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3


이영욱 편 '텅 빈 의미 - obtus'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 갤러리 브레송

 오프닝 : 21일(월)오후 6시 30분


이영욱, 자유공원, 23.5x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글 / 이광수 (부산외대교수, 사진비평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역사학의 관심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언제 누가 무슨 일을 했고, 왜 그리고 어떻게 했느냐에 관한 관심이었다. 목격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됐고, 그 위에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구조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그 과거를 규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에 봉착하면서 역사학은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이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안에 객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해석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진가 이영욱의 문제의식은 이런 맥락과 연결된다. 그에게 가장 큰 화두는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다. 신화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의문은 어떤 현상에 대해 남긴 기록이라는 것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해 건 시비이고, 나아가 사진에게까지 달라붙은 그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도전이다.

사진가 이영욱의 작품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가 던진 사진에 대한 사진을 통한 문제 제기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바닷물 속에서 사는 용왕이 토끼에게 들은 땅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듯이 그가 던진 기록과 객관이라는 신화에 대해 평소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이 어려운 것은 독자들이 보기에 왜 이런 평범한 사진이냐는 사실에서부터 먼저 시작될 것이다. 그의 사진은 누구나가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그런데 누구나가 다 읽을 수 있는 사진은 아니다. 사람들이 빛과 색으로 만든 현란한 이미지에 물들어 있고 그것이 가진 특정 현상에 부여된 의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익숙함 속에서 이영욱이 전혀 생뚱맞은 사진을 내걸어 전시를 하고, 책을 내니, 사람들은 의아해 할 뿐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1. 신화로부터 탈주

이영욱은 1995년 발표한 첫 작업 <자유공원>에서 그 화두를 꺼냈다. 그는 인천의 '자유공원'이 왜 인천 시민의 마음의 갤러리 혹은 관념이 됐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자신의 긴 사진사의 화두를 꺼냈다.

과연 그들이 품고, 개념화하고, 소비하는 그런 '자유공원'이라는 실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사진으로 던지는 작업이다. 맥아더 동상, 자유의 여신상, 비둘기, 경찰서, 반공 캠페인 표지판, 충혼탑,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등 역사를 해석하는 어떤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그리고 그 해석돼 만들어진 하나의 역사를 객관의 진리로 받아들여 시민들의 표상으로 자리 잡힌 역사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맥아더의 목을 쳐버리거나, 충혼탑의 글귀를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버린다거나 하는 비판과 느닷없는 안마시술소나 지저분하고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비둘기집을 집어 넣어버리는 방식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처음 이 공원의 이름이 '만국공원'이었다가 왜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왜 1990년대 이후 민족자주 진영의 진보운동가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했는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진가가 사진으로 맥아더 동상을 죽여버렸지만, 그것이 그렇다고 민족자주 진영이 시도한 물리적 동상 파괴에 대한 옹호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맥아더를 통해 자유냐 반미냐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냐 실재냐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다음 작업은 1998년의<대상과 침묵의 접촉>이다. 전작에서 출발한 신화에 대한 고민이 거시사의 해석이었다면,<대상과 침묵의 접촉>은 미시적 일상사의 해석이다. 이 점에서 이영욱은 롤랑 바르트의 전사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일정한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이뤄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기호에 종속돼 그 안에서 발생한 어떤 제도나 현상을 마치 자연스럽거나 합리적이거나 심지어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화일 뿐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신화에 함몰돼 어떤 것이 옳은지 싸운다. 나아가 그 옳지 않은 것은 처단해야 한다고 싸운다. 목숨 걸고 싸운다.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의 해석만을 기독교 성경 바이블처럼 받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이 <대상과 침묵의 접촉>에서 보여주는 사진들은 모두 이미지의 실재에 대한 반론이다. 흔히 말하는 리얼리티라는 것은 의미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다름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특정인의 신화 구조 속에서 형성된 그 사람의 관념의 소산일 뿐인데 왜 그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으로 굳혀져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짝짝이로 놓여져 뭔가 잘못된 된 것 같이 보이는 군화 한 켤레, 다 타버린 연탄 위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그 앞에 죽어 널 부러진 비둘기(이 새는 평화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읽힌다) 한 마리, 풀밭에 놓인 뒤엉켜 버린 고무호스, 텅 빈 유원지에 놓인 목마, 트럭 짐 차 앞에 놓인 매트리스, 공원에서 사진 찍는 포즈의 여성과 사진 찍는 것 같으면서 아닌 것 같은 앉은 자세의 남성 등 그 어떤 장면 하나 하나가 명확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도 없거나 자칫 식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해석될 듯한 장면들을 모아놨다.

