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미술가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오는 10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동화씨는 격정에서 경건이라는 제목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의 예술은 이성이나 사유가 아닌 본질적 감성의 촉수를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인지, 내눈에는 우리민족의 한과 분노로 읽힌 것이다.

한민족의 한과 설음을 토해내는 강렬함이 엿보였던 것이다.


, 화가 이청운, 황재형, 권순철씨처럼 거칠고 암울한 붓 길을 좋아한다.

김진열씨 작품 또한 거칠고 투박함을 좋아하지만, 그만의 또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얼핏 보면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각이 아니다.

여수에 있는연도라는 섬에서 떠내려 온 철판이나 양철 등 폐기물을 주워와

작업의 질료로 이용하는데, 소금기에 절은 철판들은 시뻘건 녹물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걸 자르고, 버려진 마분지를 여러 겹으로 덧붙여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우리 민중들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제작한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칠한 거친 작품들은

외세에 의해 찢기고 분열되어 온 우리민족의 상처 같았다.

그리고 소나무의 투박한 결에서 강인한 민족적 정체성도 느껴졌다.

또한, 우리 민초들과 함께 해 온 장승같기도 하고...


김진열씨의 생김생김은, 마치 임꺽정을 연상시킨다.

임꺽정을 보진 못했지만, 수염만 깍지 않았다면, 꼭 산적 같은 모습이다.

임꺽정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고, 나쁜 놈들을 힘들게 했다.

좌절하지 않고 분노를 삭여가며, 싸우는 정신도 같다.


작가의 조형적 감수성으로 빚어 진, 투박한 노동의 힘,

거기에서 버려진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이 꿈틀거렸다.

말보다 강한, 상징의 힘에서 우레 같은 폭발력도 엿 보인다.


작가는 우리 민중들이 섬겨왔던 거대한 나무들을 모셨다고 했다.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민중들의 분노를 다독이며 위안하는 무속적 주술 같은 것도 읽혔다.


김진열씨가 보여 준, 질기고 강인한 힘은 결국, 우리 사회와 정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진, / 조문호

 

그 날 개막식에는 김진열 내외를 비롯해, 김진하관장, 목판화가 류연복, 사진가 한선영, 화가 장경호,

고옥룡, 김영진, 이흥덕, 송 창씨 등 십 여명이 부산식당에서 유목민까지 옮겨가며 잘 마시고 놀았다.

 유목민에는 불화가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이종률, 전활철, 공윤희, 임경일, 김 구, 노광래,

김기영씨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김진하 촬영













































































 

 

 

 

 

 

 

 






몇 일 전, 동자동 쪽방 촌에 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찍으러 와 보니, 너무 눈물겹습니다.
여지 것 살기가 힘들어 불평만 해 왔는데, 부끄러웠습니다.


한 평 남짓한 쪽방에 사시며 짐이 많아 다리를 못 펴고 주무시는 노인도 많습니다.

그들의 방에 가려면, 대낮인데도 어두워 조그만 후레쉬를 지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 경사진 좁은 계단을 오르다 잘못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들 하는 말이 ‘요즘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몸만 움직이면 무료급식도 늘려있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합니다. 20여명이 사는 쪽방건물에 화장실이 하나뿐이니, 아침이면 곤욕을 치룹니다.

그러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무서운 건 사회로 부터의 소외고 외로움입니다.


지난 추석 무렵, 동자동 쪽방에서 십 여 년 동안 사셨던 박정용(71)씨가 목메어 자살했습니다.

경찰이 가족을 찾아 불렀는데, 10여 년 동안 제대로 안 먹고 모은 돈이 1700만원이나 나왔습니다.

가족이란 자는 돈만 챙겨가고, 시신은 그냥 두고 갔습니다.


어떻게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사진을 찍어드리며, 어려운 실상을 알려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일 뿐입니다.
부지런히 쪽방촌의 비참한 실상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영정사진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찍어 드리며

조그만 위안이라도 되어주고 싶으나, 여력이 없습니다.


5X7사이즈와 8x10사이즈의 사진을 뽑을 수 있는 출력기와 잉크, 종이를 후원받고 싶습니다.

엡숀이나, 캐논 등 여러 회사 중에 동자동의 빈민들을 도와 줄 업체는 없는지요?

혹시, 그 방법을 아시는 분이 계시면 좀 알려 주십시오.



