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전진기지 ‘광화문광장’에 무허가 철공소 하나 들어섰다.

박근혜 잡을 무기 공장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에게 예술적 결기를 다지게 하는 환경미술가 최병수의 현장 작업실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부패 정치를 예술로 치유하는 블렉리스트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되어버렸다.






최병수는 이한열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신촌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미술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부쳤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이고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도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한열 열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동아리 ‘만화사랑’과의 인연으로 내놓은

그의 첫 대형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으로 진보 운동 판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유명세나 재능보다 초지일관 지켜온 예술의 사회 실천적 헌신에 더 무게를 둔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들고 현장에 가서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머리을 공격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세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돈 안 되는 짓거리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하여 텐트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워 광장은 자연스럽게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숙소로 사용하던 텐트마저 틈틈이 가져 온 각종 공구들로 가득 차버려,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전전하며 노숙 아닌 노숙자신세로 전락하였다.

아직도 그가 광장에 조형물을 얼마나 더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박근혜가 물러날 때 까지 이어질 것 같다.

설치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 시작했다는 그가 만든 악세사리 용품도 제법 잘 팔릴 것 같았다.

블랙리스트라는 글귀가 새겨진 면도날 목걸이에서부터 뺏지, 그리고 꿈을 조형화한 열쇠고리 등,

매사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사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촛불광장을 예술광장으로 이끈 현장예술가들의 피와 땀이 베인 투쟁사는 역사의 한 현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박근혜는 하루빨리 퇴진하여 모든 작가들이 제자리에서 정상적인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2월16일

조문호 사진가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박근혜는 특검을 거부하며 헛소리만 늘어놓고, 정치인들은 권력 쟁탈에 눈이 벌게져, 시급한 민생법안조차 돌볼 겨를이 없다. 공무원들은 일손 놓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의 삶은 벼랑 끝에 섰다.
 
하루빨리 박근혜를 탄핵하여 정국을 바로잡아야 할 판에, 느닷없는 ‘더러운 잠’ 풍자화 논란으로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를 패러디한 이구영의 '더러운 잠'은 작품의 질적 문제점은 다소 있으나, 어디까지나 작가의 문제의식이 투영된 하나의 작품이다.

이 시비로 보수단체 회원들은 표창원 의원을 고발하고 자택 앞에서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국격 훼손, 여성 혐오, 성적 비하를 내세우며 거세게 몰아치자 표창원 의원에게 당직 자격정지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작품은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부숴 졌다. 엄연하게 표현의 자유가 살아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술인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났다. 지난 6일 광화문 광장에서 '곧, 바이전 작가연대', ‘문화연대’, ‘민예총’ 등 총 56개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더러운 잠' 작품 훼손에 대한 예술인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창작 표현의 자유 수호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을 훼손한 것에 대해 "새누리당의 사과와 함께 보수단체 회원들의 법적 책임"을 요구했다.

문제의 핵심은 예술 표현의 자유를 짓밟은 ‘블랙리스트’에 있다.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짓밟고, 강제하고, 방해하고, 배제해왔던 반 헌법적 세력에 있는 것이다. 패러디는 미술의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작가는 원작에 있는 창녀가 아닌 비너스를 오브제로 활용했고 여기서 가져온 코드는 ‘잠을 자는 행위’ 그리고 비너스가 상징하는 ‘미모’다. 즉, 세월호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박근혜는 잠을 자고 있었고 비너스처럼 미모에만 신경 썼다는 것을 강조한 패러디다.

이것을 여성 비하라고 볼 수 있는가? 새누리당 여성위원회는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주마”라는 푯말까지 들고 나왔는데, 진짜 ‘여성혐오’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주변 무리들은 이성 잃은 지 오래다. 법을 어겨가며 시간만 끌고 있고, 여론몰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국민적 지지를 상실한 수세국면을 이번 사건으로 왜곡하여 모면하려 설친다. 날조된 기사들이 도배된 엄청난 분량의 찌라시를 배포하며, 조선일보에 주말집회 광고까지 실고 있다. 참가한 시민들에게 돈을 뿌리는 정황도 이미 다 밝혀졌다.


