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김상현씨의 음악홀 ‘뮤아트’에서 “인사동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 열렸다.

얼마 전 기국서씨 훈장수훈 기념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축하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 못했는지 몇 명 나오지 않았다.




평일 공연 외에도 봄, 가을로 페스티벌을 갖지만, 그동안 잘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끔 다녔으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서다
조명이 어두운 공연장이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무례도 마음에 걸렸고, 한 번도 내지 못한 술 값도 부담스러웠다.
이번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저녁 여덟시 무렵 집을 나섰다.




옛날에는 고막이 덜덜 떨릴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에 파 뭍혀 살았지만,
사진에 미쳐 음악에 등 돌 린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스스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처럼 음악에 빠져 볼 작정을 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뮤아트‘ 입구에서 망설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현씨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뮤아트'의 분위기는 언제보아도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는 조준영 시인과 양평에 작업실을 둔 화가 최용대씨가 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만난 최용대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24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숲‘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주었다.
인사동에서 가끔 만났던 최 형, 안준영, 곽미영, 박소진, 류수씨 등 여러 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날 처음 본 유혜린 째즈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감미로웠다.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에 빠져들기도 했다.




선물로 샴페인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 맛은 샴페인에 대한 기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여지 것 삼페인 하면 40여년 전에 마셔 본 ‘오스카삼페인’이 떠올라 기피해 왔다.
그 당시는 생일이나 무슨 축하할 일만 생기면 “뻥‘ 터지는 소리 때문에 오스카 삼페인이 따라 붙었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 맛에 고개를 절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샴페인은 가라 안는 기분을 살짝 받쳐주는 좋은 술이었다.




김상현씨의 ‘뮤 아트’는 93년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제로 14년 동안 어렵게 끌어왔으나, 건물주 횡포에 신사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고집은 사업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임대료에 허덕이며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부도로 무너질 때도 음악이 일으켜 세웠고,
병마에 쓰러졌지만, 음악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사나이가 김상현이다.




그 날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며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렀다.
전시 오프닝 공연이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뮤 아트’ 본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김상현씨가 아픈 후로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 같다.
그의 노래 소리에서 낙엽 떨어지는 가을 냄새가 난다.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강민 선생께서 ‘백두에 머리를 두고‘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창비'에서 냈다.

용인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28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시선집 전달을 겸한 오찬회를 갖는다는 반가운 기별이 왔다.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에 갔더니,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씨도 나와 있었다.

선생께는 송구스러웠지만, 시집 때문에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밥 값은 김명성씨가 계산했고, 시집은 정영신씨가 받았으니 부담도 없었다.

원님이 아니라, 강민 선생 시집 덕분에 나팔 좀 불었다. 낯 술엔 쥐약인 놈이지만...





1962년 등단한 강민 선생께서 팔순이 넘은 연세에 펴낸 이 시선집은 4부로 나눠 98편의 시를 싣고 있었다.

시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지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의 문단사였고 역사라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선생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사적 심성을 늘 간직하고 살아온 서정과 우국의 적절한 조화”라고 했는데,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이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마다 광화문광장에 나타나 후배들을 격려해 주며 바른 세상을 염원하였듯이

인사동 또한 선생처럼 애착을 갖고 사랑하시는 어른이 드물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시 ‘광장에서’에 적혀 있는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소재로 한 시다.





그 때 80대 중반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아서 피가 끓어 나갔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이념이 아니라 양심과 죄책감에서 우러난 시여서 그대로 가슴에 사무친다.

보수 꼴통 노인이거나,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벙어리 노인들만 판치는 세태가 아니던가?





그리고 시선집에 있는 ‘꿈앓이’는 분단시대의 아픔과 북녁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6.25전쟁과 4.19혁명, 그리고 5.16쿠테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시대를 양심으로 지켜 본 체험에서 우러난 시다.





강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여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동안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그리고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 문학상도 받았다.





등단 이듬해인 1963년 김수영, 신동문, 고은 시인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활동을 펼쳤다.

5.16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의식적인 타이틀을 내건 시인이다.

1974년 진보적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한 이래, 꾸준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강민선생을 뵙게 된 인사동과의 인연이다.

