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서 만난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와 신화철 화백


어느 애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하나 뿐인 나의 아들에 대한 회한은 남다르다.
왜냐하면 애비구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을 ‘햇님’이라고 지었겠는가.
밝고 강하게 살라 붙였건만, 눈물을 더 많이 흘리게 했다.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자식까지 팽개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부산에서 사진 한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시절이었다.
석관동에 셋방 하나 얻어 살았는데, 대책없이 사창가에서 윤락녀들
사진이나 찍고 있었으니 집안이 편할리가 없었다.
결국 이혼하여 아내와 아들은 연고지인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 서서 울고 있었다.
내 마음에 큰 대못을 박았다. 그렇게 헤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한 것이라고는, '경성대' 사진과에 다닐 때 등록금 보내준 것뿐이다.
그 것도 등록금 때문에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으나 
아들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만두었다.

그 이후 아들은 패션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돈이 되지 않아 사진을 접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료기 외판원에서부터 온갖 일을 다 한 것으로 알지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거나, 지역 봉사하는 사진들을 만나면
속이 터졌다. 그래서 정의당원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말릴 일은 아니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누군가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지 것 정치판을 더럽다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급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오염이 안되었다고 판단한 정의당에 들어가, 아들과 동지가 된 것이다.
나야 정치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에 불과하지만,
아들은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김제남의원 지역보좌를 맡고 있었다.

몇 일 전 신학철선생으로 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노동 정치 연대’ 상임대표로 있는 양경규씨와 같이 저녁식사 한 번 하자는 것이었다.
아들과 함께 오라기에 물었더니, 양경규씨를 돕기 위한 자리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3일 오후, 약속장소인 인사동으로 나갔다.
먼저 신학철선생을 만나러 간 ‘인사아트’ 전시장에서 양경규씨를 만났다.
노동분야 전문가인 그에 대한 이력은 알고 있었으나, 첫 만남인 셈이다.

만찬장소인 ‘하늘풍경’으로 옮겼더니, 정의당 공동대표인 김세균선생도 오셨더라.
그 날 자리는 노동과 예술을 연대하려는 양경규씨의 의도에 만들어졌다.
정의당 전사로 발 벗고 나선, 그를 돕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정의당의 대소사를 기록하고 알리는 일은 물론, 노동운동에 사진을 활용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대기업의 횡포와 각종 탈법과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불공정,
힘없는 소수자에 대한 멸시와 핍박 등 공정 사회로 가려면 한 참 멀었다.
이런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투쟁은 다수 대중과 더 멀어질 뿐이다.

인간적인 접근으로 대중의 힘을 결집시키야 할 양경규씨의 지혜가 절실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의당 김세균 공동대표


좌로부터 양경규, 김세균, 신학철선생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 조햇님






좌로부터 조문호, 신학철, 김세균, 양경규씨




삼년 전, 의성 옥산장에서 만난 김치욱씨(79세)다.
할멈이 쓰던 모자를 내가 쓴다며, 먼저 떠난 할멈을 그리워했다.
갈 날만 기다린다는 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한 아무 미련도 없어 보였다.
담배를 꺼내 무는 그의 표정에서 삶의 허무가 느껴졌다.

아직 살아 계실까? 그이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정월 초하루, 제사상 물리기가 무섭게 호출이 왔다.
독거노인 대표주자 장경호화백이 연출한 번개팅이란다.
감기 걸려 빌빌하지만, 독거 서러움 다독이려 찾아 나섰다.

설 날, 이른 시간이라 ‘유목민’ 문이 열릴까 싶었는데,
전활철씨 안사람이 친정가, 그 역시 독거라 가능하단다.

닫힌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불 꺼진 술집에 노광래, 장경호, 전활철씨만 있었다.
이미 빈 술병들이 더러 보였고, 난 몸이 정상이 아니라 대번 기별이 왔다.
느닷없이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공윤희씨와 채현국선생께서 나타났다,

그리고 임재경선생이 오셨다 가시더니, 뒤늦게는 신학철선생까지 등장하셨다.
무슨 연극무대 배우 들락거리듯, 출연진들이 속속 뒤 따랐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니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정치나 비평 같은 씨잘데 없는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괜한 딴지가 딴지를 걸고, 울분이 분노를 토해낸다.
이미 고개 숙인 전사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활철씨의 기타반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살울림’의 ‘청춘’에 왠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간 적음, 강용대, 김종구 이야기 끝자락이라,
그리움인지, 회한의 추억인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동 ‘실비집’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낭만은 아린 사연이 많다.
3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다, 이제 끝자락에 머문 것이다.
모두들 인사동의 마지막 해방구라 아쉬워 하지만,

