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것 같다.



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오가고,
관광객들이 사진들을 찍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뭔가 구멍 뚫린 듯 허전하다.




인사동, 인사동, 노래 부른 강민선생이 떠나서 일까?
인사동 터줏대감이 사라진 허전함 같았다.
날씨까지 비가 왔다 갔다 지랄 같았다.




인사동의 거리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다.
옛 시인이 한탄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아니라
“산천도 인걸도 모두 간 데 없네”가 되고 말았다.




세월 따라 인사동은 또 바뀔 것이고,
거리를 메우는 사람도 쉼없이 바뀔 것이다.
그게 필연이나 하나는 지켜야 한다.




인사동 정신과 풍류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전 차주의 일방적 결정으로 기사도 모르는 사이 차가 폐차장으로 끌려갔다.

차주가 백 육십 만원 준다는 노후차량 조기 폐차 보조금이 탐나 보낸 모양인데,

지방 촬영 길 따라 다니며 사모님 모셔야 할 기사 가오가 영 말이 아니다.

당장 정선가야 할 내 일이 더 걱정이다.

 

차 꼬라지가 기사 쌍판대기처럼 쭈그러져 처분했는지 모르지만, 그 돈으로 무슨 차를 바꾼단 말인가?

사더라도 비슷한 차를 넘 볼 수 밖에 없는데, 못 생겨도 아는 차가 훨씬 났다.


 

그 차는 2004년도 식 무쏘 픽업인데, 3년 전 오백만원에 구입했다.

딜러에게 속아, 엔진 힘이 딸려 오르막길에 빌빌거리지만, 이젠 요령이 생겨 큰 지장이 없다.

그동안 차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고치지만, 껍데기는 일체 손대지 않았다.

사실 자동차 범퍼라는 것은 충돌 시 차체 손상을 방지하는 완충장치일 뿐인데,

다들 조금만 부딪혀도 난리다.


 


몇 달 전 우리동내 골목에서 접촉사고가 난 일이 있었다.

쌍방과실로 범퍼만 약간 찍혀, 각자 해결하면 될 간단한 일이었다.

, 보험처리 하지 않고 그대로 끌고 다녔는데,

상대방은 보험 처리로 범퍼 교체 때 까지 랜트 카를 빌려 많은 수리비를 발생시켰다.

결국 보험처리하지 않은 나만 바보가 된 것이다.


 

그동안 차 외관이 엉망진창이라 차주가 꽤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차를 세워두면 구경할 정도인데, 멀쩡한 차주의 모습에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차주 한 번보고 기사 한 번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얼마나 쪽 팔렸겠는가?


그래서 폐차 보조금 준다는 이야기에 냅다 가져가라 한 모양인데, 기가 막힐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돈 좀 생기면 폐차장에 끌고 가 필요한 부품을 구할 생각도 했다.

범퍼와 백밀러, 후진램프 등 폐차 부품은 저렴할 텐데,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사실, 다시 구입한다 해도 지금 타고 다니는 종류의 중고차를 구할 수밖에 없다.

무쏘 픽업은 화물용이라 자동차세도 싼데다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

그리고 사륜구동이라 산골 끌고 다니기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비슷한 똥차를 구할까 고민 중에 반가운 연락이 왔다.

차주가 폐차장에 가서 차를 다시 끌고 오라는 것이다.

검사결과 사고차량으로 결정되어 조기 폐차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단다.


에라이~ 썩을 놈들지 놈들이 폐차보조금 준다며 바람 잡아 놓고 무슨 소리냐?

차 팔아먹고 세금 거둘 때는 언제고, 왜 엿쟁이 마음대로 폐차시키라며 협박했냐?

폐차할 차에 돈 쳐발라 깨끗하면 통과되고, 수리하지 않으면 사고차량이라는 게 말이 되냐?

