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형작 '알혼섬' 2016 캔버스에 연필 162.2X112.1cm



‘춘천시문화재단’에서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강원 춘천까지-가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지난13일에는 역사학자 주재혁의 ‘바이칼과 아리랑’에 대한 강연도 있었다.
“바이칼호반 원주민 부리아드 코리족은 코리안(고려인)이란 종족이름을 가졌다, 이태리인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바이칼호반 코리족들은 ‘아리랑’가락이 본래 당신네 가락이 아니고 우리 가락이었다고 말했다”며 우리 민족의 뿌리였음을 강조했다.



길종갑작 '바이칼 답사기'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개막식에는 참여작가인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황재형, 황효창씨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최형순, 춘천문화재단 상임이사 이치호, 화가 함 섭, 장경호, 노용춘, 전강호, 도예가 신동여, 사진가 정영신, 하재은, 최용주, 목공예가 류정호, 시나리오작가 최근모 등 100여명이 참석했으나, 대개 모르는 분이 많았다.



권용택작 '바이칼-오대산천까지' 2016 캔버스에 아크릴, 먹 324X260.6



이 전시는 바이칼 현장답사를 해가며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으려는 기획 의도는 좋았으나, 준비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 원형의 동질성이 작품 여기 저기 드러나 있고, 작품 곳곳에 선조들의 영혼이 떠도 는 것 같았다. 



이재삼작 '달빛' 2016 charcoal on canvas 80x194cm


 
이재삼의 작품 ‘달빛’은 ‘저 알혼섬이 영혼의 섬은 아닐까?’하는 몽환적 분위기로 끌어들였다. 물안개의 미묘한 질감 또한 이재삼의 목탄화가 아니면 아무도 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황재형 역시 목탄으로 그린 작품이 있었다. 높은 절벽아래 이는 물빛을 담은 알혼섬’이란 작품은 대자연의 위엄 속에 마치 선조들의 혼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권용택의 작품 ‘바이칼-오대산천까지’는 바이칼에서 시작된 우리민족의 이동경로가 느껴지고 있었다. 수원화성과 오대산, 바이칼에 이르는 대서사가 한 프레임에 나누어지고 있었지만, 이질감 없는 동질성으로 응축되었다.
 


황효창작 '바이칼의 혼'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cm



인형을 통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황효창의 ‘바이칼의 혼’은 나무에 얼 킨 오방색 천으로 우리 무속신앙의 원형을 보여주었으며, 길종갑의 작품 ‘바이칼 답사기’의 강렬한 원색적 터치는, 알혼 섬이 맑고 깊은 생동의 기운으로 넘치게 했다. 김대영의 ‘알혼섬의 사랑바위’는 그의 방식대로 오방색과 왕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바이칼을 시원의 의미를 가진 민족의 양수로 표현하고 있었다. 김용철의 ‘바이칼의 노래’는 아리랑이라는 음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동질성을 나타냈다.



김용철작 '바이칼의 노래' 2016 한지위의 아크릴릭 250x90cm



  서숙희작 '바이칼 가는 길-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채색 117x73cm



또한 서숙희의 ‘샤먼을 부르는 바람’이라는 작품은 바이칼에 이는 바람을 그렸는데, 그 시적 분위기가 독창적이었다. 신대엽의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이란 작품은 옛 풍속도나 신선도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묘미가 있었다. 우리민족 고유의 가락 잡힌 낙천성이 깃들어 있었다. 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사람에서 찾았기에,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남자의 몸을 바이칼 호수 변에 세우기도 했다. 




 신대엽작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 2016 리넨에 먹과 채색 210x400cm



전시장을 메운 작품들은 텅 빈 가슴을 어루만지는 한 구절의 시, 내면에 깃든 잠재력을 일깨우는 음악, 새로운 힘이 솟게 하는 춤사위 같이 감상자들을 피안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김대영작 '알혼섬의 사랑바위'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130,3cm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최형순은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작가들이 바이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담은 아리랑으로 펼치는 우리민족의 이야기가 다채롭다. 강원도 작가들의 전국적인 유명세도 상상이상이다. 불의에 기웃대지 않는 작가적 자존심도 그 크기에 못지않다. 살아있는 땅의 역사에 살을 부비며 그 안에 깊숙이 배어있던 모습들도 그대로 들추어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려하는 진실의 태도를 거기서 배운다. 미래를 맞는 준비도 거기서 가능하다. 이들이 펼치는 그 미술 자체가 겨레의 노래이며 아리랑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글 / 조문호



조문호 작 '바이칼에서 길종갑' 2016 잉크젯프린트 110x 210cm








 




어제가 울 엄마 제삿날이다.
아버지 제사 지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제사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한다는 옛 속담이 실감난다.

