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전시 준비로 보름 가까이 똥 오줌 못 가렸다.

갤러리 앞에 서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다.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며, 지난 시간을 돌아 본 것이다.
그동안 동자동에선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밤에는 일주일 만에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을 꺼내보며,
그걸 정리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번 전시는 느닷없이 코가 꿰인, 억지춘향격의 전시였다.
오래전 만들어 둔 포토포트폴리오에서 사진은 골라 썼지만,
초창기사진들은 필름 수정하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다.

돈도 시간도 없어, 전시를 안내하는 엽서도 만들지 못했다.
별도의 연락과 우편물은 보내지 않고 SNS만 알렸더니, 주위에서 말들이 많다.
왜 연락을 안했냐며, 삐친 친구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젠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처음엔 전시 비용을 걱정했으나, 다들 주변에서 도와주셨다.
고향의 후배사진가 하재은씨가 도와주었고, 이광수교수는 뒤풀이 비용까지 내 주셨다.
사는 것 자체가 빚지고 사는 인생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저승에서라도 갚을 날이 있을지...
애써, ‘사진인을 찾아서’ 기획 자체가 갖는 사진적 의미로 위안한다.
남는 장사인지, 손해 보는 장사인지, 그런 걱정마저도 정영신에게 떠 넘겨버렸다.

전시 디피는 일본에 사는 사진가 양승우와 시나리오작가 최근모가 도와주었다.
그들이 일복이 많은지, 내가 인복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오픈 날은 광화문광장으로 가야 하는 토요일이라
가능하면 평일에 오라고 알렸으나,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다.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이광수, 이규상, 김남진, 강제훈, 정진호, 윤철중, 양재문, 김준호,

권 홍, 이경희, 오윤석, 장경호, 김문호, 김 구, 김보섭, 임계재, 조준영, 나떠구, 김주혁,
박병문, 채재웅, 고정남, 고광석, 마기철, 박진호, 김봉규, 이윤기, 이은영, 황일환, 이정환,
이석필, 김 원, 김성규, 최근모, 조햇님, 유진오, 오윤택, 노광래, 정영신, 문진우,
박영환, 강제욱, 윤진원, 양승우씨등 전시를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갑자기 끄집어 낸 사진들을 펼쳐보이니 부끄럽기 짝이없었다.
박근혜 말처럼 ‘이럴라고 사진을 했는지 자괴감마저 든다.’
반 평생 동안 사진 사진 노래를 불렀는데, 겨우 이건가 싶다.
어쩌면 이것조차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일지 모른다.

아무튼, 돈 한 푼 없는 개털 주제에 전시까지 열며 기분 좋게 놀고있다.
모두들, 고맙고 고맙다.

이제 즐겁게 여생을 보낼 동자동으로 돌아갈 때가 닥아오고있다.
전시 오픈에서 찍은 이런 저런 모습을 기념으로 펼쳐 놓는다.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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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쪽방 도배를 했다.
새벽에 간신이 잠 들었는데,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천‘무의도’를 예술 섬으로 만드는 정중근씨 였는데,
서울역 그릴에서 기다릴테니, 아침식사 하러 오라는 것이다.

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한 끼라도 때우려 기어 나갔다.
설치 미술하는 최정자씨와 있었는데, 굴 짬뽕 한 그릇씩 먹어 치웠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이, 올 망년회에 인사동사람들과 멋지게 한 번 놀자는 것이다.
맛이 더 가기 전에 인사동에서 한 번 모이자는 것인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확답도 못하고 돌아와 사진정리하고 있는데, 사진하는 후배 조성기가 찾아왔다.
‘눈빛 출판사’에서 만드는 사진가선 원고 전해주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데,
조금 있다 ‘수원사진축제’에 간다며 일어섰다.