시집에 나와 있는 ‘인사동 아리랑’의 유목민 이야기는 잊혀져 가는 그리움을 호출하고 있었다.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 그의 부인 목순옥 /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 방송작가 박이엽 /

그 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 (중략) 다시 한 세월은 가고 /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선생은 천상병시인과 함께 인사동 풍류를 노래한 인사동시대의 초창기 멤버였다.

거명했던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신경림, 민영, 황명걸시인 등 생존 작가마저 몸이 불편해 못 나오지만,

강민 선생만이 지팡이를 이끌고 인사동에 나타나신다. 만날 사람은 없어도 그리움에 배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냈고, 친구들도 대부분 떠나보냈다,

선생의 시에는 자신의 늙어감에 대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가자는 시인의 순정이 아직까지 뜨겁다.


의리도 지조도 인정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이 비정한 세상에 선생 같은 분이 계시니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예술을 빙자하는 그림이던 문학이던, 사기꾼소리 듣지 않으려면 선생처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날 오찬회에서 술 한 잔 마신 김에 선생께 감히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기억을 들춰, 못 다한 이야기를 페북에 좀 올려주십시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다른 원로 시인과는 달리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페북도 하니, 후진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남겨 줄 수 있는 분이다.

내가 듣고 옮길 수도 있겠지만, 선생께서 귀가 어두운데다 나는 말이 어눌하니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에 이르기까지 겪은 애환과 아픔을 시로 노래하셨지만,

돌아 가시면 묻혀버릴 시대적 역사를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민주주의와 통일,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사적 심성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노장이시다.

이번에 발표한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좌로부터 쥐띠부인과 박광호



불운의 화가 박광호가 불쌍하다.

한 평생 가난하게 살다 희귀병에 걸렸는데, 쥐띠부인을 만나며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다.

그 불 같은 성격에 다 참고 견디며, 아들 둘 데리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가?

그런데, 박광호가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박광호작 [지구촌 영상문학 카페에서 스크랩]



그는 앙상한 생선뼈를 그려 온 화가로, 만난 지 40년이 된 동생 같은 후배다.

생명이 도려내 진 물고기 뼈를 통해 인간의 가학성과 소외문제로 절규했으나,

때로는 꽃이나 새 같은 서정적인 내면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물고기 뼈로 그 만의 조형언어를 그려 낸 그림들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작업이다.

물고기 뼈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담아왔는데, 그의 초창기 그림들은 너무 처절했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지금은 없어진 인사동 ‘실내악’에 걸린 그림 한 점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외상 술값으로 그려 준 그 그림은 빈 접시에 앙상한 생선뼈만 그렸는데, 마치 불행한 박광호 자화상 같았다.

그런데, 그 이후 그림부터 상형문자처럼 조형화, 도식화되어 아쉬운 감도 들었다,



박광호작 [숲속의 음악세상 카페에서 스크랩]




그와의 인연은 70년대 부산 남포동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꾸려가던 ‘한마당’이란 국악주점 단골로 드나들 때, 얽힌 사연이 만만찮다.

허구한 날 돈 없이 마시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잤다.

그는 술만 마시면 끝장을 보는 체질이라 같이 자기도 여러차례 잤다,

사진에 미쳐 다 말아 먹고, 서울 올라오며 한 동안 박광호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시국사범으로 광주교도소에서 일 년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그 때부터 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쥐띠부인을 만난 후로는 개봉동과 강메, 행신동으로 옮겨 다녔는데, 사는 게 순탄치 않았다.

개봉동 집 부근에 카페를 운영할 때는 가게에 불을 지러기도 했다. 

강메에서는 철거될 빈집에 들어가 2년가량 살았는데, 억새풀이 어우러져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도 불을 질러, 사는 꼴을 가까이서 안보니 속은 편했다.

뒤늦게 찾아가 타다 남은 작품을 찍기도 했는데, 그의 강직한 성격은 아무도 못 말린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그 이후 다행히 행신동 임대주택에 살게되어 잘 됐다고 좋아했는데,

그 때부터 근이양증이란 희귀병이 찾아와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쥐띠부인 정신병까지 생겨 불운이 겹친 것이다.

