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20160824-20160830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초대일시 / 2016_08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라아트센터

ARA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Tel. +82.2.733.1981

www.araart.co.kr




장날은 느림의 미학이다. /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쫓아다닌 정영신의 장날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그는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정영신-장날-1988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솔직히,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이라 하지만, 난 팔불출이란 소리들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 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들의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는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장날-1987  구례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과 인간에 대한 정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장날-1990 무주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거나 지워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장날-1986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위에서 내려 보고 찍을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 조문호(사진가)




정영신-장날-1988  청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추억으로 가는 문 / 정영신의장날은 추억으로 가는 문이다. 이미 사라졌고, 잊힌 풍경이라 여겼는데, 벽돌 벽이 문으로 변하는 마법처럼,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정지된 것 같은 평면 안에서 이야기가 솔솔 새어 나온다. 사진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느새 20년여 전, 혹은 30년여 전으로 들어가 있다.


내가 처음 장을 보러 간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현금이 워낙 귀해서 계란으로 돈을 사서 차비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계란 몇 개를 가지고 가면 며칠간 차비를 쓸 수있었다. 그런데 계란을 팔 수 있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편하게 팔 수 있는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고, 가장 먼 곳은 장터였. 처음 가져 간 계란을 팔았던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다. 느그들 차비 해사 씅께, 이 닭알 가지가서 폴아갖고 오니라.”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계란 한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이런 것은 엄니가 폴아사제. 학생이 어띃게 계란을 다 폴로 간다? 그라다 깨져불기라도 하먼, 우짤라고.” 장에 갈 시간이 없응께, 안 그라냐, .”

아무리 버텨 보아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농사에 정신이 없었고, 무거운 가방을 든 형의 눈빛은 완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란 개수를 줄이는 협상을 하였고, 짚으로 싼꾸러미 대신 계란 세 알을 주머니에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 안이었다. 그 당시의 통학 시간대의 버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손님을 실었다. 사람을 태운 것이 아니라, 람을 쟁여 실었다. 더구나 장날은 더 심했다. 짐이고 사람이고 실을 대로 실은 버스가 차장의오라이!” 소리에 출발을 하면, 기사는 직선의 길도 갈지자를 급하게 그으며 차를 몰았다. 차의 오른쪽에 타고 내리는 문이 있었으니, 차의 왼쪽으로 사람이며 짐을 쏠리게 하였던 것이.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실제로 넘어진 버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버스 한 번 타고 나면, 책가방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이나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용케 의자에 앉았다고 해도 편할리가 없었다. 함부로 열린 창문으로 책가방이며, 짐이 날아들었고, 이 질질 흐르는 짐도 유리창을 통해 닥쳐오는 판이었으니, 아무리 멋쟁이 여학생이라도 장날 통학버스를 타고 나면 거지꼴이 되었다. 거기다가 새끼줄에 묶여 있던 닭이라도 풀리는 날이면, 옷이며 머리며 가릴 것없이 닭똥이뿌려지며, 물크덩하고 따뜻한 닭똥세례에 오리까지꽥꽥 소리로 음악을 연주해대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아니라 고통과 아우성과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통 같았다. 계란 세개를 주머니에 담고 있었던 나는 버스를 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계란이 깨지지 않게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계란 하나 값이 차비보다 비쌌다. 계란 하나를 팔면, 왕복 차비가 되었으니, 요즘 시세로 한다면, 계란 하나에 2천 원 내지는 3천 원은 하였던 것이다. 나는 호주머니보다 가방이 더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란을 가방에 넣었다.



정영신-장날-1989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버스는 역시 만원이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나, 우리 마을의 아이들과 장꾼들 20여 명이 더 탈 수 있었다. 그때의 시골버스는 고무로 만든 버스 같았다. 그 후로도 적잖은 손님을 더 태웠으니, 고무중에서도 신축성이 대단히 좋은 고무로 만든 버스였음에 틀림없다. 주머니에 있던 계란을 책가방에 옮기고 나는 초긴장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읍내까지 갈 동안 가방을 사람들 머리 위로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것도 쉽지 않아서 두 손으로 가방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가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인력으로는 막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버스에 탄 후 가방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있자,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형이 대신 가방을 들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내 책가방은 읍내까지 배달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 가방을 열어 보니, 그렇게 고이 간직해 온 계란 중 하나가 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의 풀잎을 뜯어 책과 공책과 가방 안을 닦아냈. 하도 귀한 계란이라 어지간하면 먹었을 것이지만, 으깨어진 계란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 계란이 갑자기 미워져서 장터에 가서 팔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학교 앞 점방에 주고 말았. 그 점방에서는 계란 한 개당 70원을 쳐주었다. 계란 판 돈을 받아 든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땅히 300원 정도를 받아와야 하는데, 내가 내민 돈은 140원이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계란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일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란 하나가 깨졌다는 말에 어머니는 안타까워했지만, 나무라지는 않았. 어머니가 알고 싶은 것은 어디에다 계란을 팔았냐는 것이었다. 학교 앞에서도 계란 받어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계란이 학교 앞에서는 70원 쳐주고, 장터에서는 100원 쳐준다는 것을 어머니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가격 차이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부터 계란을 팔 때면, 꼭 장터에 갔다. 그것도 어머니의 단골집으로 갔다. 단골집 아주머니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낫게 값을 쳐주었으며,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내입에 물려 주었다.




