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산골 사람들 / 정선, 최돈연 2003

 

 

 

2016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인을 찿아서 12- 조문호論

 

 

'사람이다' 조문호 사진전 

 

전시일시 : 2016년12월10일(토) -12월20일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

초대일시 : 2016년 12월 10일 오후5시

 

 

  

 

조문호

: 人本

 

이광수 / 사진비평가, 부산외대교수

 

사진가 조문호는 올해 칠순이니 얼추 잡았을 때 인생 40 여년 가까이를 사진판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굴지의 사진 저널의 편집장이나 심사위원 등 웬만한 직함도 몇 가져보기도 했고, 위로는 사진계 1세대와 아래로는 사진계 2 세대에 낀 세대의 사진가이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데다, 사람 자체도 무골호인이라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술을 좋아하고, 형식이나 의례를 따지지 않아 그를 좋아하는 사진계 선후배가 들끓는다. 그런데 그가 40년 가까이 가진 사진에 대한 태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지가 그저 그렇고, 독창성이 어떻고, 그래서 직품이라 하기에는 어쩌고 하는 말을 할 뿐, 그가 사진으로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이는 없다.

 

어떤 인터뷰에서 조문호의 아내이자 동지인 사진가 정영신은 그를 이렇게 말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게 없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는다. 정말 어떤 일을 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이 말보다 그를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난, 찾지 못했다.

 

 

장터 사람들 (영덕 권정순) 2013

 

장터 사람들 (남원 박경순) 2013

 

 

1. 사진, 실존으로서의 행위

그는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되어 소통되는데 쓰이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가다. 자신의 사진이 여러 군데 많이 걸리고, 그 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품 값을 비싸게 책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높은 가격으로 한 두 점만 팔려 돈을 벌 수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보고 즐겼으면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거나, 사진으로 예술을 하기 위해 창의적 발상을 하거나 독창성을 계발하려 하거나 깊은 관념을 집어넣어 어렵게 해석하려 하거나 하는 따위의 작업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장터 사람들 (괴산 정숙현) 2014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이렇듯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그의 두메산골 사람들은 이러한 사진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애초에 그는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강원도 동강에를 갔다.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처음 계획은 동강 댐 건설에 반대하면서 그 일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정선에 머물렀으나, 정작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곳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그는 그 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정선에서 6년간 눌러앉아 그곳 사람들을 찍었다. 사회 문제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에게로 이었으니, ‘사람은 사진가 조문호에게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다. 그가 사람 자체에 매료당한다는 것은 그의 사진 스타일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메산골 사람들 /  삼척 김지석 2003

두메산골 사람들 / 정선, 최종대, 이선녀 2000

 

 

결국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예술이나 진보 운동과 같은 어떤 본질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 조문호가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행위다. 행위자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런데 사진가 조문호의 그러한 실존 행위는 그를 소유의 존재로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사람과의 소통과 그 안에서의 능동적 주체성을 찾으면서 사진을 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일곱 살 박이 아들의 눈물을 가슴에 묻으면서 가난에 몸서리치면서 아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가슴을 후빈다. ‘사람을 생각한다면서 가족을 등한시 하는 것에 대한 고뇌가 평생 무겁습니다.’

 

 

인사동 사람들 / 천상병 1983

 

인사동 사람들 / 김언경 1990

 

 

2. 사람, 세계의 중심

사람을 그렇게나 좋아 하는 것이, 사진가 조문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그 누구한테도 규제받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쓴 소리를 마구 던지는,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는, 그런 가난한 예술가 말이다. 조문호는 비록 한 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허기진 뭔가를 그 인사동 사람들을 통해 메웠다. 그 인사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한둘씩 세상을 떠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없어져 갈 때 그들과 나눴던 사람 냄새를 보존하기 위해 그들을 사진으로 박제해두고 싶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지천으로 깔렸던 그 정()과 우애를 담아놓고 싶었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 기억하게 하고, 가난한 예술인들은 사진에 남아 서로를 기억하도록 하고, 그래서 모두 소풍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나누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인사동 사람들 / 신경림 2006

 