술만 마시면 넘치는 쥐띠부인의 극성스러운 성격에 너무 힘들어 했다.



1993년 의정부, 천상병선생  장례식장에서, 좌로부터 세번째가 박광호다



그래도 가끔 술을 사들고 행신동 아파트로 찾아 갔으나,  쥐띠부인 못 마시게 하려고 박광호가 술을 끊어버렸다.

때로는 쥐띠부인의 정신병 증세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는데,

일어서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밥 해먹는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라.




오른쪽이 박광호며 안 쪽에 김용문씨도 보인다. 1990년 인사동 여관방에서,..



어느 날 그의 집에 가 보니, 작품 중에 별난 작품이 한 점 눈에 띄었다.

전면에 까마귀 한 마리가 버둥대는 형상을 크로즈 업 하였는데, 왠지 불길했다.

평소 그림과는 달라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형! 그 그림 맘에 들면 가져가”라며 싸 주었다.



2011년 천상병선생 의정부 묘지에서, 좌측 전강호씨와 차안은 박광호씨



남의 작품을 탐내거나 손 벌린 적이 한 번도 없으나, 그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오래 전 신세진 게 마음이 걸려 작품이라도 한 점 주고 싶은 것 같아 그냥 받아왔다.

그 그림을 정선에 가져다 놓은 지가 벌써 20여 년이 되었는데,

그림만 보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한 번도 벽에 걸지 못하고 모퉁이에 세워 두었다.

불길한 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버릴 수도 없었다.

좌우지간, 그 그림을 갖다놓은 뒤 부터 풀리는 일이 없었다.



정선 만지산 작업실 모서리에 세워 둔 박광호작품



2013년 10월,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남극과 북극을 오가다’란 글을 올리며

만지산 작업실 일부분을 찍은 위의 사진을 올렸는데, 아마 그 그림을 알아 본 듯했다.

마치 악의 그림 같은 걸 뒤늦게 보았으니, 신들린 여자 눈에는 꽂혔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탐나면 그냥 필요하다며 달라하지, 왜 병문안 핑계로 미친 척 쇼를 하냐?



2014, 박광호



한 동안은 박광호가 안부 전화를 걸어 왔으나, 일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겨 버렸다.

‘쥐띠부인’이란 별명으로 인터넷에 들락거리며 신이 내린 무당이라는 등

여기 저기 휘젓고 다녀 아예 소통 자체를 끊어버렸다.

안부를 묻고 싶어도, 극성스러운 그녀와 말 섞기조차 싫었다.



병원에 입원 중에 참석했던, 일산에서 열린 단체전에서 찍은 사진으로 뒤에는 아들이다.



뒤늦게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전해 들었다.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함께 병문안 가자는 이야기도 했으나,

환자가 목에 호스를 꽂아 통화를 할 수 없는데다, 아무도 요양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쥐띠부인의 극성스럽고 악랄한 처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멀어져 버린 것이다.

다들 쥐띠부인을 만나는 것은 물론, 통화조차 꺼려해 미루어 왔다.



2003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광호전 개막식에서, 그 때만 해도 많은 벗들이 모였다,



늘 마음의 짐이 되어 기회만 기다렸는데,

느닷없이 ‘쥐뛰부인‘으로 부터 놀라 자빠 질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조문호, 박광호가 1년간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데 전화도 없고 병문안도 오지 않는 게 도리냐?

박광호가 그린 세발까마귀 그림 아래 주소로 보내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1동 샘터마을 222동 404호, 바로 부쳐라”



2013, 인사동 ;아라아트'개관 전에서



그 불길한 그림을 돌려달라니 반갑기도 하지만,

평소에 '오라버니~'라고 아양 떨며 꼬리 치던 여자가, 손 위 사람에게 보낸 막말 메시지에 속이 뒤집혔다.

전화가 계속 울렸으나 받게되면 쌍욕부터 튀어 나올 것 같아 참고 있는데,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너 내 전화 좋은 말로 할 때 받어!’

