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줄이려 잘 나가지 않으니, 이젠 다른 일이 꼬리문다.
다음 달 열리는 오일장 박람회 일로 급히 정선에 다녀와야 했다.
당일치기지만, 집에도 가지 않고 그냥 올 순 없었다.
지난달 심은 고추와 옥수수에 거름도 주고 물도 줘야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필요해 검사만료일이 다 된, 폐차 직전의 고물차를 불러냈다.

부랴부랴 ‘성산자동차검사소’부터 달려갔으나,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오후6시가 가까워서야 순서가 돌아왔는데, 우려대로 불합격이었다.
매연 1% 초과에다 파손된 후미 등 때문에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깨진 아크릴만 교환 할 수 없어, 통째로 갈려면 가격이 만만찮았다.
정선 갔다 와서 해결할 생각으로 동자동으로 돌아갔다.
분향소에도 들려야 하고, 용성이네 쌀을 전해주는 등,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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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분이 돌아가신 동자동 분향소는 30분이나 늦었지만, 다들 기다려 주었다.
연고자 없는 세 분의 상주가 되신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우건일, 조두선,
김정호, 선동수, 박정아, 이난순씨 등 여러 분이 남아계셨다.
쪽방에서 돌아가신 채로 발견된 김동휘씨의 장례는 내일이라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드릴 수가 없었다.

저승에서나마 사람대접 받기를 염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잘 때는 한없이 자지만, 안 잘 때는 허구한 날 날밤을 깐다.
틀에 짜인 규칙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잠자는 건 죽는 연습이라는 생각이다.
광주 518묘역에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한 두 시간만 눈을 붙이고 정선으로 떠나야 했다.



 


오전에는 군청에서 일을 보고, 오후에는 만지산집에 들렸는데,
얼마나 가물었던지, 말라죽은 야채 모종이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다.
물 퍼 나르고 거름 뿌리느라, 오줌 누며 거시기 볼 시간도 없었다.

어두워서야 간신히 마무리하고 산꼭대기 사는 최종대씨 집에 올라가
늦은 저녁밥을 얻어먹었더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떠나려 했으나, 한 시간만 눈 부쳤다 가라며 두 내외가 붙들었다,
그 한 시간의 잠은 꿀맛이었다. 짧은 시간의 천국인 셈이다.





서울로 돌아오니, 오전 두시가 지나버렸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 온 걸 축하한다며 정영신씨와 술잔을 들었다,
작년 무렵 만지산에 들어 온,  치정에 얽힌 여인네 이야기를 안주 삼았다.
꽃뱀처럼, 어리숙한 촌 남정네들을 녹여 단물만 빨고 내친 놈이 한 둘이 아니라는데,
믿기지 않는 소문이었다. 와전되었기를 바라지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그 이튿날은 온 종일 자동차검사에 매달려야 했다.
정선가는 비용에 맞먹는 후미 등 값 줄이려 장안동 중고가게를 누벼야 했다.
그 다음은 매연이 문제였다. 검사소에선 1% 초과로 배기통만 털어 오라 했는데,
브란자를 수리해야 한다며 상당한 수리비를 요구했다.






아는 정비업소에 찾아가 부탁하니,
한적한 곳에 가서 패달을 밟아 공회전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처음부터 왜 검사대행업체에 맡기지 않았냐고 했다.
고물차는 대행업소에 맡기면, 아무 탈 없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런 불법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도장을 찍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안전문제인데 어떻게 아직까지 그런 게 통하는지...





어렵사리 검사는 받았지만, 이박 삼일동안 바쁘게 돌아 다녀야 했다.
쪽방에 올라와 라면 한 그릇 끓여먹고 컴퓨터를 켜니,
그때야 쌓였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 놓은 채, 누가 업어가도 모를 상태로 뻗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이튿날 점심 무렵이었는데, 장장 열 몇 시간을 잠든 것이다.
차라리 영원히 잠드는 것이 더 편할 법 같기도 했다.