오후에는 인사동에서 조준영시인과의 약속이 있었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갔더니, 조준영씨와 전활철, 김기영씨가 있었다.
좀 있으니, 김태서와 신상철씨도 들어왔다.
반가움도 잠시였고, 점심 겸 저녁을 두 그릇이나 먹어치우며,
소주 반병 마셨더니 졸음이 쏟아져, 아쉽지만 작별하고 나왔다.

인사동거리는 시꺼러웠다.
촛불을 든 국민들의 박근혜 퇴진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갑자기 잠이 확 깨어, 나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대통령도 아닌 박근혜는 내려온나! 검찰은 박근혜를 구속하라!”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열리는 동안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첫 날은 한꺼번에 오시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그 다음 날 부터는 마치 순서대로 오시는 것처럼, 좋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8일의 인사동은 가랑비가 오는 듯 마는 듯, 술 마시기 좋은 촉촉한 날씨였습니다.








전시장에는 이런 시간부터 울산 오세필씨를 비롯해 국민은행의 여성임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엊 저녁 유목민에서 뵌 분이나, 전시를 보러 다시 왔다는 것입니다.

좀 있으니, 그저께 다녀 간 가수 최백호씨가 다시 왔습니다.

최백호씨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입니다. 노래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시인 못지않게 글도 잘 씁니다.

오래동안 라디오에서 MC 일을 맡다보니 말도 구수하게 잘하는데다, 공연기획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토탈 아티스트인 셈이지요.

오래전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제작비가 큰데다 주위의 만류로 좌절했으나,

이제 그 문제점을 해결한 후, 다시 꿈을 펼쳤답니다.














그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큰 기대를 걸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화가 허미자씨와 공윤희씨가 왔습니다.

그리고 페친이며 사진하는 후배 홍윤하씨도 왔습니다.

미아리에서 열리는 텍사스 프로젝트를 보고 왔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이 '텍사스 프로젝트'는 작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시한 588전시 때, 동참의 제안을 받았으나,

일정이 임박한데다 야외 설치라 사진손상을 우려해 거절한 일이 있어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오세필씨가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기에 정영신, 공윤희, 홍윤하, 연극하는 처녀 한 분과 여자만'으로 갔습니다

일인분 45,000원이라는 정식에 술 까지 마셨으니, 괜히 부담 되더군요.

    





그 이틑 날인 29일에는 지하철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들어오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춘천의 김대영씨 전시 보러, '백송갤러리'부터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에 작가는 없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고감도 필름에서에서나 볼 수 있는 조립자로 그린 자연 형상들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장날' 전시장에 들리니, 김중호, 심지윤씨가 지키고 있었고, 오프닝 때 도와 준 음식 장식 전문가 최소연씨도 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할 계획인 양동 쪽방 사람들에 도움 줄 시나리오 작가 최건모씨와 사회복지사 김성규씨도 왔어요.














잇따라 화가 김하은, 황정아씨도 찾아왔고,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과 사진가 Area Park이 다녀갔고,

미국에 거주하는 전기작가 이충렬씨도 왔습니다.

이충렬씨는 간송 전형필을 비롯하여 한국미의 순례자에 이어 , 김수환추기경을 펴낸 작가지요.


얼마 전 각종 메스컴에서 김수환추기경 책 소개가 대서특필되었지만,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데,

이번에는 전국의 성당을 돌며 김수환추기경의 사회정의와 인간존엄이란 주제로 강연을 합답니다.

제일 먼저 잡힌 일정은 오는 922일 오후8시부터 10시까지 불광동성당에서 갖는다니,

시간되는 분들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기록하러 갈 예정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친구는 사진하는 이돌필과 김은환씨 였는데, 이석필씨는 사진보다 심령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짐작키로 아무도 찍어보지 못한 심령사진을 염두에 둔 듯 했습니다.

화가 서길헌씨와 유카리관장 노광래씨가 나타나 하루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유목민에서 여러명이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필대사가 계산을 해 버렸습니다. 오늘 복채 좀 받았던가?

골목을 지나치던 사진가 안영상씨와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지요.

다행스럽게도 같은 방향인 노광래씨가 차까지 태워 줘 편안하게 귀가 했답니다.