결국 연결 되지 않으니, 정영신씨께 전화해, 나더러 개 새끼라고 욕을 해대며,

그 그림은 짓게 될 박광호박물관에 들어 갈 작품이라는 등 헛소리를 해대며, 빨리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막말할 군번도 아니지만, 너무 돌변스러운 행동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했다.



녹번동 '풍년식당'에서 정영신, 조준영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침 ‘인사동 사람들’ 맴버인 조준영시인이 녹번동으로 온다기에 함께 자리했다.

정영신씨 집을 방문해 인근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는데, 또 다시 메시지가 온 것이다.

“너 내가 어물 적 넘어갈 줄 알면 큰코다쳐! 좋은 말 할 때 박광호 세발 까마귀그림 택배로 부쳐!“





조준영시인은 쥐띠부인을 본 적이 있어, 사연을 설명하며 전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메시지를 본 조준영씨가 “그 그림 보내 줘 버려요”라고 잘라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행동을 제지하는 남편마져 병석에 누워 꼼짝할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지리산으로 내려 간 박한웅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도 여럿 곤욕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더나들며 인사동 소식은 물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고 있었는데,

병문안 못 간 것에 화가 났다면, 내가 입원하거나 길흉사가 있을 땐,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나?

그리고 메시지를 잘도 보내면서 박광호가 입원했다는 메시지는 보낼 수 없었나?

순리대로 정중히 메시지를 보냈다면, 당장 정선 갈 수야 없지만, '동강할미꽃 축제' 때 까지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이제 박광호와의 인연을 끊던지, 이번 기회에 불운의 씨앗을 불태우던지, 결정해야 겠다.



“‘쥐띠부인에게 전하니, 단단히 새겨들어라.

오는 3월 하순 정선 귤암리에서 열리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끝나는 날,

그 불길한 까마귀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울 것이다,

그 그림이 필요하다면, 태우기 전에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면 주겠다.

그렇지만 액운을 다시 끌고 가니, 박광호와의 인연은 끝이다.

그 대신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전시가 끝난 2007년도에 갖다 준, 사진작품을 가져오라.

액운의 까마귀 그림대신, 그 사진액자를 태우며, 살아서의 인연을 끝내겠다.“



박광호,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광호야! 미안하다.

그동안 참고 산다고 욕 봤다. 쥐띠부인 없는 저승에서 만나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은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장례식 치루며 술 마시느라 고생했다며, 속 풀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창동 ‘금보성센터’에서 열리는 박찬원씨 돼지전시 오프닝 시간과 겹쳐 버렸다.





서둘러 평창동부터 들렸는데, 일찍부터 사진인들이 나와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최연화씨는 2층에 잔뜩 차려놓았으니 천천히 먹고 가라지만,

작품 돌아보기도 바빴다.






‘민예총’전시가 열리는 인사동 ‘관훈갤러리‘로 옮겼더니,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최석태, 서인형, 이재일, 정영신씨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요즘 매일같이 나오는 장경호씨 이야기가 화두였는데,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다.
그날도 술을 마다하고 일찍 들어갔단다,
몸이 좋지 않은지, 기가 빠져 보인다는 등 걱정을 하고 있었다.





조준영씨는 전시 진행하는 분들에게 밥 사 준 것만도 고마운데,

김수영시인의 모습을 담은 이태호씨 판화도 한 점 샀단다.






다들 ‘민예총’재기를 위해 힘을 보태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도 만원짜리 CMS 한구좌 가입하고 싶었으나, 통장이 없어 불가능했다.
신용불량자는 기부도 할 수 없는 처지라, 기분 더럽더라.






이 불경기에 1억원 어치가 넘는 작품이 팔려나갔지만, 아직 부족하다.
어제는 도종환장관께서 전시장에 들리는 등
개막식 이후 최고의 관람객이 몰렸다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전시장 지키는 사람들이 심약하여 권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작품을 사지 못하면 CMS라도 한 장 적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부담스러운 작품 구입보다 회원으로 가입해 주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된다.






이제 일요일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
전시를 보지 못한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금 절실한 것은 돈보다 마음이다.
우리 민족 예술가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모으자.



