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 술마실 수 있었던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른 술시부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연락 왔으나, 두 세 시간 지나야 나갈 수 있었는데,
뒤늦게 인사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경호, 전강호,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빈 병으로 보아 장경호씨는 정량을 초과한 듯 싶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김명성, 이상훈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 신현수, 이인섭, 강찬모, 신성준씨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노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는 조가 잘 맞아야 하니까...
장경호씨는 이미 취해 매사에 시비조였다. 전강호씨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관용을 아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가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으로 술값을 내길래, 내가 강찬모한테 탁발한 심사임당 한 장을 주었는데,

'낭만'가는 길에서 최명철씨를 만나 , 그 구리알 같은 돈을 최명철씨 한데 줘버렸다.

이런 싸가지 좀 보게, 그것도 오빠 보는 앞에서...

최명철씨 역시 객지에서 떠 돈지가 오래되어, 주머니가 빈 걸 눈치챈것 같았다.


김용태씨 딸래미 보영이가 장사하는 '낭만'에 가보니, '민미협' 그림쟁이 투성이더라.

이재민, 조신호, 강성봉, 정세학씨 등등, 다 말하다 보면 날 새겠다.






그 날따라 갑자기 열반한 적음(寂音)이 그리웠다.
인사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선생 등 유명세를 떨친 분이 한 둘 아니지만,
선생 분들은 체면 때문에 본색을 들어 낼 수 없었으니, 노는 것하고는 별개 문제다.

단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적음이만 유일하게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월간 뻐꾸기’이야기가 신화로 둔갑한 '월 빠'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대개 알것이다.
자기가 무슨 ‘월간 빠’ 주간이라며 창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월빠’이야기로 좌중을 웃겨댔다.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웃는 것도 그렇지만, 온 몸을 흔들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은 ‘적음선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법명을 뜻하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땡초로 통했다.

보면 이 갈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적음이다.



적음선사



술이 취하면 '찔레꽃'을 엄청 청승맞게 불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참 좋지!


한 번은 정선 만지산 ‘서낭당 축제’ 뒤풀이에서 “긴 머리 소녀”를 불렀는데,
털도 없는 중놈이 '긴 머리 소녀'를 청승맞게 불렀으니, 동네 사람들이 나 자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만지산 사는 최종대씨는 그 이야기로 적음을 그리워한다,

탁발로 살아야할 중이 대중에게는 손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 주머니만 털지만,
그마져 없으면 인사동 ‘실비집’에 퍼져 날 밤을 까며 퍼 마셔댔다.
아는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니,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오죽했으면 장경호는 적음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를 간다.
미술선생을 할 때인데, 돈 떨어지면 학교 찾아와 수업중인 자기 기다리느라

교무실에서 회전의자 돌리고 있었다는데. 얼마나 징그러웠겠는가?

그래도 끝 까지 술값 보태 준 사람은 전활철, 김명성, 강찬모 등 몇몇사람 있었지만,

적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 깊은 정신을 아니까...






그는 열다섯 살에 경북 기림사로 출가하였으나, 그 기행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는 산문집이 잘 팔려나가자 허구한 날 술로 살았다.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택시타고 인사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 간다.
절에 차 대놓고 주지 불러 택시비 주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단지 술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지만, 한 마디로 돈을 좆같이 본다는 거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 ‘청량사’ 있을 때도 벼랑 깊은 암자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는데, 한 밤중에 부엌에서 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암자에 적음과 나, 두 사람 뿐인데, 누가 그릇을 만진단 말인가?
완전 쫄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가끔 나한상이 장난 질 친다며 별거 아니란다.


그런데 한참 후에 모령의 애인을 데리고 가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산 깊은 암자에 오르느라 너무 피곤한데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적음도 애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에 찾아 나섰는데, 옆 골방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미쳐 팔짝 뛰겠더라.
보이는 것은 달싹거리는 이불 뿐이었지만, 그 아래서 들리는 신음은 분명 그녀의 신음이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어 산으로 기어 올라 청량사를 내려보며 울부짖었다.
“적음아! 이 씨발 놈아~ 적음아! 이 씨발 놈아~” 목 놓아 외치니 산울림은 내 귀에 내려 꽂혔다.

내 얼굴에 침 밷는 격이었다.