    











전시 철수하는 날인 30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갔습니다.

충주에서 지용철씨도 오기로 했고, 태백의 박병문씨도 오기로 했거던요.

전시장에 도착하자 말자, 지용철씨가 여성 한 분과 오셨고, ‘나무화랑 김진하관장도 왔습니다.

모두들 철수하기 전에 서둘러 왔다는 것입니다.









뒤 이어 박병문씨가 찾아 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실내장식하는 최영문씨가 나타나 갈팡질팡하게 만드네요.

최영문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박병문씨와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와 참치구이로 식사를 했습니다.

두 시무렵, 전시를 철수하여 짐을 옮기고는 다시 인사동에 나와야 했습니다.

    







조준영시인과 메비우스관장이었던 기획가 김권선씨와 저녁 약속이 있었거든요.

인사동 마중에서 만나 술 한 잔 했지요. 

마중의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빨리 취하는 술입니다. 술 취해 돌아오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김명성, 전인경, 공윤희, 오세훈, 이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딱 한 잔만, 딱 한 잔만, 하다 맛이 가버렸네요.

 

















이상으로 보고를 끝 냅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지난 28일 조준영시인과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강민 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정오 무렵, ‘포도나무집’에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이행자, 조준영, 김상현씨가 나와 있었다.

뒤늦게 장경호씨도 나왔으나, 주문한 음식들이 형편없었다.
주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인사동에 갈 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다.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충 허기를 메우고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민선생의 순례 코스이기도 하지만, 그 곳은 땅콩이 무제한 제공되는데다, 한적해서 좋다.

좀 있으니, 신경림 선생도 오셨으나, 자리가 편하지 않았던지 슬그머니 나가셨다.
강민 선생도 몸이 편치 않아,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셨다.







그 때부터 김상현씨의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신곡이 많았으나, 그의 음색에 잘 맞는 곡이었다.









그 무렵, '경기도미술관장' 지낸 최효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라 근황이 궁금했는데,
어디 갔다 오는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좋은 술이 있다며 배낭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주었는데, 감로주였다.

알콜 도수가 40도나 되어 그 자리에서 비우기는 좀 그랬다.
맥주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나누었으나,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옮겼더니,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준영씨는 신학철선생 계신 서울대병원으로 떠나고,
장경호씨는 전시 중인 ‘인디프레스’로 떠나며, 나중에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마침, 다음 달 12일까지 연장 전시된 김억의 목판화전이 생각났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과 정복수화백이 있었다.
좋은 작품에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니, 어찌 술병이 고개를 쳐들지 않겠는가?
감노주를 꺼내 마셨는데, 전주가 있어 그런지 금방 올랐다.
전시장에서 내려왔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가 없었다.













저녁 약속으로 다시 나와야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야했다.
몸도 피곤하지만, 아침일찍 일터에 나가던 아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다.
집에 들어와 숨도 고르기도 전에, 빨리 나오라는 전화가 이어졌다.






‘유목민’으로 나갔더니, 일터에서 곧장 온 아내도 와 있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편집국장과 임동현기자도 와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서 올라 온 변형주씨와 조준영, 장경호, 공윤희씨 등 여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은영씨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이라며 신문을 보여 주었다.

술 취한 분들이 신문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 같으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돈 안 되는 문화예술계 소식만 다루는 유일한 신문이 아니던가?

잘 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해야지,

신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만든 신문에 시비를 건단 말인가?

난, 어렵게 운영되는 신문을 아끼는 마음에서 원고료도 없이 글을 보내주고 있다.











옆 자리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장성한 아들을 데려 왔는데, 음악을 공부한다더라.
기타를 연주하였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위키리의 ‘눈물을 감추고’란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얼마 전, 부친 상을 당한 이은영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던 노래라며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우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 자주 나가는 것은 대부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전시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약속을 인사동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난 30일에는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인사동 ‘유목민’에 나갔더니, 일하러 간 아내가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씨와 공윤희, 정영신, 김형진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박인식, 김명성, 이상훈, 전인경, 허미자, 황인호, 전인미씨도 옆자리에 있었다.
우연히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래서 인사동에 미련을 떨치지 못 하는 걸까?