여론조사에서 80%이상이 꾸준히 박근혜의 탄핵을 요구하는데도, 그들은 태극기가 촛불을 앞질렀다며 헛소리다. 물론 태극기집회에는 동원된 무리 외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노년층도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반공교육과 부패정권 나팔수 노릇하는 언론에 세뇌된 불쌍한 세대들이다. 이젠 광신도로 변해 죽을 때까지 바뀌기란 어렵다. 얼마 전 태극기를 감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한 노인이 바로 그런 전형이다.


그런 사람은 제쳐두더라도 좀 배웠다는 분들의 잘못된 사고가 더 무섭다. 새 박사라는 윤무부씨는 생태영향평가란 간판을 이용해 소중한 생명을 도매금으로 팔아넘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휠체어를 탄 채, ‘군대여 일어나라’는 피켓을 목에 건 사진을 보았다. 분명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구데타 일으키는게 군인이던가?


그리고 괜찮은 정치인이라 여겨왔던, 김문수씨의 박근혜 두둔하는 소리도 귀가 막혔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쪽팔리는 짓은 제발 하지마라. 그렇게 권력이 탐나는가?
 
나라꼴이 이렇게 된 것은 부패한 권력자들에 있지만, 일부 국민들의 방관도 한 몫 했다. 나 하나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나? 하는 생각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잘 못 배워 모르거나, 권력욕에 눈 뒤집힌 정치꾼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알면서도 빌붙기 위해 양심을 속이거나, 침묵하는 자들이 더 비겁한 것이다.


'이게 나라인가', 국민들의 탄식과 자괴의 목소리가 더 높다.

'더러운 잠'으로 여론을 돌리려는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들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박근혜 탄핵에 집중해야 할 때다. 대선에 앞서 정의부터 바로 세워야한다. 모두들 광화문으로 몰려나가 특검과 헌재에 힘을 실어주자.





정영신사진



지난 14일 열린, ‘광화문미술행동’의 네 번째 프로젝트 ‘응답하라! 1987’이 시민들의 참여속에 진행되었다.

체감온도가 영하13도에 이르는 한파가 시민들의 몸을 얼어붙게 하였으나,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강한 투지는 한파를 견뎌내게 했다.





이날은 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추모를 겸했는데,

박종철열사의 대형 사진과 그 당시 그림들은 30년 전의 민주항쟁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얼마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지 현수막 걸개그림들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지지대가 풀려나가 다시 끌어 메는 등 작가들이 고생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와 연대한 추모제였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탁 치니 억하며 죽었다”는 그 때의 말도 그렇지만, 청문회나 특검에서 오리발 내며 거짓말로 일관하는

오늘의 상황이 더 지능적이고 악랄하다.






현수막전에는 신학철선생의 ‘초혼가’, 조문호의 ‘87민주항쟁’,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등

그 때 그 시절의 이미지들이 내 걸렸으나 추운 날씨 탓인지 정치적 한기를 더욱 체감케 했다.

‘한국민족춤협회’에서는 ‘백년의 바람 춤’을 추었는데, 백년만의 바람인지 엄청 난 북풍이 몰아쳤다.

그 바람찬 광장에서 지켜보는 시민들은 이를 악물며 결기를 다지게 했다.






시민참여 인증샷 ‘그날, 나도 거기에 있었다’와 차벽공략에 설치될 그림판 작업도 진행되었다.

사진가들이 찍어주는 인증샷에 참여하며, 굳은 얼굴을 펴기도 했고,

작가들과 시민들은 언 손을 녹여가며 글이나 그림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김준권, 류연복, 김진화, 윤병권, 장경호, 이인철, 정영신씨 등 많은 작가들이 고생했으나,

이 날은 대구에서 올라 온 이재갑씨가 인증샷과 사진기록을 돕기도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하는 윤병권씨가 이재갑씨의 어린 시절 고향친구라는 것이다.

우연히 이산가족 만난 듯한 반가움에 얼었던 얼굴을 활짝 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이광군, 남 준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오후4시부터 다른 일과 겹쳐 잠시 떠나야했다.