내려 와보니, 그 여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 감고 있었고, 적음은 자고 있었다.

그냥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지껄일 수 밖에..

아마 꿈 속에서 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소암 '전경




나중엔 거기서도 밀려나 봉화 수식에 있는 헌 집 하나 얻어 ‘一笑庵’이란 문패 달고 혼자 살았다.
보나 마나 가까이 있는 도예가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영주의 뮤지션 이종문과

많은 글 패들게 민폐께나 끼쳤을 것이다.


나중엔 마을 사람까지 싫어해 외톨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발가벗은 알몸으로 열반하고 말았다,
그의 법명처럼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이 방바닥에 썩어 안타까웠다.

그게 바로 적음이다.


열반한 적음선사의 시신이 섞은 자욱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인사동에 연연하는 것도 미우나 고우나 사람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구, 강용대, 김영수는  물론이고, 죽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사는 이청운, 배평모, 신동여,

석 파, 김신용, 장경호, 최울가, 김명성, 김용문, 전강호, 박광호, 이수영, 노광래, 공윤희, 이목일, 전활철 등 등..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 아무 것도 아닌 인사동이란 자리에 목메고 살았던 것 같다.


적음이 남긴 '유적'의 시 한자락이  떠 오른다.

"청동의 푸른 뱀이 / 꿈틀거리고 있는 / 숲길을 지난다 / 무섭지도 않은 등 뒤에 / 스멀스멀 / 실안개 / 따라 붙는다."


사진,글/ 조문호



적음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몰려든 지인들


빈소를 여관방에 차려놓고, 신동여, 석파, 이수영씨가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적음 일주기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적음을 추모하며 한 잔 마셨다.


아래 사진은 지난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지난 19일 오전11시경, 춘천(온의동 스포츠타운길 530 (2)에서 강원도 전통시장 지원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강원도가 주최하고 강원도산업경제진흥원이 주관한 개소식에는 양민석 경제진흥국장과 서상건 강원상인연합회장,

서동엽 강원도산업경제진흥원장, 조호순 경영관리부장, 박현지 지원센터 주임, 노명우 진흥과장, 현금서 지원담당자 등

강원도와 도의회, 춘천시, 강원상인연합회, 춘천지역상인회, 강원경제단체연합회 등 강원도의 전통시장을 이끌어 갈

핵심 인사 80여명이 참석해 현판제막식을 여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 관 플랫폼을 구축해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게 될 '강원도전통시장지원센터'개소식에는

정영신의 장터 사진전외에도 전통시장 특화음식 시식회, 개소 축하메시지 동영상 시청 등의 부대행사도 열렸다.





'강원도 전통시장지원센터'는 서민경제의 뿌리인 전통시장 활성화에 민간의 전문성을 접목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설립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민간 전문가와 상인, 지역주민, 금융기관 등이 협력하는 센터에는 2개팀 8명이 근무하는데,

센터장에는 정선아리랑시장 사업단장으로 일하며 전통시장 활성화사업에 대한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허승영씨가 임명되었고,

팀장에는 창업, 홍보, 마케팅 등에 전문성을 갖춘 신유회씨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민간전문성을 전통시장 활성화에 접목하기 위해 홍보 마케팅전문가, 상인,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자문위원회도 운영할 계획이다.

 

전통시장지원센터에서 시장활성화를 위해 추진할 사업은 중앙부처공모사업관리, 청년상인육성, 마케팅.홍보, 교육,

사업컨설팅, 대기업사회공헌사업 유치, 안전관리 등이다.

또한 다양한 정책 발굴 및 각종 통계관리, 상권분석, 등 민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도 맡게된다.






그런데, 개소식장을 사진으로 장식했는데, 바로 정영신씨의 추억어린 한국의 장터사진을 내건 것이다

사무실을 오르는 계단에서 시작하여 실내와 심지어 준비된 액정화면 두 곳에서도 정영신의 장터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사진전인지 개소식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진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오래 전부터 사진전을 부탁받아 하루 전에 사진 디피를 마쳤는데, 일을 하면서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정도로 끝나게 될 개소식을 위해 사진전을 마련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무실 전체를 온통 사진으로 도배해 주객이 뒤 바뀐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시경비를 받으니 시키는데로 하면 되겠지만, 전시의 효용성에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무자들이 의도한 내용을 듣고서야 무릎을 쳤다.

