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이거 가져가서 반찬 해 무라.”
“괜찮심더. 그냥 놔놓고 파이소”

지난여름 의성 봉양장에서 만난 정겨운 모습이다.

장바닥에 좌판을 벌인 할머니가 잘 아는 아낙을 만나
팔던 농산물을 챙겨주려 실랑이 하고 있었다.
그냥 못이기는 척 받아 가면 좋으련만, 아낙의 마음은 달랐다.
힘들게 농사지었으면 한 푼이라도 더 팔았으면 하는 배려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뿌리치는 손을 부여잡고 기어이 손에 쥐어주고 만 것이다.
아낙은 무거운 짐 진 듯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전해 준 할머니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쩌랴!
자기밖에 모르는 도시인들이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인정병이
방방곡곡에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진한 쾌감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장작 팔러 장에 가는 행렬이 오래된 추억을 일깨운다.
그리 많지도 않은 장작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에서 가난의 세월이 그대로 읽혀진다.
네 사람이 이고 진 장작을 다 모아도,
하루 저녁 군불 땔 양밖에 되지 않을 텐데, 도대체 몇 푼이나 받을 수 있었겠는가?

옛날엔 곡식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땔감이었다.
가스나 석유가 대체한 요즘의 연료에 비해 원시적이긴 하지만,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이 장작불이나 화롯불이다.

온돌방에 군불을 때거나 밥을 짓는 등 가정에서 사용한
유일한 에너지가 장작이나 솔가리뿐이었다.
요즘에야 산에 나무가 흔하지만,
예전에는 헐벗은 산이라 나무도 흔치 않았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대개의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녔는데,
가난한 집은 어린이까지 나무하러 다녔다.
나도 친구 따라 한 번 간적이 있었는데,
빌린 지게가 내 키만 해 질질 끌고 다닌 기억이 난다.

그러니, 장날만 되면 나무전에 장작이나 솔가리 둥치가 많이 나왔다.
아버지께서 나무장사와 흥정해 마루 밑이나 헛간에 사 모았는데,
나무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무게로 달아 파는 것이 아니라 어림짐작으로 매기니 그럴 수밖에..

장작이 타 들어가는 부엌아궁이에 쪼그려 않아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던 추억도 새록새록 하지만,
밥 짓느라 아궁이를 지킨 엄마 옆에 달라붙어 용돈 달라고 칭얼대던 기억도,
화가 난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달려 나오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그런 촌스러움이 그리워서인지, 요즘도 정선만 가면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아궁이에 군불 때는 것은 물론, 도끼로 장작 패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끼 한방에 쩍쩍 벌어지는 쾌감이나,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기는 재미를 알랑가 모르겠다.
따뜻한 아랫목에 드러누워 등 찌지는 맛은 또 어떻고...

몇 년 전에는 넘어지는 나무에 치여 발가락이 망가지는 사고도 있었지만,
나무를 쌓아두면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오랜 추억 때문일 것이다.
올 해는 여러 분들의 집안에 장작불 같은 행복의 에너지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위의 사진은 작고하신 광고사진가 김한용선생의 초기사진 ‘장터 길’이고,
아래 사진은 조문호의 '두메산골 사람들'이다. 글을 조문호가 썼다.









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홈리스들이 왜 역을 안방처럼 생각하고, 서울역을 큰집처럼 생각할까?
역이니까 어디로던 쉽게 떠 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구걸하기 좋기 때문일 것이다.
기나 긴 역전의 세월이 쌓아 놓은 빈자들의 울타리다.
맞은편에 둥지 튼 양동과 동자동은 한 가닥 희망 촌 역할을 한다.






지난 22일은 충무로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들려 낮부터 술을 마셨다.
돌아오다 보니, 서울 역 주변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 
총 맞은 듯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는데, 다들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홈리스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멀쩡한 놈이 일은 안하고 빈둥거린다'거나
'술만 마시고, 행패나 부리는 놈'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다 사정이 있다. 더러는 게으름뱅이거나 알콜 중독자도 있으나,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요즘은 그들이 대포폰, 대포통장, 대포차, 바지사장 등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무슨 천형이나 받은 듯 특별한 계층으로 보지만, 노숙자 되기는 아주 쉽다.
정해진 주거가 없는데다 돈 떨어지고,
일용직을 구하고 싶어도 경쟁에서 계속 밀려나면 그냥 노숙자가 되는 거다.