이젠 죽을 때 까지 폐차하지 않고 끌고 다닐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폐차장 주소만 들고 차를 찾으러갔는데,

대중교통도 잘 다니지 않는 일산 변두리에 디젤차량 폐차산업이란 간판을 붙여 놓았다.

그 곳은 내 차보다 더 지저분 폐차장인데, 모아 둔 차를 보니 가관이었다.

다들 묵사발 된 차들이 판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차는 점잖은 편이었다.

 

차 유리에 흰 유성 펜으로 커다랗게 적어 놓은 번호가 마치 사망자 번호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폐차 직전에 구출하여 돌아오는 조기사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절대 강제 폐차에 따르지 않는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봉이가? 씨벌넘들아~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에! 어찌 이리 간이 컬 수 있을까?
정선 집 방문 앞에다 벌집을 만들고 있는데,
천장도 아닌 정면에 보란 듯이 작업 중이다.
이건 쪽발이 아베 신조가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산중에서 벌이나 뱀은 가급적 손대지 않으나
이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전 같으면 벌집을 때내 멀리 버렸겠으나,
아베 신조 생각에 살충제로 씨를 말려버렸다.
빈 벌집은 도발의 표본처럼, 보란 듯이 붙여두었다.




찢어진 차양막은 점령군 깃발처럼 펄럭이고, 축대는 산사태 난 것 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사는 데는 지장 없는 오래된 집이다, 쪽방에 비하면 대궐이지...
집을 비울 때는 찾아 올 손님을 위해 따뜻한 물도 준비해두고, 책장이 비좁아 오래된 책은 밖에다 내놓았다.
다들 그런 건 관심없고, 필요한 물건만 가져가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젠 전기세가 부담되어 온수기는 꺼버리고 오지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책장은 주저앉아버렸다.
오래된 책은 다들 버리라지만, 오래된 책일수록 버릴 수가 없다.
요즘 일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오래된 소식은 옛날 잡지에서나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들리는데, 이번에는 이박삼일로 좀 여유 있게 잡았으나 금방 가버렸다.
옆집에서 술 한 잔 하라는 인정도 마다한 채, 혼자 동동거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져야 주변도 보이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서울이던 정선이던 한 곳에 눌러 살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정선 집이나 동자동 쪽방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은 할 일이 남아 결정하지 못한다. 죽고나면 아무 필요없는 이 욕심을 어쩔까?
서울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도, 또 다시 가야 한다.




그 이틀 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늙어 버린 상추는 다시 파종하고, 지킴이로 봉숭화 한포기만 남겨 두었다.
무성한 잡초를 뽑아가며 농산물을 거두었는데, 한참 일하다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흐르는 땀에 밀려 잠시 벗어 두었는데, 어디다 벗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되어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산소부터 올라갔다.




지난번 떡갈나무 아래 수목장한 햇님이 외할머니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었다.
두 분이 생전에는 상면한 적 없으나, 햇님에게는 조모와 외조모라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손자를 지극히 좋아했으니, 모처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혼자 걱정하는 것 보다 두 분이 하니, 햇님이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젠 갈 일만 남았는데, 사라진 안경이 걱정이었다.
풀밭을 이 잡듯이 세 시간이나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돌아왔으나, 흐릿한 초점으로 운전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별 탈 없이 오기는 왔으나, 좌우지간 명줄 하나는 길다.




길에 뿌린 기름 값에다 안경 맞출 돈까지 생각하니, 머리 아프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편한 날이 없다.


홧김에 쪽바리 아베에게 욕이나 퍼부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샘터 2019년 7월호]


이 달에 만난 사람 : 조문호


                 가장 낮은 곳을 올려다보는 빈자(貧者)의 카메라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 언덕배기엔 낮게 엎드린 빈자(貧者)들의 쉼터가 있다. 서울 도심에 몇 남지 않은 쪽방촌 골목. 오랜만에 다시 만난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73) 작가는 그 사이 쪽방촌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한 듯 전보다 더 밝고 편안해 보였다. “보기는 이래도 생활하는 덴 불편하지 않아요. 매달 70여만 원 씩 나오는 기초수급비에서 방값 23만 원을 내고도 돈이 남으니 걱정할 게 없지요. 월세 걱정하는 이웃들한테 어쩌다 만 원씩, 이만 원씩 집어줘도 나 혼자 사니까 충분히 지낼만합니다.”


