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나왔을까?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 조문호사진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전시장 풍경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전시장 풍경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석인 시리즈



그렇지만 그 형상을 세겨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석인 시리즈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석인1 / 경기도 시흥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석인3 / 경기도 용인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석인2 / 경기도 수원



가끔은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품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석인4 / 경기도 용인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을 얻었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전시된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글 / 조문호


































 




지난 달, 임재천씨 전시에서 작당한 일이 하나 있다.
인천의 김보섭씨가 민어회가 맛있는 철이라며, 한 번 놀러오라 했다.
모두들 가겠다고 했으나, 술자리에서 오간 말이라 새겨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4일 오후5시, 인천역에서 만나자는 이규상씨의 메시지가 떴다.

그 날은 이명동선생 댁에서 시간을 보내 허급지급 달려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출 수 있어 한 숨 놓았는데,
‘차이나타운’방향으로 나가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김보섭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안미숙씨 내외, 엄상빈,

김 헌, 남 준, 이영욱씨 등 일곱 명이 나와 있었다.

다들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김보섭씨와 남 준씨는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
무더운 날씨라 땀이 줄줄 흘렀으나, 역전의 용사다웠다.
김보섭씨의 안내로 변모하는 차이나타운을 거쳐,
김보섭씨 ‘바다사진관’촬영 현장이었던 만석부두로 옮겨갔다. 

찍을 때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 친숙하게 닥아 왔다.

윗도리를 벗은 채 당당하게 포즈를 취한 그 어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 인간과 연결된 구체적인 장소성이 주는 의미가 현장감을 더했다.

뜻밖에도 김보섭씨의 ‘바다사진관’사진을 인근에서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그 동네에 ‘우리미술관’이란 조그만 갤러리가 있었는데, 마침 초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실, 사진전은 사람들이 많은 서울의 큰 전시장에서 하는 것 보다,
사진의 배경이 되어준 동네전이 사진을 찍은 작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느낀다.
나도 ‘두메산골사람’전시를 그 사람들이 사는 분교를 돌며 한 적이 있기에, 
김보섭씨의 자부심이 점쳐졌다.

여태껏 인천을 여러 차례 오갔지만, 만석부두 후미진 곳을 골고루 돌아 본 적도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현장을 기록해 온 김보섭씨의 안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장답사에서 재 인식된 것은 김보섭씨의 인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었다.
긴 세월 인천의 역사적 현장들을 기록하며, 그만큼 껴안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이런 사람에 감사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 가까이 돌아다니다, 모두들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보섭씨는 식당 집 할머니가 인간문화재급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그 큰 민어를 여유롭게 다루는 걸 보니, 일단 보통 솜씨는 아니었다.
드디어 민어가 상에 올랐는데, 살점을 듬성듬성 잘라 푸짐했다.
입에 들어가니 살살 녹는데, 오죽 맛있었으면, 엄상빈씨는 집사람 걱정을 해댔다.
집에 남겨 둔 마나님 생각에 차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같이 오기로 했지만, 허리를 다쳐 못 왔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끓인 서더리탕 안주에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으나, 술을 자제해야 했다.
술 취해 오버해 대면, 아내가 난처 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누라 눈치도 봐가며, 알아서 기야 살아남는다.
갈 길도 먼데, 부루퉁해 있으면 입장 곤란하거던...

어쨌든, ‘바다사진관’ 답사도 답사지만, 맛있게 먹고,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짬 내 정선 갔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네.
‘우루ㅡ루 쾅’ 천둥소리에 놀란 가슴 삭이며,
일손 놓은 채, 담배연기로 시름 달랜다.

시원해 좋긴 하다만, 밀린 일은 언제 할까?
칡넝쿨은 나무를 뒤덮고, 불 지필 화덕에 코스모스가 웬 말이냐?
텃밭의 상추 대는 하늘로 치솟고, 잡초들만 제 세상 만났는데..

맛도 보여주지 않고, 가버린 님은 얄밉지만,
고추, 옥수수 같이 반겨주는 것들도 남았구나.
공들인 것 만큼 거둔다는 이치 따라, 또 다시 땀을 흘린다.

