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준비로 정신없이 보내다, 아내에게 미루고 정선으로 갔다.
고추도 따야 하지만, 기가 빠져 자연의 충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 날 밤 서울은 더워 잠을 설쳤는데, 귤암리 조양강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젊은이들 레프팅 행렬로 강은 울긋불긋 요란했다.

밭에 달린 고추는, 빨리 안 따면 병들 것이라며 협박해댔다.
밤이 되니 쌀쌀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없는 반찬에, 소주 곁들여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드러누워, 방문 너머의 하늘을 보니 달이 훤했다.
취기의 등짝은 노골노골하고 찬바람까지 솔솔부니, 심신이 편안했다.


그래도 님은 그립더라.
이백의 명시 ‘월하독작’이 생각난다.


사진,글 / 조문호
















사진가이며 소설가인 정영신은 지난 30년간 전국의 오일장 600여개를 전부 돌아보며, 시골 장터사람들의 인정미 넘치는 삶을 흑백사진과 맛깔스런 글에 담아 왔다.

이번에 열리는 ‘장날’사진전은 80년대 초창기사진으로 사람 사는 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진가의 장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색깔을 덜어낸 흑백질감과 합쳐지며, 사람 사는 정과 사라져가는 것들의 애잔함이 마치 마술처럼 되살아난다.

물건 파는 일보다는 사람 만나는 일이 즐거워 장에 나온다며 곰방대로 담배연기를 연신 뿜어내는 할머니, 장바구니 사이로 목을 내민 강아지의 정겨운 모습들이 사진 속에 살아 꿈틀거린다. 따가운 햇살에 양산을 받쳐 들고 앉은 모습은 정겨우면서도 눈물겹고, 자기 몸집보다 큰 봇짐을 머리에 얹고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향의 풍경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묵혀진 장맛처럼 의미가 진해진다.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이 사진들은 전자제품처럼 각박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반성하게 한다. 돈이 최고의 가치기준인 오늘,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잃어버린 이웃에 대한 그리움, 기층 민중에 대한 애정을 돌아보게 하는 사진전이다.

“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 수 있다”는 정영신은 오일장들이 마켓에 밀려나며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장날은 지역경제의 모세혈관 역할을 톡톡해 해내며, 그 지역만의 문화를 담아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형마트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계절을 만날 수 있는 곳 또한 장마당이란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장에 가면 따뜻한 인정이 고향처럼 반긴다며 마트에서 주는 포인트 대신 사람의 손으로 건네주는 덤을 직접 체험해 보라고 권한다.




전시제목 : ‘장날’ 사진전
전시기간 : 2016년 8월24일- 8월30일 (개막식: 24일 오후6시)
전시장소 : 인사동 ‘아라아트’5층 (02-733-1981)
전시작품 : 디지털 프린트 110cm X 164cm 6점
디지털 프린트 40cm X 26,6cm 46점
사진집출간 : 눈빛사진가선29호 ‘장날’ (눈빛출판사) 12,000원











사진만 떠돌고, 찍은 이가 밝혀지지 않은 사진이 있습니다.
해방이 되며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감격스러워 만세 부르는 수감자들의 모습으로,

추측 컨데 신문사 기자가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오래된 역사자료집에 실려 있었고, 이젠 인터넷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빚진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은 작가를 몰라 원고 사용료를 드리지 못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고인이 되었겠지만, 무덤이라도 한 번 찾아가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행여 사진의 주인을 아시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그 내막은, 내가 사진을 처음 시작할 무렵인 40년 전 ‘감격시대’란 이름의 대규모 학사주점에,

이 사진을 메인사진으로 활용했습니다. 간판과 로고는 물론, 음악신청용지에도 그 사진을 사용했거든요.

복사한 사진을 술집 한가운데, 2m나 되는 크기로 프린트해 걸었는데도,

사진입자가 거칠었지만, 사진이 주는 분위기 자체가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주점은 경남 진주의 불난 극장을 인수해 친구와 동업 했으나, 문을 여니 손님이 미어터졌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라, 친구를 잃을까 물러났습니다.

돌려받은 투자금으로 마산에서 제2의 감격시대를 열었으나, 쫄딱 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젊은 손님들을 모으려면, 가장 마음이 들뜨는 이브나 연말에 맞추어 문을 열어야,

그 손님이 이어지는데, 시설을 하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 뒤, 빚내어 부산 서면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란 제목의 피난시절을 상징하는 술집을 다시 열었으나 손님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에 서울로 야반도주했는데, 내가 떠난 이후부터 손님이 몰려들어 인수자는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 것이 화류계와 마지막인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와 돈과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돈 안 되는 사진이었지만, 그동안 열심히 찍고 마시며 잘 살았습니다.