누구든 이 장면에 대해 확실한 의미를 보여줘 봐라는 것이다. 세상이 이러 하니 제발 잘 찍은 사진 한 장, 물성이 좋은 이미지, 리얼리티가 분명한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중앙동, 100x15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용현동, 100x13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2012년의 작업,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와 2014년 작업 <이상한 도시 산책>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이뤄진 사진의 기록과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사진가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자신의 작업실 주변을 기록했는데, 15년 정도가 지난 후 우연히 그 사진들을 보다가, 그곳을 다시 찾아가봤다.

그리고서는 변해버린 장소성 안에서 특정의 시간을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스스로가 붙들고 있는 긴 화두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했다. 사진으로 남긴 것은 기록이라는 탈을 쓴 하나의 기억일 뿐이지 않는가, 그것이 국가·민족·계급과 같은 만들어진 집단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보았고 내가 셔터를 눌러서 기록했다고 해서 그 '나'의 시각은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를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한 의문으로 그의 사진은 '나'에게서 도시에게로 옮겼다. 그래서 이 도시가 꿈꿨던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 꿈이란 도대체 있었던 것일까? 그 꿈은 무엇인가?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2. 기록과 다큐멘터리의 부정

사진가 이영욱은 <자유공원>과 <접촉>을 통해 '존재와 해석'에 관해 사진으로 글을 썼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긴 작업을 하나의 글이라 치면  <자유공원>과 <접촉>은 기(起)에 해당한다. 그 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2001년 <거울의 기억.에서는 살을 붙이고, 윤기가 나게 문지르고, 생각을 확장했다. 이른바 승(承)이라 할 수 있다.

사진가가 보는 존재란 절대성이 없고, 그것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을 뿐이라면, 이제 <거울의 기억>은 그 해석의 열린 공간을 만들어보는 문제의 이음새다. 올림푸스 하프 사이즈 카메라로 작업해 한 프레임 안에 찍혀 좌우에 우연히 배치된 서로 다른 장면들을 하나로 묶어 우연성 안에서 해석의 여백을 만든 작업이다. 사진의 가장 큰 특질 중의 하나인 우연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로 만든  이미지다.

그는 그 두 개의 이미지를 우연에 기대어 하나의 조합으로 세워 둘 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나의 사진이 어떤 완결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가는 바로 이 전제에서  '텅 빈 의미'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텅 빈 의미'란 아무 의미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많아서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이 '존재와 해석'의 문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승(承)한 것은 기록에 대한 것이다.  2007년의 <북간도> 작업에서다. 그것은 기록이지만 탈(脫)기록이다. 그 기록이란 기존의 시간과 맥락을 탈피하려는 새로운 차원의 기록이다. 사진가 이영욱은 자신이 처음 접한 '북간도'에 대한 인식을 '일반화'라는 신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그것을 중지시키고자 했다.

상징으로 점철된,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가치로부터 벗어나야 뭔가 새로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이영욱은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 하면 자연스럽게 상기되거나 읽혀지는 특정 역사의 의미 구조를 과감히 배제하고, 객관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좀 낮 설 수도 있는 이미지를 선택해 기록의 신화로부터 탈주하고자 함을 말하고자 한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던 풍경들, 일제 강점기나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잃어버린 조국 강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조국 강산을 위해 살아남아야 할 그 땅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만주 평원을 기록한 것이다. 그 안에는 역사도 없고, 사회도 없다. 오로지 중지된 현상만 있을 뿐이다. 당신은 이런 방식의 기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은 객관성이라는 만들어진 신화에 대해 그리고 그 신화 안에 똬리를 튼 '사진(의 과학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에 대해 사진으로 말을 하는 중이다. 사진으로 사진을 말하는 사진론, 참으로 무거운 작업이다.

그는 이 작업을 1995년부터 해오던 중 2001년에 중국에 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신화 깨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말하기의 방식은 기존의 것과는 사뭇 달리 <즐거운 유배지>와 <사진일기> 작업을 했다. 동일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낮은 화질(350dfi)의 이미지로 5x7 inch 크기의 사진이 텍스트와 묶여 함께 발표됐다.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은 이 두 작업을 두고 "어릴적 그림일기 형식을 차용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배치 한 것인데,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적인 솔직한 고백의 형식이라 믿는 일기를 뒤집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사진은 과학적인 증거의 역할을 하고, 일기는 아무도 보지 않(거나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자기 고백이라는 일반화 된 진실 같은 비(非)진실을 믿는 관객에게 죽비로 그 어깨죽지를 후리치는 도발이다.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그런데<불확실한 여행>에서는 그 텍스트를 제거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작가는 텍스트마저 제거해 앞에서 시도한 사진과 일기로 표상되는 일상성의 신화 깨기를 사진으로만 보여준다고 하는 의도인 것으로 읽힌다.

