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 이게 얼마 만이더냐?

그놈의 코로나에 발목 잡혀 못 만난 지가 2년을 훌쩍 넘었다.

조준영 시인의 사발통문으로 모처럼 인사동 골통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인사동 풍류를 사랑하는 예술가 패거리가 생겨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7-80년대 목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귀천을 아지트 삼아,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 민,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민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 풍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소식 끊긴 구중관, 배평모를 비롯하여 김종구, 강용대, 최정자, 이청운,

강찬모, 조해인, 최울가, 박광호, 전강호, 김신용, 석파, 적음, 김용문씨 등 많은 풍류객이

만들어 낸 사연들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것이다.

그중에는 김명성씨가 있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화가도 더러 있으나, 예전엔 다들 개털이라 술값 낼 물주가 필요했다.

김명성씨가 창예헌이란 모임을 만들어 인사동은 물론,

지방까지 예술축제를 개최하여 지역 예술가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인사동에 세운 아라아트건물이 빚더미에 올라

중국 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조준영 시인이 주선하여 유목민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인원은 십여 명 밖애 모이지 않았지만, 터줏대감들의 유지는 이어 온 셈이다.

그것도 형식상으로 일 인당 만 원을 거두지만,

주태백이 술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항상 제 주머니를 털어 온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랜만에 모임을 규합하기 위해 봉화 사는 신동여화백을 불러 온 것이다.

신화백은 인사동에서 전시했던 4년 전에 보고 처음이니, 다들 얼마나 반갑겠나?

, 신동여씨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우익선생이 생각난다.

 

신경림시인의 간고등어시에도 소개되었지만,

봉화에서 인사동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안동 간고등어를 들고 오셨다.

신화백도 같은 봉화 살지만, 삶의 철학이 비슷하다.

신화백 역시 예전에는 간고등어 대신 약초를 갖다주었다.

 

전우익선생 말씀대로 재미있게 사는게 최고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럴려면 저어기 무인도에나 가서 살어.

별로 재미없는 세상 재미나게 살아가야제. 안 그려?

비잉신처럼 굴지말고 학실히 살다 가. 알았냐?”

 

인사동 모임은 지난 금요일 오후 여섯 시로  잡혔는데,

전시 리뷰 하나 전송하고 나가려다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인사동에 도착하니 삼십 분쯤 늦었는데, 이미 유목민벽치기 골목은 대목장이었다.

 

봉화에서 올라온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임태종, 조해인, 이명희, 김상현,

장경호, 전강호, 정복수, 노광래, 유근오, 김수길, 김 구, 임경일, 정영신, 노박사,

이인섭, 최유진, 김민경, 전활철씨 등 이 십여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도 와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대신 카메라부터 들이댔는데, 찍고 빠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걸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슬슬 취했다.

술맛 좀 날 만 하자, 일찍 마신 술꾼들은 도망갈 준비부터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니, 바톤 받듯이 임헌갑, 서인형, 류연복, 최석태, 안원규,

발렌티노 김이 뒤를 이었는데, 한때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 이두엽까지 나타났다.

아직 인사동 밤안개가 나올 시간은 아닌데...

 

기분이 좋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갔다.

요새 한꺼번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자주 생긴다.

그제는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이 인사동에서 열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까지 올라 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는 정동지 눈치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신 화백하고 빨다 잘 테니, 먼저 들어가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에 나온다는 말이 딱 맞다.

모셔드려야 할 밤늦은 시간에, 어찌 동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늦게 온 술꾼들마저 사라지는 걸 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평소 문 닫을 때 까지 마신다는 장경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신화백까지 사라져 활철씨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여관에 갔단다.

활철씨 안내로 '한흥장'을 찾아가니, 이미 신화백은 뻗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화백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인사동 거리는 사람 청소를 했는지,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나 인사동에 해장할 곳이 마땅찮다.