강원도 전통시장을 이끌어 갈 핵심 요인들에게 강원도 시장이 나가야 할 중요한 컨셉을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바로 우리 고유 시장이 가진 휴머니티, 즉 강원도 장터의 인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정영신의 장날사진전은 8~90년대 찍은 사진들로 구성했는데, 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이 아닌 사무실에 풀어 낸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에 의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있다.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추진 팀에서 강원도 전통시장 지원센터 오픈과 함께 정영신의 장터사진을 끌어 들인 것 같았다.





개소식 현장은 물론 참가자들의 반응을 취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 춘천으로 가려했으나 문제가 생겨버렸다.

전 날 까지만 해도 잘 따라 주던 자동차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시동을 걸면 변속이 되지 않았는데, 중고차를 구입한 지 이틀 만에 일어 난 일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씨름하다 하는 수 없어 견인차를 불렀더니, 그 때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서둘러 출발했으나 차까지 밀렸는데, 가 보니 모든 행사는 끝나 버렸다.





가자마자 전시 작품을 철수하느라 취재는 물론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 걸 때 찍어 둔 사진과 참관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강원도 실무자와 지원센터 관계자들의 이야기로는 성공적이었다며 다들 만족해 했다.

모든 행사 참가자들이 사진전에 관심을 가졌고,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강원도 전통시장의 활로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사진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통행료 아끼려 늘 국도로 다니는데, 네비는 자꾸 고속도로로 끌고 가려 했다.

네비 안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엉뚱한 길로 진입하고 말았다.

길이 낯설어 살펴보니 홍천 팔봉산이 나왔고, 돌아 나오다 보니 강촌 유원지도 나왔다.

일을 잘 마쳤으니 너무 서둘지 말고 주변 관광이나 하라는 계시 같았다.





그 때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차가 애를 먹여 조반은 물론 점심식사도 못했기 때문이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문상호 코다리 냉면을 먹으러 갔으나 너무 메웠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성남훈씨 전시가 개막된다고 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돌아오다 공짜폰이란 현란한 광고가 걸린 핸드폰 매장 앞에서 차를 세우란다.

내가 사용하는 고물핸드폰이 통화가 잘되지 않으니, 이 기회에 핸드폰을 바꾸라는 것이다.

난, 있는 핸드폰마저 버리고 싶었지만,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적 발상이라는 말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노인을 위한 구형 핸드폰이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페북 까지 연결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디서나 핸드폰만 들고 사는 사람들 모습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천하 지존인 차주의 말씀을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와 애마가 더 이상 속을 썩이지 않도록 고사를 지내자고 했다.

사실은 고사 지낼 술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문제는 차주와 기사가 모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술 취해 노래 부르며 울고 웃는 모습을 내 핸드폰으로 찍어 정영신이가 페북에 올려 버린 것이다,

나 역시 낄낄대며 댓글까지 달아놓고 자빠져 잤는데, 정오 무렵 일어나 확인해 보니 귀가 막혔다.

본 바탕이 못 생긴거야 어쩔 수 없겠으나, 생지랄 발광하는 꼬락서니로 보아 청춘사업에 치명타였다.

부랴부랴 내렸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때 늦은 후였다.





19일의 하루는 보람된 날이기도 했지만, 애간장을 태운 치욕스런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라! 그게 운명이라면 묵묵히 따를 수 밖에...

 

사진,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정영신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장안평 중고시장에 차보러 가자는 것이다.
내일 춘천에 전시 작품 실고 갈 일이 난감했던 모양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판인데,
정선 만지산 갈 일이 걱정이었다.

차를 사면 정영신씨는 운전을 못하니, 내차나 마찬가지다.
단지 지방 갈 때 기사노릇을 충실히 해줘야 하지만...

장안평 차 사러 가며 예산은 얼마 잡냐고 물었더니, 300만원 정도란다.
그것도 캐피탈 분할로 구입해야 한다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일요일이라 사람은 별 없었으나, 삐까뻔쩍한 차들이 빼곡했다.
왠만한 차들은 천만원이 넘었다.