이 날은 공윤희씨가 즐기는 고량주를 마셨더니, 취하는 감이 달랐다.
조준영씨는 내 생일날, 가까운 분들과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으나 손사래 쳤다.
챙겨주는 마음이야 고맙기 그지없으나, 내가 나서는 자리는 싫어하니 양해하기 바란다.
예전에는 생일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지만, 아내를 만나고부터 간단한 생일치레를 해 왔다.

이번에는 칠순이라는 아내의 성화에, 8월초로 예정한 창원전시를 생일이 있는 9월로 미루어버렸다.
어차피 전시 뒤풀이에서 한 잔 해야 하니, 그 자리에 붙여 넘어 갈 작정이다.

김형진씨는 아내에게 동영상 메카니즘에 관한 많은 정보와 활용방법을 가르쳐 주며,
동영상 찍는 무거운 삼각대까지 빌려주었다.

고랑주 빈 병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니, 다들 술이 거나했다.
그 날은 고량주만 마셔 술값이 꽤 많이 나왔을 텐데, 조준영씨가 내버렸다.
매번 얻어먹다보니 습관이 되었는데, 사기를 쳐서라도 한 번 갚아야지.
멋지게 쏘려면 도대체 얼마나 사기 쳐야할까? 참 걱정도 팔자다.

그 날은 무거운 삼각대 핑계대고, 택시 타는 호강까지 했다.


사진: 김형진, 조문호 / 글: 조문호





 김형진 사진













김형진 사진













지난 2월, 춘천고속도로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온 조준영 시인이 넉 달 만에 인사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트럭에 받혀 샌드위치 된 승용차에서 아내와 모두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분명 신의 가호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자동차는 폐차 처분했으나, 신체 모든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척추나 폐 등 내 외과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결정적인 곳에서 모두 멈추었다고 한다.

얼굴에 약간의 흉터가 남았으나, 청춘사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친구! 참 괜찮은 사람이다.
시만 썼다면 그도 개털이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 강남대학교 교수자리를 껴 찰 수 있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긴 하지만,

여지 것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동을 떠도는 예술가들의 그 많은 경조사에 빠지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이 큰일을 당해서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것도 누군가 우연히 전화하다 알아 낸 것이다.

입원 중인데도 퇴원해 집에서 가료 중이니, 좀 있다 연락하고 나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이런 착한 심성을 가졌으니, 어찌 저승사자인들 데려갈 수 있었겠는가?

지난 28일 오후6시경에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몇 일전 받았다.
교통사고를 알고 있는 지인들만 연락한 모양인데, 장경호, 김상현, 이명희, 전강호, 최석태, 정영신,

공윤희, 서길헌씨 등 열 여명이 모여앉아, 사고 내막 듣느라 귀를 곤두세웠다.

그리고, 요즘 인사동 16길은 화가나 문인 뿐 아니라, 영화감독이나 가수들도 많이 더나 든다.
이 날도 한 때 ‘가랑잎’으로 인기를 누렸던 ‘에보니스’의 이호상씨 등 여러 명이 등장해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뮤아트’의 김상현씨가 되받아 ‘목포의 눈물’로 답했다.

덕분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운 자리였으나 광고사진의 대부 김한용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에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늦게까지 남았던 아내 이야기로는, 그 날 술값도 조준영씨가 냈다는 것이다.

그동안 병원에 누워있어 돈 쓸 기회가 없었다나...
다들 병문안도 못 갔기에 술값을 조금씩 준비했는데 말이다.