4~50대에 실직한 뒤 고시원 쪽방 다 거치고 찜질방 전전하다
그마저 갈 돈이 없으면 그때부터 노숙한다.
청년층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안 되어 좌절하거나,
또는 계약직 전전하다 막히면 30대 중반부터 노숙자 신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사연이 절절하다.
대개 노숙인이 되는 과정은 질병이나 사고로 노동력을 잃은 사람이 많지만,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 빚보증을 잘 못서거나 가정불화로 나온 사람도 있고,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직업을 택한 경우도 많다.
주로 주먹쟁이나 운동선수, 군인, 예술가등이 그런 직종인데,
그 중 많은 게 운동선수와 주먹쟁이다.






지하도 계단을 지나다 노숙하는 김용규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듯 종이컵을 들어보였다.

상원이와 소령이를 거느리고 술판을 벌여놓았는데,
그는 구미가 고향인 씨름선수 출신이다.





김용규씨는 젊은 친구들을 잘 보살펴주어 동생들이 지극히 모신다.
술이 부족하여 오천 원을 꺼냈더니, 상원이가 냅다 달려가 소주 두병을 사왔다.
다들 폭주 하지 않고 서서히 즐기며 마셨는데, 나만 쭉쭉 들이켰다.





씨름꾼 시절의 삿바 이야기에서 부터 몇일 전에 일어났던 싸움이야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시비를 걸어 노숙인과 싸움이 붙었는데,
경찰이 노숙인만 나쁜 놈으로 취급했다며 열변을 토했다.
같이 주먹다짐을 해도 일반인보다 노숙자가 불리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없다.







너무 답답하여 “술~ 술~ 술이 원수다‘란 케케묵은 노래를 불렀더니, 다들 질급을 한다.
역무원에게 당장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쫓겨나지 않으려 공중질서를 지키지만, 내가 더 못난 놈이었다.
상원이가 노래 말에 시비를 걸며 ”형! 술이 원수가 아니라 돈이 원수지요“라고 말했다.
조그만 소리로 다시 불렀다. “맞다 맞다 맞았다! 돈이 원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역 쪽으로 나가니, 노숙하는 김지은씨가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났다고 했더니, 괜찮단다.






따라갔더니, 진짜 그때사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지은씨 덕에 도시락과 화장지 선물을 받았는데,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예배와 공연으로 보내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생략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인생을 배우지만, 가끔은 약삭빠른 요령도 배운다.


이러다 사기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2017년 12월 26일 (화) 17:19:06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누가 패자인 홈리스에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지난 22일의 동지 날은 해마다 서울역에서 홈리스 추모문화제가 열리는 날이다. ‘홈리스 행동’을 비롯하여 ‘동자동 사랑방’등 40개 반빈곤인권사회단체가 연대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에서 추진한 행사로,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들의 넋을 기리는 문화제다.

▲무연고 사망자를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분향소가 마련되어 서울역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이 헌화하기도 했다.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을 알려 추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홈리스의 복지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거리나 쪽방에서 죽은 무 연고자를 추모하는 자리지만, 무관심한 사람이 더 많았다.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살펴야 한다고는 하나, 말뿐이다.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지하도에서 연명하는 홈리스 이야기를 꺼냈더니, 핀잔을 주었다. 게으르고 술만 마시는 그들은 어쩔 수 없다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너무 열 받아 한 마디 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마라. 네가 그 사람들 사정이나 한 번 들어 봤나? 돈이 사람을 망치는 세상의, 한 희생자일 뿐이다. 어쩌면 돈에 길이든 네가 더 잘 못 산 것인지 모른다.“

▲사망한 홈리스의 이름 위에 국화가 놓여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논리에 순응하지 못해 비참하게 죽었는데, 누가 그들의 죽음에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추모제가 열린 날은 다른 날에 비해 덜 추웠지만, 홈리스의 삶은 일 년 내내 혹한의 겨울이다.

