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라면, 바이칼은 한민족의 시원이다. 풍족한 호수라는 뜻인 바이칼의 영성적인 기운을 찾아 동시베리아 남부도시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춘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이어졌다.


오는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이 기획전에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민족 DNA속에 내재된 신화 속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로, 바이칼 호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작업에 반영시키는 프로젝트다.


우리 민족 DNA의 원류를 찾아...바이칼호수는 세계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



▲아직 눈이 녹지않은 설산과 호수에 깔린 기운이 심상찮다.(사진=조문호)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숲과 완만한 구릉의 초원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이며, 네 시간 넘게 달려서야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여름철 성수기를 대비한 진입로공사와 부대 시설물 신축으로 부산했다.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몰려드는 관광객 수용을 위한 최소한의 일로 보였다.


▲바이칼호에서 연결된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사진=조문호)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몰려드는 투자자들로 본래의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이칼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로 최고수심이 1,620m이며 길이 636㎞, 평균너비 48㎞, 면적 3만 1,500㎢나 되는 제주도 절반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호수에 있는 물이 다 빠져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330년이고, 담수량은 미국 5대호를 다 합친 것 보다 많다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알혼섬을 감싼 호수 왼쪽에 악어바위가 보인다.(사진=조문호)


 5억년이나 된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으로 구성되며 호수 바닥의 퇴적층 두께는 무려 6,000m에 이른다. 호반 가까이에는 사화산들의 지각변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끔 심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기후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온화해 1~2월의 기온은 평균 -19℃이고 8월평균기온은 11℃가량이다. 호수 면은 1월에 얼고 5월에 녹는다. 8월의 수면온도는 약 13℃이고 해안에서 가까운 얕은 곳에서는 수면온도가 20℃에 이른다.



▲알혼섬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부르한 바위.(사진=조문호)


파고는 4.5m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호수는 광물을 거의 함유하지 않아 수심 40m 까지 들여다보이며 염도도 낮다. 특히 이곳에 서식하는 민물세우가 물을 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하다.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위나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약 3/4은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다.


▲하보이언덕을 향하는 협곡.(사진=조문호)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오물’같은 고유종으로 특히 연어류가 많이 잡힌다. 가장 큰 종류는 철갑상어로서 길이 1.8m, 무게 120㎏에 이르며, 코메포리다이과에 속하는 골로먄카라는 수명이 짧은 물고기도 서식한다. 그 중 유일한 포유동물은 바이칼 물범이며, 주변지역에는 326종의 조류와 곰이나 사슴도 서식한다.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 그 중심에 신비한 영기가 서린 알혼섬 


바이칼호수에 있는 26개의 크고 작은 섬 중에서 알혼 섬이 가장 큰 섬으로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바이칼호수가 시베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면 알혼 섬은 바이칼호수의 심장이라 했다.



▲샤먼의 근거지답게 열세개의 세르게가 줄지어 서있다.(사진=조문호)


바지선에 실려 알혼 섬으로 들어갔더니, 사륜구동 우아직이란 별나게 생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누어 타고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로 향했는데, 원주민 기사의 운전솜씨가 만만찮았다. 두 대중 한 대는 번호판도 없는 무적차량인데, 사고 나면 끝장이겠다는 생각에 모두들 가슴 조려야 했다. 비포장 길을 얼마나 달리는지 마치 미쳐 질주하는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알혼섬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차분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기암괴석들, 넓은 해변, 호수와 산, 하늘과 맞닿은 풍경들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하게 다가왔다.



▲땅끝 지점의 하보이 언덕에 선 신목.(사진=조문호)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해변이나 다름없는 호숫가로 몰려 나가니 석양을 받은 호수는 금빛처럼 빛났고, 그 옆에 버틴 오방색 천에 감긴 신목에서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저절로 큰 절을 올리며,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제발! 저의 악업을 거두어 달라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20여 년간 끌어 온 작업, ‘생명’전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산과 바다나 늪지 등 전국의 성스러운 자연과 함께 담아 온 남성 알몸 찍기에 화가 길종갑씨가 마지막 모델로 나서 주어 가능했다.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이르쿠츠크의 통나무집들.(사진=조문호)



바이칼서 25년간 미완의 남성 알몸 찍기 ‘생명’전 마무리, 화가 길종갑씨 마지막 모델로


그 찬 호수 물에 정갈히 몸을 적셔, 기를 모아 주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웠으면 거시기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바이칼호수에 발만 담가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온 몸을 담가 영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미안한 마음은 좀 덜었던 것 같다.