사진들은 몇 일전에 찍은 동자동사람들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올 해로 여덟 번째 열리는 동자동 어버이날 행사가 지난 5월8일 오전10시부터 오후2시까지 동자동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열렸다.

해마다 어버이날을 맞아 ‘동자동 사랑방’(대표 김호태) 식구들이 마련하는 잔치인데,

주민들로 부터 모금한 돈으로 손수 음식을 장만하는 등 서로 협력하여 정 나누는 자리다.

외롭게 사는 쪽방 촌 빈민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음식을 대접하며, 이웃과 소통하게 한다. 

다른 음식 나눔과는 달리 반주까지 곁들일 수 있었으니, 더욱 즐거운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공원에서 술을 못 마시게 되어 있지만, 이 날만은 '동자동사랑방'에서 제공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주민들과 노숙인 등 약300여명이 모여 모처럼 이런 저런 정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미역국과 밥 부침개, 과일, 소주, 막걸리, 음료수 등 준비한 음식이 푸짐했으나,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았는지 오후2시까지 시간을 채울 수가 없었다.

이 잔치는 다른 곳에서 전혀 후원을 받지 않고, 마을사람들 성금으로만 치루어 졌다는 점이 좋았다, 

잔치비용으로 총 250만원을 들였다는데, 229명의 주민으로부터 한 푼 두 푼 모은 모금액이

전체 소요비용과 비슷한 2,513,230원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일 손을 보태고 협력한 애착의 산물이었다.

어려운 쪽방주민들이 더 어려운 노숙인들을 대접한 고마운 자리였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 빨래집게 사진 나눔전도 열었다.

공원 주변 나무 사이로 쳐진 빨래 줄에다 에이바이텐 규격의 사진 135장을 내 걸었다.

7개월 동안의 기록에서 골라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몇 달 전에 찍은 결혼사진을 여지 것 전해 주지 못했으니, 그동안 당사자를 만날 때마다 얼마나 민망스러웠겠는가?

돈 좀 생기면 한꺼번에 돌려주겠다며 미뤄왔는데, 어버이날을 기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만든 사진도 주로 초상사진이나 기념사진 등 본인위주의 사진을 골랐는데, 엿쟁이 마음이니 너그러이 이해하기 바란다.

그리고 서로 돌려보기 싶게 빨래 줄에 사진을 걸어두고, 본인이 집에 갈 때 거두어 가기로 하였으나,

안내 글을 못 보았는지, 술이 취해 잊어버렸는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만든 사진이야 다음에 전해주면 되지만, 미처 만들지 못한 사진이나 추가로 촬영하는 사진은 올 추석잔치에서 돌려드리기로 했다. 

본인 사진이 없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혹시 동자동 거리나 공원에서 만나면 “어이 조기사! 사진 한 판 멋지게 찍어”라고 말하라,

결국 남는 건 사진뿐이다. 그 기록이 우리의 역사이고, 크게는 대한민국 역사다.

이날 잔치에는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회장과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우건일 이사장, 남영동 동장 마필승씨가