정영신-장날-1989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장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집합소였다. 닭이며 오리 같은 가축은 물론이고, 온갖 생선과 과일에, 보지도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까지 거기에 가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그릇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릇가게, 세상의 모든 진기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잡화상, 수백 가지의 옷들이 걸려 있는 옷가게 등. 나는 서울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장터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짜장면 집에서 풍겨 나오던 음식 냄새였다. 중학교 입학식 날 먹어 보고는 다시는 먹어 보지 못했던 짜장면. 그것은 지상 최고의 음식이었고, 후루룩 빨아먹다가 혀까지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음식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 장터에 많았던 것은 물건이나 다른 짐승들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막걸리집에서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짐을 다 싣고 장터로 들어서는 구루마도 있었다. 그렇게 구루마를 끌고 온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지를 먹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도 장터였다. 장을 보러 온 사람 중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지만, 물건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특히 노점에 앉아 물건을 파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의 손은 새카맸고, 주름이 많았으며, 갈라진 데가 많았. 즉 장터는 어머니들의 삶의 터였고, 그녀들의 생활력이 살아있는곳이었다.



정영신-장날-1989 고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내 어머니도 몇 번 좌판에 앉은 적이 있었다. 산에서 채취한 버섯이나 나물 같은 것은 물론이고, 깻잎이나 오이나 고추를 따서 장에 내다 팔았다. 특히 버섯은 상당히 비싼 값을 받기도 하였는데, 어머니는 며칠간 따온 버섯 중, 비싼 것과 싼 것을 나누어, 싼 것은 집에서 먹고, 싼 것은 죄다 장에 내다 팔았다.

친구 중 하나는 병영이라는 곳에서 유학 온 아이였는데, 자취생이었, 공부를 잘했다. 나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장터에서 멸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그 친구는 홀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잘살고 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성공하고 바르게 살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나아가 장터의 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러 몇몇 집에서는 눈속임을 하기도 하였다. 쌀집의 되는 일반 가정집의 되와 달라서 쌀집에서 쌀 한 되를 팔아와 집에 있는 되에 담아보면, 9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꾼들 저울은 눈금도 다르다고 하였지만, 모든 장사꾼들이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더러 눈속임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눈속임 뒤에 덤이 있었기에 웃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사꾼들은 단골 장사를 했기 때문에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고는 사람을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 좋은 물건을 눈에 보이는 데에 얹고, 물짠 물건을 그 아래에 깔아 놓는 것이야, 눈속임이 아니라, 포장의 기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는 지명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지금은 그냥토요시장이라 불리는 장흥의 옛 장터만 보아도, 십여 가지의 지명이 따로 있었다. 전머리, 비석거리, 쇠전머리, 지전거리, 주막거리, 진골목, 온뚝길, 겟똥 등 지명마다 골목마다 장소마다 그 나름의 풍광이 살아있던 곳이 옛 장터였다. / 이대흠(시인)



정영신-장날-1988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작업노트 / 난 전라도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촌사람이다. 어렸을 적, 장날은 잔치 날처럼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삼식이 아버지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다다르면, 여인네들이 이고나온, 보따리가 하나둘 실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동아재가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풍경은 고향에 남겨 둔 내 흑백사진이다.


남도 땅에서 처음만난 최씨할머니는 장에만 나오면 뱃속이 다 시원하다며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일후, 다시 찾은 장마당에서 하얀 고무신에 꽃분홍치마를 입은 최씨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도 땅의 색과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따스한 햇살아래 포근한 인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아련한 추억을 그리며 장날을 찾아다닌 게, 30년째다.



정영신-장날-1988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장에서 일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손을 놀리면 아깝다고 한다. 그 손의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 나도 모르게 손을 덥석 맞잡곤 한다.이 날 팽상 흙만 몬지고 산께, 손이 짜잔하지라. 이손으로 새끼 덜 맥이고, 갈쳤제.” 오롯이 장에 앉아, 오고가는 계절을 헤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보자기를 풀면, 밭과 산과 들판이 한쪽씩 따라 나온다.



정영신-장날-1989 장수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35X24cm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기록이다. 옛날 필름 속에 지역의 문화와 생활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좀 더 열심히 작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도 장을 지키며,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은 있다.아직도 장날이면 삼대가 한 공간 안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세대 간의 정을 나누는데, 꾸밈없는 사람들도 있다.

  

'눈빛출판사' 발행 / 정영신 '장날' 사진집 



장날은 여전히 인정이 오가는 문화의 텃밭이고,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거울이다.그러나 장마당 풍경도 인심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돈의 논리에 그 훈훈한 인정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도는 그 때 그 사람을 만나러 오늘도 배낭을 챙긴다. 우리 모두, 인정 한 사발 마시러, 장에 가자. / 정영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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