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은 불알에 요랑 소리 나도록 바빴다.
오전에는 주민들에게 배급되는 교회 빵 봉지 따라 다녀야하고, 정오에는 '빈곤철폐 퍼레이드' 찍으러 동대문 가야하고,

오후3시부터는 동자동 새꿈 공원에서 열리는 쪽방주민들을 위한 공연을 찍어야 한다.

퍼레이드를 끝까지 지켜보진 못했지만, 아쉬운대로 마무리했다.

다섯시가 넘어서야 모든 일이 끝나 주민들도 뿔뿔이 헤어졌다.

바쁘게 쫓아다니느라, 오전에 빵 한 조각 얻어먹은 것이 고작이라 배도 고프고, 술 생각도 났다.

‘어디서 끼니를 해결할까?’ 걱정하고 있는 차에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태백에서 활동하는 광부 사진가 박병문씨 였다.
충무로 ‘브레송’으로 오라기에, 옷 갈아입으러 쪽방부터 올라갔다.

그날따라 4층 올라가는 계단이 왜 그리 힘든지, 끙끙대며 몇 번을 쉬었다.
그냥 갈 수도 있었으나, 카메라 전지도 갈아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하기 때문이다.
온 종일 땅바닥에서 헤맨 옷을 입고, 어떻게 지옥에 갈 수 있겠나?

기다리다 지친 김남진씨와 박병문씨 내외는 갤러리 밖에 나와 있었다.
지난 8월, 정영신의 ‘장날’ 전시장을 찾아줘 만나기는 했지만, 엄청 반가웠다.
멀리 떨어져 살긴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챙겨주는 고마운 후배다.

그 날은 모처럼 영양 보충시켜 준다며, 고기 집으로 끌고 같다.
갈비 살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더니, 술맛이 꿀맛이더라.

한 잔 먹은 김에, ‘서울도시빈민프로젝트’에 대한 기획과 진행을 김남진씨가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일전에 페북을 통해 복안을 밝히기는 했지만, 직접 말문을 연 것은 처음이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었다,

큰 짐 하나 벗었는데, 동자동에만 전념할 수 있어 홀가분했다.

술자리에서 김남진씨의 이태원 촬영길에 따라 나서기로 했으나, 서울역에서 내려 버렸다.
몸도 지쳤지만, 박병문씨가 챙겨 준 음식이 마음에 걸려서다.
태백에서 가져 온, 삶은 고구마를 비롯하여 만두와 밥 등, 한 보따리였다.
이 정도 음식이면 이틀 동안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이 웬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스럽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4일은 ‘동자동 사랑방’에 갔다.
나도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에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다.
가입비 천원과 이 달 출자금 만원을 냈더니, 통장 하나 만들어 주었다.
신용불량자라 통장도 없는데, 입출금이 자유롭진 않지만, 기분 좋더라.






서울 중심의 사각지대에 있는 ‘동자동사랑방’은 쪽방 촌 빈민들의 자립을 돕는 공동체다. 

단발성에 그치거나 명분 내세우기에 급급한 구호의 손길보다, 진정으로 주민들을 도우며 함께 어울리는 곳이다.

조그만 사무실이지만, 주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한다,

비좁은 쪽방에 선반을 만들어 주거나, 물품의 공동구매로 비용을 절감시키는 등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사랑방 식도락’에서는 천 원에 식사를 제공하고, 무료로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5년 전, 빈민들이 조금씩 아낀 돈을 출자해 공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의료비와 주거비 등 긴급한 생활자금이 필요한 조합원들에게 빌려주는 소액대출을 비롯해,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공동사업과 다양한 마을공동체 행사를 벌여, 벼랑에 선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동물원에 먹이 주듯, 밥과 빵이나 던져주는 봉사단체, 조그만 돈으로 안주하게 하는 정부의 빈민정책에 비해서는 훨씬 모범적이다.






그 날은 녹색당 홍보팀장인 한진희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동자동사랑방’을 방문하여

우건일 조합장으로부터 쪽방촌의 현안과 문제점을 듣고 있었다.

방문한 젊은이들이야 빈민들의 실태에 당혹스러웠을지 모르지만,

정치하는 인간들은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걱정스러웠다.