나와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했고, 정의당 용산지구 정연국위원장, 사진가 김 원, 정영신씨도 참석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건강한 여름 맞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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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조문호/사진가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더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무명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썰려나가도 사진계의 어느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진가들이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소멸되고 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부기록보존소’에는 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발굴하여 소장하는 부서가 없을까? 고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알려진 작가 위주로 소장전을 갖기도 했으나,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뜸하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탁상에서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이나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디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진가들이 다들 살기 어려우니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다. 최근 폐북에 글을 올려 말썽을 일으킨 두 사진가 모두 가난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은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있으나, 그 행위 자체는 용납할 수 없다. 거론된 해당 출판사나 갤러리 측은 많은 사진 중에 선택해야했으니, 밀려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갑 질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건 아니다. 어려운 사진계를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며 의욕을 꺾어버렸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심의한다는 모욕적인 말을 퍼트리기도 하고,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협박하고 나선 것이다. 두 분 다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많은 사진가들을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은 개인적 욕심과 자기도취에 빠진 사진가들의 전형적인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가들만이 아니라 사진계 전반에 문제가 많다.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포기한지가 수십 년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방치되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여지 것 그 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점에 저항하며 기자회견장 한 번 마련 한 적 없고, 타 단체와 연대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문제점을 시정하고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아 나선 적도 없었다. 선배나 후배나 모든 사진가들이 자기밖에 모른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멘터리사진가들 조차 나서지 않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진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으려면 정치인들과 교류도 있어야 되지만, 정치적인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술행위에 정치가 개입되는 자체는 말이 되지 않지만, 사진계 발전이나 후진을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사진인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니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그러니 정치인마저 사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대선후보의 문화포럼에 모든 예술분야 인사들이 골고루 참석했으나, 유독 사진가만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건 한 사례일 뿐이지만 도처에 사진이 개 취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또한 자업자득일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진인들은 물론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사진-



박근혜가 구속되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며 속이 후련하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지은 죄를 뉘우칠지 모르겠다.

그동안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헤아리면 죽어 마땅하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동안 일 핑계 대며 컴퓨터와 날밤 까기를 밥 먹 듯 하였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술 취해 들어와 담배연기 자욱한 쪽방에서 잠 않자고 노닥거린 탓이다.

이것저것 사진 찍어오면 정리하는 일도 만만찮은데다,
인터넷 검색하고 페북 질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잠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일거리를 미루지 못하는 습관도 있지만, 페북에 들락거리며 더 심해진 것 같다.

정영신씨가 나더러 인터넷 중독이란 진단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핸드폰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지만,
일 때문에 컴퓨터와 씨름하다보니, 수시로 들락거린 것이다.

일이나 술도 갖고 놀아야 한다는 게 평소 신조였는데, 끌려 다녀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내 몸의 적폐 하나 청산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세상의 적폐를 운운 할 수 있겠나?

일단 컴퓨터를 몇 일 동안 켜지 않았다.
지난 주말의 촛불집회를 비롯하여 찍은 사진이 수두룩했으나, 그냥 정리하지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을 정리하지 않으니 찍기도 싫었지만, 사진을 찍지 않으니 할 일이 없어졌다.
더구나 박근혜 파면으로 쫒던 대상을 잃고 생긴 멍한 상태였는데,
거기다 일까지 없으니 무기력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타협안을 찾아냈다.
밀린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컴퓨터를 열었는데, 폐북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여지 것 찍어 온 사진들은 내가 필요한 사진도 있지만, 대개 상대를 위한 배려에서 찍어왔다.

그러니 사진이 좋든 말든 모든 사진을 블로거나 페북에 올렸는데, 주위로 부터 핀잔도 많이 받았다.

“왜 모조리 올리냐?”는 것이다. 안 좋은 사진은 작가의 이미지를 흐리게도 만들지만,

좋은 사진까지 왜 인터넷에 공개하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난 생각을 달리한다.

사진가 입장보다 찍힌 사람의 입장이라는 배려가 전제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사진이란 서로 많이 보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데, 숨겨두면 무슨 소용이냐?는 나름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젠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인터넷의 포로가 되어 찍는 것보다 보여주는데 더 골몰한 것 같다.

그러니 밤과 낮이 뒤 바뀐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죽고 나면 아무 일을 할 수 없으니,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내가 찍고 싶은 사진만 찍어 일을 최대한 줄이고, 일기 쓰듯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과 글도 몇 장만 올리기로...
폐북도 연결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다음 주에 정선 가서 기력 찾아, 그동안 소홀했던 동자동 작업에 매달려야겠다.

조문호



‘‘바람찬 전시장’을 주 무대로 석달 동안 열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현장미술을 펼쳐 촛불시민들과 함께했다,

자유롭게 벌인 미술 놀이판은 시민들과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고,

이러한 미술과 대중의 소통으로 미술본연의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게 성과라면 성과다.