매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나 쪽방 촌 빈민들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절실하지만,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장례라도 제대로 치루어 주어야 한다.

▲홈리스 추모제가 열리는 서울역 야경

그 날 서울역광장에서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빈민들을 추모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죽어서나마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추모제에 참여할 기력도 없는 홈리스가 주변에 웅크려 있다

그 많은 무연고 사망자 중에 영정사진이라고는 세 사람 밖에 없었고, 다들 이름만 적혀 있었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그토록 기구하여, 죽어가면서도 자기 얼굴 한 장 남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홈리스 서정철씨가 촛불로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추모제에서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홈리스 사진관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소리 없는 이들의 삶을 기록한 ‘홈리스 생애기록’이란 책도 출판하여 나누어 주었다. 홈리스들은 책 자체도 짐일 뿐인지라, 책보다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끓여 준 동지팥죽을 더 찾았다.

▲홈리스 김지은씨가 '동자동사랑방'에서 준비한 동지팥죽을 받고 있다

오후7시부터 시작된 추모제 본 행사에는 다들 촛불을 들고 무연고 사망자들을 넋을 기렸는데, '동자동 사랑방' 차재설씨가 나와 안타까운 추모사를 낭독했다. 노동가수 박준씨와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씨의 노래도 있었지만, 마음에 불을 지핀 건 김가영씨의 추모노래였다. ‘새로운 선택’이란 노래도 마음 아팠지만,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라고 열창한 노래에 피가 끓었다.

▲가수 김가영씨가 '새로운 선택'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추모공연이 끝난 후 죽은 홈리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서울역 구내를 비롯한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추모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쳤다. “홈리스 차별을 철폐하라”, “홈리스 인권을 보장하라”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라지만, 홈리스의 평균수명은 48세라는 걸 잊지 말자.

▲'홈리스 차별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빈민들

홈리스의 죽음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방치한 죽음이다. 그들도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빈소도 빌리지 못한 채, 냉동 보관되다 화장터로 직행한다. 더 이상 홈리스의 죽음을 방치하지마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한잔하는 셋째 수요일은 캘린더에 빨간 글로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대통령선거일’이라고 적혔는데, 지난 일들에 만감이 교차했다.
교도소에서 떨고 있을 적폐무리 생각하니 통쾌하긴 했으나, 한 편으론 불쌍했다.
마약 같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것이지, 한 인간으로서는 가여울 수밖에 없다.






모임 있는 날은 폭설이 내려 걱정스러웠다.

전날 밤 정영신씨 생일 술에 곯아, 온 종일 방바닥을 기었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모임은 송년회를 겸한 달이기도 하지만, 윤병갑씨를 만날 일도 있었다.






잔뜩 챙겨 입고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지하철로 갔는데, 삼십분이나 늦어버렸다.
눈 때문인지 사대문 방향에서 나오는 지하철은 만원인데, 들어가는 지하철은 텅텅 비었다.
많이 못나올 것으로 여겼지만, 인사동 ‘유목민’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신용시인도 나와 있었다. 



 


그는 사는 곳이 소래부근이라 한번 나오려면 차를 몇 번이나 갈아 타야하는데다,
옛날 노가다 시절에 골병든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인사동에 안 나온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은 화가 전강호씨다. 여지 것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송추에서 목발로 눈길 헤쳐 오려면 예사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강찬모, 이명희, 공윤희, 김완기, 김수길, 강성봉, 이재민,
김재홍, 강경석, 전활철, 박혜영, 김대웅씨 내외 등 많은 사람들로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하기야 술꾼들이 날씨 따지겠냐? 더구나 눈 오는 날이라 술 맛 나기 딱 좋은 날 아니던가.
그런데, 윤병갑씨는 보이지 않고 전활철씨가 ‘미술기행’ 일동이라 적힌 돈 봉투를 건내주었다.