아무튼 그들과 함께 ‘사랑방 식도락’에서 천 원짜리 식사를 했는데,

소 뼈 목욕한 국물이긴 하지만, 그 날의 메뉴는 곰탕이었다.

젊은이들 입맛에는 맞지 않을텐데,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더라.






그런데, 빈민들이 사는 촌방 촌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외국인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이웃의 한 분은 119요원들에 의해, 병원에 실려 가는 모습도 보았다.

부축하여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보아, 겉 모양은 괜찮으나, 속병이 심각한 것 같더라.

부디 별 탈 없이, 다시 돌아 오길 빌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공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는데,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남의 일 같지 않더라. 나도 요즘 밥은 먹기 싫고, 술 생각이 간절한 때가 많으니까...

다행스럽지만, 아무리 술 생각이 나도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다짐은 한 번도 깨트린 적 없었다.


길거리에 나가면 쪽방촌 사람이나 노숙자들의 술자리가 곳곳에 있지만,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만, 술을 마시기 위해 그들을 만나지는 않는다.

술에 끌려 다니지 않고, 내가 술을 끌고 다니기 위한 나의 철칙이 잘 지켜지길 바랄 뿐이다.









가난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슬픔이 술을 찾게하고, 외로움에 또 한 잔한다.

그들의 고민을 잊게하고 위안해 주는 것은 술 밖에 없다.


세상이 알콜 중독자를 양산 하는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추교부(52)



동네를 한 바퀴 휘~ 도는 것이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어제는 공원에서 큰 길로 내려가니, 길가 한 쪽에 추교부, 김영훈, 김태식이가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라.
한 잔 얻어먹으려 끼어 앉았으나, 술이 떨어졌다.
얼른 가서 막걸리 두 병을 사왔더니, 모두 입이 벌어졌다.

“형님이 엿 같은 내 기분을 알아주네!”라며 추교부가 더 좋아했다.
이 친구는 일찍이 광운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그런대로 잘 살았다.
그러나 직장에서 잘려나며 인생막장에 들어 선 것이다.
요즘은 쪽방 얻을 형편도 되지 않아, 친구 쪽방에 끼어 자거나 아무데서나 잔다.

지난밤에는 교회에서 잤는데, 일어나보니 신발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일어 난 놈이 바꿔 신고 간 모양인데, 헌 운동화 한 컬레만 달랑 남았더란다.
“모처럼 괜찮은 신발 하나 장만했는데, 복도 지지리도 없다”며 투덜댔다.
날씨도 쌀쌀해 지는데다,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신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큼직한 운동화를 질질 끌고 다닐 일이 보통 일은 아니듯 싶다.

하기야! 남의 신발 바꾸어 신고 간 놈의 사정도 보나마나다.

다들 없이 사는 죄 뿐인데, 교회서 신발을 잃어버렸다기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릴 적 동네 꼬마들이 찬송가 곡에다 가사를 바꿔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예수 사랑 할라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훔쳐가더라.
내 신 내놔~ 내 신내놔~”

사진, 글 / 조문호

























코구멍만한 쪽방에도 손님이 찾아온다.
이주용교수와 최건모, 김시우씨는 프린트기 때문에 도와주려 왔었지만,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조성기, 최영문, 정중근, 조수빈, 김보섭씨가 다녀갔다.







지난 9일에는 무의도를 예술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전 재산을 꼴아 바친 정중근씨와

인천의 소리꾼 조수빈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단, 만나기 쉬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성을 고려해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서울역 그릴이 좋을 것 같았다.

쇠고기 전골인지 뭔지 음식은 별로였지만, 식당 분위기는 좋았다.

막걸리도 조그만 유리병에 담겨 나왔는데, 공기 잔에 한 잔씩 마시니 없어졌다.

내가 밥값을 내진 않았지만, 계산은 만만찮을 것이다.






쪽방 지척에 이토록 근사한 곳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날은 번잡한 서울역 시설 곳곳을 둘러보느라 눈병 날 번했으나,

사람들이 몰리는 서울역 변두리에는 어김없이 노숙자들이 있었다.





두 분을 쪽방으로 모셔와 겨우 믹스커피 한 잔 대접했다.

두 분 모두 공연이나 축제촬영을 부탁하러 온 고객인데, 이 따위로 처신해 사업이 제대로 돌아갈지 모르겠다.