마지막 전시였던 ‘촛불역사’전 역시 지난날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는 현장사진들이라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박근혜 파면과 함께 ‘광화문미술행동‘의 모든 작가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진가들과 화가 ,시인, 시민들의 사진으로 마련된 ’촛불역사‘전이 ’광화문미술행동‘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은 박근혜가 검찰 조사받는 날이라 곧바로 구속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그러나 검찰은 미적거리는 것 같았고, 다들 대선에만 꽂혀 개혁이나 적폐청산은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지만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물길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1일 정오 무렵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미술행동 팀들이 ‘궁핍현대미술광장’ 전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김준권대장을 비롯하여 류연복, 김남선, 김영배, 이광군, 김명지, 정덕수, 김가영씨,

그리고 참여사진가로는 이정환, 양시영, 곽명우, 홍윤하, 하형우, 정영신씨가 나왔다.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전시를 철수했는데, 한마디로 시원섭섭했다.

다들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데, 김준권씨가 광화문 음식에 질렸는지 인사동으로 가자고 했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을 먹기로 했으나, 자리가 없어 한 참을 기다렸다.

그 자리에 사진가 이정환씨가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한 병을 갖고 나오셨다.

불편한 몸으로 무거운 술을 챙겨온 성의가 고마워 쪼록 쪼록 마시다보니, 그만 낯 술에 취해버린 것이다.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이곳저곳 전시장을 돌아다녔는데,

낯 술에 취하면 지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옛말이 맞긴 맞았다.

아무튼 주책 떨어 죄송하고요, 그동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사진, 글/ 조문호























































지난 주말 인사동 거리에 우리나라 최고의 광대 패거리가 몰려왔다.
이 날 ‘광화문광장’의 19차 촛불집회에서 ‘옳’ 퍼포먼스를 벌인 후,
헌법재판소를 거쳐 갑자기 인사동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비주류 예술가 유진규 패거리의 인사동 행진으로 모처럼 활기가 넘쳐났다.
지나치는 관광객들과 상인들의 눈길을 한 곳에 끌어 모았으나,
‘옳’ 퍼포먼스 뜻이나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다.
주말에도 불구하고 관광객 수는 평소의 삼분지 일도 안 되더라.

세상에 옳지 못한 곳이 어디 한 두 곳이겠느냐마는,
인사동은 돈으로 섞어 문드러진 동네다.
전통문화나 예술과 낭만 따윈 아무 필요 없고, 오로지 돈이다.

관청은 물론, 이름만 그럴사한 ‘인사전통문화보존회’도 장사꾼들 손아귀에 논다.
하기야 “인사전통문화보존회”란 조직 자체가 인사동 장사꾼들로 모인 단체가 아니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쳤으나 중국 관광객이 물러나니, 이제 닭 쫓던 개신세가 된 것이다.

유진규씨가 굳이 인사동을 찾아 ‘옳’퍼포먼스 굿판을 벌인 것도,
인사동의 정체성을 돈에 팔아넘긴 그 작태를 꾸짖기 위해서다.
이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온 나라가 홍역을 치루고 있다.
이 참에 인사동도 본래의 모습을 돌아보아, 제대로 지켜주기 바란다.

이날 인사동 거리에서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와 퓨전음악인 윤강욱씨를 만나고,
유진규 일행을 취재하러 따라 다니던 영원한 동지 정영신씨도 만났다.
고향 같은 동내에서 고향 같은 사람들 만나니, 그 날이 봄 날이었다.
진정, 인사동의 봄은 오려나?

사진, 글 / 조문호





















 

▲ 조문호 사진가

 

요즘 친박 단체들의 관제데모를 두고 '태극기 집회'라 부른다.

언제부터 태극기가 극우단체나 친박 성향의 전유물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정치적 오용은 태극기에 대한 모독이다.