어제 광복71주년을 맞아 불현 듯, 그 때 그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의 느낌을 찾으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유진규의 ‘왜놈대장 보거라!’ 퍼포먼스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할 수는 없었으나, 공연을 끝낸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갈음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날씨가 장난 아니다.


집구석에서 빈둥거리는데도 이리 더운데,

뜨거운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울까?
집이 너무 더워, 아내와 바람 쐬러 나갔다.

마침, 라이카를 고쳐왔기에,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돌아가며 이 것 저 것 찍어보고 후레쉬도 터트려 봤는데, 멀쩡했다.
본 처로 사용할지 애첩으로 사용할지는 더 두고 봐야겠다.

나간 김에 마켓에 들려 막걸리와 연어 뼈도 하나 샀다.
마누라와 맛있게 구워 먹은 건 좋은데, 또 덥기 시작한다.
궁여지책으로 물통에 찬물 받아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올 여름 최고의 피서였다. 종종 이용할 생각이다.

내일 광복절엔 유진규 8,15퍼포먼스 ‘왜놈대장보거라!’보러 가야겠다.
오후3시부터 5시까지 서대문형무소 격벽장에서 한단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817일 오후의 인사동 거리 풍경이다.

남자가 여자 한복을 입은 꼴 볼견 패션으로 인사동을 웃겼다,

이젠 패션도 젊은이에겐, 하나의 놀이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여자들 기에 눌리니, 여성우월성에 편승하고픈 잠재적 욕구는 아닌지?

 

오후6시 무렵에는 인사동 아라아트’5층에서 열리는 조명환사진전 출판기념회에 들렸다.

그런데 사진전에 사진가는 없고, ‘농심마니회원들만 잔뜩 모인 것이다.

난 아라아트김명성씨의 저녁식사 초대로 나왔으나, 바쁜 일이 있어 나 올 사정은 아니었다.


일단 전시장으로 오라해서 들렸는데, 사실인즉 사진전 출판기념회에 부른 것이었다. 

아마 박인식씨 부탁으로 연락한 모양인데, 기분이 나빴다.

요즘 '농심마니'모임에 잘 나가지 않으니, 김명성씨를 통해 쓰리쿠숀을 친 모양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행사에 노래 하러 나온 송상욱 선생께서 작가가 어느 분이냐고 묻는 것이다.

아마 그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농심마니’회원들 박인식씨 연락으로 온 듯 했다.


난 '농심마니'에 나간지가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조명환씨는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노광래씨의 유카리전시나 농심마니모임에서 한 두 차례 만났을 뿐이다.

일전에 전시 안내장을 전해 받았으나 바쁜 일 재켜두고 나갈 형편도 아니지만,

사진 자체가 풍경에 대한 전형적인 아마추어 시각이라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일로 의뢰하지 않는 건 무턱대고 나서지 않기로 해 일정표에 메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농심마니' 모임에 가기 싫으냐 하면, 적 잖은 회비 낼 형편도 아니지만,

미팅장소인 '로마니꽁티'에서 마시는 와인을 즐기지 않으니, 항상 마음의 부담만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으로 대신하긴 하나, 싫은 자리에 더 이상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새로히 추진할 작업에다, 사진 정리하기도 바빠 시간적 여유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박인식씨가 조명환씨 전시에 집착하는지,그 것이 궁금했다.

산 사진이긴하나, 일전에 전시한 임채욱 사진과의 격차를 알면서도

무료대관 추진에다 오버한 서문까지 쓴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를 축하해주고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 나이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에 억지로 동원되는 것 자체가 싫고,

초부터 생계대책으로 시작한 문화알림방에 대한 일의 원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농심마니'와의 단절을 알리기 위해서다.


아무튼, 작가를 비롯하여 백기완선생, 농심마니 회장 박인식, 작가의 오랜 친구였다는 도예가 김용문, 황예숙,

시인 송상욱, 김명성, 이만주, 화가 강찬모, 서길헌, 연극연출가 기국서, 그리고 노광래, 박기성, 최유진, 공윤희,

이상훈, 정영신, 강경석, 박성식씨 등 대략 50여명이 참석했고, 뒤풀이는 산수갑산에서 가졌다.