사진가 조문호가 사진 평생을 사람에 꽂혀 카메라를 처음 들었던 때부터 사람을 중심으로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80년대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그리 하였듯, 사회 비판에 목소리를 냈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을 치열하게 작업하기도 했고, 사라져 가는 강원도의 산하를 아름답게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꼭 사람이었다. 그 시절 데모하는 현장을 많은 사진가들이 찍어댔지만, 조문호만큼 사람 한 사람 인물을 슬프면서도 재밌고, 웃기지만 뭉클한 사람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방독면을 쓰고 일에 지쳐 기대어 있는 청소부 아저씨, 매운 최루가스에 콧구멍을 종이로 틀어막은 근엄한 수녀님과 경찰 젊은이,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가슴에 달고 십자가를 한 손에 높이 들며 연신 눈물을 흘리는 명동성당 앞의 박종철 어머니’, 역촌동 가는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힘껏 박수를 치면서 시위 부대를 격려하는 이를 앙다문 어떤 아저씨 ... 그는 민주화운동 현장에서도 보이는 것이 사람밖에 없는 모양이다. 사람에 웃고 울고, 천상 사람 앓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팔자일 것이다.

 

 

 

민주항쟁 / 충무로 1987

 

민주항쟁 / 신촌  1987

 

민주항쟁 / 명동성당 1987

 

 

역시나 그랬다. 그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진가 최민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젊었을 때 음악을 좋아해서 고향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마을의 정미소를 개조해 음악 감상실을 차려 음악에 흠뻑 빠져 살다가 부산으로 올라가 남포동에서 국악 주점을 하였다. 그때 사진가 최민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찍은 최민식의 사진에 조문호는 완전히 빠져들었고,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목도하는 도리를 최민식으로부터 배웠다. 그렇지만 사진 찍는 스타일은 최민식과는 많이 다르다. 최민식은 대상에 대해 사진가가 개입하지 않는 채 사진을 찍는다. 소위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문호는 결정적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상의 움직임을 고정시키고 시선을 렌즈에 고정하도록 찍는다. 눈동자란 마음의 거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자르거나 후보정을 과하게 하는 따위 또한 하지 않는다. 사진에 나오는 지금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나중에는 다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사동 사람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다 그러한 그의 사람과 사진에 대한 관점이 깊게 반영된 것들이다. 천상병, 김영수, 신경림, 김언경, 심우성, 공윤희... 그들이 박힌 저 사진은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웃고 울고 떠들었던 술집, 찻집, 골목, 담벼락, 거리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는데 ...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조문호의 사진은 그 슬픔을 머금는다.

 

 

노부부 / 여의도 1990

 

완행열차 / 동해남부선 1982

 

사진가 조문호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사진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대해 날선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어른이다. 2015년도 사진계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문제 때도 조문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진가라면 그 거대 권력 앞에서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평소에 자신에게 많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원로 사진가 선배들에게조차도 거리낌 없이 비판의 메스를 가했다. 한국의 사진계가 인맥과 학맥에 휘둘려 그 썩고 문드러짐이 극에 달했고, 그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그렇데 된 데에는 당신들 원로 사진가들이 자기 제자들을 챙기기만 하지 옳지 못한 일을 한 데에 대해 따끔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라는 일갈이다. 가히 죽비 소리다.

 

그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진계가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금도를 지켜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최민식 사진상이라면 사람이 그 사진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적어도 최민식 사진을 폄하하는 자들이 최민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더럽히는 짓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 홍보에 혈안이 된 협성재단은 최민식의 이름을 빌어 최민식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유명한 사진가에게 상을 주기로 운영위원장과 짜고 부정한 짓을 했음이 드러났다. 사진가란 사람을 존중하고, 작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최민식 정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음에 대해 사진가 조문호는 분노한 것이다. 일부 심사위원은 그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사진가에게는 심장과 같은 을 스스로 파버린 것에 대해 그가 분개한 것이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말이다.