아침 식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뿐이라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반주도 없이 급하게 설렁탕을 퍼 넣는데, 전활철씨가 해장국 끓어 놓았다는 기별을 했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국물이라 소주가 술술 넘어가 단숨에 한라산 세 병을 까고서야 일어섰다.

활철씨는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가는 동안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간 크게 택시를 잡아탔다.

 

모처럼 시골 영감이 상경했는데, '대마불사주'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해장술에  제정신이 아니라, 활철씨가 찔러 준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외상이 아니라는 투로 주모에게 대마불사주와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대마 나물과 대마불사주가 나왔는데, 시골 영감이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았다.

불광동 사는 장춘씨까지 불러냈으나, 이미 정신이 풀려버렸다.

많지도 않은 대마불사주 씨를 말리고서야 일어섰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신화백을 부축하여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는데,

장춘씨가 술 취한 신화백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듣는 내가 짜증 났다.

처녀로 늙었기에 망정이지, 시집이라도 갔더라면 서방 잡을 것 같았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입구에서 내려 유목민으로 돌아오니,

활철씨도 장을 보아 영업준비를 마무리했더라.

 

장춘씨의 잔소리를 안주로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노박사가 안주하라며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갖다주네.

입가심으로 마신 막걸리 두 병에 신화백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활철씨가 여관방을 잡아두었다기에, 그를 부축하느라 술이 깰 지경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리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2층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니, 장춘씨도 가버렸다.

그만 막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인사동에 방 잡아 놓고 술 마신 지가 얼마 만이더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래된 일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접어 넣었다.

신화백이 자리에 눕자, 긴장이 풀어져 다시 취기가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한 밤중에 깨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야 정신을 차렸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각났다.

뉴스 아트에 보내준 전시리뷰를 페북에 걸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 교정을 못 본 것이다.

 

컴퓨터를 열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마치 취중에 올린 글 같은 상스러운 표현인데, 이미 볼 사람은 다 봐 버렸다.

 댓글까지 달린 전시리뷰를 내리고, 수정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글을 다시 페북에 링크한 것이다.

 

카메라에 든 이미지를 꺼내 정리하며, 불 꺼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으니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닭죽을 끓여 놓았는데, 신화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화백은 일찍 봉화로 내려 간 것 같았다.

만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그래! 잘 내려가시게나.

당신이 또 하나의 인사동 추억을 남겨주었구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인사동 풍류, 불 꺼진 창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삭막한 인사동,

뒷골목 정마저 사라진다면 전우익 선생 말처럼 무슨 재민겨?”

다들 조준영 시인이 부여잡은 인사동 끈을 모두 놓지 맙시다.

 

이상으로 ‘신동여 선생 상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진, / 조문호

 

 

하상호, 왕인숙씨의 아들 태영군과 강찬모, 정영임씨의 딸 현인양이

지난 5281230아펠가모 반포'에서 화촉을 밝혔다.

 

이번 결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십 년 전인

초등학생 시절부터 가까웠던 친구 사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면 어린 시절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늘 친구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축원한다.

 

예전에는 딸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딸을 잃은 듯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이젠 세상이 역전되었다.

아들 장가보내는 부모 마음과 뒤바뀐 것이다.

 

딸을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 같은 사위를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결혼식에는 많은 지인이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했다.

 

이성 구로구청장을 비롯하여 조준영, 오세필, 전활철,

이만주, 서길헌, 조해인, 김수길씨 등 많은 분을 만났는데,

김명성씨는 부인 지혜숙씨와 아들 한성군까지 대동했다.

 

강 화백께 다시 한번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시인으로 부터 인사동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전에는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있었으나, 코로나 광풍에 밀려 사라진터라 반가운 기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준영씨를 만난 지가 일 년을 훌쩍 넘겼으나 인원수 제한에 걸려  다른 분은 연락도 못했다.

아마 정선 집에 불난 소문을 듣고 무리하게 자리 만든 것 같았다.