▲하보이언덕 나뭇가지를 휘감은 오방색 천.(사진=조문호)


92년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30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나, 그 중 두 분이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촬영에 응해준 분들은 전시 후에 사진을 드린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늘 마음의 짐이 되어왔다. 항상 집에 걸어두고 죽은 후에는 영정사진으로 쓴다는 약속이 무산된 것이다.


사실 ‘생명’전 작업을 여지껏 마무리 하지 못한 원인은 팔리지 않는 전시인데다,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속의 육신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해 세우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번 기획전의 내용과 맞아 떨어져 밀어붙여 버렸다.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김치식당, 김치찌게가 일품이었다.(사진=조문호)


알몸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해방되려 본인 사진부터 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내 가족들이 익숙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고 나면 영정사진으로 쓰라고 아내에게 당부도 해 두었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모두들 웃으며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취지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데, 울고 불며 야단법석 떨면, 떠나는 망자의 마음이 편하겠나? 재수 없어 될 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 전통사우나인 반야라는 독특한 체험도 했다. 이는 장작불에 달궈진 조약돌에 물을 끼얹어 거기서 나오는 증기와 열기로 체온을 덥히는 일종의 증기욕인데, 자작나무 잎으로 몸을 두들기니 은은한 자작나무향이 온몸을 감싸 올랐다.




▲바이칼 호수변에서 인물스케치를 하는 화가.(사진=조문호)


자작나무 사우나 '반야'와 지금도 생각나는 바이칼 생선 '오물'


자작나무로 몸을 두들기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밖에 없어, 내가 황효창선생을 두들겨 드리려 했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설마, 시원하게 두들기지, 아프게야 할까?”


체류기간동안 사람 입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도 재차 실감했다. 몇 일간 보드카 좀 마셨다고, 그 좋아하던 소주가 싱거워 못 마시겠더라.


이튿날은 우아직에 실려 바이칼 북쪽 끝으로 내달렸다. 탁 트인 언덕위에 올라서니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더라.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한이 깊은 호수로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호수에 깔린 성스러운 공기,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내 몸속으로 베어드는 신성함에 빠질 수 있었다.



▲바이칼만의 생선 '오물'을 말리고 있다.(사진=조문호)


그런데, 도시락으로 싸왔던 '오물'이란 생선을 영 잊을 수가 없다. 생선을 쪄서 가져왔는데, 젓가락 없이 손으로 먹어야 했던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발라 먹었으니,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겠지만, 옛말처럼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정답이었다.


알혼섬에서 가장 영기가 센 바위로 불리는 부르한바위(일명: 샤먼바위)에는 대제국을 호령한 징키스칸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빼시안카에는 돌덩이 부두와 건물잔해만 남았지만, 구 소련시절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 터도 있었다. 그 곳을 지나 최북단에 이르니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가 보였다.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사진=조문호)


자식을 바라는 염원의 자리로 왼쪽 봉우리에 서면 아들, 오른쪽 봉우리에 서면 딸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유독 붉은 기운을 내뿜는 ‘삼형제바위’를 비롯하여, 사자머리와 악어형상을 한 바위 등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조망할 수 있었다.


샤먼의 고향 바이칼, 매년 샤먼축제, 샤먼은 삼(三)과 안(하늘天, 신神)의 글자 합, 삼신할머니 유래


샤먼의 고향인 바이칼에서는 매년 세계 샤먼축제가 열린다. 샤먼이란 말은 삼(三)이란 글자와 안(하늘天, 신神)이란 글자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가 쓰는 표현을 빌리면 삼신할머니란 삼신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문도 샤먼에서 나온 단어이다.