사진, 글 / 조문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에 대한 경의”, 연남동 공간41’에서 9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전인경씨는 만다라(Mandala) 안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풀어간다.  수많은 핵으로 형성된 윤회적 표현들은 순환과 회귀로 이어지며, 해와 달의 시간성을 나타내기도 한.


그녀는 캔버스 앞에 앉으면 수행자가 된다.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차단한 채, 마음의 중심을 찾아나서는 내면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마 무의식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명상적 기도인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에서 부터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향해 덧칠해 가며 만다라의 원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는 성신여자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만봉 스님으로 부터 4년 동안 불화를 사사받아, 불화와 단청 학습으로 자신만의 사유 세계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일관되게 작업해 온 만다라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원으로 표현해 놓아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오했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일가를 이루어 펼쳐 온 만다라 작업에 변화가 찾아 온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뇌과학자의 신경세포 드로잉과 만다라를 결합한 뉴로 만다라연작이었는데, 부제로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에 대한 경의라 붙여 놓았다.



 

 

뉴로 만다라전은 100년 전 노벨상을 받은 신경과학의 선구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드로잉을 자신의 포스트만다라와 결합하여 새로운 과학예술의 장을 열고자 시도했다. 최초로 신경세포를 관찰하고 기록한 드로잉을 토대로 8점의 오마주 작업을 했으며, 현대 뇌 과학이 밝혀낸 신경세포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4점도 발표했다.



 

 

이번 뉴로 만다라전에는 신작 12점과 함께 6점의 포스트만다라연작을 소개했는데, 5미터가 넘는 대작 슈퍼노바는 탄소의 탄생을 형상화한 것으로 만다라 연작의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었다. 함께 선보인 작품들도 만다라의 우주적 세계관과 천문학을 결합한 것으로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과학예술로 진화하는 전인경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인경씨의 작업은 세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이후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만다라를 통해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인간 생명의 감추어진 구심점을 찾는 여정을 거쳐 온 것이다. 작년에 가진 두 번의 개인전에 이어 올해도 두 번이나 보여줄 정도로 부지런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성급한 전시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따랐다.



 

 

미학의 뇌를 번역한 심희정 미학박사는 전인경의 작업 뉴로만다라는 예술적 상상으로 그려진 신경 체계에 대한 어떤 상이다. 거대한 은하계, 자연 세계의 어떤 단면을 연상시키며, 신경체들이 이루어내는 화면은 우주 기원, 생성과 소멸, 접촉과 변형을 연상시키며 글자 그대로 수많은 차원과 관계를 말한다고 말했다.



 

 

전인경씨는 시냅스는 시냅스작용이 일어나는 것들끼리 강해지고 굵어지며, 신경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도 관계에서 의해서 일어나고, 우리의 인간사도 만나면 헤어지는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생로병사의 인간 세계는 신경 세포의 생장과 정지, 연결과 단절은 우주에 있는 별들의 생성과 소멸과 같다고 말했다.



 

 

전시 개막식이 열린 지난 14, 연남동에 있는 갤러리 공간41’를 찾았다.

마침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작가 전인경씨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심희정, 이준기씨,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 시인 조준영씨, 화가 서길헌씨 등 여러 명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성 구청장과 만봉스님 자제 이인섭선생, 큐레이터 전인미씨 김용국, 김상윤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신작들과 함께 눈에 익은 작품도 더러 보였으나,

5미터가 넘는 대작 앞에서는 입이 벌어졌다.

전인경씨의 치열한 작가정신과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뒤풀이 장소에는 무세중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이광군씨등 많은 분들이 먼저 와 있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1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조준영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 같은 모임이다.






모이기로 한 ‘유목민’으로 가다 ‘갤러리 이즈’ 앞에서 아르바이트하는 Lucy양을 만났다.
언제나 쉴 틈 없이 초상화를 그리는 그녀지만, 마침 혼자 있었다.
모처럼 이런 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홍익대 3학년인데, 학비 마련하러 인사동에서 일 한다는 것이다.
한 장 그리는데 팔천 원씩 받지만, 그리는 량이 많아 수입은 짭짤하단다.
돌콩 같은 조그만 녀석이 참 기특했다.