 

사진, / 조문호















































































 

장 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20160824-20160830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초대일시 / 2016_08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라아트센터

ARA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Tel. +82.2.733.1981

www.araart.co.kr




장날은 느림의 미학이다. /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쫓아다닌 정영신의 장날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그는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정영신-장날-1988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솔직히,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이라 하지만, 난 팔불출이란 소리들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 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들의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는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장날-1987  구례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과 인간에 대한 정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장날-1990 무주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거나 지워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장날-1986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위에서 내려 보고 찍을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 조문호(사진가)




정영신-장날-1988  청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추억으로 가는 문 / 정영신의장날은 추억으로 가는 문이다. 이미 사라졌고, 잊힌 풍경이라 여겼는데, 벽돌 벽이 문으로 변하는 마법처럼,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정지된 것 같은 평면 안에서 이야기가 솔솔 새어 나온다. 사진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느새 20년여 전, 혹은 30년여 전으로 들어가 있다.


내가 처음 장을 보러 간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현금이 워낙 귀해서 계란으로 돈을 사서 차비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계란 몇 개를 가지고 가면 며칠간 차비를 쓸 수있었다. 그런데 계란을 팔 수 있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편하게 팔 수 있는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고, 가장 먼 곳은 장터였. 처음 가져 간 계란을 팔았던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다. 느그들 차비 해사 씅께, 이 닭알 가지가서 폴아갖고 오니라.”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계란 한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이런 것은 엄니가 폴아사제. 학생이 어띃게 계란을 다 폴로 간다? 그라다 깨져불기라도 하먼, 우짤라고.” 장에 갈 시간이 없응께, 안 그라냐, .”

아무리 버텨 보아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농사에 정신이 없었고, 무거운 가방을 든 형의 눈빛은 완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란 개수를 줄이는 협상을 하였고, 짚으로 싼꾸러미 대신 계란 세 알을 주머니에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 안이었다. 그 당시의 통학 시간대의 버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손님을 실었다. 사람을 태운 것이 아니라, 람을 쟁여 실었다. 더구나 장날은 더 심했다. 짐이고 사람이고 실을 대로 실은 버스가 차장의오라이!” 소리에 출발을 하면, 기사는 직선의 길도 갈지자를 급하게 그으며 차를 몰았다. 차의 오른쪽에 타고 내리는 문이 있었으니, 차의 왼쪽으로 사람이며 짐을 쏠리게 하였던 것이.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실제로 넘어진 버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버스 한 번 타고 나면, 책가방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이나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용케 의자에 앉았다고 해도 편할리가 없었다. 함부로 열린 창문으로 책가방이며, 짐이 날아들었고, 이 질질 흐르는 짐도 유리창을 통해 닥쳐오는 판이었으니, 아무리 멋쟁이 여학생이라도 장날 통학버스를 타고 나면 거지꼴이 되었다. 거기다가 새끼줄에 묶여 있던 닭이라도 풀리는 날이면, 옷이며 머리며 가릴 것없이 닭똥이뿌려지며, 물크덩하고 따뜻한 닭똥세례에 오리까지꽥꽥 소리로 음악을 연주해대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아니라 고통과 아우성과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통 같았다. 계란 세개를 주머니에 담고 있었던 나는 버스를 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계란이 깨지지 않게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계란 하나 값이 차비보다 비쌌다. 계란 하나를 팔면, 왕복 차비가 되었으니, 요즘 시세로 한다면, 계란 하나에 2천 원 내지는 3천 원은 하였던 것이다. 나는 호주머니보다 가방이 더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란을 가방에 넣었다.



정영신-장날-1989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버스는 역시 만원이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나, 우리 마을의 아이들과 장꾼들 20여 명이 더 탈 수 있었다. 그때의 시골버스는 고무로 만든 버스 같았다. 그 후로도 적잖은 손님을 더 태웠으니, 고무중에서도 신축성이 대단히 좋은 고무로 만든 버스였음에 틀림없다. 주머니에 있던 계란을 책가방에 옮기고 나는 초긴장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읍내까지 갈 동안 가방을 사람들 머리 위로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것도 쉽지 않아서 두 손으로 가방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가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인력으로는 막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버스에 탄 후 가방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있자,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형이 대신 가방을 들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내 책가방은 읍내까지 배달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 가방을 열어 보니, 그렇게 고이 간직해 온 계란 중 하나가 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의 풀잎을 뜯어 책과 공책과 가방 안을 닦아냈. 하도 귀한 계란이라 어지간하면 먹었을 것이지만, 으깨어진 계란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 계란이 갑자기 미워져서 장터에 가서 팔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학교 앞 점방에 주고 말았. 그 점방에서는 계란 한 개당 70원을 쳐주었다. 계란 판 돈을 받아 든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땅히 300원 정도를 받아와야 하는데, 내가 내민 돈은 140원이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계란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일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란 하나가 깨졌다는 말에 어머니는 안타까워했지만, 나무라지는 않았. 어머니가 알고 싶은 것은 어디에다 계란을 팔았냐는 것이었다. 학교 앞에서도 계란 받어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계란이 학교 앞에서는 70원 쳐주고, 장터에서는 100원 쳐준다는 것을 어머니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가격 차이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부터 계란을 팔 때면, 꼭 장터에 갔다. 그것도 어머니의 단골집으로 갔다. 단골집 아주머니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낫게 값을 쳐주었으며,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내입에 물려 주었다.




