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19일 동안 조양강변 일원을 설원과 빙상, 고드름 천국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어 온 2018정선고드름축제가 폐막되었다.

지난 25일 오후3시부터 고드름주제관에서 열린 폐막식에는 전정환 정선군수의 폐막인사와 함께 화려한 축하공연도 펼쳐졌다

아름다운 전통공연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는데, 상투를 말아 올린 산골노인까지도 핸그폰으로 축하공연을 찍고 있었다.

이젠 전국민이 사진가이고 기자인 세상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식구들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들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전상현, 남계원씨등 군청 문화관광과 주무관을 비롯하여 유재순, 정춘경, 서덕웅씨 등 반가운 분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정선 화암의 ‘G갤러리’ 김형구 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는 3월 2일부터 말일까지 내 사진전을 열고 싶다는 것이다.
정선에 적을 두고 있으며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 없어, 있는 사진으로 하겠다고 답했다.





정선에서 하는 전시라 이 지역 사람들을 찍은 산골 사람들이 적합할 것 같았다.
이 사진은 2000년도 무렵 촬영하여, 2004년도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당사자들이 사는 산골 분교를 찾아다니며 순회전을 했으나, 정작 화암은 하지 못했다.
당시 동면 화암리에 사시는 전동욱씨도 촬영했으나 한사람 밖에 없어 못했는데, 잘 된 것 같았다.
당시 84세였으니, 아직까지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선 집에 보관한 그 당시 사진들이 잘 보관되었는지도 궁금했다.
필요한 사진은 다시 만들어 이 곳 저 곳 출품하기도 했으나,
처음 만든 사진은 천장 위에 처박아 두어,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4년 동안 맞바람이 통하는 천장 위에서
부엌 아궁이의 거스름까지 뒤집어썼으니 온전한지 걱정스러웠다.
고드름 축제가 끝나면 다시 오기도 힘들 것 같아 일단 G갤러리에 전해주어야 했다.






지난 17일 전시장을 정영신씨에게 맡겨두고, 사진 챙기러 만지산 집에 갔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 먼지 자욱한 액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 청소하다 보니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그런데, 먼지를 털어내고 포장을 뜯어보니, 모든 사진들이 그때 그대로였다.
단지 액자로 만든 미송나무만 색이 바랬는데, 오히려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분명, 만지산 산신령님이 도운 것 같았다.





30점 중에 20점을 챙겨두고, 다시 축제장에 나가려니 정영신씨 전화가 걸려왔다.
시간 되어 전시장 문을 닫았으니 ‘아우라지식당’으로 오라는 것이다.
아우라지 식당은 곤드레 밥이 맛있는 집이라, 시장기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가보니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천연 염색하는 유재순씨와 군청 문화관광과 팀장인 전상현씨도 있었다.






전상현씨를 보니 밥보다 술이 더 땡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소주를 까다보니 정량을 초과해 버렸다.
뒤늦게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남계원씨도 나타났으나, 그 역시 술이 취해 혀가 꼬였다.
그의 술 취한 모습을 처음 보는데, 아주 위트 있는 재미난 친구였다.






나 역시 신이나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봄날은 간다’를 불렀는데,
식당 주인아주머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평소에 그토록 점잖던 분이 어떻게 저렇게 바뀔 수 있냐는 것이다.
술이란 간을 키우는 약이기도 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술자리가 끝난 후 증산에 있는 모텔까지 가야하지만, 음주운전을 할 수 없었다.
유재순씨 방에서 세 사람이 끼어 잤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녀에게 술이 취해 덮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더니 덮치면 더 좋다는 것이다.
정영신씨가 있으니 안심했겠지만, 나의 엽기적인 행각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이틀 날은 사진전시장 옆의 눈썰매장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벌어지는 날이다.
다시 만지산으로 들어 가 야외에 걸 이젤을 몇 개 챙겨오니, 전정환군수가 전시장에 와 있었다.
기념사진 찍으며 화암에서 열릴 ‘산골 사람들’전시에 초대도 했다.
별도의 오프닝 행사는 없으나, 술 마시기 좋은 날을 택해 서울과 정선의 문화예술인들을 모아
다양한 생각들을 한 번 들어보는 좌담회를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봄바람 휘날리는 술잔에 꽃잎 띄워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자만 확정되면 페이스 북에 올려 관심 있는 작가들을 모아 볼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에서 열리는 고드름축제도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추운 겨울 축제지만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는데, 송어 낚시터와 장작구이 등의 잡고 먹는 곳만 만원이다.
난, 고드름축제에서 열리는 정영신씨 장터사진전 지원하러 왔으나, 먹고 자는 게 영 편치 않다.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아 답답한데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갈 곳을 못가니 더 미친다.
이제 며칠만 고생하면 끝나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이 나이에 언제 어린애처럼 놀 기회가 있겠는가?
어린 시절 고향의 영산 연지 못에서 썰매 타며 놀던 생각도 났다.
겨울철이면 온 동네방네 친구들이 다 모여 썰매를 탔는데,
얼음이 녹아 휘청대는 곳을 질주하다 한 번은 물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썰매보다 설피 신고 눈길 뛰는 재미가 더 좋더라.
아마 산골에 살다보면 더 필요한 게 설피 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가한 틈을 내어 고구마 구워 먹으며 노는 재미도 빼 놓을 수 없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정영신씨 웃기는 재미를 알랑가 모르겠다.