 

전농동 588 / 1984

 

3. 따뜻함, 대상과의 거리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전농동 588 / 1984

전농동 588 / 1985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그 명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이란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이란 순간적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 아닌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이다. 그가 처음에 이곳을 찍으러 갔을 때 그는 사회적 공간성의 의미로 이곳을 찍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서 사람을 찾아버렸다. 그래서 그는 소외라는 이념이나 588이라는 공간의 사회사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돈 벌면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의 사진집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그 여인들의 행위를 사회악으로 규정해서 일소의 대상으로 삼는 정부의 시책에 저항하는 몸짓인 셈이다. 그들은 윤리를 타락시키는 윤락녀가 아닐 뿐더러 우리가 구원해줘야 할 악의 무리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누이였을 뿐이다. 그것을 사진가 조문호는 사진으로 말을 한 것이다.

 

 

동자 동 사람들 2016

 

지금 사진가 조문호는 70 나이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2016년 추석 무렵 그는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 촌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사진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곳은 지금은 다 잃어버린 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과 한 식구(食口)가 되었다. 얼마 후 동료 사진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작은 사진전을 열고, 사진을 한 장씩 그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사진이 잘 나오거나 못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못 나왔다고 사진을 삭제해버리면 그 찍힌 사람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 누군가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느끼게 되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그는 동자동 사람들작업이 사진가로서 하는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니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 작은 콤팩트 카메라 들 힘만 있으면 그는 또 어딘가 힘없고 무시당하지만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그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나누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숙인 2016

 

 

 

 

 

 

 

 

 

   

 

 

 

  

 

 

 

30일 춘천 문예회관 전시실
도내 16명 작가 1∼4점 출품
사실주의로 시대 현실 풍자



▲ 황재형 작 ‘ Business Oligarch(닭,세월호희생자)’



암울한 시대에/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인가?/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이다/암울한 시대에 대해’

혁명을 노래한 독일 시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2∼1956)의 시 ‘모토’를 떠올리게 하는 전시가 열린다.

도내 미술가들이 암울한 시대에 대해 노래한 ‘순실뎐’이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30일 오후 5시 개막해 내달 5일까지 이어진다.‘산과 함께,71’ 특별기획전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부끄러움으로부터 시작됐다.

전시를 기획한 최형순 미술평론가는 “사회적 혼란으로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질 때 우리 예술가들은 광화문과 춘천 촛불의 머릿수 하나를 채우는 일로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며 “시국선언과 같은 ‘시국展’의 필요성 또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책임 필요성이 제기됐다”고 설명한다.

전시에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 시대를 살아온 작가 16명이 참여한다.작가별 100호 크기의 작품 1∼4점을 출품했다.


▲ 조문호 작 ‘유진규’



민중미술과 리얼리즘 미술의 대표 화가로 불리는 ‘광부화가’ 황재형 작가는 ‘속아 넘어가다’를 풍자한 ‘소가 넘어가다(Buffaloed)’,지난 대선 결과의 느낌을 표현한 ‘徵候(징후·Portent)’,현 상황을 빗대 그린 ‘Business Oligarch(닭,세월호희생자)’ 등을 통해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강조한다.

조문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광화문 시위 현장과 그 현장에서 벌어진 유진규 마이미스트의 퍼포먼스,양혜경 무용가의 ‘넋전춤’ 등 ‘시국 몸짓’을 담아낸 사진작품을 전시한다.

참여 작가들은 “현실반영,리얼리즘,저항이라기엔 이미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른다.예술가의 의무라고 하기에도 초라할 뿐”이라며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작가=△황효창△황재형△권용택△조문호△김진열△김대영△신대엽△서숙희△김용철△이광택△백중기△길종갑△류정호△전형근△박은경△박종혁.


[강원도민일보 : 안영옥 okisoul@kado.net]





열흘 전 쯤, 인천 무의도를 예술 섬으로 만들려는 정중근씨와 소리꾼 조수빈씨를 인사동에서 만났다.

화가 이봉기씨 전시 뒤풀이가 열리는 '장군보쌈'에 있었는데, 그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모처럼 인사동 나온 김에 얼굴 한 번 보려한다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해 가기 전에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망년회를 한 번 열자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쌍수들고 맛 장구쳤겠지만, 요즘은 동자동 쪽방에 빠져있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들 한 번 만나고도 싶은데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박근혜 하야를 위한 성토대회라도 열고 싶었다.

