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서 지내는 날은 유독 밤이 한가롭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없으니, 볼거라고는 책 밖에 없다.
뭘 볼까 살피다, 성남훈씨의 ‘소록도’사진집이 눈에 박힌 것이다.




 


그 사진을 처음 본 것은, 20여년 전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였다.
‘삼성포토갤러리’에서 열린 성남훈씨 ‘소록도’ 전시를 보며 감흥을 받은 것이다.
그 좋았던 기억이 사진집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다.






성남훈씨의 ‘소록도’ 사진은 볼수록 정감이 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사진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가슴 아픈 삶의 모습이 세월의 두께에 숙성되어
그 당시 받은 감흥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소외되고 고통 받은 이들의 아픔이, 큰 사랑으로 빤짝였다.





성남훈씨가 보여준, 당시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거나,

혹은 숨기려 했거나, 아무도 모른 척 했거나, 아니면 관심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폐해에 의한 가난과 기아, 병자 등 약자나 소외계층의 삶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우습게도 예술이란 것이,  아픔의 고통이 클수록 사람들은 더 감동하고 예술성을 높게 산다.






일세기가 지난, 기나 긴 역사의 소록도 애환은 보는 이의 가슴에 사무친다.
소록도를 기록한 사진들이 더러 있지만, 성남훈씨 사진을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그는 잘 못 인식되었던 다큐멘터리사진의 실체를 온 몸으로 보여 준 사진가다.





한센병환자들이 머무는 '소록도'는  전라도 고흥군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다.

1910년 선교사들이 세운 ‘시립 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어

1916년 주민들의 민원에 의해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 개원되었다.

'소록도'는 아픔의 섬이었고, 치유의 섬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체재하다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소록도라고 한다.
어느 누가? 그 곳에 들어 가 사진 찍을 생각을 할 수 있으랴!
깊은 상처를 보여주기 꺼려하는 그들을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가의 진정성을 느끼고, 교감을 이루기까지의 노력은 보나마나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제일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지만,
사진보다 인간적으로 그들의 삶에 다가갔다는 점을 높이 산다.
그 앞에 작업한 루마니아 집시 생활상에 이어 인간애를 다룬 두번째 작업이다.






삼 년동안 두 달 넘게, 그곳에 생활하며 이루어 낸 역작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의 사진은 사회비판이나 캠페인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서정성이 짙게 깔려 있다.
큰 목소리보다, 잔잔한 여운이 깊고 오래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남훈씨의 촬영기록에 적힌 마지막 글은 자기 밖에 모르는 오늘의 현실을 반성케 한다.


“소록도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도 속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의 평안을 비는 시간이 더 많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조심스럽게 등 도닥여주는 행동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소록도'가 한센병 걸린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곳에도 우리네와 똑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 없이 보여준다.



글 / 조문호











지난11일은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일찍부터 술독에 빠졌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님은 먼 곳에’를 청성 맞게 따라 부르는데,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술 마시기 좋은 꿀꿀한 날씨라 인사동에 나왔다는 것이다.
가겠다고 말은 했으나, 술이 취해 걱정이었다.
사진 찍는 건 일상이나, 몸 가누기가 불편했다.






인사동에서 ‘툇마루’ 가는 골목을 접어돌다,
그만 난간에 걸터앉은 노인의 발을 밟아 버렸다.
“어이쿠! 미안합니다‘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전각가 최규일 선생이셨다.

야! 너무 반가웠다. 한 때는 인사동을 주름잡은 어르신인데,
원주로 옮기고부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사모님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아쉽게 헤어지고 ‘툇마루’로 올라갔더니, 반가운 사람이 너무 많았다.
구석에는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최명철, 김이하시인이 자리 잡았고,
한쪽에는 카페 ‘아리랑’을 운영하는 민요가수 최은진씨 일행이,
입구에는 김발렌티노 일행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돌아다니며 사진부터 찍었다.
난, 사진 찍는 걸 인사처럼 여기지만,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게 볼 거다.
그 뿐 아니라, 술 취해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노래까지 불렀으니,
밥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김이하촬영



지랄발광을 떨었더니, 그때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비빔밥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는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더 있으면 영업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명절에 놓친 선물 값 4만원을 동사무소에서 받았는데,
그 걸 내놓고 줄행랑쳤다.
가는 길에 ‘유목민’들려 전활철, 노광래씨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쪽방에 들어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이 깨야 자는 습관인데다,
술 취하면 인터넷도 손대지 않기로 했으니, 할 일이 없었다.

쉽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단 한 가지 있으나, 상대가 없다.
같이 놀아 줄 사람 없는 독거의 설움이 절절한 밤이었다.


사진,글 / 조문호
















김이하촬영



























사람이 참 간사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덥다고 난리치더니, 하루아침에 춥다며 웃옷을 찾는다.