반가운 분들도 여럿 전시장을 방문했다.

신주호 부군수를 비롯하여 서건희 문화관광과장, 전상현, 유명선,
박상철씨도 오셨고, 늦게는 강기희씨가 소주와 안주를 사와 가뿐하게 한 잔했다.

그 맛있는 닭발을 이가 빠져 못 먹는 신세가 좀 처량하지만...

강기희씨의 신작 '위험한 특종 김달삼'이 다음 달에 출간된다는 소식도 들었다.

천연염색하는 유재순씨 일행과 저녁 식사하며 부족한 술은 보충했다.






그 이튿날은 일찍부터 강기희씨가 부인을 대동하여 나타났고, 뒤 따라 전상현씨도 왔다.
전 날 저녁 있었던 도깨비소 총각과 유재순씨의 중매 문제를 들고 나왔으나,
당사자인 도깨비총각이 나타나지 않으니, 공술 얻어먹을 일은 물 건너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중매 잘 못하면 빰이 세대라지만, 외로운 사람끼리 한 번 붙어보는 것도 좋을텐데 말이다.



사진: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상은 묵묵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줘야하는 것, 동자동은 을이 보여주는 일상”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02월 12일 (월) 10:55:23 임동현 기자, 정상원 인턴기자 press@sctoday.co.kr  

▲ 조문호 사진가 (사진=정영신 사진가)



“왜 나에게 상을 주나 짜증을 냈다. 상이라는 것이 양면성이 있다. 상을 받으면 자만에 빠질 수 있고, ‘상 받으려고 쪽방촌 간 거냐’라는 말이 나올 수 있고, 상을 놓고 여러 문제들이 있었던 것을 알기에 그렇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찍어온 조문호 사진가. 최근에는 동자동에서 생활하며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에게 본지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의 작품을 망칠 수 있는 ‘독’으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는 본지와의 만남 역시 조심스러워했다. 신문에 실리는 순간 ‘결국 유명해지려고 작업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람이 담긴, 사람 냄새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그 사진을 통해 ‘사람’을 전하기 위해 지금도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의 이야기다.


문화대상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상의 양면성’을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는데 수상소감 대신 선생이 생각하는 ‘상의 의미’를 듣고 싶다.

상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우쭐하고 자만하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자신에 대한 인식도, 예술에 대한 진정성도 없이 ‘재주꾼’이라고 각인되는 것 같다.

특히 지금 내가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상을 받았다고 하면 ‘상 받으려고 동자동에 갔다’는 말이 분명 나오게 된다. 그 말이 정말 듣기 싫다. 동자동에 있으면서 인터뷰 요청이 계속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다. ‘유명해지려고 한거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이 인터뷰도 서울문화투데이가 식구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하는 거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 안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조심스럽다.

또 상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주어져야하는데 나같이 늙은 사람이 받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소감을 그렇게 말한 거다.

그래도 기왕 상을 받았으니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에게 채찍이 되어주는 좋은 상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한 조문호 사진가



동자동을 가게 된 배경은?

