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만지산 골짜기에도 봄이 왔다.

마당의 목련은 처녀가슴처럼 부풀었고,
할미꽃도 수줍은 듯, 고개 내민다.

자연은 온통 봄소식 전하느라 바쁘건만,
만지산 사람들은 싸우느라 정신없다.

원주민과 이주민들의 기 싸움질이다.
마치 정치판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툇마루의 낡은 가림 막은 깃발처럼 펄럭이고,
시멘옹벽이 무너져 주춧돌을 협박한다.

함께 살자던, 자연마저 나를 버리려는가?
낯 술에 취해, 울 엄마 무덤을 찾았다.

미주알 고주알 하소연하다, 잠들어버렸다.
꿈에라도 기다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다.

사진,글/ 조문호












글 / 최형순[미술평론가]


작가는 홀로 있는 개인이 아니다. 미술에서의 작가 역시 다르지 않다. 사회에서,역사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그러기에 나른한 데카당스와 근거 없는 보헤미안으로서의 작가를 기대하지 말자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하우저는 그렇게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 우리의 현실을 줄기차게 말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백두대간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작가로 살았다는 것은 광복 70년의 무게만큼이나 미술에서도 뜻 깊다. 그들이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하는, 우리의 ‘산과 함께’ 담은 ‘70년’은 어떤 것일까. 진정한 강원미술의 의미를 물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온 몸을 던져 살아낸 작가의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고 믿는다. 예술이 어떤 혈통을 타고나서 귀족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예술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듯,작품이 예술성을 담아야 예술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곳 백두대간의 한 가운데서 함께 아리랑을 노래하는 그들의 미술이,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기에 그것이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 감동으로 전율하게 된다면,더 더욱 의심 없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예술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기에 더 독한 패러독스를 내뿜게 된다. 황효창의 인형그림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다. 술독에 빠진 인형이라니 기가차기 그지없다. 인형의 입을 틀어막은 그 권력이란 참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개명하지 못했던 시대를 그렇게 견뎌온 1970, 80년대의 그림과 같이 오늘의 인형도 우리에게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광부화가로 이름난 작가 황재형. ‘광부의 옷’으로 중앙미술대전을 휩쓸고 ‘황지연작’을 그리던 그는 기어이 관찰자로만 기웃거릴 수 없다고 그곳에 들어가고야 만다. 30년이 넘는 작가로서의 활동기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이제 달라진 그곳의 현실도 계속 담아낸다. 탄광은 폐쇄되었지만 여전한 자본의 막장 극에 대해 할 말이 아직도 그곳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홍등가에 들어가 그들 삶의 현장을 담았던 사진작가 조문호도 강원의 작가가 되었다. 정선,영월,삼척의 두메산골 사람들을 담으려 정선에 터를 잡고 작업해왔다. 권용택 또한 그렇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실경을 찾아 강원을 찾았던 것처럼,강원의 산하를 담으려 정선에서 작업하고 있다.

신대엽,서숙희,백중기,김용철,김대영,길종갑이 그 세대를 이어 오늘의 리얼리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아니다. 미화한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거칠고 가슴 아픈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미술(美術)이라고 오해하지 않을 일이다. 진선미,위악추가 모두 예술의 대상이고 희로애락 어느 것도 미술의 대상 아닌 것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그 예술이 빚어내는 감동의 크기에서 찾아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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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현 시국을 예술로 표현하다


동아일보 /2016,12,1 / 이인모기자


강원 예술인들 시국전 ‘순실뎐’ 열어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 중인 ‘시국전’에 전시되고 있는 황재형 작가의 작품 ‘속아 넘어가다(Buffaloed)’(왼쪽 사진).