삼안이란 단어는 아주 먼 옛날부터 북부 초원지대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쓰여 왔다. 이것을 서양학자들이 듣고 자신들의 발음으로 옮긴 단어가 샤먼이다. 이 샤먼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 관습 등 관련문화를 샤머니즘이라 말한다.



▲칼호이저 야시장에 옷가지를 팔러 나온 할머니.(사진=조문호)


칭기즈칸이 통치하던 시절, 라마교의 탄압으로 바이칼이 샤먼들의 유일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부랴트족의 조상이라 불리는 호리도이의 신화가 숨 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이칼호수의 여러 신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는데, 그 중 흰 독수리 형상의 옷을 입고 지내던 '한후테-바바이’의 아들인 ‘한쑤부-노이온’이 최초로 탱그리(하늘신)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데, 그 탱그리 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점도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바이칼에서 아만에서 아빠, 엄마 나와


기록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곳이 바이칼이다. 나반과 아만에서 아빠, 엄마, 아버지, 어머니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래서 영어의 마마와 파파처럼 전세계 언어권에는 비슷하게 발음하고 뜻이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탄생한 호수여서인지 호수 성분도 어머니의 양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 칼호이저 야시장에서 옷사이즈를 재보는한 남성.(사진=조문호)



그리고 몽골족의 하나였던 부리야트 족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브리야트족은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가장 닮았다. 발길 닿는 곳곳에 솟대와 신목, 그리고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펄럭였다. 알혼섬 곳곳에 남은 샤머니즘의 흔적들이 우리민족의 발원과 유력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원주민들 눈빛과 표정 친밀감,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부터, ‘나무꾼과 선녀’,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


여행 중 두 차례에 걸친 세미나에서도 우리민족과의 동질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효창선생은 도처에 남아있는 샤먼의 흔적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거대한 자궁이라 말해 온 황재형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향을 찾은 듯 너무 편안하다고...



▲코발트의 물빛 층이 신비롭다.(사진=조문호)


야시장에서나 숙소에서 만난 원주민들의 눈빛과 표정들도 한국 사람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그렇지만, 솟대와 장승, 신목 등 우리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미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나 DNA까지 조사한 역사학자들의 고증들이 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큐영화감독 이창주 만나 금정 산성막걸리에 맛이 갔다.


졸라 노래부르며 셀프로 찰깍~,


근데, 내가 봐도 징그럽네!

마치, 하마가 암컷 찾아 울부짖는 것 같다.


이런 음주사진은 불법 아닌가?

난, 술마시면 운전은 못하지만, 사진은 찍는데...

취권이 아니라 취사란 말 알랑가 모르겠다.​










▲조문호 사진가


어버이날이 부끄럽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장모님께서는 이런 저런 병으로 십 여 년을 병상에 계신다.

올해로 아흔 다섯인 장모님은 폐암 말기에다 양쪽 골반이 무너져 내려 오랜 세월 고생스럽게 연명하고 있다.

두 번씩이나 산소공급기를 차단하자는 병원 측 제안에도 지극정성으로 살려 낸 아내의 효심이야 갸륵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장기간 환자를 돌보다보면 정신적, 육체적 나아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쩔쩔매며 병원으로 일터로 쫓아다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장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해,

그냥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불효를 저지르지만,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긴 세월 병원비를 내다보니 환자가족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닥아 오는 게 간병비였다.

직접 간병하면 되겠으나, 한 푼이라도 벌기위해 일터로 나서야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문제는 그 간병비를 악덕 병원 업자들이 착복한 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알았을 때는 너무 분통이 터져 병원 측에 항의도 했다.

그래도 시정되지 않아 언론사의 지인에게 하소연했더니 오래 된 관행이라 했다.

“노인복지 노인복지” 노래를 부르는 이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을 빼 먹지, 벼랑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노인들의 등을 치다니...

그렇게 더럽게 축재해, 돈 되는 노인 병원 확장에 혈안 되어있다.

문제는 보건 복지부에서 이러한 부정을 방치하며 등짐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다.

장모님이 입원하신 서울 녹번동의 노인병원에는 한 병실에 다섯 명의 환자들이

오늘 내일 하직할 날만 기다리며 연명하고 계시다.