중개인에게 삼백만원짜리 사륜구동에다 짐 실을 수 있는 밴을 찾았더니,
이번에 폐차시킨 ‘코란도밴’정도 라지만, 가격이 맞지 않았다.
그것도 수동 사륜은 없고, 자동 이륜뿐인데 대개 500만원 대였다.

적당한 차가 없어 난감해 하니 ‘무쏘 스포츠’는 어떠냐는 것이다.
가격을 물었더니, 한 푼도 깎지 않는 조건으로 500만원에 주겠단다.
‘무쏘 스포츠’는 연비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몸이 빵빵한 게 완전 글래머였다.
어차피 할부인지라 흥정을 붙였는데, 깎고 깎아 470만원에 낙찰되었다,

할부금 낼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걱정거리는 해결되었다.
시운전을 해보니, 엔진 소음도 적고 승차감도 좋았다.
일요일이었지만 수속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등록비와 일주일 종합 보험료만 내고, 데려왔다.

돌아오며 정영신씨가 하는 말이 화물차 타다 그랜즈 타는 기분이라지만,
덩치 때문인지, 낯설어 그런지, 페달 밟는 느낌이 좀 무거웠다.

무쏘야! 난 너의 풍만한 몸집이 좋아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제발 아프지만 말아다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의 인사동은 초가을에 접어든 수요일이라 그런지 전시장마다 사람들로 넘쳤다.
난, 전시 열림식에 가야 할 곳도 한두 군데 아닌데다, ‘유목민’에서 사진인과의 모임도 있었다.

문제는 전시 오프닝이 대부분 비슷한 시간대라는 거다.

연락이 와 인사차 들리지만, 다들 사진 찍어 주기를 바라니 작품만 보고 나올 수도 없다.

바삐 인사동 거리를 가다보니 화가 김구씨도 바삐 지나간다. 나만 바쁜 것이 아닌 것 같다.





먼저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설숙영씨의 도예전과 네팔드림팀 그림전, 장흥래씨 인물전을 차례대로 들렸다.

눈도장과 함께, 사진 한 두 컷 찍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강찬모 초대전에 들렸다.

그곳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 나가고 아는 분으로는 작가 강찬모씨와 신성준선생, 노광래씨 뿐이었다,





작품을 보려고 작정했던 ‘나무화랑’의 최경선씨 전시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미 김진하관장과 장경호를 바롯한 화가들이 뒤풀이에 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낭만’으로 가자지만, ‘유목민’에서 기다리는 분들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사진가 김문호, 이정환, 최승희씨가 와 있어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이정환씨가 준비해 둔 11도짜리 다랭이 막걸리가 별로 독하지 않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홀짝 홀짝 맛있게 마셨다.





마침 강찬모씨 뒤풀이도 ‘유목민’이라 고중록, 김명성, 조해인, 조준영,

이명희, 최유진, 강경석, 조명환, 임태종씨 등 많은 분들이 옆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 인사 나누느라 바빴는데, 뒤늦게 주인공 강찬모화백이 등장나자,

화가 이인섭, 전형근씨, 그리고 구로구청장인 이성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술이 슬슬 취하기 시작했다. 마구초로 다독였으나 소용없었다.

정영신씨가 나타나자 찍던 카메라 내 맡기고 줄행랑쳤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아, 김명성씨에게 택시비까지 구걸해 집에 왔다.




집에 들어오자 말자 큰 대자로 뻗어버렸는데, 다시는 11도 막걸리 먹지 말아야겠다.
난, 역시 소주 체질이야!

사진, 글 / 조문호


























































토요일엔 서둘러 공원에 나갔다.
남의 밥그릇 뺏는 일이라
몇 주째 빵 배급을 놓쳤더니,
뱃속을 비우는 경우가 잦다.




천성이 밥하는 것을 싫어하는데다,
혼자 사먹기도 그러니, 어쩌랴?
아슬아슬하게 받은 번호표가 199번,
한 장이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온다.
착한 아내 버려두고, 왜 여기 왔나?
뭘 위해,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 것이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엊 저녁엔 노을조차 심상찮았다.
마치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끝내라고...