그동안 쌓인 분노를 망년회 술잔에 풀자는 생각에 어렵사리 받아들인 것이다.


참가비는 만원으로 못 박았으나, 초과되는 비용은 정중근씨를 비롯한 독지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 날 소리꾼 조수빈씨의 소리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즉흥 퍼포먼서도 있으니,

일정을 참고하시어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 :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오후7시
장소 : 인사동 ‘사동면옥’ 2층

참가 자격: 인사동을 사랑하는 국민이면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 식사준비 관계로 인원 수 파악이 필요하오니, 전화나 메세지 또는 댓글에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화 / 조문호 010-9436-6144

         정영신 010-2955-8926










지난 일요일엔 정영신을 만나러 녹번동으로 찾아갔다.
모처럼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술잔에 푸는 즐거운 자리를 마련했는데.
요즘은 지인들의 전화가 너무 성가셔 헨드폰을 꺼둔다고 했다.
심지어 자기가 이용당하고 있다며, 정신 차리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별의 별 전화질이 많다며, 눈물이 맺혔다.

하기야! 대개 이혼이라면 비극으로 끝나는 줄만 안다.
다들, 판박이로 만들어 논 법적 절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방세와 생활비를 마련할 고육지책이었으나,
다들 이해하지 못한다. 작업은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들이 나처럼 벼랑에 섰다면 어떻게 할지, 한 번 바꾸어 생각해보라.
돈 한 푼 없이, 가난한 아내의 등골만 파먹고 살아야 하나?
더 이상 남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마라.

아내에게 시간나면 동자동 기록도 함께 하기로, 동료로서의 결의를 다지며,

주말부부처럼 일요일만 만나기로 했다.

아내는 누가 물어 보라 했다며, 솔직하게 답하라고 했다.
사진과 정영신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다.
둘 다 소중하지만, 내 일은 차마 버릴 수 없다는 말을 뱉고 말았다.
결국,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게되어, 마음이 아프다.

그런 이분법적 질문을 시킨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두 사람만의 신의로서는 견뎌낼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글 / 조문호







지난27일은 동자동 쪽방 촌에 구제물품을 나누어주는 날이다.
지난 주민회의에서 1인용 전기장판이나 이불 등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물품들을 신청했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는 등록된 주민 600여명을 대상으로 가구당 차렵이불 한 채씩을 나누어 준 것이다.

아침 겸 늦은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이나 일찍 현장에 나갔는데도 이불 한 채씩을 둘러메고 싱글벙글 돌아오고 있었다.

상담소 앞 도로변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주민들이 백미터 남짓 줄지어 서 있었다. 심지어 이불 받으려 일 나가지 않은 노무자도 있었다.

올 겨울을 견뎌내려면, 두툼한 이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좁은 쪽방에 이불 한 채가 더 들어가면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진다.

헌 이불과 새 이불을 바꾸면 되겠으나,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 긴히 쓰던 물품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싶지 않다.

사실상 쪽방 사는 사람보다 이불이 필요한 사람은 노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불을 주지도 않지만, 줘도 보관할 곳이 없다.


내가 잘 아는 노숙자 이성동씨에게 내 이불을 주려 했더니 난색을 표했다. “형, 그 큰 이불을 들고 어떻게 밥 얻어먹어요.”

맞는 말이다. 노숙자들에게는 개인사물함이 필요하다. 공원 주변에 이불을 넣을 수 있는 케비넷이라도 마련해 둔다면 요긴하게 사용할 텐데,

다들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탁상 행정의 문제점은 빈민들 생활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한다는데 있다.


둘 곳이 없어 비좁게 자거나, 멀쩡한 이불을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은 낭비다. 정치나 행정이 너무 이벤트성 행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 빈민들이 필요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일정의 상품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부터 고려해 주기 바란다.
