신화를 깨고 나가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것이겠으나, 두 장르를 가지고와 양 방향에서 신화 깨기의 협공을 벌인 싸움을 느닷없이 중지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의 신화 깨기 싸움을 벌이는 것 같아 긴 싸움의 여정에서 볼 때는 천재적이거나 산만하다.

이 셋은 이미지와 텍스트와의 상관관계, 이미지에서 물성(物性)의 제거, 평범한 오브제와 대상의 선택 등을 통해서 볼 때 결국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불확실한 여행〉은 기(起)를 거치고 승(承)1과 승(承)2를 거쳐 전(轉)으로 넘어 가지 않고, 승(承)3으로 영역을 넓힌 것으로 이해된다.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3. 아카이브라는 또 다른 신화

사진가 이영욱이 사진으로 하는 사진에 대한 신화 깨기 작업은 2015년의 <집이다>에서 전(轉)을 맞는다. <집이다>에서 '집'은 특별한 맥락의 이해나 기교를 통한 수식 등을 필요로 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 지난 도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대상을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미지로 찍는다.

그 대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해줄 뿐, 달리 특별한 양식의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 만든 이미지다. 전작들에 비해 힘이 빠지고 기름기가 빠졌다. 상큼하다. 누구든 저 이미지를 보면 '어쩌다 저런 집이 생겼을까!'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묘한 그 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극적인 다큐멘터리는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아카이브의 방식을 통해 사진가 이영욱은 지금까지 해온 객관이라는 신화를 깨는 방식을 전환시켰다. 지금까진 논리적 격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고, 그저 그냥 거울 하나 꺼내 제 모습 보도록 넌지시 건네줄 뿐이다. 작품의 감동은 이러한 발상의 전환에서 온다.


이영욱, 집이다. 인천-화평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집이다. 인천-북성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이 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절대적 기록이 아니다. 그 어떤 시각도 다 배제한, 완전히 절대적으로 무미건조한 본질적 절대성을 지닌 기록으로서의 이미지란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지개를 잡으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그 가능하지 않은 길을 새로운 방법론을 대동해 가능하다고 믿고 길을 나선다. 그 새로운 방법론이란 바로 '아카이브'다


이영욱, 아카이브 - 섬프로젝트 - 이작도,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아카이브 - 중구프로젝트 - 송학동,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일정한 장소를 기록하되, 대상을 보는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시각을 가능한 한 최대한 배제하고, 대상이 스스로 말을 하도록, 모든 장치를 방해하지 않도록 무미건조한 사진을 찍되, 그 분량을 최대한 늘린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인간이 관계적으로 유일하게 독립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각 매체로서의 사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이 갖는 의미와 예술에 대한 강한 부인이다. 이영욱이 택한 이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중국에서 돌아온 후,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에 시작했다.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 이영욱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사진가 이영욱은 이제 도시에서 벗어나, 농촌과 어촌을 향한다. 객관이나 일반의 신화를 깨려는 작업은 여전하다. 흔히 말하는 '우리'가 갖는 농촌의 모습, 섬의 이미지는 이제 이영욱의 카메라를 통해 정겹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어머니와 고향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그것이 설사 가능하지 않다더라도 고정 관념과 이미지를 향해 쉴 새 없이 던지는 성찰과 담론이다. 그것은 뭇 사람들이 갖는 기록이라는 신화에 대해 균열을 내서 그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이다.

결과를 뽑아내려는 사회과학이 아닌 문제를 제기하는 인문학 담론이다. 만들어진 신화에 대한 지독하고 치열한 도전이다. 기록성을 부인하면서 만들어가는 기록, 예술을 부인하면서 생기는 예술, 우리는 이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까? 탈객관을 지향하는 탈주관? 존재와 기록에 대한 아나키즘? 신화를 무너뜨리며 쌓은 또 다른 신화? 사진가 이영욱 앞에서 사진에 달라붙은 모든 만들어진 신화는 지금, 무너진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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