사진,글 / 조문호




























어저께, 동자동 쪽방촌 도시락 나눔 행사에 참여하며 여러 집들을 방문했는데,

그 날 찾아 본 구역의 환경이 서울역 주변 쪽방촌에서 제일 열악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슬럼가로 꼽을 수 있었는데, 아직 그러한 집이나 방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위생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럽게 들릴 정도였다.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좁은 방에 늘린 어지러운 용품들,

자칫하면 넘어질 것 같은 비좁은 계단과 거미줄 같은 전선들이 불안감을 조성했다.

 

문제는 건물주들이 집보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월세만 꼬박 꼬박 받아 챙긴다는 것이다.

어느 입주자의 이야기로는 겨울철 난방비를 정부에서 지원해주는데도,

저녁10시부터 새벽5시까지만 가동시켜, 겨울엔 추워서 지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문짝이나 전기 등, 문제가 있는 시설물도 지자체나 봉사단체에서 해 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그토록 더럽게 돈 벌어 어디에다 쓸까?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대개의 방엔 벽에 붙일 수 있는 얕고 작은 장식장이나, 밖에 별도로 보관할 수 있는 사물함,

그리고 선반제작 등, 방구조에 맞는 맞춤형 목공 지원이 절실했다.

좁은 방바닥을 정리해, 발이라도 편하게 뻗을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무자비한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일 년 가까이 식물인간처럼 사셨던,

백남기 선생의 주검을 두고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공부하는 학생이 권력에 줄 대려고, “시체팔이‘란 괴변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나,

최고의 지성이란 서울대 의사들이 권력에 겁먹어 어린애들도 다 아는 사인을 병사라 적지 않나,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일해야 할 검찰들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시신을 꺼내 한 번 더 죽이려고 몸부림치지 않나,

서민들은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대통령이란 인간은 골프 살린다며 서민들 염장이나 지르는,

이런 개 같은 나라에 더 이상 살아서 뭐하겠나?

이제 마지막이란 각오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양심이라고는 저당잡힌 이 정권을 향해 비폭력저항의 촛불시위 한다지만, 쓸데없이 힘빼지 말자.

죽도록 싸워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사라질지라도, 후손들에게 정의가 뭔지 알게해야 하고,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

모두 나서자! 비명에 돌아가신 백남기 선생을 추모하러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부터 올리자.
그리고 물러서지 말자. 백선생을 죽음으로 몰게 한 세월호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우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냥개에 맞서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는 수밖에 없다.

백남기선생 따라, 부끄러운 이 나라를 떠나자.

그 날이, 닥아 오는 10월1일 오후3시다.

“백남기농민 국가폭력 살인정권 규탄 범국민대회”에 모두들 나서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 청와대까지 쳐들어가 박근혜의 무릎을 꿇게 하자.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들은 지난 26일의 백남기선생 장례식장의 모습과 오후2시에 열린 “백남기농민 상황 및 입장발표“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전기 작가 이충렬씨의 ‘김수환 추기경이 추구한 사회정의와 인간존엄’에 대한 가톨릭 독서 콘서트가

지난 22일 (목) 저녁 8시부터 2시간에 걸쳐 '불광동성당 대성전'에서 열렸다.

강사로 초대된 이충렬씨는 얼마 전 두 권으로 출판된 “아 김수환추기경‘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전기 작가다.

그동안 누구도 하지 못했던 김수환추기경의 삶과 영성을 총체적으로 그려냈는데, 이 책 외에도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등 여러 권을 썼다.


이충렬씨는 강의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가장 관심을 가지셨던 주제가 '인간'이었고,

"모든 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사회정의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말했다.


정치와 사회가 균형을 잃어 정의가 위협받고, 갈등과 이기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소리 없는 자의 소리가 되어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는 보람된 시간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을 바탕으로 진행된 강의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는데,

김 추기경을 영웅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그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던 그의 전기처럼,

항상 낮은 자세로 사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던 추기경의 따뜻한 인간애와

사회정의감에 빠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열린 저자사인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추석연휴인 지난 17일의 인사동은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오죽하면, 사람에 걸려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을 정도였다.

초 저녁부터 장경호씨를 만났으나 ‘유목민’ 문이 닫혔다고 했다.
거리에 사람은 많지만, 골목에 숨은 술집들은 오히려 손님이 없다.
인사동 술꾼들이 사람 많은 휴일은 인사동 출입을 삼가하기 때문이다.