사진,글/ 조문호
















이동식이 살해하여 찍은사진, 당시 보도된 일간지에서 스크랩했다




▲조문호 사진가



사진도 제대로 모르는 얼치기 아마추어 사진 인들이 전체 사진가들 얼굴에 똥칠시킨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공모전에만 집착하여 상장 쪼가리 몇 장 받고나면 자기도취에 빠져 안하무인이 되어버린다. 취미로 즐기며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나무랄 일은 못된다. 그러나 자연을 훼손하거나 부정을 저지르는 등 온갖 부도덕한 짓거리로 말썽을 일으켜 문제다,

반세기 동안 공모전 수상 경력을, 한 사진단체의 입회 자격으로 삼은 것이 원인인데, 그 폐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공모전 입회점수제를 폐지하라며 목청을 높여왔으나, 여지 것 반복되고 있으니, 어쩌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부정부패나 불협화음이 공모전에서 비롯되지만, 돈과 모든 이권이 공모전에 걸려 있으니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 폐해는 사람을 죽여 사진을 찍는 이동식 같은 살인마도 탄생시켰다.

이동식이 죽음에 집착한 동기도 공모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차례 공모전에 출품하여 고배를 마셔오다 우연히 죽어가는 비참한 닭을 촬영해 출품했는데, 그게 은상을 받은 게 사건의 발단이다. 그래서 끔찍하고 자극적인 사진이 예술사진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이 굳으며 엽기적인 살인마로 변한 것이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한 단체가 구성되려면 구성원의 인성이나 자질은 물론, 교육이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그 살인 사건도 창피하다고 쉬쉬할 것이라, 입회규정에 명시된 공모전 수상경력을 폐지하여 회원들의 자질이나 사진교육에 치중했더라면, 오늘처럼 작가 없는 작가단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작가란 허울 좋은 이름에 순수한 아마추어 사진 인들이 공모전을 추종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조직의 규모가 공룡집단처럼 비대해졌다, 이젠 한 술 더 떠 예비회원이란 이름으로 선모집도 한단다. 이게 작가증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전국에 깔린 조직들의 지역 이기주의 또한 보통문제가 아니다.

몇 일 전 속초 청호동에 ‘아트 플렛폼 갯배’란 갤러리가 개관되어 엄상빈씨의 ‘아바이 마을 사람들’ 초대전이 열렸는데, 지역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항의성 민원이 물의를 빚었다는 것이다. 지역 사진가를 두고 왜 외부 사진가를 끌어들여 개관전을 하느냐?, 지원액도 지역 사진인들과 차별하느냐?‘는 내용이라는데, 사진이면 다 같은 사진이냐?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심보인지 모르지만, 제발 주제 파악 좀 하라. 이런 일들이 지방마다 비일비재하다.

앞서 이동식사건을 새삼 언급한 것도 그 희대의 살인마가 그 사진단체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동식씨는 서울 가락동에서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하며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모델촬영대회를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주변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목 맨 모습이나, 밧줄에 묶여 칼에 찔려 죽는 모습 등 비참하게 죽어가는 잔인한 사진을 연출해 찍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실감나는 사진을 얻기 위해 마침내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이동식은 이발관 면도사였던 김경희(24)양을 모델 시켜 주겠다며 산으로 유인해, 청산가리를 담은 캡슐을 감기약으로 속여 먹였다고 한다. 당시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한 그가 찍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진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귀가 막히는 것은, 그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올림픽을 앞 둔 시점이라 나라 망신시킨다며 수사를 중단시킨 채, 그냥 덮어 버렸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담당 수사관이 뒤늦게 밝힌 바에 따르면 전처를 비롯하여 21명이나 되는 또 다른 여성 실종자에 대한 살해자백도 받아 냈다고 한다. 전처의 시신이 묻힌 자리를 파는 순간, 수사를 종결하라는 지시에 막을 내렸다니, 이제 죽은 자에게 더 물어 볼 수도 없게 되었다.

86년도 사형이 집행되며 그 살인사건은 모두에게 잊혀 졌지만, 난 부끄러워 잊을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입을 막았고, 사진 계에서도 입을 닫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달 사진계 원로학자를 만난 사석에서 그 이야기도 사진사에 남겨야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가치 없는 그런 일은 입에 담지도 말라는 것이다. 치욕의 사진사는 역사가 아니던가? 꼭 남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 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사진을 찍은 것이다.“라는 한 사이코의 괘변이 아직도 머리를 짓누른다. 미쳐도 제대로 미쳐야지, 어중간하게 미치면 사람도 잡을 수 있다는 경고의 말이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압수된 사진들과 증거자료를 설명하는 이동식.