넘어진 소를 표현하며 속이고 속는 세태를 풍자했다. 오른쪽 사진은 조문호 사진작가의 ‘광화문 시위’. ‘시국전’ 기획자 제공


강원 지역 예술인들이 암울한 현 시국을 예술적 관점에서 표현한 ‘시국전(展)’이 30일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막돼 관심을 끌고 있다. 긴급 특별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비선에 의한 국정 농단을 개탄하며 예술가로서의 의무를 지각하고 시민들과 뜻을 함께하기 위해 마련됐다. 5일까지 엿새 동안 열릴 예정으로 전시 타이틀은 ‘순실뎐’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황효창 강원민예총회장을 비롯해 권용택, 조문호, 김진열, 황재형, 길종갑, 서숙희 씨 등 작가 1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100호 크기의 그림과 사진 1∼4점을 출품해 총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광부 화가’ 황재형 작가는 ‘속아 넘어가다’를 풍자해 소가 넘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Buffaloed’와 지난 대선 결과에 대한 느낌을 담은 ‘징후’를 전시 중이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국민의 광화문 시위와 유진규 마임이스트의 퍼포먼스, 양혜경 무용가의 넋전춤 등 시대의 몸짓을 담은 사진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최형순 씨는 “시국선언이 쏟아질 때 우리 예술가들은 촛불 집회의 머릿수 하나를 채우는 일로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라며 “이번 시국전은 예술가들에게 시국선언과 같은 의미”라고 밝혔다. 

이인모기자 imlee@donga.com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동강 변 뼝대(벼랑)에 석회암 바위를 뚫고 피어난 동강할미꽃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연분홍, 청보라, 붉은 자주색 꽃이 하늘을 향해 초롱초롱 빛을 낸다.
 


 ‘동강할미꽃’의 고장 강원도 정선 기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알려진 ‘동강(東江)’은 강원도 정선의 주강이다. 동강 물길 51㎞ 중 태백이 5㎞, 영월이 14㎞인데 정선은 32㎞다. 동강에서 봄철에 유난히 주목받는 것이 있다. 암벽 틈 사이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동강할미꽃’이다. 고개를 숙이는 여느 할미꽃과 달리 깎아지른 기암괴석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신비스럽게 꽃을 피워 보석 같은 꽃향기를 뿜어낸다. 강인한 생명력이 경이롭다.


동강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15㎝ 정도의 꽃을 피운다. 꽃대 전체에 흰 털이 많다. 잎은 뿌리에서 나는 깃꼴겹 잎으로 작은 잎 7∼8장으로 이뤄진다. 동강 주변의 정선, 영월, 평창의 석회암 바위틈에서 자라는 한국의 자생 야생화다. 1997년 한 식물사진가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2000년 6월 ‘동강할미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가장 늦게 봄이 드는 강원도 땅에 살지만 3월말부터 4월 초순에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현란하게 화려하지 않지만 잔잔한 잔영을 남기는 아름다움이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우리 꽃이다.


할아버지 수염을 한 동강고랭이. 정선 동강변에 동강할미꽃과 함께 자란다.


처음 동강할미꽃이 발견된 곳은 정선군 귤암마을이었다. 수직 절벽이 동강할미꽃의 자생지다. 이름은 할미꽃이지만 전혀 할머니 같지 않다. 수줍은 새색시 마냥 가냘프고 고운 미녀 같은 꽃이다. 연분홍, 청보라, 붉은 자주색 꽃이 하늘을 향해 초롱초롱 빛을 낸다. 동강을 붉게 물들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동강할미꽃도 활짝 열었던 꽃잎을 서서히 닫는다.  

동강할미꽃을 맞이하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꼬불꼬불한 동강변 도로를 한참 달려야 한다. 길 한 켠에 ‘낙석주의’ 표지판이 긴장감을 준다. 그렇게 가는 길에 만나는 ‘동강할미꽃 군락지’라는 표지판이 반갑다. 동강할미꽃은 장미나 튤립처럼 흐드러지게 피지 않는다. 군락지라고 해서 빠르게 지나치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바위벽을 찬찬히 살펴야 그 틈에서 손을 들고 있는 보랏빛 꽃을 마주할 수 있다. 그 빛은 장미의 붉은색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병방치 스카이워크.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반도 지형과