인사동에 그렇게 술집이 많지만, 입맛에 맞는 술집이 별로 없었다.
비싸지 않고, 안주가 맛있으며, 분위기까지 있는 그런 술집 말이다.
술꾼들만 모이면 새로운 술집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술집도 돈 안 되는 작가들의 술타령 보다 매상 오르는 젊은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한 푼이라도 더 남는 것이 장사의 속성이 아니던가.

사람 많은 거리를 피해, 돌고 돌아 피맛골의 ‘불타는 소금구이’까지 갔다.
거리에서 김노암씨 가족을 만나기도 했고,

술집에 도착해서는 주인장 완기씨를 비롯하여, 김기영, 김대웅씨 등 여러 명을 만났다.
인사동의 술집을 골라 다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반가운 벗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옆 좌석의 노래소리 들으며, 주량만큼 딱 막걸리 네 병만 마시고 일어났다.
그 사이 인사동거리에 많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조용했다.
얼마나 거리를 밟았으면, 길이 빤질빤질했다.
버스킹 나선 젊은이들의 처량한 노래소리만, 길 위로 미끄러졌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건너편은 우리나라 대기업 빌딩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굴지의 기업 GS건설빌딩과 전 대우빌딩인 금호빌딩도 있고, 남대문경찰서 뒤로 서울시티타워인 그린화재빌딩과

힐튼호텔, CJ홈쇼핑 건물도 보인다.

그러나 그 거대한 빌딩 틈으로 쪽방들이 코딱지처럼 다닥 다닥 붙어있다.
옛날 사창가였던, 양동을 비롯해 동자동, 도동 등지에 전세 100만원에 월20만원 정도하는 한 평 남짓의 쪽방들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보기로 작정했다.

그 실상을 전해 들어 마음 굳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공식적인 길을 따르기 앞 서, 그들의 실상부터 파악할 겸, 추석 이튿날 동자동을 찾았다.

명절이라 그런지, 동자동 놀이터에 많은 분들이 모였더라.

일단, 그분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갔으나, 나도 모르게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갔다,

개성이 독특한 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마치 공원자체가 연극 무대 같았다.






몸이 불편한 분들이야 나오지 못하지만, 웬만하면 답답한 방안보다 공원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날 공원 곳곳에 낮술을 즐기는 분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 인심이나 담배인심은 좋았다.

처음에는 인사로 권하는 줄 알았는데, 담배가 없으면 아무에게나 담배를 달라 했다.

예전에야 담배 인심 하나는 좋았으나, 담배 값이 비싸진 이후론 보기 드문 미덕이다.






그러나 원색적인 욕설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겉으로는 거칠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진 않겠지만, “야이 씨발놈아”란 말이 일상적인 언어였다.

듣는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걸보니, 그냥 친근함을 나타내는 악의 없는 욕설이더라.


그런데, 그 곳에도 남자들이 여자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성태엄마란 분은 아무 남자에게나 시비를 걸고 쫒아 다니며 진득이를 붙어 결국 도망가게 했다,

가겟집 할머니가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쳐가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날, 세상살이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술에 가두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오죽하면 공원 주변에 술중독자 상담을 위한 현수막이나, 공원에서 술 담배를 즐기는 것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성 플래카드도 걸렸으나. 공염불인 것 같았다.

놀이터에 가뭄에 콩 나듯 한 어린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노인들의 해방구라 그냥 묵인하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런데 놀이터의 분위기를 확 바꾼 것은 하투놀이였다.
한 남자분이 신문지를 깔고 화투판을 벌였는데,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 여섯 사람이 돌아서서 섰다판을 벌였는데, 투전이라기보다 하나의 나누는 놀이였다.

돈을 딴 사람이 구경하는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 뿐 이었다.

가진 자보다 없는 자들이 더 인정이 많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잠시, 환자들이 누워계신 쪽방 몇 곳을 찾아보았다.
어떤 분은 귀가 어두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어떤 분은 내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있지만, 찾지 않는다는 분도 계셨고, 죽는 날만 기다린다며 체념한 분도 계셨다.

다들, 복에 없는 돈보다는 사람 사는 정에 목말라 했다.

그렇지만 한 푼이라도 생기면 가난한 자식에게 주고 싶다는 말씀도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게다. 다시 찾아 올 날을 적어드리고, 물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서울역 주변에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사는 쪽방촌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다들 가난을 물려 받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 뿐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으로 사는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라도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초생활 수급비 60만원에서 집세 20만원을 제하면 남는 게 뭐있겠나?

임대료를 도와주거나, 추위나 더위, 화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절실했다.

내일은 양동과 도동 방향을 돌아보고, 월요일부터 작업에 들어 갈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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