“아이구! 허리야”
이러다 밤일 못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 억은 그동안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담아왔다.


▲남도풍색, 부분도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도면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남도풍색‘을 비롯하여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남도풍색, 부분도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해 온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해남 땅끝마을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5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덕룡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5cm


김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만덕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cm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작가 김억은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에 전념해 왔다. 우리 국토를 발로 따라가며 마음에 담아온 뒤 나무판을 촘촘히 깎고 그림을 찍어낸다.


▲월출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7cm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여름,가을,겨울,봄’이란 한국화전을 시작으로 수원화성, 한강 등 열여덟 차례의 개인 국토전을 가졌고,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727일 제181


 조문호 사진가


도서관의 수준을 보면, 그 지역의 수준을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도서관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도서관은 국가에서 세운 국립 도서관과 지방에서 세운 공립 도서관, 그리고 학교나 단체에 딸린 사립 도서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각각 하나씩 있고,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학교도서관, 전문, 특수도서관 등 모두 일 만개가 넘는다. 이외에도 등록되지 않은 마을의 소소한 도서관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도서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질이라는 것이다.

도서관은 기록으로 남겨진 여러 가지 책이나 그림, 사진 등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 보관하며, 여러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책 · 신문 등 인쇄물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등의 시청각 자료는 물론, 심지어 녹음테이프, 영상 필름, 마이크로필름까지 보관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과학 등 다른 분야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사진집에 관해서는 한마디로 빵점이다.

난, 사진 찍는 일이나 잡다한 일에 파묻혀 도서관을 자주 찾을 형편은 못되지만, 책벌레인 아내 덕에 종종 들릴 때가 많다. 사실 가난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입장에서 사진집을 골고루 사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에 들릴 때마다 보고 싶었던 책들을 검색하면, 백전백패다. 원하는 사진집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난달 한 평생 ‘골목 안 풍경’만 기록하다 돌아가신 김기찬 선생의 글을 쓰다, 컬러로 찍은‘골목 안 풍경’이 생각났다. 선생의 ‘골목 안 풍경’은 대개 고즈넉한 맛이 우러나는 흑백사진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두 번째 발행된 사진집은 컬러사진이었다. 서재에 분명 꽂혀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도서관을 돌아다녔는데, 어디에도 그 사진집을 비치한 도서관은 없었다. 사료적 가치는 물론, 대중 인지도까지 높은 사진집이 없다니 귀가 막혔다. 신청하면 구해 놓겠다지만, 일하다 나왔으니 마냥 기다릴 처지가 아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출판된 아카이브 ‘골목 안 풍경 전집’은 몇 쇄를 거듭하도록 인기를 끌고 있는 유일한 사진집이 아니던가? 그런 인기 작가의 서적이 도서관에 없다는 것은 다른 사진집은 보나 마다다.

도서관의 조직은 대체로 수서부문, 정리부문, 열람부문, 참고업무부문, 관리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수서부문은 도서관자료를 선택하여 수집한다. 왜 도서관 사서들이 인문학 서적 못지않게 중요한 사진집들을 비치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사진집 중에서도 다큐멘터리사진집은 바로 우리들의 살아있는 역사다.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소구력을 가진 것이 사진이다. 진실의 현장이 기록된 다큐사진집을 비치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서들의 무지를 넘어, 직무유기다.