오래전부터 정선과 인사동을 오가며 새로운 작업을 찾고 있었는데, 최근모 시나리오 작가가 보여 준 동자동의 실상을 찍은 비디오에 결심했다. 거기서 자극받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재 작년 9월에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동자동에 더 애착이 간 이유는 갑의 입장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선한 사람이 못사는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없는 사람이 사는 일상을 기록하며 그들의 생활 환경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동자동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기 때문에 돈을 잘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은행에 저축을 할 수도 없다. 일정 이상 돈을 가지고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에서 탈락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계속 수급자로 머물러야한다. 그러니 일을 하여 자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어떤 사람은 집에 돈을 계속 모아두고 숨겨놨는데 그 사람이 사망한 이후 이불 밑에서 돈다발이 발견됐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가족이 찾아왔는데, 시신은 그냥두고 돈만 가져가는 매정한 세상이다. 또 한 번은 가족이 연결되지 않아 돈의 행방을 두고 많은 의혹이 쏟아지기도 했다.


동자동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올 겨울 날씨가 유난히 춥다. 지내기는 어떤지

일단 방이 무척 좁다. 정말 누우면 관 속에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웃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겨울에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전기장판을 틀어놓으면 그래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데 여름에는 정말 더위를 피할 수 없다. 10분만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비오듯 나온다. 더위를 피할 방법이 없다. 한파가 왔다고 하는데 따뜻하게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웃음).



지난해 어버이날과 추석 무렵에 동자동 공원에서 ‘빨랫줄 사진전’을 열었다. 동자동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안다

사람을 찍으면 본인들이 사진을 달라고 부탁한다. 찍을 때마다 주려면 작업에 지장이 생기기도 해서 어버이날과 추석날 잔치 자리에 걸어놓고 찾아가게 하는데, 다들 좋아한다. 아직까지도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진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진으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 중에 노숙자가 있는데 연초에 내 카메라가 마음에 든다고 가져갔다가 단속나온 경찰과 몸싸움을 하던 과정에서 그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아직 찾지도 못했다. 소중한 카메라였는데 배신감을 느꼈다(웃음).'



지금 우리가 동자동 사람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동자동 사람들은 노숙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생활이 나은 편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면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 욕심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동자동 쪽방촌만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이런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동자동이 곧 개발이 된다고 들었다

현재 조합이 구성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개발안은 나오지 않아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조금 있으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동자동 사람들을 위한 이주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방세내고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 생각보다 돈벌이에 급급하다.  최대한 동자동 사람들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진가가 작품 활동보다 빈민운동에 관심이 더 많다는 소리도 듣지만, 사회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면 갑보다 을의 입장에 서야하며, 사진보다 그들의 환경개선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난 처음부터 사람만 찍어왔는데, 어찌 그들의 삶보다 사진이 먼저일 수 있겠는가?



▲ 동자동사람들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친해지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담아낸 과정이 궁금하다

사진을 찍으려면 그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밖에서 보는 시선과 대상과 동질성을 느낀 사람의 시선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사진도 결정적인 사진 한 장이 중요하다기보다 사진 여러 장이 이루어내는 전체적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풍경 하나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기록으로, 역사로 남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사진이다.


‘가장 좋은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람 냄새나는,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사진 작업하는 양승우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주로 가부키쵸에서 활동하는 야쿠자 사진을 찍는데, 사진을 보면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다. 찍는 사람, 대상과 공감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사진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록사진의 가치를 높이 산다.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인간애가 드러 난 사람사진을 최고로 치며, 사람 찍힌 사진을 좋아한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일까?

사진에서 제일 경계하는 점은 포즈를 취하거나 사물을 움직이는 등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찍는 순간포착을 즐긴다.  연출되지 않고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 찍은 사진이 왜곡되지 않은 사진이고, 그것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한다.


최근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전시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주변의 지인 중에서도 아름다운 풍경만 고집하는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다. 꼭 기록해두어야 할 대상을 추천해 준 적이 있는데, 결국은 본인이 좋아하는 소재만 찍더라. 일로서 보다 취미생활로 즐기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그래도 사진으로 즐겁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다만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늘어나다보니 다양한 사진공모전들이 생겼는데 여기에도 비리가 많았다. 상이 남발되고, 돈이 개입되거나 자기가 친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최근 예술계의 상은 순기능보다는 상으로 장사한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남발돼서 그런 것 같다. 다 돈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본지에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는 칼럼을 연재하셨다. 예술계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셨는데(웃음) 지금의 예술계가 과연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걱정된다

현재 예술계에서는 ‘예술'이라는 간판을 내건 장사가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 열렸던 한 전시가 그 예다. 저명하신 분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아는 수십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와 판매를 하고 수익금은 가난한 화가를 돕겠다고 홍보를 했다. 취지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막상 판매를 하면 결국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팔리고 가난한 작가의 작품은 팔리지도 않는다. 거기다 수익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가난한 작가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없다. 유명 작가만 돈 버는 거다. 결국은 예술을 간판으로 내걸고 장사하고 그 돈을 자기들 멋대로 쓴 셈이다. 여기에 크게 분개한 적이 있었다. 이런 구조니 자연히 병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자선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는 전시회가 많다. 그렇지만 전부 예술계에서 서로 아는 관계이기 때문에 쉬쉬하고 있는데, 정말 이건 아니다.