정영신-장날-1989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장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집합소였다. 닭이며 오리 같은 가축은 물론이고, 온갖 생선과 과일에, 보지도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까지 거기에 가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그릇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릇가게, 세상의 모든 진기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잡화상, 수백 가지의 옷들이 걸려 있는 옷가게 등. 나는 서울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장터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짜장면 집에서 풍겨 나오던 음식 냄새였다. 중학교 입학식 날 먹어 보고는 다시는 먹어 보지 못했던 짜장면. 그것은 지상 최고의 음식이었고, 후루룩 빨아먹다가 혀까지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음식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 장터에 많았던 것은 물건이나 다른 짐승들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막걸리집에서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짐을 다 싣고 장터로 들어서는 구루마도 있었다. 그렇게 구루마를 끌고 온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지를 먹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도 장터였다. 장을 보러 온 사람 중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지만, 물건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특히 노점에 앉아 물건을 파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의 손은 새카맸고, 주름이 많았으며, 갈라진 데가 많았. 즉 장터는 어머니들의 삶의 터였고, 그녀들의 생활력이 살아있는곳이었다.



정영신-장날-1989 고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내 어머니도 몇 번 좌판에 앉은 적이 있었다. 산에서 채취한 버섯이나 나물 같은 것은 물론이고, 깻잎이나 오이나 고추를 따서 장에 내다 팔았다. 특히 버섯은 상당히 비싼 값을 받기도 하였는데, 어머니는 며칠간 따온 버섯 중, 비싼 것과 싼 것을 나누어, 싼 것은 집에서 먹고, 싼 것은 죄다 장에 내다 팔았다.

친구 중 하나는 병영이라는 곳에서 유학 온 아이였는데, 자취생이었, 공부를 잘했다. 나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장터에서 멸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그 친구는 홀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잘살고 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성공하고 바르게 살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나아가 장터의 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러 몇몇 집에서는 눈속임을 하기도 하였다. 쌀집의 되는 일반 가정집의 되와 달라서 쌀집에서 쌀 한 되를 팔아와 집에 있는 되에 담아보면, 9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꾼들 저울은 눈금도 다르다고 하였지만, 모든 장사꾼들이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더러 눈속임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눈속임 뒤에 덤이 있었기에 웃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사꾼들은 단골 장사를 했기 때문에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고는 사람을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 좋은 물건을 눈에 보이는 데에 얹고, 물짠 물건을 그 아래에 깔아 놓는 것이야, 눈속임이 아니라, 포장의 기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는 지명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지금은 그냥토요시장이라 불리는 장흥의 옛 장터만 보아도, 십여 가지의 지명이 따로 있었다. 전머리, 비석거리, 쇠전머리, 지전거리, 주막거리, 진골목, 온뚝길, 겟똥 등 지명마다 골목마다 장소마다 그 나름의 풍광이 살아있던 곳이 옛 장터였다. / 이대흠(시인)



정영신-장날-1988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작업노트 / 난 전라도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촌사람이다. 어렸을 적, 장날은 잔치 날처럼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삼식이 아버지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다다르면, 여인네들이 이고나온, 보따리가 하나둘 실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동아재가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풍경은 고향에 남겨 둔 내 흑백사진이다.


남도 땅에서 처음만난 최씨할머니는 장에만 나오면 뱃속이 다 시원하다며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일후, 다시 찾은 장마당에서 하얀 고무신에 꽃분홍치마를 입은 최씨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도 땅의 색과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따스한 햇살아래 포근한 인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아련한 추억을 그리며 장날을 찾아다닌 게, 30년째다.



정영신-장날-1988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장에서 일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손을 놀리면 아깝다고 한다. 그 손의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 나도 모르게 손을 덥석 맞잡곤 한다.이 날 팽상 흙만 몬지고 산께, 손이 짜잔하지라. 이손으로 새끼 덜 맥이고, 갈쳤제.” 오롯이 장에 앉아, 오고가는 계절을 헤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보자기를 풀면, 밭과 산과 들판이 한쪽씩 따라 나온다.



