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집' 초판에 얽힌 이야기


▲ 표지 화사집 초판 표지
ⓒ 소명출판사



상상속의 동물인지 실존하는지 헛갈리는 희귀본이 있다. 김구 선생이 직접 서명해서 증정한 <백범일지>라든가, 1973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월간문학사판 <농무>는 구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소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구경은 할 수 있다. 근대 서지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조차 존재한다는 것만 알뿐 그 실물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한탄한 책이 있다. 1941년 오장환 시인이 경영하던 <남만서고>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특제본이 그 주인공이다. 

미당 서정주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 국립중앙도서관이 <화사집> 특제본을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근대 서지 전문가들조차도 그제야 <화사집> 특제본이 있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특제본 <화사집>은 경매에 낙찰된 가격이 무려 1억 원이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제본이란 말 그대로 특별히 제작한 한정판이라는 의미인데 이 사전적인 설명만으로는 <화사집> 특제본의 귀함을 다 담지 못한다.

<화사집>과 시인 오장환

먼저 서정주의 <화사집>을 발행한 오장환 시인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다.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은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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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니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은 1946년이 되자 임화 등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8년 월북했다. 오장환 시인의 시는 강건하고 치열했지만 그의 일생은 짧았다. 많은 월북 작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사망시기와 사망원인이 분명치 않다. 늦어도 1953년경 결핵 또는 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에 유학 생활을 하였었는데 이때 일본의 화려한 장정 책을 접하고 장차 본인도 아름다운 장정으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양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출판 산업이 발달한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오장환 시인은 주 책방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가죽을 비롯한 고급 재료로 장정을 하고 화려한 마감을 한 서양의 고서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오장환 시인은 조선에 돌아간다면 한정판을 전문으로 만드는 단체를 만들어서 춘향전이나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고전이나 조선 현대 문인들의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오장환은 시인이면서 발행인이기도 하고 한정판 애호가였다.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가 이봉구의 기억에 의하면 오장환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나서 1938년에 차린 책방 '남만서방'는 시집, 문학, 역사, 철학책을 주로 취급했고 희귀본과 호화장정본이 가득했다고 한다.

오장환 시인의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 물려받은 유산을 밑천으로 해서 서점을 열은 서점이다.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시집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차린 것을 두고 세간의 사람들은 '일 년에 시집이 몇 권 출간되지 않는 나라에서 웬 시집 전문 서점이냐?'며 오장환 시인의 객기를 어지간히 걱정했다고 한다. 

서점 정면 벽에는 이상이 선물한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1940년대 '남만서방'에 자주 드나들면서 벽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과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책들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느낀 십대 후반의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인환 시인이다. 

'남만서방'에 걸린 이상의 자화상은 보통의 그것처럼 근엄하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고 연필로 그렸는데 머리는 무성한 잡초처럼 보였고 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 갈대밭처럼 보였다니 소년 박인환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서점이름도 평범함을 거부하고 '남쪽 오랑캐'를 뜻하는 '남만'이지 않는가.  



          

오장환 시인이 유학하던 시절 도쿄에는 '남만서점'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다가 판금을 당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오장환 시인이 서울에 서점을 차리면서 도쿄의 서점 상호를 따온 것이 아니겠냐는 설이 있다. 아쉽게도 서점은 문을 연 지 2년이 채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만다. 대신 남만서점의 고객이었던 박인환이 파고다 공원 근처에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었고 그 이름처럼 외국 서점을 연상케 하는 서양 책들이 많이 진열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이유

다시 <화사집> 특제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장환 시인은 본인의 시집을 수수하고 평범한 장정으로 출간했지만 한때 동인으로 활동했고 절친했던 후배 미당의 <화사집>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으로 출간을 했다. 한마디로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한 오장환 시인은 발표작도 얼마 되지 않은 미당에게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미당은 일지감치 오장환 시인에게 시집에 수록할 시를 넘겼지만 1941년에 와서야 출간이 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것은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결국 당시 남대문 약국의 주인이자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상준이 500원을 출연해서 간신히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화사집> 모두를 호화 장정판으로 출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과 한정판을 따로 제작했다.