동자동 일대엔 이처럼 보증금 없이 20만원 남짓한 월세만 내고 사는 쪽방이 천여 개나 밀집돼 있다. 작가가 세 들어 있는 다세대주택 또한 50여 개의 쪽방 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층마다 복도 양편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방들, 바가지로 물을 퍼 뒤처리를 해야 하는 공동 화장실, 한겨울에 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없이 작가는 만 3년째 쪽방촌 이웃들과 어울렁 더울렁 살 부비며 즐겁게 사는 중이다. 가진 건 비록 1인용 침대 와 컴퓨터 책상만으로 꽉 차는 1.25평짜리 작은 방 하나뿐이지만 작가에게선 여전히, 가진 게 없어 행복한 삶의 역설을 수긍하게 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밖에서 볼 땐 초라하고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정이 더 많습니다. 먹을 게 생기면 자기보다 없이 사는 사람부터 챙겨주려는 인정이 살아 있는 곳이지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동네 풍경,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곤 합니다.”

 

작가의 동자동 생활은 서른 해 넘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진실의 순간을 탐닉해온 이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는 오래 전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인 전농동 588번지를 특유의 정감 어린 시선으로 담은 사진연작 홍등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청량리 홍등가의 일상을 기록한 작품들로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애초에 쪽방촌 사진 작업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을 거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형편에 맞춰 살 집을 구해온 것뿐이라는 말로 세간의 얄팍한 호기심을 일축해버린다. “이왕 여기 온 김에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같이 생활하다보니 그것조차 다 내 욕심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계획을 접었습니다.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가 꺼려하는 사진은 안 찍는 것만 못합니다.”

 

작가라면 구미가 당길 법한 소재 앞에서도 담담히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의는 선험(先驗)에서 나온다. 윤락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와 뒤늦게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다시 작업한 청량리588의 뒷얘기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월간 사진편집장을 거쳐 동아미술제, 86아시안게임 기록사진전 수상으로 사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도 그의 관심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현장 속으 로 뛰어들어 일체의 연출 없이 대상과의 유대감을 직관으로 포착하는 작업방식을 이해 못하는 동료들도 적진 않았다. 누군가는 소재주의라는 비난을 쏟아 냈고, 그에 편승한 언론에서는 매춘(賣春)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만 부각시켜 애써 기록한 사진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 소란통에서 급격한 산업화 시대의 민낯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가의 노력도 얼마쯤 빛이 바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도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 그 작업을 누가 할 거냐고 물으면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럴수록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는 대상을 찾아내 연출하지 않고 대상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찍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장면을 연출하거나 화려한 촬영기법과 렌즈를 이용해 현실을 포장하려 한다면 다큐멘터리와는 안 맞습니다.”


 

