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은 인사동사람들 만나 술 한 잔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죽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자고 나발 분지가 제법 되었건만,
다들 그리운 사람이 없는지, 사는 게 힘든지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날은 오후2시부터 인사동 나오라는 장경호씨 전화를 받았다.
일찍부터 마시면 늦게까지 버티기 힘들어 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난 지 오래된 최명철씨와 함께 ‘툇마루’에 있다는데...






나오다 동자동 입구에 자리 잡은 유정희씨 일당에게 덜미 잡혔다.
“날씨도 더운데, 막걸리 한 잔 해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시다보니 30분이 후딱 지나버렸다.






바삐 갔더니, 그 때까지 장경호씨와 최명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명철씨는 전국구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일 없이 바쁜 양반인데, 모처럼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툇마루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느즈막에 달아올라 힘들게 하는 술이지만, 찔끔 찔끔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양념 행상을 해 온 권정선씨가 ‘툇마루’ 이층에 올라 온 것이다.
알고 보니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에 들어가는 참기름을 권씨 할매가 댄다고 했다.
‘툇마루’를 단골로 잡고 있는 권씨 할매가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였다.
뵐 때마다 옛날 같지 않은 야박한 인사동이라 사는 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빔밥 한 그릇 먹고 ‘유목민’으로 가다 거리에서 뜻밖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이 친구 역시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 넘었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그것도 날씨가 무섭도록 춥거나 더울 때만 나타난다.
보이지 않으면 혹시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는데, 그 걱정을 비웃듯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인간 보면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숙자들이 몰리는 서울역 부근으로 가면 밥이라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가 즐겨 다니는 곳은 인사동이나 미술관이 몰린 곳이라 밥은커녕 사람들의 눈총만 받는다. 



 


비록 노숙하며 살아가는 걸승이지만,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저승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그를 일찍부터 알아채어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는 한 때 해인사 중이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인사동을 헤맨 지 숱한 세월이 지났다.
인사동에서는 스님들이 그의 밥이다.
얼마 전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보살 한 분이 거지 행색을 푸대접 했다가 혼쭐나는 모습을 최명철씨가 봤단다.






그는 중답게 술은 마시지 않는다.
녹차는 좋아할 정도가 아니라 그의 중독자에 가깝다.
거지 주제에 따뜻한 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비결은 나도 모른다.
녹차 문제로 종로경찰서에 들락거린 적도 두 차례나 있는데, 그 때마다 고인이 된 ‘귀천’ 목여사가 빼 내 주었다.






아무리 꼬드겨도 그의 법명은 물론 신상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의문이 그리 많은지 항상 고개를 까닥거리고 다녀 그냥 까딱이로 부른다.
탁발 또한 아무한테나 손 벌리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만 강탈하듯 뺏는다. 
푼돈이지만, 만나면 항상 갈취 당했는데, 요즘은 내 사는 꼴을 짐작했는지 돈 달라는 소리를 일체하지 않는다.






너무 반가워 담배 한 대 권했더니, “주제에 담배는 무슨 담배냐”며 갑 채 빼앗아 자기만 피운다.

오히려 내가 담배를 구걸하도록 만들었다. 좌우지간 보통 내공이 아닌 의문의 걸승이다.






이 날은 오래된 인사동 꼴통들을 자주 만났다.
돌 위에 자리 잡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문호형님 아입니꺼?”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올려다보다 지산이었다. 이 인간 이야기 꺼내려면 날 샐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그 날은 막사발로 통하는 김용문씨를 비롯한 서울공고 동문들의 단체전이 있다기에 ‘나무화랑’에 올라갔다.
석심 미술전이라 이름 붙였는데, 돌에는 마음이 없으니 보나마나다.
김용문씨를 내세운 아마추어 동문들 전시였는데, 아는 분이라고는 김용문씨와 김진하관장 뿐이었다.






날씨도 내 마음처럼 왔다 갔다 했다.
비오다 더웠다 들랑날랑 하니 사람들도 많았다 적었다 날씨 따라 갔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으나 시간이 이른지 손님도 없었다.
오가며 만난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수호선생과 김명성, 공윤희, 유진오, 전활철, 박혜영씨가 전부다.






그나저나 술이 취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다들 늦게나오는데, 나오기도 전에 내가 취해버렸으니 어쩌랴!
다음부터는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경호, 유진오씨를 남겨두고 삼십육계 줄행랑 쳤다.






아! 살아남기 힘들다.

제발 셋째 수요일을 기억해다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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