그래서 나를 그려보라며 Lucy양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Lucy양은 나의 사진모델이 되었다.
얼굴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연신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참 예뻤다.
낯선 소녀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쳐다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소녀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유목민’으로 가던 장경호씨와 안원규씨에게 덜미 잡힌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 꼬라지가 하도 지랄같이 생겨서인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보니 너무 미화시켜 놓았더라.
대개 예쁘거나 근사한 자신의 모습을 원하겠지만, 대 실망이었다.




 


이가 빠지면 빠진 데로 주름살이 있으면 있는 데로 리얼하게 그려야 하는데,
닮은 것이라고는 안경테와 콧수염뿐이었다.
주변에 그려 넣은 색이나 카메라도 산만하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돈은 벌지 모르겠으나, 본인 작업에는 도움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김상현, 이한성, 전강호, 장경호, 안원규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씨가 나타났다. 번개 팅도 아닌데 참석률이 저조했다.






더욱 김빠지게 하는 것은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여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래야 기껏 연극하는 이명희씨와 사진하는 정영신씨 정도겠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구석자리에 사진하는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한기현씨가 두 차례나 인사하며 언질 주었건만, 이야기하느라 가보지 못했다.
아마 그날 희수갤러리에서 열린 박경태씨의 ‘마주한 기억’ 전시를 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하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니, 다들 나가려고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한옥란교수를 닮아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한참 젊은 미녀였는데,

뒤늦게 페친 신청한 이름을 보니 노미경씨였고, 안명현씨도 있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부랴부랴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송구스러웠다.
다음 만날 기회 있으면 꼭 술 한 잔 올리리다.






술이 얼큰해지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나만 조는 것이 아니라 장경호씨도 졸았다.
지난 밤 너무 더워 잠을 못이루어, 둘 다 졸음이 몰려 온 것이다.
먼저 가 쉬라는 조준영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행랑쳤다.
같은 버스를 탄 장경호씨와 번갈아 졸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내릴 곳을 놓치지는 않았다.






구월 모임에는 많이 불러 모아 좀 재미있게 놀아 봅시다.

그리고 모임의 이름이나 인사동에서 해야 할 일을 의논하는 등 모임의 틀도 짭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은 고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엉뚱한 일로 무산되고 말았다.

용산경찰서사이버수사대에 출두하여 조사받는 날과 겹쳐진 것이다.


 

3년 전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 최초 발견한 사진가는 이석필씨다.”란 글을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뒤늦게 야생화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명예혜손으로 고소장을 접수시킨 것이다.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지가 숱한 시일이 지나도록 감감소식이었는데,

뒤늦게 주소지인 용산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가 찍어 발표한 동강할미꽃 사진이 야생화의 생태를 헤치는 잘못된 방법이라는 점과

알려 진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바로잡기 위해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내용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실과 달리 동강할미꽃 최초촬영자로 나서며 정선군의 명예군민증까지 받지 않았던가?

동강할미꽃 사진은 그가 촬영하기 10년 전 태백의 야생화사진가 이석필씨가 먼저 찍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1999년 동강환경사진집에 실린 이석필씨의 동강할미꽃 사진만 하더라도 김정명씨가 만든 야생화 달력보다 앞서고 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찍었냐보다 동강할미꽃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거나 꽃에 붙어있는 마른 풀을 뜯어내는 등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내 놓은 그의 사진에 있는 것이다.

야생화사진을 심사할 위치에 있는 중견사진가의 꽃 사진이 그러할진데,

어찌 사진 배우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그의 사진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 글을 올린 것도 따라하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만행을 근절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야생화사진이란 생태를 파괴하는 것 보다,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사진이라는 것이지,

김정명씨 개인에 대한 감정이 있거나 명예를 혜손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변명으로 일관된 고소장을 읽어보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챙겨간 증거자료를 제출하며, 수사관의 질문에 답변하다 보니 조사시간이 세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며 동자동으로 돌아왔으나, 곧 바로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모처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사발통문을 받은 것이다. 