마누라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독감에 끙끙댄다.
죽어도 제사상은 차려야하니, 지켜보는 내가 더 죽을 맛이다.
없는 돈에 장보아, 찌지고 뽁아 상 차렸다.
누님과 동생까지 찾아와, 옛이야기 비벼 잘 먹었다.

사실, 힘들게 장만한 음식이지만, 귀신이 먹는 게 아니라 사람이 다 먹는다.
먹고 남은 음식이면, 닷새 동안은 매끼마다 제삿밥을 먹을 수 있다.
제삿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동안 반찬걱정 안 해도 된다.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옛날에는 살기 힘들었으니, 골고루 영양보충 하기는커녕
끼니를 거르는 게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은 건과 같은 제수는 다음에 쓰고 싶어도, 못쓰게 했다.
한 번 올린 제수는 다시 쓰지 않는다고 못 박아 두었으니,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삿날이라도, 골고루 잘 먹으라는 배려였다.

그런데, 그 좋은 미덕을 미신으로 모는 서양귀신들로 풍비박산 직전이다.
이 제사도 서양귀신에 홀린 형님께서 내 쳐, 내가 이어 받은 것이다.
가족들도 남북 갈라지듯, 제삿날에 다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좆도 모르는 것들이 탱자탱자 하는 것이다.


사진,글 / 조문호


사진- 좌로부터 전시기획자 최형순씨와 참여작가 길종갑, 김대영, 서숙희, 조문호, 권용택, 신대엽, 황효창, 김용철, 황재형씨



‘춘천시문화재단’에서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강원 춘천까지-전시가

지난 13일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가 기획되며, 오월 중순경 바이칼 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며 망설이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바이칼 답사를 떠나는 취지는 이해되었으나 기간이 너무 임박해 자칫 중구난방의 전시가 될 확률이 높은데다,

결국 참여 작가들의 작업비를 여행경비로 소진하는 것이 가난한 작가 입장에서는 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내가 내놓은 남자 알몸 사진을 두고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집행부를 향한 길종갑씨의 투덜거림으로 대충은 짐작했지만, 뒤늦게 황화백이 귀띔해 준 것이다.

‘춘천문화재단’ 관계자들의 생각인지, 미리 겁먹은 기획자 최형순씨의 생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보수적인 안목으로 어떻게 전시를 추진하는지 걱정스러웠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역사학자 주재혁씨의 ‘바이칼과 아리랑’에 대한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사진만 찍고 강연은 듣지도 못했다. 그마저 멀리서 온 분들이 기다리고 있어 입구로 나와 버렸다.

화가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오래 전 모델에 되어주었던 도예가 신동여씨와, 화가 전강호씨가 와 준 것이다.

당사자들을 자신의 사진 앞에 세워 기념사진을 남기려는데, 갑자기 ‘우두둑 꽝’하는 굉음이 전시장을 메웠다.

돌아보니 강의 듣던 황재형화백이 뒤로 나 자빠지고 있었다.

황소 같은 황형의 무게를 프라스틱 의자가 감당하지 못해 의자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몸은 커지만 예민한 양반이라 살아남았지, 나같이 멍청한 사람이라면 뇌진탕으로 갈 뻔한 사고였다.

정말 황화백은 대단한 분이었다. 바이칼 답사 때도 사진과 동영상으로 세세히 기록하는 열성을 보이더니,

출품작 여덟 점 중 전부가 바이칼을 소재로 한 신작이었다.

불과 한 달 보름동안 그 대작들을 다 그렸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한 두 점도 힘들게 마무리했다는데, 이건 꼼짝 않고 그림에만 메 달렸다는 이야기다.

그의 투철한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막시간이 가까워오자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들기 시작했다.
'춘천문화재단' 이치호 상임이사, 화가 함 섭, 노용춘, 사진가 정영신과 하재은씨, 목공예가 류정호씨,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 ‘아트인라이프’상임이사 최용주씨가 있었으나, 대개 모르는 분이 많았다.

미술평론가 최형순씨의 간단한 작가소개가 있은 후, 황재형, 이재삼씨가 나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품들을 둘러보다, 참여 작가들의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모두 불러 모았다.

아내더러 사진을 찍으라고 카메라를 넘겨주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이재삼씨가 빠져있었다.