휘돌아가는 동강의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귤암리는 53가구에 138명이 사는 마을이다. 정선에서 유일하게 온대식물인 감나무가 재배 되는 곳으로 예부터 감꽃이 만발해 귤화리라고 칭하던 ‘귤’자와 의암이라는 자연부락 이름에서 ‘암’자를 따왔다. 주민들은 세계 유일종이며 한국특산종인 동강할미꽃을 보존하기 위해 2005년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를 창립했다.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 및 동강 유역에서 4월 1일부터 3일까지 제10회 동강할미꽃축제가 개최된다. 동강할미꽃 분재 및 사진전시, 마을풍경 그림전시, 동강할미꽃 10년사 자료 전시, 한반도지형 및 수리봉 포토존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 서덕웅 회장은 “동강할미꽃축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라기 보다 자연의 고마움을 자연 속에서 느끼고 아름다운 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라며 “척박한 환경 극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동강할미꽃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귤암리 동강생태체험공원에서 올려다보면 병방산(兵防山·861m)이 웅장하게 서 있다. 위로는 천층 절벽이요,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강물이라 한 사람만 지켜도 천군만마가 근접하지 못할 요새지여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그 산 중턱에 병방치라는 옛길이 있다. 1974년 강변으로 통행할 수 있는 호박길(동강로)이 생기기 전까지는 산 아래 귤암리 주민들이 정선 5일장터에서 생필품과 비료, 시멘트 등을 운반했던 생명의 길이었다. 병방산의 허리를 가로질러 오르는 고갯길의 경사를 낮추기 위하여 36굽이 뱅글뱅글 돌아 통행했기에 뱅뱅이재라고 불린다. 다람쥐도 한숨짓고 나는 새도 쉬어가는 길이다. 

병방치에 서면 굽이치는 동강의 아름다움이 가슴 뻥 뚫리는 청량감을 준다. 깎아지른 듯한 산세를 따라 뱅뱅 돌아가는 옛길을 따라 가면 동강변 할미꽃마을에 이르게 된다. 약 3㎞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정선에서 요즘 ‘뜨는’ 곳이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송중기·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인 고한읍 ‘삼탄아트마인’이다. 함백산 자락에 위치한 옛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폐광시설을 이용해 시간의 흔적과 예술의 희망을 캐는 콘셉트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예술광산으로, 지난해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됐다. 1964년부터 2001년 10월 폐광되기 전까지 3000명이 넘는 광부가 석탄을 캐던 삶의 터전이었다. 갱도로 내려가는 승강기와 석탄을 나르던 레일 등이 모두 보존돼 있다.


여행메모 
영동고속도·42번 국도 이용 3시간 소요… 곤드레나물밥 별미
 


곤드레나물밥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나와 42번 국도를 타고 평창읍을 지나 비행기재터널을 통과한 뒤 7㎞가량 가면 광하교다. 이 다리를 지나 강변을 타고 4㎞ 정도 더 가면 ‘동강 할미꽃 축제’가 열리는 정선 귤암마을이다. 약 3시간 걸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시외버스가 있다. 

정선읍내에서 59번 국도를 따라 가다 남면에서 38번 국도로 갈아타고 고한읍을 지나면 삼탄아트마인에 다다른다. 지난해 한국관광100선에 포함된 삼탄아트마인은 탄광 문화와 예술이 결합된 공간으로 문 닫은 뒤 멈춘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4층부터 전시 공간 10여 곳을 둘러보면 석탄을 캐서 모으던 시설에 미술 작품을 가미한 레일바이뮤지엄을 거쳐 기억의 정원 등이 있는 야외 공간으로 나온다.

정선은 곤드레나물의 고장이다. 정선읍내의 싸리골식당(033-562-4554)은 곤드레나물밥(사진)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아라리촌주막(033-563-0055), 동박골식당(033-563-2211), 동광식당(033-563-3100), 짐포리식당(033-562-2479) 등도 맛집이다. 

[스크랩/ 국민일보] 정선=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갤러리 브레송’기획전의 “사진인을 찾아서” 세 번째 작가,
이영욱씨의 ‘텅 빈 의미’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21일 오후6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난, 사진가 이영욱씨를 20여 년 전에 처음 알았다.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였는데, 그곳에서 ‘자유공원’이란 사진전을 했다.
그 때는 대개 틀에 박힌 사고에 젖어 있을 때라, 그의 사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없는 말들은 ‘자유공원’ 자체를 다시 생각게 했다.