그 시간의 기록은 정영신씨의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오후6시가 지나서야 현장으로 복귀하니, 시민들은 종각방향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우렁찬 함성은 영하의 날씨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청와대 문고리 잡고 발악하는 박근혜나 자기 잇속 차리느라 잔머리 굴리는 정치꾼들을 보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이제 민심을 그르치는 정치꾼은 발 붙이지 못하게 모두들 눈 똑바로 떠야 할 것 같다.






작업을 마무리한 “광화문 미술행동”팀들은 ‘남원추어탕’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먼저 본 작가 외에도 김진열, 김 억, 최병수, 이재민씨 등 많은 분들이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파하여 장경호, 최병수씨와 차 한 잔하는 자리에서 사진가 곽명우, 남 준씨를 만나기도 했다.

다들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느라 늦은 시간 까지 고생하고 있었다.







오는 21일 열릴 ‘광화문 미술행동’ 다섯 번째 프로젝트 ‘차벽을 넘어 광장으로‘의 주제는 “동녘이 밝아 온다”다.

정오부터 ‘서울민미협’의 깃발전을 시작으로 ‘광장 갤러리’ 설치, ‘세화 목판화 찍기(김준권, 류연복)’,

‘서예 퍼포먼스(정고암, 강병인, 여태명)’ ‘시민과 작가가 함께하는 그림, 글쓰기’, ‘인증샷 사진촬영 등

다양한 미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뒤편과 미대사관 앞에서 펼쳐진다.





오랫동안 끌어 온 집회의 누적된 피로와 추위로 시민들이 완급을 조절하고 있으나,

다음 집회에서 다시 한 번 동력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 걸 악용하여 뒤집기를 시도하는 ‘박사모’ 잔당들의 역습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은 박사모 잔당보다, 박근혜 무리가 척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과의 싸움이다.

13차 촛불집회에는 모두 나서서, 끝장을 내자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조문호사진































































정영신사진




















조문호사진


















2017년의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2월 31일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자'는 의미인

 ‘송박영신(送朴迎新)' 10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날 ‘광화문 미술행동’에서는 사진가들이 모여 '정의로운 촛불행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찍어주는

'그 날, 나도 여기에 있었다.' 초상사진 퍼포먼스가 열리기도 했다.

판화가 이철수씨와 김준권씨의 작품이 그려진 180×700cm 인증 샷 배경현수막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시민이면 누구나 촬영할 수 있었다.

다큐사진가인 조문호, 엄상빈, 정영신, 곽명우, 남준씨의 봉사로 시작되었지만 뒤이어 양시영씨와 하형우씨도 함께 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으로 본인은 퍼 갈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보폭을 좁히라고 했으나, 그게 잘 안 된다.
독하게 마음먹고 동자동에 살라고 왔으면,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놀아야하는데,
맨날 천방지축 돌아다닌다. 아니 끌려 다닌다.
어디 세상 연을 끊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던가?
인사동이나 사진판에 대한 연도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연도 마찬가지다.

요즘 나를 더욱 바쁘게 하는 것은 바로 박근혜다.
내가 무슨 투사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열 받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신경을 끊은 것이다.
티비나 신문 한 장 보지 않았으니 가능했으나, SNS에 접하며 달라졌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개인적이고 방임적인 처신으로, 여지 것 하나도 바뀐 게 없다는 자책 때문이다.

나야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자식들에게는 이런 세상을 물려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함께 사는 빈민들을 위해서라도,
싸울 수 있는데 까지 싸워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쁘다는 이야기 한다는 게, 박근혜만 나오면 말이 길어진다.

지난 연말에는 동자동사랑방 공제협동조합 홍보위원회의에 참석했다.
홍보위원 김정호씨가 홍보위원으로 같이 일하자며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나야 하는 일이 홍보하는 일이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승낙했는데,
할 바에는 제대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대외적인 홍보도 홍보지만, 그보다는 세상과 단절해 사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더 중요한 홍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200여명 중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조합원 수만 보더라도,
폐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벗이 되어주어 함께 어울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날 ‘동자동사랑방’ 사무실에서 가진 홍보위원 회의에는 차재설 홍보이사를 비롯하여

김정호, 허미라 홍보위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우리가 할 일은 홍보물이나 소식지를 제작하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후원자를 늘리고, 잘 모르는 분을 설득하여 함께 하는 것이었다.