그 이튿날인 10일엔 사진가 김보섭씨가 찾아왔다.
충무로 ‘브레송’에서 최광호씨 전시 보러 온 김에 들린다고 했다. 전시장에서 먹다 남은 와인을 가져왔는데, 맛이 꽤 괜찮더라.

김보섭씨는 아직 양동 사창가가 남아 있는지 궁금해 하여 양동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 본 것이다.

빌딩 숲 속에 끼어 있는 낡은 골목 곳곳에, 이불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널려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7일에는 ‘동자희망나눔 회원증’을 받았다.
지자체의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발급하는 이 회원증은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일단, 동자희망나눔센터의 샤워시설과 세탁시설을 활용할 수 있고, 각종 민간단체에서 지원하는 식료품을 받을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도 똑 같은 쪽방촌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동자동 주민기자증으로 느껴졌다.

내가 체험하고 느끼는 문제점은 물론,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알리고,

주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함께 권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시나리오작가 최근모씨와 사진가 김시우씨가 찾아왔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프린트기 지원내용을 알아 보러 왔다가, 동자동 사랑방에 들려, 내가 못한 부탁을 해 주기도 했다.



'동자동사랑방'의 박정아씨, 쪽방촌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보수성향의 일부 주민들은 진보성향의 사람들이라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사업에 진보, 보수가 웬 말인가?

 

[동자동 사랑방 조합장]

 

그 친구들이 떠난 후, 상담소로 가다 김유례씨를 만난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며 자기도 찍어 달라 부탁 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진을 강 호씨가 알아, 여기 저기 보여주며 소문 낸 것이다.

SNS의 위력을 또 한 번 실감했다.

덕분에 이기영씨의 안내로 몸이 아픈 김익윤씨를 찾아가 찍기도 하고, 이대영씨 등 여러 명의 영정사진도 찍었다.

프린트기만 들어오면, 찍은 모든 사진을 뽑아 주인에게 돌려 줄 작정이다.


김유례씨는 나와 동갑내기다.


강완우씨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늦게 나가 빵을 못 받고 돌아서니, 슬그머니 닥아와 자기가 받은 빵봉지를 내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두시 쯤, 공원입구에 가보니, 일찍부터 정재헌씨가 술자리를 깔아 놓았다.

그 날은 강완우, 이기영, 김장수씨 등, 술 친구들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사내도 있었다. 용팔씨 이야기로는 오늘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턱 쏘았다. 벼룩도 낮 짝이 있다는데, 맨 날 얻어 마실 수만 없잖은가?

추교부, 나흥주, 장국태씨도 뒤늦게 나타나,  술과 담배 값으로 파랑새 석장을 날렸으나 기분 좋게 마셨다.

 

“니는 무슨 죄 짓고 교도소 갔노?” 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 대답이 걸작이다.

“안 만졌는데, 여자 엉덩이를 만졌다고 잡아가데요.”  용팔씨 설명으론 성추행범으로 잡혀 한 달 넘게 살다 나왔단다.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요즘 초상권 문제나 성추행 문제에 너무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 쪽 팔릴까봐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내의 사진은 찍지도 않았고, 이름도 거명하지 않았다]

 

 

 

 

 

위에 있는 김장수씨는 부산 동성고등학교 출신으로 기계체조선수였는데, 고향은 경남 진영이라다.

나도 젊은 시절 '김해농협'에 근무할때, 진영에 자주 간 적이 있어 더욱 반가웠.




혼자서 얼마나 여자가 그리웠으면, 모르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을까?

옛날 같았으면 빰 한 대로 끝낼 수도 있는 일을, 감방까지 보내야 하는 세상이 너무 야박한 것 같더라.

그래서 그 친구에게 부탁했다. “내가 멋진 여자 알몸사진 한 장 뽑아 줄테니, 생각나면 그걸 보며 딸딸이나 쳐라”


어떻게, 이런 저런 설움을 알았는지, 하늘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술에 눈물같은 빗방울이 섞이니, 술 맛이 달더라.


[주민 자치회의 장면]


 

 

 

 

난, 그만 일어서야 했다.


오후 다섯 시부터 ‘동자희망나눔 센터’에서 주민자치회의가 열리기 때문이다.
술은 취했지만, 어떠한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궁금하고, 모르는 분들에게 신고하고 싶어서다.