찍기 직전에 분명히 전시장에 있었는데, 어디로 빠졌을까?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쨌든 이차까지 넘어 간 뒤풀이에서 꼴리는 대로 놀았고, 술도 어지간히 마셨다.
두 번 째 납치되어 간 곳은 어느 전망 좋은 호수 가였는데, ‘갤러리 파코도노’라 적혀 있었다.
놀란 토끼처럼 전시장을 비롯해 여기 저기 돌아다녔는데, 한 쪽에는 노래방기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막걸리와 소주는 없을 것 같았는데, 대신 위스키가 나왔다. 누구 주머니를 터는지는 몰라도 신나 부렀다.

오랜만에 촌놈 목구멍에 때 벗기느라 바빴다, 술 마시랴! 사진 박으랴! 춤추랴! 노래 부르랴! 정신없었다.

아! 그런데 밤 열시가 되니 슬슬 불안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전철이라도 탈 요량으로 살그머니 빠져 나와 버렸다. 재미있게 노는데, 간다면 판 깨기 십상이잖아.

그런데 그곳이 어딘지 한참을 걸어 나왔는데도, 택시는 물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가게하나 찾아 콜택시 전화번호를 얻긴 했지만, 상봉역이 종점인 전철만 남아 있었다.

살았다 싶어 퍼져 앉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들여다 보니 장경호 전화였다.

“아이쿠! 장경호를 남겨두었구나”, 뒤늦게 사태파악을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전화통에다 지랄 같은 욕을 퍼부어 댔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뿐, 너무 열 받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술이 취해 잠에 빠져들었는데, 얼마나 잤는지 승무원이 깨웠다.

택시비 적게 내려고 상봉역에서 돌고 돌아 독립문이 종착지인 3호선을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한시가 넘었는데 , 일찍 온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 없느냐고 묻기에 장경호를 흘리고 왔다 했더니, 당신 치매아니냐며 나무랐다.

“야! 고마 자빠져 자자. 알아서 하 것지. 지가 한 두 살 묵은 아가? ”


사진,글 / 조문호





























































































































황재형작 '칸차르다흐 2016 캔버스에 유채 162.2x112.1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춘천까지-


최형순 / 미술평론가







황효창



바이칼의 혼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200x200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길종갑


바이칼 답사기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화전 2014-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7점)


화악산기 2015-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김대영



알혼섬의 사랑바위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 x 130.3


숲길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 97


상춘의 봉의산길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 97




김용철



바이칼의 노래 2016 한지 위의 아크릴릭 250x90







조문호



길종갑 2016 바이칼 110x210


김의권 1991 울산 언양 110x210


전강호 2008 양주 송추 110x210





권용택



바이칼-오대산천까지 캔버스에 아크릴, 먹 324.4x 260.6


오대천의 수달 2011 캔버스에 아크릴 162x 130


산불 2000 캔버스에 아크릴  184x 73





황재형


알혼섬 2016 캔버스에 연필 162.2x 112.1


역사는 선비와 함께 흐른다 2014,7 캔버스에 목탄과 짚신 259,1x 162,1


아! 이르쿠츠크 2016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97x162.2 /  33,4x53





이재삼



달빛- moonscape- 2016 charcoal on canvas 80x 194


달빛- moonscape- 2013 charcoal on canvas 227x 543


달빛- moonscape- 2009 charcoal on canvas 259x 582






서숙희



바이칼 가는 길 - 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17x 73


바이칼 가는 길 - 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62x 97


반짝이는 나무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16x 73





신대엽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 2016 리넨에 먹과 채색 210x 400

 번개시장 2007 순지에 먹과 엷은 색 200x 250


백작도 2015 순지에 먹과 엷은 색 162x 127





충무로 갤러리브레송 오는 20일까지




후덥지근한 장마철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전이 열렸다.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의 ‘청춘길일’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숱한 전시를 하였건만, 고국에서는 처음 있는 전시다.


몇 일전,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들을 보아 기대는 했으나,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전시장 가득 돈 냄새와 여자냄새, 마약 같은 찐득한 냄새들이 진동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듯,

내면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전시를 보고 말한 미술학자 이태호 교수의 말이 적확했다.

“고급스런 하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질스런 고급문화를 본다.

양승우의 사진을 보면 그동안 우리 다큐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참으로 소심하고

착하게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본 작가의 첫인상은 폭력배처럼 우락부락한 것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겸손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력을 읽었을 뿐이다.