결의를 다지는 식사자리도 만들어, 다 같이 소주 한 잔했다.

그리고 한정민씨도 꼽사리 끼었다.

사진, 글 / 조문호

















갑작스런 전시 준비로 보름 가까이 똥 오줌 못 가렸다.

갤러리 앞에 서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다.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며, 지난 시간을 돌아 본 것이다.
그동안 동자동에선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밤에는 일주일 만에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을 꺼내보며,
그걸 정리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번 전시는 느닷없이 코가 꿰인, 억지춘향격의 전시였다.
오래전 만들어 둔 포토포트폴리오에서 사진은 골라 썼지만,
초창기사진들은 필름 수정하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다.

돈도 시간도 없어, 전시를 안내하는 엽서도 만들지 못했다.
별도의 연락과 우편물은 보내지 않고 SNS만 알렸더니, 주위에서 말들이 많다.
왜 연락을 안했냐며, 삐친 친구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젠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처음엔 전시 비용을 걱정했으나, 다들 주변에서 도와주셨다.
고향의 후배사진가 하재은씨가 도와주었고, 이광수교수는 뒤풀이 비용까지 내 주셨다.
사는 것 자체가 빚지고 사는 인생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저승에서라도 갚을 날이 있을지...
애써, ‘사진인을 찾아서’ 기획 자체가 갖는 사진적 의미로 위안한다.
남는 장사인지, 손해 보는 장사인지, 그런 걱정마저도 정영신에게 떠 넘겨버렸다.

전시 디피는 일본에 사는 사진가 양승우와 시나리오작가 최근모가 도와주었다.
그들이 일복이 많은지, 내가 인복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오픈 날은 광화문광장으로 가야 하는 토요일이라
가능하면 평일에 오라고 알렸으나,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다.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이광수, 이규상, 김남진, 강제훈, 정진호, 윤철중, 양재문, 김준호,

권 홍, 이경희, 오윤석, 장경호, 김문호, 김 구, 김보섭, 임계재, 조준영, 나떠구, 김주혁,
박병문, 채재웅, 고정남, 고광석, 마기철, 박진호, 김봉규, 이윤기, 이은영, 황일환, 이정환,
이석필, 김 원, 김성규, 최근모, 조햇님, 유진오, 오윤택, 노광래, 정영신, 문진우,
박영환, 강제욱, 윤진원, 양승우씨등 전시를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갑자기 끄집어 낸 사진들을 펼쳐보이니 부끄럽기 짝이없었다.
박근혜 말처럼 ‘이럴라고 사진을 했는지 자괴감마저 든다.’
반 평생 동안 사진 사진 노래를 불렀는데, 겨우 이건가 싶다.
어쩌면 이것조차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일지 모른다.

아무튼, 돈 한 푼 없는 개털 주제에 전시까지 열며 기분 좋게 놀고있다.
모두들, 고맙고 고맙다.

이제 즐겁게 여생을 보낼 동자동으로 돌아갈 때가 닥아오고있다.
전시 오픈에서 찍은 이런 저런 모습을 기념으로 펼쳐 놓는다.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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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보다 찍고자 하는 대상의 삶속으로 들어가 ...2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 

 

 

조문호의 ‘사람이다’ 전이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리고 있다.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열두 번째 마지막 작가로 열린 조문호의 ‘사람이다’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였다.