이 날은 온 마을이 이불보따리로 들썩였지만, 이불보다 술에 시름 푸는 친구들도 있었다.
정재헌, 김장수, 이준기, 이남기, 강재원, 조찬익, 이상종씨가 공원 옆자리에 모여, 열 받는 정치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박근혜를 향한 욕설을 술안주로 삼고 있었으나, 순진한 이준기씨는 불상한 대통령 욕하지 말라며 나무라기도 했다.

평소에는 보수성향의 이준기씨 말을 모른 척 듣고 넘겼으나, 이 날은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나야 페북에서 보아 대충 알지만, 그 친구들은 티비를 껴안고 살아서 인지 나보다 더 많이 알았다.


괜히 열 받아 술과 안주까지 사버렸다. 개털 주제에 중국집에 탕수육 작은 것 하나를 시켰는데, 갑자기 길바닥 술판이 그득해 보였다.

만 칠 천원에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맨 날 깡 술로 버티던 사람들이 모처럼 왕건이 술안주를 만났으나,

다들 많이 먹지 못해 여러 사람이 먹어도 남았다. 어느 누가 싸가려 하니, 조찬익씨가 한마디 던졌다.

“욕심내지마! 여기서는 술안주지만, 가져가면 쓰레기야” 쪽방사람들은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불 얻어 기분 좋게 술을 마셨으나, 오후7시까지 인사동 ‘이모집’으로 넘어가야 했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이사회를 5년 만에 연다는데, 명색이 사단법인의 이사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술김에 가서 확 뒤집어 버릴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날씨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 졌습니다.

요즘 반가운 자리를 가급적 피해, 더욱 춥게만 느껴지는 그런 날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던 마누라까지 내치고 나온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더 혹독한 겨울을 절감해야 합니다. 보상의 길이 있다면, 이웃들에게 조그만 힘이 되어 주는 것이지요.

처음 나올 땐 사진이 우선이었지만, 그 또한 나 자신을 위한 이율배반적인 짓이라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 온 쪽방은 돌아갈 수 없는 나의 마지막 무덤이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처음엔 일 년 쯤 작업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 갈 작정이었으나, 그 생각마저 접었거던요.

엊그제 겨울 옷가지와 당장 필요한 자료들을 챙기러 정선 집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무덤 앞에서 술 한 잔 올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한 평생 걱정만 끼친 통한의 눈물을 흘렸지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잘 봐 달라며 부탁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작은 쪽방이지만,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정 붙여 사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그래서, 정선에 모아 둔 오래된 전시 포스터를 몽땅 가져와, 쪽방 도배부터 할 생각입니다.

죽고 나면 쓰레기에 불과할 것을 뭐가 중요하다고, 뭉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독거의 외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다양한 방법을 찾는 중이지요.

 

그리고 일에 대한 우선순위도 정했습니다.

캘린더에 빽빽하게 적힌 일정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내 일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똥개처럼 쫓아다니며 공술 얻어 마시는 일도 이제 줄일 것입니다.

술 생각나면 주변의 노숙하는 친구들과 마시면 되니까요.

 

제일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동자동에서 벌어지는 길흉사나 약속들입니다.

그러나 급하게 서둘지 않고, 차근 차근 공부하듯 배워 나갈 것입니다.


두 번째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올 년 초에 시작한 문화알림방포스팅말입니다.

기초생활수급자 혜택만 받게되면 더 이상 돈이 필요없겠지만,

어려움에 처한 노숙자들에게 막걸리도 사 주어야 하고, 정영신씨도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병원비에다 학비까지 마련해야 할 처지거던요.

병 주고 약 준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나도 조그만 양심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발 쓸데없는 추측들은 하지 마십시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문호가 새 여자가 생겨 나갔다느니,

정영신이가 너무 쪼아 나갔다느니,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리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이상 없습니다.

처음, 갑작스런 제안에 문제가 되긴 했지만, 전 정영신을 잘 알아, 내 마음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젠 충분히 공감대를 가져 몸은 남이지만, 마음은 늘 함께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관습이나 규칙 따위는 지킬 사람이나 지키라는 것이지요.

기회가 된다면 멋진 데이트도 신청할 작정입니다.

 

그 외의 시간들은 내 꼴리는 대로 살 것입니다.