 

 

 

정영신씨와 함께 약속보다 일찍 나가 마루아트에서 열리는 노무현 추모전 사람 사는 세상’부터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박재동 화백과 유준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9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세삼 울컥하게 만든 작품은 노무현대통령 전속 사진가로 일한 장철영씨 사진이었다소탈한 바보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에 어찌 옛날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나온 인사동 거리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문 닫았던 몇몇 가게들이 옷 가게나 악세서리 가게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전통 노리개를 팔던 아원공방자리는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동 길가의 신축건물 일층에 더 스타갤러리가 문을 열었더라.

일 년만 숨어 지내다 오면 인사동의 모든 게 다 바뀔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되어 툇마루로 갔더니, 김 발렌티노가 반갑게 맞았다.

요즘 청소부로 돈 번다며 밥 한 그릇 사겠다고 우겼으나 약속이 있어 사양했다.

 

 

 

'툇마루에서 조준영씨를 만나 된장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요즘 술만 마시면 힘들어 아껴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입은 땡기고 머리는 말리니 어느 장단에 춤 출지 모르겠더라.

 

 

 

다들 지난한 나날들 하소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조준영씨가 화재 후원금을 건네주었다.

함께 공유할 예술창고를 만들려면, 돈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해 고맙게 받아 들였다.

 

 

 

대기손님들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오래 버틸 재간이 없었다.

 

 

 

툇마루에서 나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유목민도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소식 끊겨 죽은 줄만 알았던 장춘씨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여인이다.

'죽어도 고.”라는 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녀의 언어 법은 귀신들이 나누는 말투라 다소 난해하다.

 

 

 

우린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으로 흘리니 문제될 게 없으나, 옆 좌석에 던지는 실 없는 소리에 신경 쓰였다

다행스럽게 귀신 말귀를 알아챘는지, 맞장구를 쳐 주어 분위기가 무러익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 얼마만이더냐? 마음대로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마신 적이...

 

 

 

같은 방향이라 녹번동으로 함께 갔는데, 장춘씨가 떠난 생각이 나지않는 걸 보니, 아마 먼저 뻗은 것 같았.

벌 받아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누워 낑낑거렸으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놀면 날마다 노나?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 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좋더라.

앵헤야~ 엥헤야~ 앵헤야~ 앵헤야~“

 

사진, / 조문호

 



년 말이 다가오니 사방팔방 술 마실 일 뿐이다.
문제는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탈이다.




지난 19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연극연출가 기국서씨 시상식에서 뒤풀이도 마다하고 달려갔더니‘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시인 조준영씨, 화가 김 구, 장경호, 전강호, 조경석씨,
미술평론가 유근오, 최석태씨, 연극배우 이명희씨, 연출가 강경석씨
사진가 정영신씨, 중문학자 임계제씨 문화기획가 서인형씨,
안쪽에는 불화가 이인섭씨와 사진가 이유홍씨도 있었다
그 외에도 안원규, 전활철, 김대웅,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을 만났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분도 많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났으니, 기분 좋아 술이 술술 넘어갔다.
기분 좋게 즐긴 건 좋았으나, 그 다음 날 죽어났다.
술자리에서 실수도 많이 한 것 같은데, 필름이 끊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자에 달라 붙은 김치조각이나, 튀어 나온 정영신씨 입을 보니 알만하다.


정영신사진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누군가 욕을 하는 모양이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으니 할 말도 없다.
차라리 술 마시다 뒈져 버렸으면 이런 낭패는 없을텐데...



정영신사진


주머니를 뒤져보니, 김구씨 전시 엽서가 한 장 나왔다.

내년 1월3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화인'에서 열린단다.

'갤러리 화인'은 옛날 '평화 만들기'자리에 있고,

개막식은 1월3일 오후5시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브레송'에서 사진인들 망년회라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술 마시다 죽는 건 주사인가? 아니면 순직인가?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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