이제 세상은 암기력이나 지식의 총량이 아닌 상상력과 창의성이 경쟁력이자 성장 동력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우는 데는, 좋은 사진집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이미 세상은 영상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전체 독서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평균 이하이며, 유엔 가입국 중에서도 하위 그룹에 속한다. 더욱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독서 인구와 독서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제 작년 통계에 따르면 한 번도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 않은 학생이 42%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조한 우리의 독서력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빈약하게 하고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도미노 현상을 가져 올 것이다. 따라서 독서력을 높이는 것은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미래의 우리 삶을 향상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사서들이여! 기케로 루보크의 명언을 되새기자.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그림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찍는 것이 다큐 사진, 소외 속 따뜻한 마음 담아내고파"


[서울문화투데이]2016년 07월 29일

인터뷰·정리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본지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많은 전문 예술인들이 직접 자신들의 현실을 기사로 쓰고 칼럼으로 쓰면서 독자들에게 문화의 현실을 알리고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각 분야에서 활동 중인 이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대해 심도있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문화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호기심을 갖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중 독자를 사진의 매력 속으로 초대하고 때로는 사진계, 나아가서는 문화계에 대해 쓴소리를 내는 작가가 있다. 사진작가 조문호. 지난해 '청량리 588' 사진전으로 다시 주목을 받은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진을 찍고,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후배의 사진들을 소개하며, 본지를 통해 문화계의 나아갈 길을 이야기해주는 예술인이다.


그의 옆에는 소설가에서 이제는 '장터사진 찍는 작가'로 더 잘 알려진 정영신 작가가 있다. 이들에게는 '내조'나 '외조'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들은 같이 움직이고 같이 행동하며 같이 생각한다. 비록 '다름'은 존재하지만 그들은 그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부부'에서 '동지'로 발전했다. 정영신 작가가 보여준 장터 사람들의 표정과 조문호 작가가 보여주는 성노동자들의 애환은 얼핏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하루하루를 따뜻한 마음으로 살려는, 우리들의 부모이자 할머니, 누나이자 여동생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렇게 어느 여름날 오후, 본지는 부부를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식 인터뷰'라기보다는 편안한 대화의 시간이었고 '작품 세계'니 '미술계의 현실'을 논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두 '예술 동지'의 인생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편안했기에 더더욱 좋은 이야기들이 나왔던 그날의 대화를 여기에 옮긴다



▲ '찍사 본능!' 기자가 사진을 찍는 사이 조문호 작가가 카메라로 기자를 찍었다. 역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조문호 작가는 어떻게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


조문호(이하 '조')  :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보고 사진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내 촛점은 사람이었다. 작년에 다시 전시한 588 사진도, 그 당시 ‘동아미술제’공모전 주제가 직업인이었기에 접근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상을 받아, 그 곳에 머물며 다시 찍게 된 것이다. 그 전시로 세상의 주목은 받았으나 그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 동강 댐에 반대하며 정선에 머물렀으나, 그 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웃음)


정영신 작가는 본래 소설가로 알려졌고 '장터사진 찍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작업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정영신(이하 '정) :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로 갔다. 장터는 열려있는 공간이라서 누구나 갈수 있다. 더구나 난 산골사람이다 보니 장터가 내가 놀던 시골마당처럼 편안했다. 장터에서 만난 노인들 얼굴속에서 그사람의 희노애락을 읽을수 있어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지금은 장돌뱅이가 된 것이다. 1986년부터 시작해 얼마동안은 장터바닥에서 장터사람들과 장에 나오는 사람들과 놀았다. 그런데 내눈에 장터가 변화는 것이 보여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당시 장터는 우리일상과 똑같았다. 주위에서는 재미없는 작업을 한다며 핀잔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장터에 가면 고향에 두고온 당산나무가 보이고, 당산나무 평상에 앉아 긴 곰방대로 쌈지담배를 피우는 외동할매도 보였다. 땅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할매들과 놀다보면 고향에 온것처럼 내 정서와 딱 맞았다.


1986년부터 시작한 장터는 내 놀이마당이다. 지금 딱 30년째 장터를 다니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옛날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장터는 여전히 열린다. 다만 사람이 바뀌고 물건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 들어 80년대 사진을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사를 보는 것 같다. 왜 좀 더 디테일하게 작업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을 다 촬영해 뿌듯하다.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그래서 요즘은 여유있게 촬영하러 다닌다. 그 지역의 햇빛과 바람과 땅의 냄새를 담아보려고 한 장터에 오래 머물러 작업하는 편이다.



▲ 사진가 조문호 정영신 부부


지난해 수상자 자격 논란을 빚었던 최민식사진상이 올해는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문호 작가가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다.