 

 

 
▲ 사진가 조문호

1년 동안 김남진(갤러리 브레송) 관장의 기획아래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 교수가 작가론을 쓰고, 결과물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1월, 고정남의 ‘불친절한 사진?’를 시작으로 최영진의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영욱의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 김보섭의 ‘인물과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 이재갑의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 제주도에서 국화빵 CEO로 나선 권철의 ‘독대(獨對), 문진우의 ’당신이 보지 못했던 부산의 모든 것, 신동필의 ‘부르지 못한 노래’, 이수철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강정효의 ’제주의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 김문호의 ’사진 문법‘ 에 대한 도전, 마지막으로 조문호의 ’사람이다‘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인을 찾아서’는 사진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 전시란 생각이 든다. 20년 전에 사진 유학파들이 만든 ‘한국사진 수평전’이 한국에 등장해, 만드는 사진이 한 때 유행했었다. 사진이 사진논리에 묻혀가는 것을 경계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많은 사진인들이 서양의 사조에 골몰하고 있을 때, 우리사진은 제대로 숨도 못 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진인을 찿아서’ 프로젝트는 한국 사진사를 다시 쓰는 의미 있는 기획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조문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하는 사진들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초창기 사진에서부터, ‘87 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인사동 사람들’, ‘장터 사람들’과 현재 찍고 있는 ‘동자동 사람들’ 에 이르기까지 한 주제에 10여점씩 묶어 선보이고 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산이나 불교상징 이미지 등 생업과 관련된 사진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일관되었다. 그 사진들은 지나치며 찍은 것이 아니라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살며 찍은 사진이다. 한 때는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기 위해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 방을 얻어 살았고, 성노동자들을 찍기 위해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굴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고 말했다.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순간적 찰나보다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전농동 588번지

한 때는 ‘동강’ 탐사에 참여하다 동강 주변에 사는 산골 사람들을 찍기도 했다. 당시는 동강 댐 논란으로 동강의 자연생태가 사회적 이슈였으나, 그보다는 그 곳에서 평생 살아 온 두메산골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87민주항쟁 사진들도 그 현장에 있는 사람에 집중되어 있다. 방독면을 쓴 청소부아저씨, 최루가스를 못 견뎌 종이로 코를 막은 수녀님, 십자가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박종철 열사 어머니 모습 등 슬프면서도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7 민주항쟁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쳐다 본 입상들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눈동자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애잔한 슬픔과 그리움을 머금은 사진의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감이 짙게 깔려있다. 그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다. 또한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되고 소통되는데 쓰여야 한다고 믿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인사동 사람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조문호 작가론을 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중략-

 

 

노숙인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劇)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 2013 장터 사람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존중하며 찍어 온 대상들은 하나같이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이다. 자신의 몸을 파는 성노동자, 첩첩산골에 사는 농민들,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 동자동 빈민들 등 모두가 사회적 약자뿐이다.

 

   
▲ 2016 동자동 사람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이제 칠순의 나이에 동자동 쪽방 촌으로 들어가 빈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에 대한 그의 집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자신의 삶보다 찍고자하는 대상의 삶이 더 우선인 것 같다.

  “나의 사진은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면 그만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도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2월12일 / 정영신기자

 

 

[브레인 미디어 / 스크랩]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사진작가 조문호는 사진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사진가로서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주로 아는 사람을 찍어왔다. 이런 작업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 조문호, 인사동사람들(천상병),1983.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람을 모르면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눌러 붙어 살며 찍어왔다. 그들을 알려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을 때 조문호 작가는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방을 얻어 살았다. 

 

▲ 조문호, 청량리588, 1985.

 

 

성노동자들을 찍을 때는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귤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조문호의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 조문호, 두메산골사람들, 2000.

 

 

조문호 작가는 올 추석 무렵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갔다. 그가 찍는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만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돈이 사람을 망치는 것을 일찍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그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택한 작업을 한 번도 힘들다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평소 일로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여겼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일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2016.

 

하지만 그 또한 가장이기에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랜 고집을 따랐지만, 한 가정을 지켜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단지 그 가치 판단은 먼 후대에 맡길 뿐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이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문호 작가의 사진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20161월부터 12월까지 열 두 차례에 걸쳐 전시된 사진인 찾아서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작가로 선정된 조문호의 '人本' 사진이 “‘사람이다조문호 이라는 제목으로 10()부터 20()까지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이 사진전은 조문호 작가의 전 작품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한다.

 

이 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이다.”

 

■ 전시개요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전시제목 : “사람이다조문호

전시일시 : 20161210()- 1220()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충무로) 02-2269-2613

개막일시 : 20161210() 오후5


 

[브레인 미디어]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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