진 꽃잎 따라 지듯, 또 다시 누군가는 피우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정영신


설날이지만 혼자 쓸쓸하게 제사를 지냈다.
형, 동생 모두 예수를 믿으며, 시작된 풍속도다.
하나 뿐인 아들 녀석까지 교회에 나가니, 나 죽으면 이 짓 마저 끝이다.
우리 선조들은 조상 모시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차례음식 장만은 돈도 돈이지만, 엄청 힘들었다.
연료비 아끼려다 감기 걸려, 아픈 몸으로 장만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쓸쓸하게 술을 올린 후, 아내에게 말했다.
“나 죽어 제사상 차리면, 구신이지만 상을 확 엎어 버릴끼다.”
아내 대답이 걸작이다. “같이 죽을거니, 차릴 사람이 없어 다행이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는 서민들은 시국이 흉흉하거나,
새해들어 살기가 어려우면, 점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올 해는 좋은 일이라도 생길런지, 복점이나 한 번 볼까보다.

1946년 광주 월산동에서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명절이 닥아 오면 몸도 마음도 바빠진다.
사흘 동안 정선으로 장터로 정신없이 떠돌다 왔다.

예전에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목욕탕과 이발관이 북새통을 이뤘으나,

요즘은 집에서 목욕을 해서 그런지 한산하다. 

늦은 시간, 설 차례에 대비해 이발소부터 찾았다.
우리 동내엔 음흉한 이발소 밖에 없어, 미용실에서 잘라야 했다.
어떻게 자를까 묻기에 아지매 마음대로 자르랬더니 일사천리다.
가위질 몇 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니 끝이란다.

오래전, 김기찬씨가 찍은 이발소 풍경은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의자를 재키고 누워, 면도사의 손놀림에 수염 깎기는 사근 그림이 그립다,

깨진 거울 틈 사이로 그려 놓은 이발소 그림도 보고 싶고,
물 조리로 머리 감겨주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1988년 도화동이발소는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김기찬 골목안 풍경3집에서 옮겼다.

컬러 / 정영신사진




인생 말년을 멋지게 연출하신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께서 떠나셨다.
요즘 거동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생각 못했다.

어제 노광래씨로 부터 부음을 받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은 가야할 길이고, 죽음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인사동 풍류의 마지막 불길이 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인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더니, 오래 된 영정사진이 낯설어 보였다.
입구에서 만난 도예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채현국, 황명걸, 백낙청, 구중관, 이소라,

배평모, 김영복, 공윤희, 노광래, 박진관, 오춘석 씨 등 많은 문상객들이 모여 있었다.

소주를 홀짝이며, 지난날의 선생님을 추억했다.

선생께서는 서울대 나와 기자에서 장관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분이다.
선생말씀에 의하면 은퇴 전까지는 ‘국,영,수’를 충실히 한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은퇴하고 나서야 ‘예체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래서 뒤늦게 아코디온 연주를 배우고, 여 운 화백으로부터 그림도 배웠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인사동을 흘러 다니셨다.
그림 전시도 열고, 후배들 전시에서 멋진 연주를 하며 풍류를 마음껏 즐기신 것이다.
가끔 술이 취해 오버하기도 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더라.

언젠가 교통부장관 시절 있었던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 ‘테제베’로부터 엄청난 로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상도 못할 액수라 청와대로 들고 갔는데, 김영삼대통령의 대답이 재미있다.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걸 와 내 한데 묻노?”
정신이 버쩍 들어, 열차 값을 그 이상 낮추도록 하고 돌려주었으나,
솔직히 갈등은 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돈을 받았다면, 비참한 노후가 되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문상객들이 하나 둘 떠난 자리는 허전했다.
터키에서 교편 잡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와 ‘K옥션’에 나가는 김영복씨가 남아 있었다.
인사동 원조들만 남은 셈인데, 인사동 이야기를 하다 김영복씨가 말을 꺼냈다.

80년대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전시와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응답하라 인사동”이란 제목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사진들과 그림, 이야기를 한데 묶어보자는 것이다.


80년대에는 김용복씨가 ‘통문관’에 있을 때인데, 강용대와 김종구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 소리에 ‘실비집’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실비집’은 그 당시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 시절 이야기들을 한 번 모아보자." 셋이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걸 못 보고 가시는 이계익선생이 원망스러웠다.