▲조문호 사진가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거대 언론들의 횡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치인이건 재벌이건 언론 앞에서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여론몰이로 한 방에 갈 수 있으니, 어느 간 큰 놈이 감히 고개 처들 수 있겠는가?
긴 세월동안 서로의 먹이사슬이 되어 결국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한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여론을 호도하거나 상대를 짓밟는 짓거리만이 아니라,
가난한 예술인들의 피를 빨아먹는 치사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들의 원고료를 착취하거나 재능기부란 이름의 연예인 인건비를 착취하는 사례 등인데,
문제는 대개의 작가들이 언론사의 인터뷰나 원고청탁에 상응한 대가를 강력히 요구하지 않는데 있다.

돈을 요구하면 당연히 대상에서 밀려나겠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냥 주기 때문에 악습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건비와 원고료는 고사하고, 한 술 더 떠 돈 봉투를 주거나 작품까지 싸 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더러운 관행 아닌 관행 또한 청산되어야 할 적폐임이 틀림없다.
요즘 들리는 바로는 소개해 주는 기사 당 인터넷매체는 30만원, 종이신문은 50만원이상 이라는 말까지 떠돈다.
돈을 받는 놈이나 주는 놈이나 똑 같다.

돈 되지 않은 문학이나 사진은 작품을 주거나 돈 봉투 내미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겠으나,
당연히 받아야 할 원고료는 물론 취재에 대한 인건비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 부끄러운 것은 작가들이 비굴하게 언론에 굽신 거린다는 점이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인지 모르나, 작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살기 위해 작품이라도 한 점 팔려면, 자신을 알려야 하는 다급한 사정은 이해가 되나,
스스로의 자존심이나 권리마저 내 팽개치는 예술가들의 책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생각으로, 긴 세월 언론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지 못한 원로들의 책임도 크다.

80년도 부산에서 사진 활동할 무렵,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최민식선생을 자주 만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선생께서는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서 청탁을 더러 받았는데, 대개 원고료도 받지 않은 채 사진을 보내 주었다.

그것도 가난한 잡지라면 모르겠으나 재벌 언론조차 원고료를 주지 않아, 선생의 살림살이가 걱정되어 한 마디 거들었다.
“원고료 안 받으면, 다음에 후배들은 우째 묵고 삽니꺼?” 했더니, “안 주는 걸 어떻게 달라하냐?”하셨다.
“그라마, 달라 해야지 예!”라며 몰아 부쳤으나, 말은 쉬워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일 것이다.

사진은 먹고 살기가 어느 예술분야보다 열악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사들의 원고료지급 사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공영방송에서 몇일 동안 한 가족의 생활을 묶은 대가의 인터뷰료가 고작 30여 만원에 불과했다.

지난 달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한국의 밥상’에서는 평생 장터를 찍어 온 정영신씨의 옛날 장터 사진을
여러 장 사용했으나, 원고료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적은 금액이나마 원고료를 지급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아예 예산책정에도 잡혀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이러하니 다른 군소 방송이나 신문, 잡지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진이 기대어야 할 언론매체의 비도덕적 만행은, 사진 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살 길을 막아 왔다.

그리고 언론을 앞세운 방송사들의 재능기부공연도 심각한 문제다. 재능기부라는 말 뜻은 참 좋다.
즉 개인이 가진 재능을 사회에 공헌하는 것인데, 그러한 선의의 재능기부를 악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시간과 노동력의 보상, 혹은 정당한 대가없이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노동착취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창작행위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시장에 혼란을 가져 올 수 있다.
재능기부는 경제적 가치가 다른 기부를 쉽게 요청하고 거절 못하게 하며,
개인의 능력과 직업의 가치를 폄하하는 아주 나쁜 방법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재능기부라지만 사회적 강자이거나 돈 있는 사람에게 없는 사람이 ‘기부’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언론사들의 공연문화 발전을 해치는 악덕 재능기부, 노 캐런티 출연문화’는 연예인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게 가난한 예술인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하는, 힘센 언론의 예술인 노동력 착취는 뿌리 뽑아야 한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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