병원비만 보내며 거들떠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마저 지쳐버려, 다들 말을 잊고 사신다.

이 분들의 간병비 부담은 하루 37,000원이다. 다섯 분이니 185,000원이 된다.

다섯 환자를 한 사람의 간병인이 돌보는데, 하루 60,000원을 받는단다.

나머지 125,000원은 어디로 갔는가? 수많은 병실이 있으니 그 착복하는 돈은 엄청나다.

환자들의 피해도 커지만, 간병인들의 대우도 엉망이다.

간병비를 적게 주려고, 약점 있는 조선족 여인네를 고용하는가 하면, 칠순이 된 할머니까지 간병인으로 쓴다.

대부분이 중증 환자인데, 그분들의 대소변을 혼자서 제대로 받아내겠는가?

그들이 병원에서 지내는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교대할 사람이 없어 밥도 간신히 짬을 내어, 서서 먹는다.

그리고 탈의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잠은 쪽잠을 잔다.

병원 측에서는 간병업체(소개소)에서 소개비뿐만 아니라 월 회비 등 각종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기 때문이라지만,

그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것을 정부에서 보조하고 관리하여, 모든 운영시스템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애정과 더불어 안전 및 사회적 공감의 욕구를 가진다.

이중 애정에 대한 욕구는 식욕,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다.

그런데 고령사회가 급속도로 진행 중인 우리의 현실은 노인들의 상위욕구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욕구마저 보장돼 있지 않다.

가정과 돈에서 소외된 노인들의 급증은 인간적 도리마저 짓밟는 비정한 사회로 만든다.

노인 문제라는 시한폭탄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는 물론 국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외로움으로 치닫는 한국 노인들의 이 암울한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환자는 간병비 부담 덜어 편하게 간병 받고, 간병사도 병원에 직접 고용되어 환자들이 더 좋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만 있다면, 환자는 물론 간병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법적 제도적 장치를 하루속히 마련해 가난한 서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바란다.


- 서울문화투데이-




지난 4일 오후7시부터 구미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소극장에서

구미문화도시만들기에서 실시한 제2기 구미시민문화예술 아카데미 사진 강좌가 있었다.

 

한 달 전 구미예총지회장 이한석씨로부터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난감했다.

30여 년 전 삼육대학 사진반 강좌에 갔다가 혼줄 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강단에 올라서니, 나를 보는 눈동자에 주눅 들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간은 메웠으나, 그 뒤부터 일절 강연은 사양해 왔다.

그러다 한 2 년 전 갑작스레 불려 나간 적이 있었는데, 술기운에 넘길 수 있었다.

 

50만원의 강사료면 우리 집 한 달 생활비니 이젠 사양할 처지도 아니었다.

한 시간은 내가 맡고, 한 시간은 아내 정영신씨가 맡기로 작정한 것이다.

강사료 욕심에 허락은 하였으나 사실 걱정되었다.

아내야 한동안 IBS에서 강연한 적이 많아 염려할 것 없으나,

난 사진학자가 아니니, 일단 경험담에 대한 자료들을 준비했다.

 

강의 당일 정선에서 출발해, 서울을 거쳐 구미로 내려갔다.

버스터미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딱 소주반병만 마셨다.

아주 기분 좋은 상태라 만나는 사람 모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먼저 장터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풀었다.

아내 강의도 처음 들어보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잘 했다.

 

아내의 조언에 따라 준비한 원고는 무조건 무시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홍순태 선생님에 대한 추모 묵념을 시작으로

사진 최고의 가치는 기록에 있다란 주제로 구라를 풀었는데, 술술 풀렸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버려, 못 다한 말로 아쉬움까지 남았다.

술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젠 방법을 알았으니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기념사진 찍고 나오다, 사진가 이한석씨와 이성석, 하준호씨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 그를 따라 술집부터 찾아 나섰다.

이한석씨는 80년도 초반 무렵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라는 동아리 맴버였다.