조문호 사진가라면 아무래도 ‘청량리 588’ 사진이 연상된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동아미술제'라는 공모전이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공모주제가 ‘직장인’이었다. 평소 내가 관심가진 창녀촌에 다가 갔는데, 젊은 그 때도 가난하였기에 상금이 탐났다(웃음) 오며 가며 '청량리 588'을 찍어서 냈는데, 운 좋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이후 제대로 작업해야겠다는 자책이 들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 것이다. 받은 상금으로 588에 셋방을 마련하고 같이 먹고 자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웃음) 그들의 일상을 찍었다. 그 때는 힘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니 잘 했다는 생각이 던다. 유일한 윤락녀들의 기록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이 ‘인사동 사람들’(조문호 사진가의 블로그)이다. 인사동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남기셨는데 인사동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인사동에서 계속 놀았으니까(웃음). 인사동에서 한창 놀던 때는 다들 직장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번듯한 직장이 있던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 친구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던 기억이 있다(웃음).

세월이 지나면 결국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건 아쉬움이지. 자꾸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옛 친구들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쉽지만, 또 만나면 반갑다. 그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전 인터뷰에서 종로에서 몸을 파는 새터민 여성에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욕심은 많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당면한 동자동 빈민에 정신이 뺏겨 다른 곳에 마음 둘 여유가 없다. 그러나 동자동 빈민들의 이주대책이 마련되고 삶의 여건이 개선된다면 한 번 해보고 싶다(웃음).


컴팩트카메라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전에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지만 요즘에는 잘 나온다. 일반 카메라는 들고 다니기가 무거운데 컴팩트 카메라는 갖고 다니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큰 카메라를 들이밀면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에 좋은 사진이 안 나오는데, 이 카메라는 자연스런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주 애용한다.

내 손에 카메라가 없으면 술이 빨리 취한다(웃음). 카메라가 있으면 항상 찍어야한다는 생각에 긴장을 하게 되는데 카메라가 없으면 긴장이 없어진다. 그래서 빨리 취하는 것 같다.

카메라가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수첩이 없으면 답답한 것처럼 나는 카메라가 없으면 답답하다. 기록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카메라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앞으로의 각오가 있다면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사진을 찍을 것이고, 여태 찍어왔던 사진들이 활용될 수 있도록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찍은 사진을 정리할 시간도 없는 바쁜 사람이다. 아무튼 열심히 찍으며 기록하려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마련하는 신년 오찬회가 인사동에서 열린다.

십년이 넘었건만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다, 매번 밥 값을 한정식선생님이 낸다는 것이 송구스럽다.






매년 1월에 치루어졌으나, 올 해는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위급한 상황이 생겨 어렵사리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년 말, 폐렴으로 입원하신 사모님께서 이틀 만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인 며느리의 응급대처로 삼성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숨을 거둔 분을 기적적으로 살려 놓았다는 것이다.

최고의 의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사람도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어, 한 숨 돌렸기에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 말이 생각난다.





지난 2일 정오무렵, 인사동 ‘수연’에서 가진 모임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생수, 이규상, 엄상빈, 김보섭, 이재준,

최경자, 정영신씨 등 아홉 분이 함께했다. 그 날 전민조씨는 집안에 응급환자가 생겨 모임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김기찬선생의 미망인이신 최경자씨는 요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바쁘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날의 화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가 많았다.
주로 정식과 생수 두 분께서 배고팠던 시절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름자로 보면 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휴지가 귀한 시절이라 신문지를 잘라 화장실에 걸어 둘 땐데, 한 번은 화장실에 갔더니 이태준선생 소설책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책도 마음대로 사 볼 수 없는 시절이라 가져가서 감명 깊게 읽었다며, 화장실습득 1호로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하셨다.