이 개 같은 세상, 틈만 나면 신명난 잔치판을 벌이고 싶습니다.


조문호









옛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건 한 참 잘 못된 말이다. 오직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고로, 없는 자보다 가진 자들의 편에서 정치를 해왔기에,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이다.

 

정치인들이여!

오 갈 때 없는 노숙자나 빈민들의 한 숨 소리에 과연 귀 한번 기울여 보았는가?

 

올 여름 무더위를 누가 가장 힘들어했겠나?

바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헤맨 노숙자나 바람 한 점 들 수 없는 쪽방과 고시원에서 살았던 빈민들이다.

 

그들도 사람이다. 빵 한 조각 던져주면 다 한 것이 아니다.

쓸데없이 탕진한 나랏돈 귀퉁이만 떼 내어도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 천벌 받을 짓을 더 이상 하지말자.

 

UN이 정한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맞은 지난 토요일, 가난한 약자들의 모임인

‘1017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에서 주최한 ‘1017 빈곤철폐퍼레이드가 동대문에서 열렸다.

천 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빈곤철폐를 외치며,

동대문에서 종로, 종각, 청계천 영풍문고에 이르기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광교에 도착하여 살인정권을 규탄하는 백남기농민 추모대회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썩어빠진 정치판에는 개 떼 처럼 몰리는 기자들이, 가난한 빈민들의 목소리엔 귀를 막더라.

그들이 가난을 맛보지 못해서 일까? 말로만 평등사회를 외쳤지, 생각 따로, 행동 따로였다.

 

그 날 빈곤사회연대 정성철, 김윤영씨를 비롯한 수 많은 단체에서 나와 빈민들의 원성을 전했지만,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전한 김혜진씨의 호소가 귀에 박혔다.

 “어떻게 물건이 아닌 사람에게 등급을 매깁니까?”

 

쪽방촌사람으로는 동자동 사랑방우건일씨를 씨를 비롯한 주민10여명을 만났고,

빈민 운동하는 사진가 최인기씨도 만났다.

 

그 날 외친 구호들이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민중복지 쟁취하자!" 
"노점 단속 강제집행 중단용역깡패 해체하라!" 
"허울뿐인 홈리스 복지 개선공공주택 공급하라!" 
"조물주 위에 건물주맘편히 장사하자!" 
"줬다뺏는 기초연금약속대로 이행하라"! 
"복지는 국가책임사회공공성 강화하라!" 
"세월호 진상규명진실을 인양하라!"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책임자를 처벌하라!" 

 

사진, / 조문호

























































 

 





사랑의 빵 나눔 행사를 여는 한강교회 ‘브레드 미니스트리스’에서 지난 15일 동자동 쪽방 촌을 찾았다.

빵을 기다리던 주민들의 행렬은 길게 이어졌다. 평소 방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삼가 하는 분들도 대부분 나왔다.

아예 깔고 앉을 것 까지 준비해 순번을 지키고 앉았는데, 나처럼 사진 찍으려 어슬렁거리다 보면 국물도 없다.

사진 찍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매번 모자라는 빵을 나까지 축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난 거지다.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밥을 해 먹지 않고 얻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일 필요한 게 빵이더라. 밥을 얻으면 당장 먹어치워야 하지만, 빵은 두고두고 먹을 수 있고,

반찬이 필요 없으니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빵 주는 날이면, 다들 한 시간 전에 나와 저렇게 줄지어 기다리는 것이다.

자리 비우면 그만이고, 새치기도 통하지 않는다. 질서 하나는 끝내준다.

그런데, 빵 받는 차례가 적힌 인쇄물 한 장 씩을 나누어주었는데, 거기엔 그 날 부를 찬송가 악보가 인쇄되어 있었다.

선교를 염두에 둔 행사인 건 틀림없지만, 꼭 그렇게 표를 내야 하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듯이, 조용히 자선을 베풀면 더 빛날 걸 왜 모를까.

찬송가 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졌다.
모두들 입은 흥얼거렸지만, 빵 생각뿐이었다.

“주여! 이 가난한 빈민들을 어찌해야 하나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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