그 당시 이한석씨와 김아타, 조성제, 심경희, 장정수씨 등 열 몇 명이 최민식,

김복만, 이준무선생의 지도를 받았으니, 서로 할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밤 열한시에 떠나는 열차시간을 기다리며, 술과 옛이야기에 비벼 놀았다.

 

누가 술을 원수라 했던가? 적당히 마시면 약이던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오랜만에 정선 만지산에 들렸다.
일에 쫓겨 차일피일 미루다, 그 많은 더릅이 피어버려 못 먹게 되었다.
쌉쌀한 맛에 소주한 잔 하려던 생각은 고사하고, 선물할 곳도 많아 걱정이지만 어쩌랴!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꼭 가는 집이지만, 요즘은 기름 값 걱정에 그마저 못 갈 때가 많다.
이번엔 야채파종과 축대를 보수하려 했으나, 막상 부딪쳐보니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언 땅이 풀리면 밭을 오르는 계단이 허물어져,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해야 하는 일인데다,

돈 못 버는 주제에 야채라도 많이 심기위해 빈 땅을 개간했으니 접힌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고추가 주종이었으나 개간 못한 땅엔 옥수수를 심었는데, 윗집 최종대씨가 걱정스레 말했다.

“밭에 전기철망 치지 않으면, 멧돼지가 쑥대밭 만듭니더”

그렇게까지 해 가며 농사지을 생각은 없어, 사람이 먹던 짐승이 먹던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차라리 노동이 필요 없는 딸기 같은 과일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나 살던 집은 손 볼 곳이 많아도 노동력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귤암리에선 제일 오래된 집이 우리 집일 것이다.

한 때 동강 댐이 무산되며 주민들 보상책으로 정부에서 주택건설비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정겹던 옛집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이상한 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옛집의 불편한 점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래된 집이라 수시로 손을 봐줘야 하는데다, 수세식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없으니,

개량주택에 길든 여인네들은 질색이다. 그러나 군불 지펴 따뜻한 온돌에 더러 눕는 그 맛이 쥑인다.

불과 반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집이지만, 구옥을 하나라도 지키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사진만 팔리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하고 집수리도 할 작정이었으나, 매번 공염불이 되고 만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편이 쉬려 정선 집에 갔으나, 이젠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었다.

낡은 집이 남은 내 수명까지 버텨주면 고마우련만, 허물어진 내 몸보다 못하니 그게 문제로다.

차라리 잠자다 무너져내려 같이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푸념에 아내의 핀잔을 받기도 한다.

가족 생각은 아랑곳 않는 무책임한 말에 자괴감은 느끼지만, 이 모순투성이 세상이 싫은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이젠 한 가지 고민이 더 생겼다.

한적한 시골에 살려면 이웃이 좋아야하는데, 염치없는 사람이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본래 살았던 노성수씨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집이 팔렸는데, 새로 이사 온 사람의 무례가 도를 넘고 있다.

이사 올 때부터 이웃과의 인사도 없이,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에 빨간 막대를 꽂아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도 많은데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이제 정선마저 싫어졌으니, 더 이상 내 쉴 곳은 없다.

사진,글 / 조문호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네 번째 작가인 인천 김보섭 론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지난 22일 오후630분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작가 김보섭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남진 브레송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 사진가 한정식, 전민조, 구자호, 엄상빈, 김문호, 강제욱, 고정남, 이영욱, 남 준, 마동욱, 정영신,

곽명우, 박영환, 이 원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함께했다.

 

, 많은 사진가들 중에서 김보섭씨에게 가장 동료의식을 많이 느낀다.

왜냐하면, 사진을 시작한 연대가 서로 같은 데다, 둘 다 사진을 전공하지 않으면서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것,

그리고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동아미술제연작 대상으로 각 각 데뷔했다는 점들인데,

단지 다른 게 있다면 그는 돈이 있고, 나는 개털인데다, 그는 사회 모범생인데, 난 낙제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뭔가를 기록하다 죽을, 쟁이 근성도 똑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보섭씨가 가진 최고 장점은 인간성이다.

쉽게 말하면, 나대지 않는다.