조 : 제일 큰 문제는 그 상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심사하는 이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우습게 보는 데 있다. 상도 최민식선생의 휴머니즘 정신을 계승하기보다, 우아한 예술사진에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지 것 끼리끼리 나누어 먹던 갑질을 재탕하다 결국 사단이 생긴 것이다. 심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 둘 밝혀졌으나 다들 묵묵부답이다. 상을 만든 ‘협상재단’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잘 못된 운영으로 문제가 제기되면, 공청회라도 열어 개선해 나가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다 상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런 무책임한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심지어는 운영위원장과 협성재단 측의 밀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혹도 사고 있다.



조문호 작가는 얼마 전 바이칼을 다녀오셨고 본지에 바이칼을 다녀온 글을 기고하기도 하셨다. 현재 그와 관련해 전시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조문호 사진가

조 :  바이칼. 일단 기가 센 곳이라고 생각했다. 무속적인 신기가 느껴졌다(웃음). 여건이 된다면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획전 진행에는 다소 차질이 있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해 다이칼과 관련된 작품을 작가 당 한 두 점 밖에 제작하지 못한 억지춘향 격이 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작가들의 제작비를 여행경비로 전용하는데도 불만이 많았다. 다른 분들은 여유가 있어 여행 다닐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사람에서 찾은 나는 바이칼에서 남자 알몸을 찍었는데, 지방이라는 이유로 그 것도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결국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전시는 했지만, 만약 표현의 자유에 제약을 받았다면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말씀대로라면 기획자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도 조문호 작가가 기고한 글을 보면 다큐 작가들이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그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작가들의 삶이 힘든 상황인데...


조 : 상은 그런 사람들에게 줘야한다. 어렵게 살면서 자기 스타일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정 : 한국에서 소신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잖나. 제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막노동해서 작업하고 돈 모아지면 사진 찍는 이들이 많다.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봐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 산다. 이는 제도로는 고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어느 정도 자신의 작품을 지키기위 해 막노동을 선택한 것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렵더라도 활동하는 이들을 돕고 싶다. 그래서 남편에게 소외된 곳으로 가라고 떠밀고 있다(웃음). 혼자가 안되면 같이 가서 할 것이다.


두 분의 사진을 보면 '인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정 : 장터는 열린 공간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에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다 들어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도서관 대신 배낭하나 메고 시골장터로 가 할머니와 얼굴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두꺼운 책에서 얻지 못한 지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이다.


조 : 전혀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정면으로 찍어보면 차이가 확연히 난다. 결국 상대와 얼마나 소통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사람을 찍으려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찍히는 사람의 눈빛을 중시하며 정면사진을 많이 찍는다.


정영신 작가의 사진을 보면 따뜻한 느낌이 담긴 사진이 많다.


  
▲ 정영신 사진가/소설가

정: 장터사람들은 스스로 소외당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이들도 많다. 겉으로 보면 가난하고 소외된 듯 하지만, 몇 천원, 몇 만원을 벌기위해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숭고함이 묻어있다. 장터에 나오는 사람들은 옛날 우리의 정서와 한을 갖고 있어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자체가 따뜻하다.


경상도 장터에서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 중풍걸린 남편을 리어카로 장터까지 데려와 장사하면서 온종일 남편을 보살폈다.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이고 친구를 불러와 어눌한 남편과 이야기를 시키면서도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던 할머니 모습이 한동안 눈에서 떠나지 않더라. 노부부가 살아내는 삶을 보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오히려 장터에 가면 내가 더 많이 배운다.


사진을 찍다보면 간혹 촬영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을텐데


정: 장터에 가면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는다. 장보러 온 사람처럼 온 장안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돈다. 친해지면 오후에 사진을 찍는다. 농사얘기부터 시작해 자식이야기 하다 보면 금새 친해진다. 그다음부터는 다 응해주는 편이다.


조 : 사람을 찍으려면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예전에 588 사진 찍을 때도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결국 나의 진정성을 읽고는 허물없이 촬영에 임해주더라.