그 후 그를 잊어버렸다. 이름은 잊었으나 ‘자유공원’은 잊지 않았다.
티비, 신문, 잡지 한 권 안보고 살았으니,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간첩보다 더 몰란거다.
작년부터 페북과 가까이 하며 모든 걸 알았다.
컴퓨터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정치나 사진판의 구태에 열받기도 했다.

얼마 전, 이영욱씨 사진에 대한 이광수교수의 글이 ‘오마이뉴스’에 올라 있었다.
“사진으로 맥아더 목을 잘라버린 그 남자”를 보고, 이영욱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낸 것이다.
오랜 기억의 ‘자유공원’을 비롯하여, ‘대상과 침묵의 접촉’, ‘이상한 도시산책’,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거울의 기억’, ‘북간도’, ‘사진일기, ’불확실한 여행‘, ’아카이브‘ 등 그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해 놓았는데, 놀라웠다.

그의 시비는 2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전시 개막식 날, 서둘러 나왔으나 전시장은 축하객으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김남진 ‘브레송’ 관장이 나와 작가소개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가 이영욱씨와 이광수교수가 서있었다.

엄상빈, 정진호, 성남훈, 이상엽, 이갑철, 박신흥, 신동필, 윤성준, 이은숙, 남 준, 김영호, 곽윤섭, 곽명우, 정영신,

강제욱, 고정남, 정태만, 이경자, 권혜진, 이상봉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사람이 많아 사진을 꼼꼼히 살펴볼 수 없는 게 아쉬웠으나,
모든 사진은 사물들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대상에 대한 반론 재기인 것이다.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는 작품은 마치 선승의 “이 뭣고?”라는 화두 같았다.
처음에는 좀 낮 선 것 같았지만, 신화에 불과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라 했다.
그 안에는 역사도, 사회도 없고, 오로지 중지된 현상만 있다고 말했다.

이광수 교수는 작가의 화두가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라며 열변을 토해냈다.
어떤 현상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한 그의 시비는, 신화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 했다.

'텅 빈 의미'도 아무 의미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많아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찌나 논리 정연한 달변인지, 그의 사진에 푹 빠져 이해하게 했다.

강연이 끝나고 다들 뒤풀이 집으로 옮겼는데, 식당이 꽉 차벼렸다.
즐겁게 술 마시다, 전시장에선 미처 못 본 사진집을 만난 것이다.
‘접촉’이란 이영욱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23호로 나왔는데, 일단 ‘접촉’이란 제목이 너무 마음을 끌었다.


대충 보았으나 너무 갖고 싶었다. 작품도 꼼꼼히 살펴볼 겸, 다시 찾을 작정이다.

그런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이 제법 많이 나왔을 텐데, 술값을 거두지 않더라.
일단 지갑은 굳었지만, 다들 뻔한 처지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전시 제목은 “텅 빈 의미”였지만, 사진은 “꽉 찬 내용”이었다.
이 달 30일까지 계속되니,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접촉’사진집(12,000원)도 살 수 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이영욱씨의 전시작품과 이광수교수의 글을 보실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mun6144/3631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싱그러운 봄은 찾아왔건만, 정작 인사동의 봄은 기약이 없다. 

그토록 인사동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떠들어도 다들 ‘마이동풍’이다.

“조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며 예전 군인들이 비아냥거리듯, 관련부서는 코 방귀조차 안 뀐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사동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술집으로 흘러 다닐 뿐이다.

한 때,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인사문화마당’을 포장마차 장사꾼들로부터 되찾아 예술공간으로 활용하자”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단위 리플렛을 거리에 내 놓아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자”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처럼, 거리에서 작업도 하고 작품도 팔 수 있는 무명작가 거리를 조성하자“ /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인사동과 북촌지역을 연계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를 개최하자“는 등

예술가들의 제안을 나팔 불어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 전통문화거리를 표방하는 인사동에 ‘한국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치솟는 임대료를 못 견뎌 문화관련 업소들은 외각이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거리의 상품 90%가 중국산으로, 마치 인사동이 차이나타운 같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을 꼭 닮아간다.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100여 년간 고미술의 메카였다.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이 살던 곳이 인사동이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빠짐없이 인사동에 문을 열었었다.