그만큼 좋은 작업을 많이 해, 사진계의 자리를 확고히 지키고 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재력도 가졌지만,

거들대지 않고 사람이 너무 겸손하다. 또한 얼마나 선배들을 잘 모시며 인정스러운지, 때로는 존경심마저 인다.

 

그동안 보여 준 작업으로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기록한 ‘청관이래 개인전과 출판을 열 차례 넘게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0년의 한의사 강영재’, 2006년의 바다 사진관’, 2008년의 수복호 사람들

신포동 다복집’, 2010년의 시간의 흔적’, 2013년의 양키시장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을 정리해 내놓은 이번 전시작들은 이미 사진집이나 전시로 잘 알려진 사진인데다,

이번에 쓴 이광수교수의 작가론 또한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 잘 썼는지, 다시 말하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혹시 김보섭씨의 작품을 잘 모르는 분을 위해 이광수교수의 사진비평 기인같은 한의사의 다락방엔 무엇이 있을까

링크해 둘 테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광수교수의 비평에서, 한 단락만 옮겨두겠다.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서 사라져 가는 공간의 모습은 가족이나 동네 혹은 일터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문화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각 사진 한 장 한 장은 사진 미학적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자료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그의 인물과 정물 이미지는 매우 잘 다듬어진 시어(詩語) 하나, 하나와 같다.

둘이 섞이면 시어로 기록한 민족지가 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그 좋은 사진들을 그렇게 빡빡하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좁은 전시장에 70여점이나 걸어 놓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하나의 사진에 집중이 안 돼,

돌아서니 뭘 보았는지 머리에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표작 너덧 점씩만 보여 주거나,

아니면 작은 사이즈의 사진을 많이 만들어, 중요 요점은 크게 보여주고,

설명적인 사진들을 한 꺼번에 보여주는 효과적인 배열이 필요했다.

 

, 말은 쉽다.

찍는 것도 찍는 것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다.

또 남의 일은 잘 보이지만, 자신의 일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너무 많다.

남의 잔치 집에서 축하하는 좋은 소리만 하지, 왼 시비냐고 투덜댈지 모르지만,

우리가 남이가? 둘도 없는 동료니 감히 드리는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사진으로 자리 매김하는 이런 전시가 만들어짐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조문호

 

김보섭사진과 사진비평가인 이광수님의 글을 보고 싶은분은 링크된 주소로 들어가 보시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202671



한의사 강영재, 2000년


'바다 사진관' 2008년



'수복호 사람들' 2008년



'청관' 1990년



'시간의 흔적'2010년


'양키시장' 2013년


아래사진은 전시 개막식과 뒤풀이에서 만난 분들의 기록입니다.

좌로부터 사진가 전민조, 주인공 김보섭, '눈빛'의 이규상, 사진가 엄상빈씨



























































좌로부터 이 원씨와 조문호인데, 사진은 정영신씨가 찍음.




참 점잖게 생겼네! 브레송 관장 김남진입니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일에서 해방되었다.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님의 점심약속을 핑계 삼아 하던 일을 잠시 밀쳐 둔 것이다.
일찍 나와 가까운 ‘은평평화공원’에서 봄볕도 쬐고, 대조시장에 들려 쑥떡과 딸기도 샀다.

약수역에서 내려 선생님 계신 아파트로 들어서니, 엄청 반기셨다.
그동안 허리가 아파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데,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아보았지만, 별 신통찮단다.
그래도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시는 일은 여전하셨다.

한 때 저축은행장이셨던 윤현수선생의 옥중 편지도 보여주었다.
삼년 후에 큰 백수잔치를 마련해 드릴 테니, 건강을 잘 지키시라는 말씀도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약통을 꺼내 약 한 알을 휴지에 싸 두고는, 나머지를 넘겨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기 뭡니꺼?”라고 물었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비아그라~”라고 하셨다.
세상에!. 선생님 연세에 아직까지 비아그라를 사용하시다니...

이젠 허리가 아파 어려운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횡재한 것이다.
설렁탕집으로 자리를 옮겨, 나를 위해 소주도 한 병 주문해 주셨다.
술이 얼큰해, 이런 저런 고충들을 말씀드렸다.