조문호 작가가 이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 "사진은 편하게 찍어라"라고 말했더라. 사실 말은 쉽지만 막상 편하게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조 : 다들 근사하거나 예쁘게 찍으려 하지만, 그게 안 좋다. 그 사람의 개성과 마음이 읽혀져야 좋은 사진이다. 요즘은 인위적으로(예를들어 포토샵 등) 시선을 분산시키는 장애물을 쉽게 제거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가 말하려는 포인트만 확실하면 그대로 두어라, 나중에 그 배경이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다큐사진은 결국 정확한 기록이다.


정 : 요즘 뉴스도 너무 특종 위주로 가는 것 같은데 사진도 그런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찍는 토대가 있어야할 것 같다.


두 분에게 있어 '카메라'란


정 : 내 친구다. 어디든 같이 갈 수 있어서 좋다. 종종 카메라를 놓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차표를 두 장 사거나 카메라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 정도로 친구다.


조 : (콤펙트 카메라를 꺼내며) 이 카메라로도 충분히 작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게 없어지면 정말 내 몸 하나가 없어진 것 같고 불안하다. 언제든 찍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비싼 카메라는 아니지만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부부'를 넘어 '예술적 동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다면


조 : 이해심이 많다. 정말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지(웃음)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웃음). 우린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것은 밤낮으로 함께 다니며 쌓은 동지애가 힘이 된 것이다. 마누라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사진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도 간섭도 하지 않는다. ("더 좋은 부분도 있지 않냐?는 질문에) 조(팀워크)가 너무 잘 맞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촬영가자면 반대하지 않는다. 어려운 형편에 전시를 하겠다면 한 사람은 말려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주변에서는 우리 내외를 불안하게 보지만, 우리는 오늘만 있지,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정 : 남편을 보면 집중을 잘한다. 작업에 온 정열을 바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간혹 안좋은 쪽으로 정열을 바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웃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는다. 정말 어떤 일을 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멋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고 있고 많이 배운다. 그렇기에 터치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을 다 촬영한데는 남편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난 아직까지 운전을 못한다. 기차타고 버스타고 혼자 다녔으면 아마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후배 사진가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조 : 간혹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답시고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말도 안 된다.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짓이다. 생태사진은 물론 풍경사진도 자연 그대로 찍어야 한다.


정 : 접근 방식이 다 다른 것 같다. 장터의 예를 들자면 종종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니라 풍경 찍듯이 그냥 찍고 인물을 찍어도 그냥 바쁘게 찍고 돌아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면서 찍기만 하는 것이다. 10분이라도 찍기 전에 미리 장에 대해 알고 어떤 인물을 찍어야할지를 생각해야하는데 아쉬움이 있다.


조 : 그림처럼 멋지고 예쁘게 찍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져 그런 것이다.


현재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조 :내년이 민주항쟁 30주년이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구입하겠다고 했는데, 마지막 결제라인에서 보류되었다고 하더라.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돈으로 할 일이 많은데... (웃음) 오는 9월에는 내가 칠순이라고 후배가 창원에서 전시를 열어 준다고 했으나, 전시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그리고 작업은 쭉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최근 종로에서 몸을 팔며 생활하는 새터민들이 있다고 들어, 그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8월하순경에 80년후반에 찍어놓은 옛날장터사진집이 '눈빛출판사'에서 나온다. 사진집이 나오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8월24일부터 개인전을 할 계획이다. 개인전을 마치면 시장 안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 시장이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사계절이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다. 장돌뱅이로 시작했으니 평생 장돌뱅이로 남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일전에 조문호 작가가 "작품값을 비싸게 받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조 : 나는 내 사진이 많이 걸리고, 그 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 값만 비싸게 책정해 두고 팔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나? 난 아무 일을 안 해도 국가에서 20만원이나 나온다(웃음). 집이 오래되어 주저앉을까 걱정이지만, 정선에 마음 편히 지낼 곳도 있다. 기름 값 때문에 정선도 한 달에 한 두 번 밖에 못 가지만, 자연이 텃밭을 잘 보살펴주니 걱정할 것도 없고...(웃음)


정 :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산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다.