망년회 모임에 안주라도 몇 개 시켜드시라고 보냈다는데, 엄청 미안했다.
윤병갑씨도 같이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늑장 부렸는데, 이일을 어쩌랴!
통장이 없는 처지라 봉투 전해주려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에 나왔다는데,
‘유목민’ 문이 닫혀있었다고 했다. 이 추운 날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그런데, 입장 곤란한 일이 생겨버렸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고마운 마음을 총대 맨 조준영씨에게 전했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흔 넘은 노인네는 회비를 받지 않는데, 탁발한 돈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자기네들도 내일 모래면 일흔 일 텐데, 더럽게 기분 좋더라.






일흔 넘은 사람이레야 나와 김신용씨 뿐이니, 둘 다 개털이라 봐주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인사동 출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장려차원에서 안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비 안 받는 것은 차지하고, 안주 사라고 보낸 성의까지 거절했는데,
한마디로 거지 돈은 치사해서 받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뻔뻔스럽지만 길도 미끄러운데 택시 타고 가자며 김신용씨와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훈훈한 년 말이었다.





뒤늦게 정영신, 김명성, 김상현, 최종선, 임태종, 김각한, 이회종, 김영선, 노광래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판이 무르익어갔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의 노래도 크게 일조했다.
마침 그 날이 김명성씨 생일이라 공윤희씨가 생일 케익도 사 왔다.
매년 정영신씨 생일과 하루 차이라 같이 생일잔치를 치루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 날은 안주도 푸짐했지만, 김완기씨가 양주를 한 병 가져왔더라.
몇 잔 마시지도 않았으나, 술 취해 똥오줌 못 가린 엊저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이가 빠져 삼가 했던,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지랄발광을 떨었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망할 년 보내는 날, 어찌 돌지 않으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9일 한정식선생과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열흘 전부터 한번 찾아뵙자는 선생의 말씀이 계셨지만,
이런 저런 날을 피하다보니, 토요일로 정해 진 것이다.

그동안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한 번 밖에 찾아뵙지 못했는데,
요즘은 출입을 일체 안 하시어, 신경 쓰였든 터라 기회다 싶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이명동선생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주문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먼저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더니,
혼자 계셔야 할 집에 여러 사람이 와 계셨다.
이명동선생의 아드님과 따님, 그리고 사위까지 있었는데,
그 날이 마침 이명동선생의 생신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듯이, 잔치 날이었다.

생신이면 음식도 준비해 왔을 터이고, 가족끼리 모인 자리라
날을 잘 못 잡은 것 같기도 했으나 어쩌라! 이미 저질러 진 일을...
곧바로 한정식선생께서 등장하셨는데,
이명동 선생께선 기분이 좋았던지,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 이야기에서부터
윤주영 선생 이야기에 이르기 까지 그침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지만,
한 선생께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했다.
재방송이지만, 재미있게 들었는데,
오랫동안 들려 줄 사람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데, 시간이 지났으나, 주문한 음식이 오지 않았다.
충무로에 있는 장어구이 집에 미리 계산해 두고
정오까지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는데, 30분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식당에 전화를 하니, 그 때까지 잊고 있었다.
빨리 보내 달라 했으나, 음식 장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음식이 준비되었지만, 한정식 선생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겠는가?
한정식선생의 독촉전화에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음식이 도착했지만, 배달꾼을 나무랄 순 없었다.






다들 시장했던 터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는데,
한정식선생께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장어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명동선생께서는 그 걸 의식하였는지, 다른 음식은 두고 장어만 열심히 드셨다.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같이 늙어가며 서로 챙기는 두 원로사진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튼, 건강 잘 관리하시어 여생을 건강하고 재밋게 사십시오.


"이명동 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경하 드리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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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아!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어찌 아프게 살아 온 나날들이 생각나지 않겠느냐?
그 힘든 세월이 너를 싸움터에 나서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걸 자산으로 여겨라. 만약 권력이나 돈이 있었다면,
네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한 번 생각해보라.
똑 같은 중독자가 되었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우리만 어렵게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다들 행복하게 사는 세상에 작은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초지일관’이란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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