디지털카메라 기능에 대해 해박하신 김생수씨는 최경자씨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었는데,

단종된 NIKON Coolpix P310카메라를 구할 수 없냐고 여쭈어 보았다.

지난 년 말, 노숙하는 이종민씨와 술 마시다 도둑맞은 카메라인데, 기능도 뛰어 나지만 손에 익은 카메라였다.

컴펙트카메라가 없으니 사진을 못 찍을 경우가 종종 생겨 여러 번 카메라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가져가 팔 수도 없는 고물카메라이기도 했지만, 중고를 사도 몇 만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아쉬워했더니,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알아보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오만원을 내 놓으며 좀 구해주라고 부탁하는 통해, 엄상빈씨가 짐을 떠안게 된 것이다.






염치없지만, 그 카메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뒤늦게 알아보니 중고가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카메라점을 잘 아는 후배 사진가 마동욱씨 에게 한 번 알아보라고 부탁한 모양인데,

오찬 자리에도 없었던 마동욱씨 까지 카메라 구하는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마동욱씨가 십만원, 엄상빈씨가 오만원, 정영신씨가 오만원을 보태어, 25만원에 그 카메라를 구해 준 것이다.





아무튼 한정식선생의 신년오찬회 덕에 반가운 분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도 가졌지만,

한 달동안 고민하던 숙제가 해결된 고마운 자리였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 카메라로 사진이나 많이 찍어드렸으면 좋을텐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은 사진 찍을 때마다 도움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세길 작정이다,






오찬회가 끝난 후, 엄상빈, 이규상, 김보섭, 이재준씨와 함께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용문 도판화전에 들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사진, 글 / 조문호






















 



충무로에 자주 가지만, 맛 집들이 몰려있는 인현시장(仁峴市場)은 미처 생각 못했다.
인현시장은 50년대 말엽에서 6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시장으로, 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그 이전은 잘 모르지만, 영화거리와 인쇄골목으로 알려진 충무로 뒷골목이라, 현재와 과거가 함께 하는 장터풍경을 연출한다.






인현시장의 골목 폭 은 1-2m정도로 좁지만 길이는 2백미터  남짓되는 곳에 100개가 넘는 점포가 밀집해 있다.

숨겨진 맛 집이 많은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인근의 인쇄공이나 가난한 장사꾼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그 오밀조밀 붙어있는 밥집의 정취가 서민적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지난 18일 충무로 ‘반도갤러리’에서 열리는 조성기사진전에 간 김에, 

 ‘브레송’에서 열리는 고정남씨의 ‘우리는 예술가(0)사’전에도 들렸다.
‘갤러리 브레송’ 홈피 만드느라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는 김남진관장은 만날 수 있었다.
난 이미 취했지만, 술 한 잔하자는 김관장 따라나섰다.






어딘지도 모르며 따라 가다보니, 30여년 전 김문호씨와 함께 사무실로 쓰던 충무로 ‘카메라워크’ 이층집도 보였고,
참치백반집과 된장집 등 안면있는 식당들이 하나 하나 나오더니, 평소 시장이라 생각지도 못한 인현시장 골목을 만난 것이다.
김남진씨 단골집을 찾아가 앉았으나, 난 더 마실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시도록 놔두고 난 시장이나 돌아보았다. 






내가 없다고 마누라 뺏길 일은 아니니,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며 오랜 추억자락이나 뒤진 것이다.
진화된 세상 풍경속에는, 원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것들이 족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 곳은 인사동 못지않게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충무로에 사무실을 두기도 했지만, 한 때 근무한 '월간사진'사무실도 인현동에 있지 않았던가.

근일간에 다시 인현시장에 들려, 못다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한 곡 부를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너무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졸라 부끄럽습니다.
일단, 잘난 분들도 많은데 못난 놈에게 상을 주신 심의위원 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 축하하러 오신, 강 민, 방동규, 이행자선생을 비롯하여,

통인 김완규, 화가 손연칠, 최효준관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 고맙습니다.

이 상은 상금도 없는 상이지만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가 사재 털어 9년을 끌어 온 상입니다.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에게 상주고, 용기주고, 희망 안겨주는 좋은 상입니다.
그 상을 나한테 준다니, 완전 쫄았습니다. 그건 아니 거던요,

수상소감을 하라해서,시상식에서 솔직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호강에 받쳐 요강에 똥 싸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상 자체가 싫습니다."


