

점심 식사 후, 시작한 촬영 작업은 이웃 사는 판화가 홍선웅씨도 도와주었다.

장재순여사가 꺼내주는 자료 상자를 이인철, 류충렬씨가 분류하여 나에게 넘겨주었는데,

얼마나 자료를 꼼꼼히 챙겨두었는지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까지 다 모아두었더라.

스케치 북에서부터 일기와 작업노트, 판화와 메모지 등 자료의 분량이 너무 많아 한나절이 후딱 가버렸다.

자료들에서 평소 문형의 치밀함을 엿 볼 수 있었는데, 몇 자 적어 놓은 낙서조각에도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작품들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만찬장으로 갔는데, 회에다 고급와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만나는 호화 만찬이던가?

술 한 잔의 가격을 안다면 도저히 목에 넘길 수가 없는 와인을 쭉쭉 들이키는 호사를 떨었는데, 기분 좋게 취했다.

고인의 영정사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마치 문형과 마시는 듯, 옛 생각이 새록새록 했다. 

뒤늦게 나타난 화가 박건씨의 코믹한 제스처에 한 바탕 웃기도 했다.

술도 취했지만 자정이 넘어, 살아생전 문형이 사용하던 방에서 하룻 밤 지냈다.
평소 술이 깨야 자는 습관 때문에 잠을 못 이뤄, 이 생각 저 생각 빠져든 것이다. 

문형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일 서울에서 벌어질 촛불시위를 물어보았다,


“내일 쯤, 그 년이 하야 할까?”

“택도 없는 소리, 그 뻔뻔스러운 상판대기 한 번 보소! 쉽게 물러 날 년인가...”
“그렇다면 강제로 끌어내려야지, 촛불을 햇불로 바꿔 청와대까지 쳐 들어가야지”

사진, 글 / 조문호





































아깝게도 세상을 먼저 떠난 화가 문영태선생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지난 6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두레’에 모였다.

문영태선생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만든 자리로, 고 문영태화백의 추모전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추모위원에는 김진하, 박 건, 박불똥, 박진화, 이인철, 장경호, 조문호, 최석태, 홍선웅씨 등

아홉명으로 결정했으나,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만 사정이 있어 참석 못했다.

세상을 등진지 삼 주년이 되는 2018년에 맞추어 문영태선생의 숨겨진 유작을 전부 선보일 수 있는 기획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작품도록은 물론, 생전에 가까웠던 분들의 이야기와 문영태선생의 80년대 시대정신과 관련된 모든 사료를 집대성한 문집도 발간할 계획이다.

문영태추모위 위원장으로는 민미협 이사장으로 있는 이인철씨가 맡아 주도하며, 서로 연락하는 마당쇠 역할을 맡기로 합의했다.

평소 가까웠던 분들의 관심과 도움 또한 절실하다.
아무튼, 문영태선생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게 될 추모전을 기대하기 바랍니다.


사진,글 / 조문호


'두레' 사모님은 장재순여사의 절친입니다.



박 건 촬영

홍선웅 촬영



최선호씨의 그림과 도예전이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인사동 ‘민예사랑’에서 열린다.
‘민예사랑’은 고 문영태 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운영하는 골동가게인데,
그 작고 복잡한 가게에서 그림과 도예전을 연다기에 처음엔 좀 의아했다.
가게에 있던 상품들은 다 어쩌고, 두 가지 전시를 하는지...

입구들 들어서니 200호 남짓한, 꽃그림이 마음을 움켜잡더니,
주변의 조그만 소품들과 어울려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기자기함이 좋더라.
이 건, 돈 만 생각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폭 넓은 애착이 만들어 낸 좋은 전시였다.

골동가게에서 갤러리로 왔다 갔다 하는 ‘민예사랑’의 변신술에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민예사랑’은 고 문영태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인사동에서 운영하는 골동가게다.
우리 옛 여인들이 아끼고 사랑한 장신구와 규방용품, 선비들의 고아한 취향을 느낄 수 있는

서안과 문방용품 등 정감 있는 골동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가게에 들어 가보니 구경할게 너무 많았다.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진열된 장신구와 규방, 문방용품들에서 선조들의 멋과 지혜를 맛보았다.
인사동12 골목길 초입에 있으니, 지나치는 길에 꼭 한번 들려보라.


(전화02-732-5255)


















 

 

지난 29일은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이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49제가 김포 자택에서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 정영신과 함께 떠났으나, 걸리는 시간을 잘 못 추정해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이미 방안에는 고인의 가족을 비롯하여 박진화, 최경태, 박 건, 이재민, 이인철씨 등

화단의 후배 여럿이 모여 제를 올리고 있었다.

예를 올리고 나니, 새삼 그리워져 하염없이 집 주변을 맴돌았다.
가끔 가족들과 추모객들이 오갔으나, 문화백 없는 '민예사랑'은 빈집처럼 허허로웠다.
한쪽 구석에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석상을 만났다. 마치 그가 환생한 듯 다가왔다.
옆에서는 그의 절개라도 말하듯 대나무 잎이 바람결에 속삭였다.
귀 기울이니 "세상사 다 부질없으니 곁눈질하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미리 예견하고 집을 꾸몄구나." 혼자 짐작하며 거실에 들어가니,
문화백의 '운석' 그림 세 점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그림 보여 달래도 감추더니, 이제사 슬며시 고개를 내 민 것이다.

오랜 기억속의 옛날 그림이었으나, 마치 그의 얼굴을 보듯 선명했다.

"아! 그래서 보여주지 않았구나" 잔소리가 많으면 하나도 머리에 남는 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림이 너무 좋았다.
그 운석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초상화였고, 인간 모두의 초상화이기도 했다.

"이보게! 한 수 가르쳐 주어 고맙네."
오늘 49제를 정성껏 올렸으니,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삼악도는 피할 걸세.
부디 피 칠갑하는 이런 땅에 태어나지 말고, 사람답게 사는 좋은 땅에 태어나, 못 다한 것 다 누리시게....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