정영신-장날-1989 장수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35X24cm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기록이다. 옛날 필름 속에 지역의 문화와 생활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좀 더 열심히 작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도 장을 지키며,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은 있다.아직도 장날이면 삼대가 한 공간 안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세대 간의 정을 나누는데, 꾸밈없는 사람들도 있다.

  

'눈빛출판사' 발행 / 정영신 '장날' 사진집 



장날은 여전히 인정이 오가는 문화의 텃밭이고,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거울이다.그러나 장마당 풍경도 인심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돈의 논리에 그 훈훈한 인정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도는 그 때 그 사람을 만나러 오늘도 배낭을 챙긴다. 우리 모두, 인정 한 사발 마시러, 장에 가자. / 정영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올 정초부터 시작한 ‘문화알림방’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
행사 사진 찍어 블로그 올리고, 보도자료 보내는 등, 열심히 나팔 불어 재꼈으나,
일거리가 별로 없다. 대개 가난한 예술가를 상대 하는 일이라 손 내밀기도 힘들다.
처분만 바라지만, 대부분 알고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 어물쩍 넘어간다.

십 만원이 그리 큰돈인가? 아니면, 내가 공들인 게 부족한가?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난처한 일이 생겨버렸다.
언론사 리스트를 뽑아 보도자료를 보내지만, 열어보는 기자가 별 없었다.
백 명 보내면 열 명이 볼까 말까다. 어떤 사람은 신문에 나지 않았다고 환불도 요구했다.
아무리 바빠도 정보 자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직접 나서자.'
그 때부터 페북에도 올리고, 전시리뷰를 언론사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냥 주는 원고라 대부분 실어주었으나, 그 때부터 상황이 역전되었다.
언론사에서 사용했으니, 일한 품삯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진 원고료를 챙겨주어야 할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명감 하나로 어렵게 끌고 가는 가난한 신문사에 손 벌릴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스스로 나서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가깝고 도와줘야 할 분이라도, 본인의 필요에 의해 부탁한 일만 하기로 했다.

일이란 개인적인 정리보다 공평해야 하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말고 너그러이 양해하기 바란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나도 모르겠다.
원칙에 의한 자존심이거나, 홍보해야 할 현실이거나 오로지 작가 스스로 판단할 뿐이다.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는가?



사진 : 정영신, / 글 : 조문호





지난 늦은 오후 무렵,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 부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저녁 술자리를 어디서 만들까 망설이자, 대뜸 ‘은평해물탕’이 맛있다고 했다.
우리 집 옆의 ‘은평해물탕’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몇일 전, 친구가 그 곳에서 해물찜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 싸 왔다더라고 말했다.
우린 긴 세월 그 집 앞을 지나치고 다녔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 때서야 “맞아! 그 집 해물탕 맛있다는 소문 들었어”라며 아내가 맞장구 쳤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 말처럼 난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식당에 들어가 주인아주머니를 보니, 지나치다 자주 본 분이라 안면이 많았다.
해물찜을 시킬까? 아구찜을 시킬까? 망설이다. 해물찜으로 낙찰했다.
둘 다 먹고 싶었으나 가격이 45,000원이라 한 가지 밖에 시킬 수 없었다.
해물 찜은 너무 맛있어 소주가 술술 넘어갔다.

그런데, 노인자씨가 요즘 너무 바쁘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태극권이란 운동 배우러 강남으로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이젠 강사로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산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 용문까지 가르치러 간다는 것이다.
쥐꼬리 만한 강사료 받아가며...

“아~ 돈 많은 사모님께서 말년에 뭔 고생을 사서 하신단가?
이대감, 하루 종일 고생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저녁상이라도 좀 차려주지..“
이 말 하려다 그만 쑥 들어갔다. 세상물정 모르는 원시인 소리 들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성상위시대라 여성이 배위에서 노는 세상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 그런기 아닌기라...

두 내외가 떠나고 나니 슬슬 장난기가 도졌다.
무더운 날씨에 술이 취하니, 온 몸이 쩔쩔 끌었다.
옷을 홀딱 벗고, 좁은 방에서 스트립 쇼를 해댔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권총을 꺼내 들이댔다.
마침, 선풍기 바람이 커텐을 날려줘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 일 날 뻔 했다.
거시기만 나왔다면, 음란서생에 찍혀 쪽팔려 다니겠는가?

“폐친 여러분! 전, 본디 퇴폐적인 인간이오니 널리 양지 하시옵소서”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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