이들 따라 크고 작은 화랑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공방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인사동이 명실 공히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관광객들은 넘쳐나지만, 백 개가 넘는 인사동 전시장들이 텅텅 비어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왜 인사동을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다시 올 리 없다.

그들에게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려면,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거리환경을 정비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해 작가들을 선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 곳에서 전통적인 민화나 서예, 도예 등을 제작해 외국관광객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알리는 표지판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자.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과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문채,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그리고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한 번 바꾸어보자.

아기자기한 인사동만의 골목 문화를 가꾸어,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도 담자.

다 같이 힘 모아,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는 봄바람 한번 일으키자.
 



지난 18일 오전 무렵, 별 볼일 없이 인사동에 나갔다.
주말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빌 것 같아 금요일을 택했는데,

포근한 봄 볕 탓인지 거리가 유난히 정겨웠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도 여기저기 들리고,
장대만한 흑인이 피에로처럼 머뭇거리는 모습도 만났다.
‘이즈갤러리’ 건물은 한국화가 김현정의 전시 광고로 뒤 덥혀 있었다.
4개 층 전관을 한 달 가까이 빌려 ‘내숭놀이공원’이란 전시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예스러움은 만날 수 없었다.


한 때,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아라아트’를 운영하는 김명성씨가 사재를 들여, 벤취에 앉히거나
골목 어귀에 세우기 위해 조각가 최옥영씨에게 맡겨 시안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김명성씨가 빚더미로 벼랑에 내몰리며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서울시에서 물려받아 재추진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국적불명의 관광지가 된 인사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꼬를 터야한다.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위한 다양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것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사진,글 / 조문호
























박불똥이름 모르면 간첩도 아니다. 간첩들도 다 아니까.

나도 그 이름을 80년대부터 알았지만, 실제 만나보니 이름과는 전혀 다르더라.

우락부락하고 과격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무안케 했는데,

저렇게 양순한 사람이 어디서 그런 깡다구의 투지가 나올까 의심스러웠다.

그런 그가 또 인사동서 판을 벌였단다.

 

85년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요약한 갤러리175’ 기획전으로,

지난 15일 시작해  31일까지 이어진다.


박불똥, 그는 민중미술의 기수다.

그 앞에는 현실과 발언전에 참여한 선배들도 있지만, 불똥 날리는 그의 투지는 독보적이었다.

선배들은 쓰리쿠션으로 돌렸지만, 그는 직설적인 강펀치를 날렸다.

    

 


그의 그림은 물감과 사진, 심지어는 인쇄문자까지 동원하는 포토몽타주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여러 이미지를 하나로 구성하는 기법으로 그만의 절묘한 조형어법을 만든 것이다.

그의 통렬한 비판 정신이 담긴 작품들로 한 때 박불똥 신드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붙여 만들고, 그걸 다시 사진 찍는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단방에 인식시키는 강력한 소구력이 있었다.

    

그가 삼십 년 넘게 목을 매는, 이 전대미문의 민중미술이란 도대체 뭔가?

바로 독재자가 만들어 낸 것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예술의 한 방식으로 나온 것이다.

대개들 그 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으로 박종철, 이한열씨 같은 민주투사들을 떠올리지만,

그 뒤에는 박불똥씨를 비롯한 많은 민중 예술가들이 있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홍대 미대'에 비싼 등록금 갖다 바치며 열심히 공부했으면, 남들처럼 고상한 예술이나 하지,

왜 돈 안 되는 현실 작업에 메 달려 처자식까지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면서도 작품으로 판 벌이지 않으면, 좀이 쑤셔 못 견디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개나 소나 다 만드는 전시 팜프렛 하나 만들지 못했으며, 액자도 끼우지 못했을까?