가보았더니, 말은 자치회의라지만, 여러 가지 일을 알려주는 공지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진료, 예방접종, 무료급식 등의 날짜를 알려주기도 하고, 필요한 물품을 신청받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대개 일인용 전기장판이나 이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분이 그 유명한 용팔씨랍니다.]



밖으로 나오니, 술마시던 친구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마시고 있었다.
비를 맞아가며, 세상 설움을 술잔에 풀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않아, 십팔번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목이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의 보안관 양반도 가족처럼 편안한 사람이다.

 


 

 

이 양반은 음악을 너무 좋아해 항상 레디오를 들고 다니며 춤을 춘답니다.

 

 

 

 

 

 

 

 

회의장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이 너무 쓸쓸하다.

 

 

 

족발안주를 보니 소주가 생각나네요.

 

쪽방 사람들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숙자입니다. 그들도 쪽방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노숙자들이 기초수급생활자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주민등록이나 가족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인데,

더 추워지기 전에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책이 나왔으면 합니다. 

 








 


동자동 쪽방 촌에 들어온 지 일주일 뜸 되니, 서서히 길이 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살며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는 끼니 때우기다.
하루 한 끼만 먹고 나머지는 떡이나 빵조각으로 해결하는데, 그 한 끼가 문제인 것이다.

봉사단체나 상담소에서 갖다 준 라면은 쌓여있으나, 끓여 먹기가 귀찮은 것이다.

안 먹고 사는 방법은 없을까?

배가 덜 고파서 그렇겠지만, 대개 급식소에서 얻어먹고, 쉬는 날은 싸구려 식당에서 해결한다.

그 외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
사진 찍는 일이나 컴퓨터 만지는 일 외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잔다.

낮에 자빠져 자고 밤새 컴퓨터와 씨름하기도 한다. 아무도 간습하지 않으니, 마냥 꼴리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나를 살맛나게 하는 것은 변해가는 주민들의 친근감이다.

만나면 말없이 웃어주는 표정들이 밥은 챙겨 먹었는지 묻는 것 같다. 대개 사는 게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곳은 다른 곳과 달리 인정이 살아 꿈틀거린다. 다들 없어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다.

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니 인정이 살아 남았을 게다.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목요일에 ‘가톨릭사랑평화의 집’에서 실시하는 도시락 배달에 따라 나섰다.
그 날은 평소에 관심 없던 도시락 반찬에 유달리 관심이 갔다.

오뎅, 버섯, 콩나물, 김치가 도시락에 담기고 있었는데, 침이 꿀꺽 삼켜졌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혼자 살게 되었으니 음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집에서 나올 때, 이 것 저 것 살림살이를 챙겨주며 “딸 시집보내는 것 같다”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중고 냉장고를 사러가서, 내가 우겨 제일 적은 것을 골랐기 때문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좁은 방에 버티고 있을 냉장고의 중압감이 싫어서였는데,

아내가 더 큰 것을 사야한다고 만류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배달하고 남은 반찬을 얻어 올 수도 있지만, 냉장고가 작아 넣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도시락 배달하러 나갔더니, 술이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자는 사람이 눈에 밟혔다.

다들 밥 대신 술로 끼니를 때운 모양이다. 하기야 밥보다 술이 술술 잘 넘어가기야하지만, 마음이 아프다.

동자동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다른 곳 보다는 낮은 것도 다들 술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는 마시되, 제발 끌려 다니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것이 걱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으로 이사 왔던 지난 3일, 도시락 자원 봉사하러 갔다.
그런데, 그동안 봉사해 온 ‘평화의 집’ 문이 걸려 있었다.

매 월요일과 목요일에 나누어주었는데, 개천절이라 쉬는 모양이었다.


발길 돌려 서울역 지하철 방향으로 내려가니 안면 있는 노숙자 한 명이 웅크려 자고 있었다.
그 위에 그려진 광고판이 너무 대조적이라 사진 한 장 찍었다.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오니, 그 사이에 네 명이 앉아 술판을 벌여놓았다.
잠자던 노숙자는 인사동에서 여러 차례 만난 떠돌이라, 같이 앉아 막걸리 한 잔 얻어 마셨다.