한정판들은 가로 14.5cm, 세로 23cm인 데 비해서 보급판은 가로14.5cm, 세로21cm로 작은 크기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100부 한정판 시집'이라는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보급판도 하드커버였는데 몇 부나 발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이라고 해도 표지나 용지를 조금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제작하는 우리의 출판 관례와는 달리 <화사집> 한정판은 그 외관이 보급관과는 차원이 다르게 제작했다. 총 100부로 발행했으며 초판본 속지에 번호별로 용도가 아래처럼 기재돼 있었다. 
 

正壹百部限定印行中
第壹番에서 第拾五番까지 著者寄贈本
同拾六番에서 同五拾番까지는 特製本 
同五拾壹番에서 同九拾番까지 竝製本

同九拾壹番에서 第百番까지는 印行者寄贈本 
本書는 其中第 番 


정리하면 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증정본, 16번에서 50번까지가 문제의 특제본, 51번에서 90번은 병제본(병제본의 의미가 분명치 않지만 대략 보급판 정도의 뜻으로 추측된다), 91번부터 100번까지는 발행인 증정본이라는 것이다. 번호별로 정확한 용도가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번호가 인쇄돼 있지 않은 책이 많았고 수기로 임의로 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화사집>은 오장환 시인이 장정을 책임졌고, 정지용 시인이 표지 제호를 썼으며 근원 수필로 유명한 김용준의 그림을 수록한 그야말로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이 동원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특제본만은 내지를 태지(닥나무와 이끼를 섞어서 제작하는 한지)를 사용했고, 비단으로 책 등을 만들었으며 책등의 책 제목을 붉은 색 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다. 특제본은 한눈에 보기에도 증정본과 병제본과 확실히 구별되는 군계일학이었다. 저자와 발행인 증정본은 말 그대로 증정된 비매품이었다. 그러니까 35권의 특제본은 한정판의 한정판이었던 셈이다. 

보급판이 1원 80전, 병제본이 3원이었고 병제본보다 크기가 크고 장정이 화려한 특제본은 5원이었다. 특제본을 제외한 나머지 한정판들은 능화판 문양의 누런색 표지다. '모두 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병제본과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은 의미가 비슷해서 헛갈리는데 가격이 다르고 장정도 달랐다.

보급판은 두껍고 딱딱한 종이 위에 천을 덧씌운 하드 커버형태로 제작되었다. 보급판이지만 상당히 고급스럽게 제작되었다. 최근 경매에서 원저자와 발행인 증정본도 경매에서 5천만 원에 낙찰되었고 한정판과 한날한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보급판마저 1천만 원에 팔리기도 한다.

< 화사집>은 당시 문단의 큰 자랑거리였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을 비롯한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9명의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워낙 오장환 시인이 술을 좋아해서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명월관 기생 치마폭에 붉은 실로 '花蛇集' 석 자를 수놓은 다음 특제본 표지로 삼았다고 한다. 자줏빛 실로 제목을 수놓은데 오장환 시인이 직접 수 놓은 집에 가서 한 권 한 권 제대로 하는지 참견했다고 한다. 



화사집 내지 그림 뱀이 사과를 물고 있는 아름다운 내지 그림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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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집>출간 5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도서출판 전원에서 명월관 기생 치마폭으로 표지를 삼은 <화사집> 특제본을 재발간하기 위해서 원본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서정주 시인의 기억에 의지해서 <화자집> 특제본의 복간본을 출간했다. 1941년판 특제본을 그대로 구현한 복각본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500부 한정판이었고 지금은 이 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나중의 일이지만 김광균 시인조차도 <화사집> 특제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세월이 흘러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7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전20권 미당 서정주 전집을 발간했다. 물론 친일과 군사정권을 찬양한 글들은 포함하지 않은 전집이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화사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며 화사집을 읽고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찬사가 그리 틀리지 않는다. 읽을 때 마다 아름다움에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찬사도 수긍하게 된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걷어낸다면 말이다. 


 [스크랩] 오마이뉴스(시민기자)박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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