조직 폭력배로 삶을 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친구가 사진 찍는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내세우는 사회에 감춰진 이면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에 앞서,

사진가로서 죽은 친구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사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스스로에게 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명분 있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양승우 사진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돈 없는 죄와 못 배운 죄를 짊어 진

사회적 약자에 다름 아니며,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찐득한 모습 뒤에 인간적인 애잔함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양승우의 사진이 껄끄럽거나,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 그렇지, 어느 정도의 양면성은 다 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섹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전시장에 오는 도중 충무로 역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차가 밀려 내려가 앞 차를 받았다.

경미한 충격이라 내려 보니 차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인사사고를 접수하라는 것이다.

영업용기사야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지내며 일당을 받을 욕심인지 모르지만,

뒷자리에 앉은 보험회사원까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예전에는 목이라도 움켜지며 아픈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의리 하나로 뭉쳐 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양승우는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에 전전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가부키초의 야쿠자를 시작으로 고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곤타씨 등 서너 개의 테마를 동시에 찍었다.




20여 년 동안 열 번 이상의 사진전과 네 권의 사진집을 냈고, 열 번 이상의 사진상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의 ‘인 비트윈 아트 갤러리’ 소속작가지만,

여전히 일용직 노무자로 일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참한 현실이다.





언급한 이력이나 유명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진들이 주변을 오가며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함께 즐기며 찍지 않고는 이렇게 강력한 소구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교도소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각오로 온 몸을 바쳐 즐기는 사진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전시된 사진들은 옛 친구들과 놀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폭집단의 실상이지만, 일본의 야꾸사들을 찍은 사진집도 펴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조직폭력배 친구들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달랐다.

찍으려는 작가의 진정성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마저 허문 독창성이 있다.

주변의 누군가에 카메라를 쥐어 주고는 자신이 사진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양승우의 사진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누가 셔터를 눌렀나 보다 함께 교감하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진가가 찍어 온 야쿠샤, 노숙자, 동성애자 사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듯 친밀하게 다가 온다.

어디가 진실이고 허구인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신이 당하는 현실 속의 분노와 욕망의 찌꺼기까지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의 솔직하고 과감한 접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을 담아낸 이 자전적 기록들은 누가 뭐래도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사진가이건만, 살아가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에 들어 와 살고 싶지만,

한국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들어, 그나마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산단다.

그 것도 몇 년 동안 길거리에 노숙하며 살았는데, 사진과 재학 때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사진가 양승우

전시 개막식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고집스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오신 여성분들이 볼 때는 제 사진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진이냐?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싸울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답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27집’ 양승우사진집 “청춘길일”이 나왔다,

가격은 12,000원이다.







 
▲배연신굿, 굿을 지켜보는 김금화만신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서해안 풍어제’ 정기공연이 지난 7월2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소래포구에서 열렸다. 첫날의 대동굿은 어시장에서열렸고, 3일의 배연신 굿은 소래포구에 정박한 배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서해안 풍어제는 본래 황해도 해안 지방에서 정월에 치러졌던 풍어제였다. 이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서해안풍어제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의 공동제사였다.

소래포구에 정박한 뱃머리에는 무신도를 올려 세운 굿청이 마련되어 있었고, 배위 여기저기 무당들이 둘러앉아 부산이나 지화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이란 짚으로 동그랗게 엮은 일종의 땟목이다. 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고 불을 붙여 바닷물에 띄우는 것으로 부정을 가시는 것이다.

한 쪽 구석에는 김금화, 김매물 만신이 앉아 있었는데,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모든 준비나 굿은 오태운, 조성연, 김혜경, 이순애, 오순근, 박이섭, 김태진씨 등 조교나 이수자들이 진행했다. 굿판에는 선주를 비롯하여 김용희 인천남동문화원장,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등 많은 분들이 함께 어울렸다.


▲배연신굿, 갑판에서 내려다 본 굿청


화려한 복장을 한 무녀들의 춤과 악사들의 떠나 갈 듯한 장단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에 서낭기, 호기, 장군기에 서리화, 봉죽, 백모란 등의 화려한 지화장식과 선주들의 오색 뱃기가 줄지어 장관을 이루었다.