멋들어지게 하모니카 불며, 노래 한 곡 뽑으실 텐데...

“선생님 잘 사셨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노래 부르며 편히 승천하십시오.
그 곳에는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서 아코디온 연주로 멋지게 풍악 한 번 울려야지 예!“

사진,글 / 조문호
























 


-2008년 7월, 인사동 '소담'앞에서-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79세)선생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이계익선생은 동아일보 해직기자로 교통부장관과 관광공사 사장을 지내다, 20여년 전 인사동 풍류객으로 등장하셨다.

인사동에 나타나 후배들 전시에서 하모니카와 아코디온을 연주해 주시기도 하고,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러시아 민요를 부르시며 어깨를 추켜세우기도 했으나, 결국은 술에 의해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

환갑이 된 노광래씨를 지팡이 삼아 인사동 출입을 하시더니, 지난31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족으로 부인 진옥현씨와 아들 하일·형범씨, 딸 귀인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21호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02-2258-5940.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을 간추려 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4월, 소설가 구중관 칠순잔치에서-

-2013년 5월 '무다헌'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 뒤풀이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 뒤풀이에서-

-2010년 4월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서-

-2010년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박영현 도자전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5년 2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서-

-2015년 2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3년 4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에서-

-2015년 1월 아라아트에서 열린 '장에가자'사진전에서-

-2008년 5월 '아라아트' 착공식에서-

-2008년 5월 '아라아트' 착공식에서-

-2013년 5월 '무다헌'에서-

-2011년 10월 '인사동사람들에서-

-2011년 10월 '인사동사람들에서-

-2014년 4월 '여자만'에서-

-2010년 10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한봉림 도예공방에서 열린 '창예헌'가을여행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1월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이계익선생의 누드크로키 소품전에서-

-2015년 1월 '원당감자탕'에서-

-2015년 1월 '원당감자탕'에서-

-2015년 7월 '무다헌'에서-

-2015년 7월 '무다헌'에서-

-2014년 7월 '유목민'에서 열린 강민선생의 '외포리갈매기'시집출판기념회에서-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시인 강 민, 소설가 김승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모처럼 인사동에 나셨다.

‘툇마루’건물 1층에 새로 생긴 '나주곰탕'이 괜찮다며, 세 어르신께서 오찬모임을 가진 것이다.

복분자를 반주로 맛있게 드셨는데, 심우성선생은 다음 달 넋전공연을 앞둬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날은 돈을 부쳐왔다며 선생께서 밥 값을 내셨다. 사실 세 분 중에는 주머니 사정이 제일 낫다.

여관비나 식권을 대주는 후배도 있고, 원고료도 가끔 들어오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 옛 날에 즐겨 다니신 인사동 술집들은 어디였는지 여쭈어봤다.

80년대 중반은 ‘실비식당’이나 ‘하가’였지만, 그 이전 선생님들께서 다니신 곳이 궁금해서다.
관철동을 주 무대로 오가던 문인들이 70년대 후반부터 하나 둘 인사동으로 옮겨왔으나,

갈만한 술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참 뒤에는 천상병시인의 부인께서 운영한 찻집 “귀천”이나

“누님손국수”에 자주 다녔고, 그 밖에 '사천집', '이모집' 등이 기억난다고 하신다.

‘인사동 사람들’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시간죽이다, 심우성, 김승환선생은 먼저 들어가셨다.

강민 선생따라 술집을 찾아나섰으나 ‘유목민’은 아직 문이 걸려있고,‘푸른별 주막’은 청소가 한 창이었다.

그래도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막걸리와 노가리를 시켰다.
물 뿌려 빗질 한 후라 먼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먼지 냄새에 옛 생각이 왈칵 밀려왔다.

80년대 ‘실비집’에 들려 청소를 지켜보며 술벗들을 기다리던 생각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인사동을 찾는 예술가들은 벗이 그리워 인사동에 나올게다.
예전에는 핸드폰이란 게 없어, 무작정 나와도  벗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화통을 몸에 달고 다니지만, 더 만나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상대를 배려한다지만, 어쩌면 마음의 벽이 두터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강 민 선생도 술이 고파 인사동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
인사동에 그 많은 술집들이 널렸지만, 굳이 문 닫힌 뒷골목을 배회하는 것도,

행여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날까하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낭만은 사라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인사동,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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