후세 작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는지


조 : 그건 세월이 지나야 아는 것이고, 지금은 열심히 기록할 뿐이다. 이젠 사진 정리하기도 바쁜데,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다. (웃음).


정: 누가 평가를 해주는 것보다 우리 삶의 원천인 장터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걱정이다. 우리부부가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지만, 딱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은 있다. 정선 집터에 장터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이것도 부질없는 것이려니 하지만 이런 바램이 오늘을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제 아내의 지령으로 마트에서 고구마를 한 봉지 샀다.
삶기 위해 고구마를 씻었는데, 꼴이 요상했다.
대개가 여자들 거시기처럼 생겨버렸다...
그렇지 않은 것은 씻으며 힘 없어 부러졌다.


그동안 고구마는 남자의 상징처럼 말해 오지 않았던가?
여성상위시대 따라 농산물까지 변하는 걸까?


요즘 대부분의 남자들이 마누라 앞에서 벌벌 긴다.
그 기고만장한 남자들이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오래 전 직장인의 월급봉투에서 아내의 통장으로 들어가며 역전되기 시작했다.

가족의 혈연마저 끊게하는 무서운 돈이 아니던가?


내일 정선가면, 감자는 어떻게 나오는지 캐봐야겠다.
그나저나, 한 달 넘게 비워 둔 집이 걱정이다.
농작물과 잡초가 뒤엉켜 과관 이겠다.
이판사판, 전쟁터에 투입되는 심정이다.


시원한 밤에 하는 방법은 없을까? 거시기처럼...


사진,글 / 조문호




어제는 춘천에서 열린 ‘강렬하게 리얼하게’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 밤 급히 보낼 원고들 정리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 밥도 챙겨먹지 못했다.

사진을 가져 오려 차를 끌고 나온 김에, 여기 저기 볼일도 보고, 수리 점에 맡겨 둔 카메라 찾으려다, 고생깨나 했다.
차가 밀려 계속 변속하느라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언제 한 번 시원한 자동 변속 차 끄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것도 통행료 물지 않으려 국도로 가다보니, 더 늦어 버렸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오후2시가 넘었는데, 길종갑씨와 그의 친구들이 작품을 철수해 포장까지 해두었다.
다들 식사를 끝낸 후 쉬고 있다가, 나를 반기며 점심식사는 어쨌냐고 물었다.
사실, 엊저녁부터 굶어 뱃가죽이 붙어 꼬르락 거렸지만, 늦은 게 미안해 거짓말을 해댔다.
“아침을 늦게 먹어 별 생각이 없다”고...

그렇지만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나를 끌고 식당으로 갔다.
한 그릇만 시킬 수 없으니, 남으면 안주하자며 맛 국수 두 그릇에 동동주까지 시켰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옆에 앉은 사람도 보이지 않더라. 아침을 늦게 먹었다는 말이 금방 뽀록난 것이다.
너무 고맙게 잘 먹었다며 실토했지만, 난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체면 차리느라 선의의 거짓말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악의가 없을지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차라리 말없이 웃는게 좋을 듯 했다.
거짓말은 버릇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오해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에겐 자칫 불신을 심어 의심 받을 수 있고, 특히 공인일수록 삼가해야한다.
아무 것도 아닌 거짓말이 일파만파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길종갑, 이희용, 신승복씨, 그리고 조각가 안승환씨와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사진도 한 장씩 찍어 두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늘 고마운 사람들이다.

난, 챙겨주는 후배들이 많으니, 복 받은 놈이라 생각되었다.
운전 때문에 동동주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나, 갑작스런 포만감에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졸음을 물리치는 대마초를  비상약으로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돌아오는 내내, 8월 하순에 치룰 아내의 장터 전시에 골몰하다 보니, 금방 도착해 버렸다.

"종갑아! 고맙다. 친구들에게도 고맙다고 전해라"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