뱃사람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배연신굿은 바다 위 선상에서 펼쳐지는 뱃굿이라 흥미롭다. 개인 뱃굿이면서도 내용이나 형식,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가는 굿인데, 연희적인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배연신굿, 김금화만신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그리고 신내림을 받은 강신 무당들이 벌이는 굿판이라 춤사위가 별신굿보다 훨씬 격렬하다. 신청울림, 상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울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그물올림, 쑹거주는 굿, 다릿발용신굿, 강변굿 등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배연신굿, 대감놀이굿을 하는 박영선무당


배연신굿의 절정은 먼산장군거리였다. 이순신, 최영, 임경업 장군 등을 모시는 거리로 소머리에 삼지창을 꽂아 거꾸로 세우고, 손으로 쳐서 쓰러지지 않으면 굿을 잘 받은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이 날도 한쪽에서 조용히 굿을 지켜보던 김금화 만신께서 제대로 서지 않았다며, 다시 세우라고 불호령을 날렸다. 영험함이나 예능적 끼를 타고 난 김금화 만신이지만,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배연신굿, 먼산장군거리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우리민족문화의 뿌리는 무속이었다. 악기나, 소리, 춤, 모두가 굿에서 비롯되었다. 기쁨이나 슬픔, 바람들을 굿으로 풀며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타파니 허례허식이란 억울한 죄명에 밀려난 것이다.


▲배연신굿, 무신도를 세운 굿청의 전경


오래동안 전통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만 인식시켰으니, 불손하고 거친 시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무대에서는 예술이 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까지 저급문화로 홀대하는 이들이 많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배연신굿, 배로 이동하며 흥겹게 춤추고 있다.





지난 28일은 장모님께서 아흔 일곱 번째 생신을 맞는 날이었다.
폐암말기에다 고관절이 무너져 누워만 계셔야 하는 몸이지만,

백 미터 정도의 가까운 병원에 모셔두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아내의 효심을 갸륵하게 여겼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버텨 내신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연세노블병원’에서 '노블요양원'으로 옮긴 지는 몇 일 밖에 되지 않았다.

마치 고려장에 끌려가듯,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버티셨지만, 더 이상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블요양원'의 시설이 좋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으나, 마치 호텔 룸 같았다.

2인실 방안에 화장실은 물론 갖가지 가전제품이 다 마련되어 있었다.

돌보는 요양사 또한 친절하고 부지런해 전혀 불편함이 없으나 장모님께서는 늘 부루퉁해 계신다.
“아무리 좋아도 집보다 못해야~”라는 말에 차라리 저와 자리를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했다.

장모님의 적적함을 달래려, 생신날을 하루 앞둔 지난 일요일, 처가 식구들을 모아 파티를 마련했다.

아래층의 넓은 휴게실을 빌려 멋진 생일파티를 벌이려던 계획에 그만 차질이 생겨버렸다.

담당직원이 없어 에어콘을 가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더위를 못 참아 바람이 통하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는데,

등산 갔다 온 처제 내외는 아예 바닥에 돋자리를 깔아 버렸다.

한꺼번에 자식들과 손주들을 보게 된 장모님이 좋아하셨지만, 오래 앉아 계실 수가 없었다.

좀 있다 병실로 옮겼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애주가 동서 이기남씨의 발동으로 요양원옥상에다 술판을 벌여 놓았으나

준비한 술이 모자라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옮겨야 했다.

방안 구석구석 숨겨 둔 술병을 다 끄집어내는 통에 나도 맛이 가 버렸다.

젊은 처가 식구들 면전이지만, 체통이고 지랄이고 다 벗어 던져 버린 것이다.

꼰대 소리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 버릇 개 주지 못하는 걸 어쩌겠는가?

술 마시다 다시 요양원에 들려 생일 케익 자르는 것으로 생신잔치는 끝냈다.

그런데 동서내외는 술이 취하면 꼭 노래방에 끌고 가는 버릇이 있다.

난, 기계에 끌려 가며 노래 부르는 것 자체를 싫어해 가급적 피하는 편이지만,

멀리 서 온 조카들 분위기 맞추려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무반주로 요상한 노래를 불렀지만, 처제 내외도 정신없었다.

소리를 너무 질러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와는 반대로 젊은 조카들은 차분하게 노래를 잘 했다.

그 날 함께했던 처제 정주영, 이기남씨 내외를 비롯해 심지윤, 김중오, 정호원, 유진숙,

정성태, 김소연, 김현아, 김희중, 김유원 등 모두들 와 주어 고마웠고, 즐거웠어요.
다들 바쁘지만, 틈틈이 할머니 뵈러 오세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올림픽을 앞 둔 86년, 청량리 역전의 금성 광고판 제작현장이다.
문구처럼 기술 정상에는 접근했는지 모르나, 정치나 사람들의 정신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이제 구호를 바꾸자.
“인간성 정상에 도전하자”고...

1986년 청량리 / 조문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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