한때 그에게도 농협 직원, 부산 광복동 학사주점 사장으로 세속의 화려함을 좇던 시절이 있었다. 30대 후반, 주점 단골손님이던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 선물 받은 사진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도 가진 게 많아 불행한 삶에 허덕이고 있을지 모른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부산 자갈 치시장의 인간 군상을 포착한 선생의 흑백사진들은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태풍이었다. “휴먼이란 제목의 사진집인데 머리가 멍해집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길로 나도 사진 한번 해볼 거라고 결심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요. 뒤늦게 사진 공부 를 하게 됐지만 월간 사진에서 일하며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대상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던 시기였지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은 선생의 영향은 그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은 내 특징은 스냅숏 기법이다. 상대가 의식하기 전에 찍을 수 있는 그 기법이 있어야 연출을 안 하고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면서 요란한 기법만 늘고 머리와 가슴은 텅 비어가는 게 끔찍이 싫다. 혼이 쑥 빠져 버린 사진은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선생을 통해 연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눈뜨기 시작한 작가 또한 그 뒤론 발을 동동거리며 부지런히 삶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87민주화항쟁>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등이 누구보다 뜨겁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작가의 사진은 사진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존의 사진관을 간단히 묵살할 만큼 반골기질이 넘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이면에 눈길을 주고 누구라도 관심 둘만한 소재, 화려한 촬영기술이 필요한 주제엔 눈도 돌리지 않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고집도 여전하다. “옳지 않은 일엔 쓴소리를 참지 못하니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게 걱정이지요. 얼마 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제가 찍은 천상병 시인의 사진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인화해준 게 화가 나 일 년간 안 만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사과 한마디 했으면 풀어졌을 텐데 사진 한 장 가지고 뭐 그렇게까지하는 태도에 속이 상합디다. 사진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허락 없이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서글펐어요.”

 

그도 이젠 서서히 체력을 안배해가며 작업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동자동에 들어온 뒤에도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찰나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바닥만 한 콤팩트카메라를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찰칵 찰칵, 셔터부터 누르던 직업병 덕분에 작가의 카메라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천상병,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 선생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숱한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또한 수십 년 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성실하게 수행해온 기록의 힘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무시로 드나드는 인사동과의 행복한 추억은 인사동 사람들이란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다. “30여 년 넘게 쌓인 사진 자료들이 조금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동료 다큐멘터리 작가들과 함께할 수 있는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볼까 고민 중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작가가 죽고 나면 유족들이 그동안 모인 자료를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경우도 흔한데 이제라도 귀한 기록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요.”

 

비좁은 쪽방촌 골목을 빠져나오며 가난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살아온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객쩍은 소리를 건네자 작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며 웃는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은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지난 주말은 정선 만지산에 일하러 갔다.
한 달에 한 번 가지만,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두렵기도 하다.
자연 속에 파묻히는 것은 좋지만, 일에 쫒길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다.
한 달 동안 쌓인 일을 이틀에 끝내려면, 오줌 누며 좆 볼 틈도 없다.

옆집에선 밥 먹으러 오라지만, 한가하게 밥 먹을 여유조차 없다.
빵과 우유로 해결하는 게, 시간도 벌지만 부담이 없다.
한 달 동안 자란 잡초를 뽑는 일은 빠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번엔 고추 지지대를 박아야 했다.
더 큰 일은 잡목에 가려 밭에 햇볕이 들지 않아 잡목들을 베어내야 했다,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하겠지만, 작은 톱으로 씨름하려니 간이 빠진다.






한 낯에는 더워서 일을 못하니, 더 쫓긴다 ,
오후 네 시쯤 다시 시작하여 한 두시간 밖에 못했는데, 옆집에서 두 차례나 데리러왔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일손을 놓아야했다.

가보니 서울과 홍천에서 온 손님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슨 손님이 그리 많이 오는지 모르겠다.
노부부는 손자 재롱에 흠뻑 빠져있고, 다들 백숙을 안주로 한 잔하고 있었다.






술잔을 권하던 한순식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작가님 집을 탐내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팔게되면 연락해 달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팔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매번 올 때마다 비어 없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20년 전 삼천만원에 구입했는데, 지금은 많이 올랐다는 말도 덧 붙였다.





한 때는 집터가 명당이라며 절터로 팔라는 스님도 있었지만,
‘몽암’이란 현판을 보라며, 이 집이 절이라고 농담한 적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팔고 싶은 유혹도 따랐으나,
돈은 사라져도 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버텨왔다.
어쩌면 소유한다는 자체가 욕심일 수 있겠으나, 정신적 고향만은 지키고 싶었다.