그 날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그런 엄청난 사고를 내고도 가해자가 병문안은커녕,

위로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보험회사에서 찾아가지 말라고 당부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리마저 저버린 비정한 세상이 걱정스럽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라아트’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준영 시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큰 일 날 뻔 했다는 것이다.
대형 트레일러에 받힌 큰 사고였으나,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한다.
함께 다친 아내와 50일간이나 병원에 있었다는데, 그동안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남의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챙긴 그가, 정작 자신의 일엔 입을 다문 것이다.

걱정스러워 인사동에 나갔더니, 청진동 ‘청일옥’으로 오라했다.

피맛 골 화재로 그 쪽 방향의 길이 확 바뀌었던데,
시골노인 서울 김서방 집 찾듯,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다리가 아프더라.

지금은 집에서 가료중이나, 근일간 인사동에 한 번 나온다 했단다.

'청일옥'에는 황명걸시인을 비롯하여 양평의 송화백, 횡성의 김영호선생,
김명성, 이희종씨 등 여러 명이 계셨는데, 몇 분은 먼저 가셨다고 했다.
어떤 모임이었는지는 모르나, 다들 일찍부터 거나하셨다.


황명걸선생은 마시다 졸기를 반복하셨는데,
김명성씨가 쓴 민병산선생을 기리는 시에다,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김영호선생은 모든 게 양면성이 있다며,
알려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짜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나 때문에 술자리가 지연되는 것 같아, 급히 몇 잔 들고
인사동 ‘여자만’으로 넘어왔는데, 그 곳에서 신상철씨를 만났다.
나오는 길에 ‘귀천’을 들여다보니 심우성선생께서 맥주를 드시고 계셨다.
오는17일 오후4시, 강남 ‘한국문화의집’에서 ‘귀천하는 마음’이란
넋전 공연이 있다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의존하다보니, 아날로그 소식이 너무 어두웠다.
인사동을 그렇게 들락거리지만, 모든 소식이 깡통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페이스 북에 들어와, 세상 도는 꼴을 낱낱이 알았다.
모르는게 약이라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정치이기에 정당 입당부터 작정했다.
여지 것 정치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악을 쓰고 말렸으나, 욕심만 없다면 말릴 일은 아니었다.

지난 28일, 예술가들을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유목민’에서 화가 장경호, 시인 조준영,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김형배씨와
목만 축이고 ‘무다헌’으로 옮겼더니 신학철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뒤 이어 박불똥, 이인철, 최석태, 박은태, 김정대, 조경연씨가 들어왔다.

신학철 선생과 함께하는 술꾼 모임을 늘 ‘신학철사단’이라 불러왔다.
술 마시는 것도 전투에 속할지 모르지만, 무언가 일을 작당하려는 속내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준영시인을 비롯한 한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정의당원이었다.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는 안 하니까, 여지 것 나만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악역 있으면, 좀 맡겨 달라고 신학철선생께 부탁했다.
죽든 살든 끝장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치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하는 거야.
여지 것 잘 하고 있잖아. 그대로 사진이나 찍어..”
하긴 늙은 놈이 힘쓸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그 것 뿐인 것 같았다.

소주, 맥주, 양주 등이 오가는 술잔 속에 모두들 취하기 시작했다.
그 날 소주를 꽤 마셨으나, 왠지 술이 취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라지만, 마음은 온통 초저녁에 본 ‘리얼리즘의 복권’전에 꽂혀 있었다.
자본권력에 농락당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이인철씨가 ‘민미협’ 이사장을 맡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김정대씨는 더 큰 갤러리를 만들어 본격적인 화상으로 돌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을 확장하는 일이야 좋은 일이지만, 감투를 쓰는 것은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단체라는 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누군가 맡아야기에, 잘 끌어가길 바라며 축하해 주었다.

음악회에 갔던 아내도 돌아왔는데, 술 시간이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일찍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결국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내와 택시 뒷자리에서 느긋하게 가는 맛도 좋았지만, 스스로를 자성하는 시간도 되었다.
사단장님 말씀처럼 감정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에 맺힌 분노를 녹여야하기 때문이다.
열 받지 말고, 닥치는 일을 편안하게 대처하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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