 

사실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대부분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정치판에 뛰어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보상 되었겠지만, 예술가들은 국 쏟고 뭐 데인 격이다.

그 뒤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며, 일부 작가들은 감투를 얻어 쓰거나, 미술관에 작품이라도 넣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삶의 의욕조차 잃었던 시기다싸움에 메 달렸을 때는 배고픔이라도 잊을 수 있었거든...

    

 

요즘 난데없는 민중미술바람이 불고 있다.

상업 갤러리들의 단색화에 이은 바람잡이겠지만, 박불똥은 그 덕조차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돈 되는 작가들은 장사꾼들이 다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박불똥씨 기획전은 어떻게 기획됐는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땐 판매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박불똥 형,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고 너무 서러워 마시게,

당신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밀려나지만, 더 악착같이 작업하고 있지 않은가?

못난 길 따르는 후배들께, 그 불똥 같은 정신 물려주고, 편안하게 그림이나 그리시게..

설마 산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나?“

 

이 날 전시개막식엔 인사동에서 했던 박불똥씨 전시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그만 전시장이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민중미술하는 동료나 후배들은 거의 다 모습을 드러냈으나, 선배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후배들이 뭉쳐 무슨 쿠데타라도 일으킬까, 지레 겁먹었나?

 

전지장에서는 박불똥, 조경연 내외를 비롯하여 백기완, 이 철, 권술용, 이충렬, 임진택, 장경호,

류연복, 마문호, 이인철, 최경태, 김석주, 김기호, 박은태, 조 섭, 이재민, 이철재, 김영중, 최석태,

곽대원, 김진하, 김정대, 박세라, 이종률, 이시백, 장순향, 마기철, 최혁배, 임정희, 이진경, 김태서,

이만주, 노광래, 배성일, 장재순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고,

뒤풀이는 낭만에서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사진, / 조문호


찍은 사진들을 모두 올리다 보니 100장이  넘어버렸네요.

지루하더라도 아는 사람들 있나 찿아보세요.




















































































































오늘은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다.
이번 생신은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여사께서 오찬을 미리 예약해 두었단다.
약속장소가 지하철 3호선 동대역 6번 출구라기에 내심 어디로 갈지 궁금했는데,
'남산타워 레스토랑'이라는 것이다.

사실 ‘남산타워’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생전 처음이었다.
촌놈 출세한 것이다. 여지 것 마누라에게 구경시켜 주지 못한 게 걸렸으나,
본래 잘 알려진 사람 많은 관광지를 기피하는 체질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오래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날씨가 받혀주었다.

완연한 봄 날씨였다.
따스한 봄볕에 괜히 마음이 들떴는데, 역시 늙어도 봄은 좋더라.

그 자리는 주인공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최경자, 정영신, 전민조선생과
나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움직이기 딱 좋은 인원에다 좋은 분들과 만났으니,
봄 사건 한번 엮었으면 좋으련만, 통풍이 도져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모습은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낯설었다.
희뿌연 스모그에 뒤 덮힌 시가지가 햇살에 드러났는데, 서울 같지않았다.
또 촘촘히 들어 선 높은 빌딩과 집들은 얼마나 많은지,
집 없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산타워는 오래된 탑이라 전망대에 오르는 에리베이터가 벽에 가려져있었다.
서울시가지를 내려보며 오르기를 기대했는데, 탑승료 만원이면 너무 비싸다 싶었다.
오래되어 투자금의 몇 배 이상 벌었을 것이고,
더구나 그 위의 식당예약으로 가는데 말이다.

식당 분위기는 좋았다.
마치 비행기로 하늘에 올라 밥 먹는 것 같았다. 다 좋은데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어쩌랴!
더구나 전민조선생께서 사진 찍는다며 맥주잔을 입에 대는 포즈를 취하라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술 같으면 몰라도 맥주는 더 마실 수 없었다.
통풍에 맥주는 쥐약이니까...

좌우지간 한정식산생의 생신을 기념하는 오찬회는 즐거웠다.
원님 덕에 나팔 분 격이나, 모두들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선생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백세까지만 건강하게 사십시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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