아무튼, 죽어도 팔지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했더니,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팔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어 공익단체에 기부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밤이 되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다.
한순식씨가 매운탕 끓인다며 강가에 고기 잡으러 가는 사이 슬쩍 빠져 나왔다.
비워둔 집이라 군불도 지피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술이 너무 취해버렸다.
군불만 지펴놓고 방에 쓰러져 잤는데, 또 데리러 온 것이다.
자칫했으면 불 단속도 않고 잠들 뻔 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 이튿날은 시원할 때 일을 끝내려고 새벽4시부터 서둘렀다.
정영신씨 줄 상추와 야채부터 거두고, 언덕을 수놓은 딸기도 땄다.
어지럽게 잘라놓은 잡목을 정리하다 보니, 벌써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옥수수 밭에 난 잡초 뽑기를 서두러니 하늘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농작물에 물 줄 일도 남은 일의 하나인데, 큰일을 덜게 된 것이다. 





다음 달은 울 엄마 제사가 있어 좀 여유 있게 지낼 작정이다.
가족이 어울려 산소에서 술 한잔하는 일도 사는 즐거움의 하나다.
잘 갔다 오라는 인사마냥, 비는 오지 않고 천둥만 울어댔다.
“우루루 쾅쾅”

하늘이 무너져도 똥차는 간다.



사진, 글 / 조문호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동자동 주민들을 줄 세워, 또 사람을 길들인다.





지난 5일은 삼성에서 주는 선물이라 묵직했다.
작년처럼 물량까지 충분해 천천히 나누어주어도 될 일이었다.
아홉시 반부터 나눠주기 시작해 열두시에 끝났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날씨까지 추워 두 시간을 벌벌 떨어야 했다.






나누어 주는 절차는 뭐가 그리 복잡한지, 도무지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삼 백미터나 되는 긴 행렬이 가관이었다.
그런 걸 노렸는지, 이엔지 카메라까지 동원되어 짐 날라 주는 봉사활동까지 샅샅히 찍었다.
제발, 선심을 써도 조용히 소리없이 모르게 하라.






2년 넘게 쪽방 촌에서 살다보니, 나도 슬슬 길들기 시작한다.
공짜 좋아하며, 은근히 주는 게 기다려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 않고, 뻔뻔해 졌다는 것이다.






처음 동자동 들어오니, 보컬그룹 레이더스의 ‘인디안 보호구역’이 생각났다.
인디안은 아니지만, 빈민 보호구역으로 여겨졌는데,

우리들을 보호구역에 가둬 버리고, 우리의 생활방식, 돌도끼 그리고 칼과 할마저 빼앗아 갔다

노래 가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시로 먹을 것 나눠주며,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육이나 다름없다.
주는 떡이나 받아먹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 아니가?

우범자들을 한 군데 모아 관리하는 것 같기도 한데, 종종 정치적 쇼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도대체, 서울시에서 ‘쪽방상담소’란 것은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오갈 때 없는 노숙자를 위한 ‘노숙자상담소’라면 모르겠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별도로 만든 것은 다른 저의가 있는 것 아닌가?
차마 줄 세워 길들이는 일을 공무원한테 맡겨, 똥바가지 덮어 쓸 필요 없다는 거지...






이 날도 '삼성화재'에서 50여명의 도우미가 나왔으나, 노약자들 짐 옮겨 주는 일만 했다.
내 앞의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일어 설 수 없어, 시멘트 바닥에 퍼져 않아 한사람 빠지면 자리 옮기기를 반복했다.
지나가는 삼성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며 신분증을 줘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이 그러겠다며 받아 가더니, 한 참 있다 와서는 본인 확인이 안 되면 불가능하단다.






에라이! 이 융통성 없는 죽일 놈들...
쪽방상담소 직원들이 권위적이고, 갑질하는 못된 짓만 배웠다.
그런 원칙이 똑 같이 지켜지면 말도 안한다.