이은영씨가 수상소식을 전해 줄 때, 왜 저를 추천했냐며 짜증을 냈습니다.

이 상이 영광스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상이란 게 좋은 점이 많으나, 반드시 양면성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면 자만에 빠져 우쭐댈 수도 있지만,
상에 얽힌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신문에 가끔 글도 기고하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라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소리듣기 안성마춤입니다.
다행히 상금이 따르지 않는 순수한 상이라 마음이 놓이지만,..

상금주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짤리니, 더구나 받을 수 없었겠지요.

저는 동자동 쪽방 촌에 들어가 일 한지가 2년째 입니다.
그 곳에서 일하며 제일 경계하는 것이 언론의 접근이나, 상 받는 일입니다.
상 받으면 “저 새끼 상 받으러 동자동들어 같구나” 같은 영웅주의로 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싫지만, 노출되면 작업에 장애가 될 뿐입니다.
쪽방 주민들과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인과관계에 거리감이 생깁니다.

내가 저들의 친구가 아니라, 사진가라는 것 때문에 동격이 아니게 됩니다. 


요즘 동자동 재개발사업 추진으로 쫓겨나게 될 일에,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작정을 했으나, '마누라 대행' 압력에 그냥 깨갱한 것입니다.

빼도 박도 못할 처지라 상만 받고 숨기려 했으나 시상식에 나타난 후배가 달랑 페북에 올려버렸네요..

그래서 부랴 부랴, 그동안의 과정을 이실직고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영광스러운 상을 내려 주셨으니, 이 상을 하나의 완장삼아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이 상은 작가들에게 화관 씌워 주는 상이 아니라,
일하는데, 큰 채찍이 되어주는 좋은 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영원한 싸움꾼으로 살겠습니다.

동자동에 사는 주민들의 이주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절대 죽지 못합니다.
절대 비겁하게 죽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시근방 떨어...






야 이 개새끼야~ 우당-탕 탕술 자리에 난리가 났다.

지난 14일 새벽, 완주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술 취해 졸다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꿈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듯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고함소리만 들렸다.

소화기 포말 냄새로 보아 불이 난 걸로 착각했다

슨 일로 왜 싸울까 궁금했지만, 꿈 꾸듯 헷갈렸다.

옆 자리에는 자다 깬 송상욱, 이만주, 박인식씨가 놀란 망아지처럼

우두커니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은 바로 이상훈씨와 김명성씨였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의자를 집어던져 벽의 통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가 서길헌씨는 이상훈씨를 부여 잡았고, 김영국씨는 김명성씨를 떼어놓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방에 들어나자

이상훈씨의 화살이 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보니, 이상훈씨와 한봉림씨 싸움 같았다.



    


나이 많은 선배에게 행패부리는 것을 김명성씨가 그냥 두고 볼리 없기 때문이다.

힘에 부친 김영국씨가 손을 다쳐, 김각환씨가 나서서야 간신히 김명성씨를 제압했다.


결정적인 것은 한봉림씨가 2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100호쯤 되어보이는 그림에

술병을 날렸는데, 캠퍼스천을 뚫으며 액자가 바닥에 나 뒹군 것이다.





간신히 이상훈씨가 밖으로 밀려 나가서야 사태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김시인씨가 쓰레기를 한데 끌어 모아 대충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진 찍을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카메라를 들고 놀았으나, 왜 그 기막힌 현장을 찍지 안했을까?

무의식적으로 카메라에 눈은 갔으나,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벗들이 죽자 살자 싸우는 그 다급한 판에 어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사진은 냉정함을 요하니, 차라리 사진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낳겠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봉림씨의 술 취한 퍼포먼스를 이상훈씨가 과잉 대응한 것 같았다.





다들 하루종일 술을 너무 많이 퍼 마셨다.

낯부터 전주 막걸리골목에서 마시고, 한봉림씨 댁에 준비된 술은 물론 비축주마저 씨를 말리지 않았던가.

자정이 지나서는 그마저 없어져 콜택시에 연락해 전주에서 소주 한 박스와 맥주 두 박스를 사 오게 만들었다.

얼마나 기분좋게 놀았는지, 내 생애 최후의 화려한 만찬이라 했다가,

그 자리에 정영신씨가 없어 최후란 말은 거두었다.




 

술 마시며 재미있게 놀다 분위기가 식은 시간은 새벽 두시 무렵이었다.