피로 지켜낸 나라의 국기가 일제에 빌붙었던 박정희 우상화와 그의 딸 박근혜를 지키는 도구로 전락됨을

선열들께서 얼마나 통탄하시겠는가? 이 날 내린 봄비가 선열들의 눈물인양 서글펐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덮으려 마치 애국자처럼 태극기를 흔들어대더니 이젠 한 술 더 떠 성조기까지 흔들고 있다.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주체성 없는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운지도 모른다.

요즘은 그들의 패악 질에 태극기만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쩌다 신성한 태극기에 혐오감이 생기는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광화문광장의 '노란리본 공작소'에서 노란리본을 단 태극기를 나누어주어

촛불집회에서도 태극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극기에 노란리본을 달아 태극기 집화와 차별화하는 것도 안 된다.

나라가 두 쪽 나 태극기와 인공기로 나누어 진 것만도 서러운데 태극기까지 나누어서야 될 말인가?

지난 삼일절은 시청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로 뒤 덥혔지만.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보다 태극기가 오용되고 양분되는 참담한 현실에 온 종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날 찾아 간 지하철 시청역 인근에는 온 몸에 태극기를 휘감은 사람에서부터

박근혜 초상사진과 태극기를 들고 일인 시위하듯 서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여지 것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는 매주 나왔지만 ‘시청광장’ 태극기 집회는 처음 가보았다.

스스로 나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몰려다니는 것으로 보아 단체에서 동원된 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광장에선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으나, 확성기에서 들리는 소리는

종북 타령과 박근혜 탄핵반대를 외치는 선동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다.

연단에 나온 사람들의 어투나 집회 분위기도 왠지 북한을 닮아가는 듯 했다.

촛불시민을 종북 이라지만 그들의 짓거리가 북한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군복 입은 늙은이는 ‘군대여 일어나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는 ‘빨갱이를 죽여라’고 외치는 등, 하는 짓이 완전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같았다.

그런데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주최한 3,1만세운동 ‘구국기도회‘도

나라를 구한다는 이름과는 달리 대통령탄핵 반대 집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무대 단상엔 군복 입은 정광용 탄기국 대변인이 지켰고, ‘공산주의 반대’ 등의 손 팻말을 들고 성조기도 흔들어댔다.

정의를 앞 세워야 할 종교단체가 정치꾼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냥 두면 많은 시민들은 하나님에 등 돌릴 것이다.

태극기의 분열과 오용으로 삼일절을 우울하게 만든 그날,

‘광화문 미술행동’이 '바람찬 전시장'에서 태극기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태극기 역사’전을 열었다.

세종대왕상 뒤쪽에 자리잡은 이 기획전은 ‘광화문미술행동’의 촛불광장 프로젝트 일환이었다.

매주 주제를 바꾸어가며 많은 대중들과 소통해 왔는데, 이번에는 태극기에 관한 자료 전을 내놓았다.

태극기는 삼일절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보수단체의 태극기 오용이 도를 넘는 시점이라 시의적절 했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태극기에서부터 해방되어 친일파가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어 그린 것도 있었고,

여성 속옷 천에 그려진 태극기도 있었다, 싸움터에 동원된 것 같은 태극기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뚫린 구멍과 혈흔이 묻어 있었다.

전시기획자인 김진하씨는 ‘태극기는 국가에 대한 기호로서의 이미지에 앞 서,

3.1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어 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국민들 마음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국기로,

이런 태극기가 부패한 정치집단의 무능을 가리는 도구로 오 남용되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태극기의 역사’전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아 와 기념사진을 찍는 등 전시장은 온 종일 관람객들로 붐볐다.

비록 하루 열린 전시였지만, 어느 대형전시장도 이만한 관객동원이 쉽지 않다.

실사 이미지로 보여주었지만, 대형 프린트의 시각적 효과는 야외 전으로 그지 그만이었다.

촛불시민들에게 태극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태극기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는 시간이 되었다.

극우단체들이여! 더 이상 태극기를 슬프게 하지마라.
친일잔재인 너희들이 남용할 태극기가 아니다. 이제 그만 태극기를 내려라.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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