할머니께서 한 시간이나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시니,
쪽방사무소를 들락거리는 완장부대가 신분증을 받아가 해결해 주더라.
아는 사람은 새치기도 받아주면서...






마침내 두 시간 만에 내 차례가 돌아 왔다.
한 사람이 컴퓨터에 입력하여 넘겨주면, 한 사람은 신분증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을 보고 적더라.

그리고는 본인에게 서명까지 하라는데, 그 것도 한 군데가 아니라 두 군데나...





글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 많은데, 해보지도 않은 사인을 두 군데나 하려니
오죽 시간이 걸리겠는가? 추워 손가락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데...
시간이 지체될것 같으면 일하는 사람을 늘리면 될 텐데, 끝까지 노인들을 추위에 떨게 했다.






선물을 받아 열어보니, 작년처럼 쌀, 라면, 통조림, 김 등 꼭 필요한 것만 있었다.

그걸 보니, 한국전쟁 때 미군들이 구호물품으로 준 시레이션 박스가 연상되었다.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나라미’ 쌀 주지, 푸드마켓 에선 김치 주지, 토요일은 교회에서 빵 주지,
수시로 이런 저런 것들을 나눠주니, 줄만 서면 가만있어도 굶어 죽을 염려가 없다.






이러니 임대주택에 독립해 나간 사람조차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새집에 살면 뭐하냐? 먹을 것이 없고 친구가 없는데...






제발 줄세워 길들이는 짓은 그만해라.

"안자 마이 뭇다 아이가”



사진, 글 / 조문호

















큰 일 났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인사동으로 나오라는데, 부르는 사람이 거절 못할 사람이다.

낯에는 송추에서 밤에는 응암동에서 퍼 마신 터라 힘들었고, 술 취해 자다 받은 전화라 더 황당했다.

 





죽기보다 일어나기 싫었으나, 술 취해 혼자 갈 수 없다는 어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인사동으로 나갔으나, ‘유목민에는 없었다.

전활철, 박혜영, 장경호, 안원규씨가 있었으나, 다들 취해 있었다.





박혜영씨는 사진 찍어 달라하고, 장경호씨는 욕지껄이로 시비부터 걸었다.

전활철씨가 "형!"하며 반기니까, “어떤 놈은 좋아하고 어떤 놈은 싫어하냐?”

전활철씨 더러 씹할 놈이라는 등 쌍욕을 해댔다.

너 그렇게 싸가지 없이 지껄이고 살아남은 게 용하다 말을 남기고, 정영신씨 찾으러 큰 길로 나갔다.






전화를 걸었으나, 불통이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사동 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는데, 공휴일의 인사동이라 그런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인적 없는 인사동은 그리 흔치 않다. 가보지도 못한 북한의 밤이나, 아니면 난리 난 것 같았다.






다시 벽치기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좀 전에 없었던 낮 익은 사람이 보였다.

화가 한상진씨와 미술평론가 황정수씨가 와 있어, 반갑게 인사 나누었다.

유목민에 들어가보니, 그 때야 정영신씨가 와 있었다.





저런 인간하고 왜 살아? 버리고 나랑 연애나 하자는 말을 장경호가 정영신씨께 지껄였다.

남의 말이나 엿듣는 것 같아 못들은 척 참았으나, 들어 가 밟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말이면 다 말이냐? 선배가 아니라 친구라도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황정수씨 더러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산의 이광수교수 욕은 왜 해댈까?

나와 가깝다는 이유일까? 아니면 이런 사람도 안다는 가오 세우려 그럴까?

여지 것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피하는 게 불쌍해 아껴주었는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어디 있냐?






앞으로 그 인간이 다니는 술집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며,

그를 부추기거나, 술 권하는 사람까지 안 보기로 작정했다.



    


정영신씨를 데리고 나왔는데, 마치 지옥을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 인사동마저 징그러워진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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