동자동 공원으로 돌아오니, 그 곳에도 여러 명이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늘 이사 왔다는 최상섭씨와 정재헌씨 등 몇 명이 있었는데, 초장부터 다들 취해 있었다.
정재헌씨는 ‘희망 나눔 센터’에 빨래하러 온 김에, 한 잔 한다고 했다.


“이름은 알아 뭐 할끼고? 술이나 마시라”는 경상도 사내가 한 마디 했다.
“살 날이 많으니, 술은 천천히 마시는 기라. 더러운 세상 꼭꼭 씹어가며...”
최상섭씨가 너무 취해 횡설수설하니, 점잖게 한 마디 던진 것이다.

예쁘게 분단장한 김은자씨가 살며시 등장했다.

“공주님 넘 예쁘요”라고 칭찬했더니, 살포시 웃는다.
갑자기 경상도 사내가 “밥은 뭇나?”라며 내게 말을 걸어 와, 
“배달 봉사하고 한 그릇 얻어먹으려 했으나 그 날은 쉰다니 하늘 닫힐 때까지 기다려야지”라 했다.
그가 슬며시 일어나 매점에서 컵라면과 우동을 사왔다.

난, 컵라면을 좋아하지 않지만, 성의가 고마워 받았다.


“나도 사먹을 돈 있는데, 왜 쓸데없이 돈쓰고 그래”라고 말했더니,

“사람은 정이 있어야지, 정!”이라 했다.
그 흔해 빠진 정이란 말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씨발~ 눈물 떨어진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그 맛은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셀카로 박았는데, 난 어디갔노?









12일까지 인사동‘나무화랑’에서 열려

형상미술가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동화씨는 ‘격정에서 경건’이라는 제목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의 예술은 이성이나 사유가 아닌 본질적 감성의 촉수를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김진열, 땅과 하늘을 이어가니 91cmX116cm, 2016



그렇다. 그래서인지, 내눈에는 우리민족의 한과 분노로 읽힌 것이다. 한민족의 한과 설음을 토해내는 강렬함이 엿보였던 것이다.

필자는 화가 이청운, 황재형, 권순철씨처럼 거칠고 암울한 붓 길을 좋아한다. 김진열씨 작품 또한 거칠고 투박함을 좋아하지만,

그만의 또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김진열,  숨겨진 숨결 156X10cm, 2016


얼핏 보면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각이 아니다. 여수에 있는‘연도’라는 섬에서 떠내려 온 철판이나 양철 등

폐기물을 주워와 작업의 질료로 이용하는데, 소금기에 절은 철판들은 시뻘건 녹물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걸 자르고, 버려진 마분지를 여러 겹으로 덧붙여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김진열, 뿌리와 더불어 78X109cm, 2016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우리 민중들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제작한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칠한 거친 작품들은 외세에 의해 찢기고 분열되어 온 우리민족의 상처 같았다.



▲김진열,  불휘 깊은 91X116,5cm, 2015


그리고 소나무의 투박한 결에서 강인한 민족적 정체성도 느껴졌다.

또한, 우리 민초들과 함께 해 온 장승같기도 하고...김진열씨의 생김생김은, 마치 임꺽정을 연상시킨다.

임꺽정을 보진 못했지만, 수염만 깍지 않았다면, 꼭 산적 같은 모습이다.

임꺽정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고, 나쁜 놈들을 힘들게 했다. 좌절하지 않고 분노를 삭여가며, 싸우는 정신도 같다.



▲김진열,  땅과 하늘을 이어가니 91X116,5cm,  2016


작가의 조형적 감수성으로 빚어 진, 투박한 노동의 힘, 거기에서 버려진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이 꿈틀거렸다.

말보다 강한, 상징의 힘에서 우레 같은 폭발력도 엿 보인다.



▲김진열, 껴안고 109X78cm, 2016


작가는 우리 민중들이 섬겨왔던 거대한 나무들을 모셨다고 했다.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민중들의 분노를 다독이며 위안하는 무속적 주술 같은 것도 읽혔다.


▲김진열, 잘린 이후 78X 109cm, 2016


김진열씨가 보여 준, 질기고 강인한 힘은 결국, 우리 사회와 정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작품을 말하는 김진열작가


[스크랩]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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