두시부터 시작되어 새벽 네 시 무렵에야 사태가 진정 되었으니,

무려 두 시간 동안 난장을 벌인 것이다.



 


분위기가 시들해서 포커 판을 벌였는지,

포커 판 때문에 술자리 열기가 식었는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이상훈씨등 네 사람이 벌인 포커 판이었다.



 


나 역시 포커하는 게 싫어 자리에 누웠지만, 다들 그 때부터 술자리에서 물러난 것 같았다.

그 무렵,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갑자기 소화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벽난로의 불이 옮겨 붙는 착각에 소화기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느닷없이 포커 판 쪽으로 소화기를 쏜 것이다.



 


그래서 직격탄을 맞은 이상훈씨가 난리를 친 것이다.

하나의 퍼포먼스 였으나, 이상훈씨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차라리 하얀 눈가루를 맞으며 춤이라도 너울너울 추었으면 좋으련만...




 


무작정 한봉림씨에게 욕하며 달겨드니, 김명성씨가  빰을 몇 대 때렸다고 한다.

그래서 분풀이로 기물을 때려 부수며,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되고 나니, 사고 친 이상훈씨를 비롯한 다섯명은 콜택시를 불러 탈출하고 없었다.

미처 차를 부르지 못한 김상현씨는 아코디온과 기타 통을 둘러메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읍내까지 나갔다고 했다.

어두운 눈길을 걸어가며, 살아남은 유랑악단의 설움을 절절히 씹었을 것이다.





그 난장판을 피한 사람도 있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간 전활철씨 가족과 김혜련, 황예숙씨만

그 사실을 깜쪽같이 몰랐는데, 현장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김명성, 서길헌, 김영국, 송상욱씨 등 다섯 명인데,

이불은 소화기 가루가 뿌려져 버슥 버슥했지만 그 위에 쓰러져 잠시 눈을 붙여야 했다.





아침 무렵, 한 숨 자고 나온 한봉림씨가 현장을 보고 한 말이 죽인다

하하하~ 대단한 퍼포먼서였어


포말가루 자욱한 컵들을 씻어 커피 한 잔씩 마셨으나, 한봉림씨는 남은 맥주로 속을 풀어야 했다.




 

한참 후, 버스타고 올라가며 보내오는 메시지도 각양각색이었다.

화가 강찬모씨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나비만 보았다고 적었고,

무용평론하는 이만주씨는 소화 분말을 많이 마셨더니, 속에 있는 울화가 다 사라졌다고 적었다.





 

인사동 풍각패의 유랑 길에 어찌 이 정도의 풍파를 거세다 할소냐?



 

 

전주로 유배 떠난 지가 몇 달된 음유시인 송상욱씨께 위문공연 가자는 이야기는 지난 년 말부터 나왔다.


난, 새해 첫날부터 감기에 걸려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년초에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근일 간에 전주 가야하는데, 전주 가는 날을 형이 잡아라고 다잡았다.

일주일 후에는 감기가 나을 것 같아 토요일로 정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감기도 완쾌되지 않았지만, 창원의 양철수씨가 보냈다는 택배를 받아 노숙인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구체적인  일정이나 누가 가는지도 모른 채강남고속터미널로 나갔더니,

이만주씨와 김상현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주모자인 김명성씨가 무작위로 불러 모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십 팔명이었다.


십 팔년의 첫 유랑 길에 십 팔명이 떠난다는 암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진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아무튼 괜찮은 년일 것 같은 예감은 들었다.





뒤이어 박인식, 김혜련, 황예숙, 김시인, 서길헌, 김각환, 이상훈, 김영국, 이만주,

강찬모, 전활철씨와 아들 시원이, 딸 예원이 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 창예헌농심마니 팀으로 이루어 진 잡탕이었.



 


전주터미널에 도착하니, 송상욱선생과 한봉림씨가 나와 있었다.

첫 코스는 송상욱선생 작업실이 있는 전주 막걸리 골목이었다.

처음들린 집이 옛촌 막걸리였는데, 공교롭게도 바가지 집이었다.






술에 안주가 따라 나오는 게 아니라 안주를 시켜야 술이 한 주전자씩 나왔다.

많은 안주를 시킬 수 밖에 없어 잠깐 동안 마신 술값이 무려 40만원이나 되었다.