“술이 깨야 자는 습관으로, 가끔 음주댓글로 말썽을 일으킨다.”고 했더니, ”큰 병이네“를 반복하셨다.
술을 안 마실 수는 없으니, 수면제라도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소주 반병은 인사동에서 마실 작정으로 남겨왔다.
술기운에 인사동을 돌아다녔는데, 날씨 탓인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아라아트’ 공윤희씨를 비롯한 아는 분을 여럿 만나 선생님 하사품인 비아그라를 나누어 주었지만,

낯 술 같이 마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아시면 섭섭할지 모르나, 있을 때 나누어 먹어야, 없을 때 얻어먹거던.

‘갤러리 H’에서 열리는 하영준씨 전시를 둘러보고 집에 돌아왔더니,

내차 유리창에 비아그라 광고 명함이 꽂혀있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짜식~ 번지수를 한참 잘 못 찾았네, 나 오늘 비아그라 생겼어, 임마”

사진, 글 / 조문호
































































▲조문호 사진가



요즘 인공지능 알파고 바람에 말들이 많다.

로봇에 고도의 에이아이가 합해지면 통제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며 걱정들 한다. 감정 없는 에이아이가 인간의 존엄성 위협에 악용된다거나 평범한 인간은 도태된다는 우려도 한다. 그러나 인류에 도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긍정론도 만만찮다. 에이아이는 모든 게 데이터 입력으로 통제 가능하며, 만들고 통제하는 것도 결국 인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기계를 인간의 뇌와 비슷하게 만들까 고민해왔다.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한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은, 이제 인간의 판단력보다 우수한 로봇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봇은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오감을 통해 느끼고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동양의 아날로그 직관력이 더 적중한 시대가 올 것 같다.

문제는 인공지능 로봇이 활용되기 시작하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수백만 건의 법률자료에서 적합한 판례와 조항을 찾아낼 것이며, 수많은 병리적 증상에 적용될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알아낼 것이고, 온갖 변수를 감안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보다 일 잘하는 알파 변호사나 의사를 더 믿게 될 것이다. 벌써 세상에서 살아질 직업들이 줄줄이 나오고, 살아남을 직업도 거론되고 있다. 예측한 일이었지만, 그 살아남을 직업에 예술부문이 제일 먼저라는 말에, 배고픈 예술가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우린 돈 돈하며 너무 기계처럼 살아왔다.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사동을 자주 드나드는 장경호화백이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행님, 사람답게 삽시더” 누군 사람답게 살지 않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구조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게 되어있다. 이미 각종 기계에 빠진 중독증세로 사람보다 기계와 노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물질만능시대에 돈 없으면 사람취급도 못 받는 세상이다. 인간성회복이란 말에 “인간성 좋아하네, 인간성이 밥 먹여주나”하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제 인간성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온다.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면 인간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자동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의의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것은 사람을 위해 사람답게 사는 방법뿐이다. 로봇이 알아서 해주니 편히 살 수 있는 대신, 인간의 상식과 도리를 되찾아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각박해진 우리들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평화와 행복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한다.

노약자들을 배려하거나, 어려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다거나, 이웃과의 교류, 소외된 이웃들에 관심을 갖는 이런 소소한 것들이다. 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회복이다. 내 가족의 안락과 안위를 위해서 오로지 물질적 풍요만 꿈꿀 것이 아니라, 로봇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만의 따뜻한 마음을 되찾자는 것이다.

머지않아 불거질 문제는 분배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없는 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문제는 기존 가치체계를 초월해 평등하게 짜여 져야 하는데, 힘 있는 자들이 만들다 보면 그들이 유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당장 눈앞에 닥친 국회의원부터 사람다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 결국 그들이 인간성회복을 위한 패러다임을 다시 짜야하기 때문이다. 번지레하게 말이나 잘하고, 정치 맛들인 속물들은 절대 안 된다. 재벌들과 관련 있는 정치인은 더 더욱 안 된다. 문제는 아직까지 후보보다 정당을 보고 찍는 국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사람 위주로 뽑자. 착하고 바르게 일 할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을 뽑아야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의 소중한 한 표가 미래의 우리를 죽일 수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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