반가운 인사동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야 마다할 수 없지만,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는 27일까지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동안 술자리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술을 사양해 왔고,

그제 밤에는 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도 음복 한 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약속장소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조해인, 장경호, 공윤희, 전활철, 박혜영, 김상현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유진오, 정영신, 이인섭, 이 현, 황예숙, 박상하씨도 나타났다.



모임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내용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때로는 당사자의 반감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들을 했으나,

잘 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데 어찌 친분을 따질 수 있겠는가



오는 8월25일 아들 햇님이 장가 갈 걱정에서 부터, 속도위반으로 손자를 얻어 일타 쌍피를 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하필이면 사돈 될 두 내외가 16년 전 영월 천포문학회에서 거시기 퍼포먼서로 난리 친, 그 집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조준영교수는 한 수 더 떠 내가 찍은 그 때 사진을 핸드폰에서 보여 주었다.



조준영교수는 쪽 팔린다며, 부인의 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화가 이청운을 검색해보니, 죄다 조준영씨와 술 마시는 사진만 나오더라는다.

"이젠 같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너무 탓하지 마시라요."



사실 사진판이나 문화예술계는 물론 즐겨 찍는 인사동이나 동자동 사람들 대개가

가깝거나 잘 아는 분들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부터라도 정신차려야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며 더 이상 쪽팔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중엔 왕따가 되어 외로워지더라도 내가 할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노회찬의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피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문대통령이 문상은 가지 않으면서 장례기간 중에 광화문 호프집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맥주 쇼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정치 자체가 쇼를 필요로 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동지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박원순 시장까지 옥탑방에서 쇼를 벌이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쇼에 넘어가는 순진함에 있다는 것이다.


 

장경호씨는 인사동 모임을 묵사모로 하자고도 했다.

민초연대로 하면 참여할 사람이 많겠지만, ‘묵사모가 더 좋다는 것이다.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默思의 뜻은 좋으나 단번에 묵사발이란 말부터 떠올라 좀 그랬다.

하기야 모임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지 그까짓 이름이야 무슨 소용이랴!

단지, 술 마시고 노는 모임에서 인사동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모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말았다.

고인도 그 시간엔 편히 영면에 들었겠지만, 숱한 시름을 술잔에 풀어놓고 말았다.


 

부디 이 땅에 진보정치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나마 잘 지켜주소서!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조준영 시인으로부터 인사동에서 대포 한 잔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5일 약속장소인 ‘유목민’에는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골목 술상에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강경석, 유진오, 김상현,

이명희, 전강호,, 공윤희씨 등 반가운 사람들이 많았다.
안 쪽에는 화가 김 구, 김 억, 한상진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김명성, 윤승길, 김수길, 신상철, 이미례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이 모임에는 술값으로 만원을 받고 있는데, 
그마저 70세 넘는 노인은 면제니, 보나 마나 적자다.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이 다들 가난하니, 어쩌겠는가?





예전에는 대부분의 술값을 김명성 시인이 부담하였으나,
조준영 시인이 소집하면서 부터 작은 돈이지만 회비를 받게되었다.
십시일반 조금씩이라도 모아 모임의 자립성을 꾀하려하나,
모자라는 대부분을 대학에서 교편 잡는 조준영 시인이 부담할 수 밖에 없다.






이날 모임에서 은평구의원에 출마한 조햇님에 대한 인사를 많이 받았다.
달세 방에서 노모와 외할머니까지 모시며 사는 가난한 형편에
불평등의 벽을 없애겠다며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니, 다들 대견스러운 것 같았다.
그 고마운 마음을 답하는 길은 기어이 당선되어 잘못을 바꾸는 길 뿐이다.






그리고 화가 박광호씨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생선뼈만 줄 창 그렸던 박광호씨는 불운의 화가다.
장애가 깊어진 후로 인사동은 커녕 방안에서만 지내지 않았던가.






오랫동안 연락되지 않아 걱정했는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안부를 전해들은 것이다.
목에 호스를 꽂아 통화가 불가능하다기에 병문안이라도 한 번 가야할 것 같다.
전강호씨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내어 연락해 주면,
다들 찾아가 그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고 재기를 기원하자.





가난한 인사동 사람들이지만, 인정마저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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