전주의 맹주 한봉림씨가 내려는데, 김명성씨가 먼저 내버려 구역침범했다며 화를 냈다.

그보다 엄청난 바가지 골목이 되어버린 막걸리골목의 못된 장삿속에 더 울화가 치민 것 같았다.

인터넷에 올려 아무도 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펄펄 뛰었다.





그 자리에서 황예숙씨는 송상욱선생께 도예작품을 이주선물로  전하기도 했다.

이어 송상욱씨의 재미있는 노래와 김상현씨의 구성진 연주가 이어졌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이어지는 열두냥짜리 인생도 들었고, 김상현씨가 부른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도 들었다.



    


지척에 있는 송상욱선생의 무대로 옮겨갔다.

입구에는 송상욱선생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무무놀랑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안에는 송상욱선생께서 노래 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 져 있었고,

부인이 춤 출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벽에다 거울을 붙여 그런지 엄청 넓어 보였는데, 더 놀라운 것은 가게 임대료였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쪽방  임대료가 23만원인데, 그 넓은 작업실이 한 달에 20만원이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송상욱선생의 아내인 김미옥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아라가야에서 처음 만난 지가 벌써 10이나 흘렀는데,

세월이 빠른 건지, 사는 게 급한 건지, 나도 모르겠.


김미옥여사가 준비한 다과에다 보드카도 한 잔 씩 마셨다.

방음된 공연장에서 듣는 아코디언 연주와 노래소리는 좀 달랐다.  

역시 뽕짝은 술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는 맛이 좋더라.



    


늦을세라, 한봉림씨 아지트가 있는 완주 소양면 종남산 자락으로 옮겼는데,

그런 귀 막힌 퍼포먼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앞서 말했지만, 그 날만큼 재미있게 논적도 드물었다.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의 노래도 한 몫했다.

달래듯, 빈정대듯 하소연하듯 상대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부르는

쌍팔년도 포크송에 세 여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양한 춤이 어우러진 가무 또한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을 듯 싶었다.



 


그런데 종남산자락의 집터가 샌 것인지,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창예헌가을여행과 농심마니산행이 겹쳐진 10년 전에도

이곳에 전국각지의 명물 100여명이 모였는데, 그때도 가관이 아니었다.


영화사를 운영하던 임정하씨가 술이 취해 넘어져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고,

관객모독의 연출가 기국서씨가 여우 공격법으로 한봉림씨를 활킨 사건은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의 사건 사고였다.





그 날이 한봉림씨 모친 구순 생신이라 다들 인사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젠 백수를 넘기도록 종남산을 지키고 계시니, 보통 명당은 아닌 듯싶다.



 


한봉림씨의 안 서러운 배웅을 받으며 10시버스로 다들 전주 시내로 나왔다.

콩나물 해장국으로 속을 달랜 후, 또 다시 술집을 찿았다.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술집을 물어물어 갔더니, 가는 날이 공일이라 문이 잠겼다.

하나님 만나러 간다나...





닥치는 대로 찾아 들어간 집은 '구일집'이었다.

생각 밖의 맛있는 음식집이었다. 김밥도 가락국수도 나오는 음식이 모두 맛있었다.



 


오후3시 무렵에서야 서울로 올라오며, 지난 일들을 곱씹었다.


술이 취한 상태지만, 이상훈씨가 너무 무례했다. 그렇게 막 나갈 군번이 아니었다.

젊은 혈기라 그런지 모르지만 나이 많은 선배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 같았다.

좀 지혜로웠다면 소화기를 빼앗아 퍼포먼스를 대신 할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이런 술자리에서 포커판을 벌여서는 안 된다,

일단 돈 냄새나면 역겹다. 꼭 해야 한다면 방을 빌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

어쩌면 호탕한 성격의 노장 한봉림씨의 거침없는 가르침 일 수도 있다.


어떻게 자기집에 찾아 온 손님에게 포말을 쏠수 있냐고 흥분하였지만,

남의 집이 아니고 자기가 청소할 집이니 가능한 것이다.





이번 일은 남의 기물을 망가트린 손해배상에 앞서 진정한 사과가 따라야 한다.

한 쪽 모서리가 터진 작품은, 또 하나의 훈장을 단채 의미를 더할 것이다.





아무튼, 술판의 돈 놀이를 채찍질한 훌륭한 퍼포먼스라 생각된다.

오랫동안 추억할 일이 틀림없으니, 이게 좋은 유랑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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