사실, 쌀쌀해지면, 술 맛 나는 계절 아니던가?
술 생각에 새꿈 공원으로 나갔더니, 여기 저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구멍가게 강재원씨는 이미 맛이 가버렸더라.
어머니 몰래 소주 몇 병을 빼돌려 놓고 허풍을 떨어댔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자락에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었다.
이남기씨의 빠진 이빨 사이로 즐거움이 넘쳐 흘렀다.






이홍렬씨는 소주파가 아니라, 주위만 맴돌았다.
내가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자리를 만드니,
그 때야 한 잔 하시며, 옛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추석명절의 쓸쓸함이 유난히 길어, 그 때가 그리운 것 같았다.






20여 년이 지난 추석 전 날,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다 돈뭉치를 주웠다는 것이다.
거금 백만원이나 들어있는 쇼핑빽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그 날 청소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고,
남은 돈은 명절 보너스 로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없는 사람들 적선했으니, 아마 복 받았을 거다.
그래도 혼자 챙기지 않고, 함께 나누었으니 인간적이지 않은가?
신고해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도리지만, 어찌 혼자 독식하는 야박함에 비할소냐.





지난 해 동자동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다섯 쌍 중의 두 내외도 나와 있었다.
이기영, 홍홍임씨 내외와 김만귀, 이경희씨 내외는 찰떡궁합이다.
그 날도 두 내외가 짜장면으로 정분을 나누었는데,
김만귀씨 아들 정훈이가 동내재롱 다 부린다. 동자동의 유일한 기쁨조다.






이 날은 ‘구글 보지’로 통하는 유씨도 등장했다.
사실은, 이름보다 별명이 더 잘 기억된다. 옆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그랬다.
“꼭다리 옆방이 짹짹이 방이잖아” 이름은 얼른 기억나지 않지만, 별명은 바로 나온다.
날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찍새로 불러다오.






그날의 화제는 어딜 가나 지갑 분실사고 였다.
지난 추석 전 날, 이모씨가 지갑을 분실한 모양인데, 그 일로 뒷말이 많았다.
CCTV에 줏는 사람 모습이 찍혔다며 경찰까지 개입했으나,
아무도 이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동내에서 인심을 잃은 것이다.






이미 술이 취해 있었는데, 인사동에서 술친구들이 날 불러 재꼈다.
인사동‘툇마루’로 자리옮겨 마시느라, 지갑에 만원짜리 한 장 달랑 남겼는데,
그마저 임자가 따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역에서 지하계단을 올라가다 옆방에 사는 최완석씨를 만났는데,
구석에서 노숙자 한 사람이 손을 흔들어댔다.
자세히 보니 “소주 한 병과 김밥 한 줄이 소원”이라던 이상구씨였다.






몇 달 만에 만났는데, 얼굴도 많이 상했지만, 다리를 다쳐 목발을 옆에 두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찾길래,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지갑을 마저 털어야 했다.
누구에게 구제 금융을 요청하던, 그건 내일 일이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든 이상구씨의 고마워하는 표정에 내일 걱정까지 사라지더라.






“돈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던가”


사진,글 / 조문호




페이스북 친구가 된 김길석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내 손이 잛아 나는 반토막만 나왔네



































 

명절연휴가 이어진 7일의 동자동 '새꿈 공원'은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강교회’에서 나온 빵 나눔 봉사자들이 일을 마치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만,

대개의 쪽방사람들은 빵보다 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연휴가 이어져, 밥 배급 차는 물론 ‘식도락’까지 문을 닫아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김원호씨와 유정희씨가 단골식당도 문 닫았다며 투덜대어, 가끔 들린 적이 있던 된장집으로 안내했다.

백반 3인분과 막걸리 두병으로 허기를 메우고 있는데, ‘식도락’을 돕던 난순 여사도 식사하러 오셨더라.

모처럼 함께하는 식사라, 꼬불쳐 둔 비상금으로 밥 한 끼 대접했다.

 

식당에 둘러앉았으나, 다들 말이 없었다.

다들 먹고 싶어 먹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 먹는 것 같았다.

밥 보다는 막걸리가 더 술술 잘 넘어갔다.

 

밥 얻어 먹기가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명절날이라 차례도 올리고 가족들과 지내야 하니, 누가 오갈 때 없는 이를 도울 수가 있겠는가?

원죄가 뭔지는 모르지만, 막장까지 내 몰린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추석명절 날에 집에도 가지 않고 공동차례상을 차리며, 도시락을 나누어 준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들이 참 고마운 것이다.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반가운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따라 공원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식당에서 마신 술이 부족하여, 내가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가 공원 한 구석에다 자리를 깔아놓았는데, 이기영씨가 막걸리 값 모우기 화투 한판 치자는 것이다.

난, 칠 줄을 몰라 남은 천 원짜리 석장을 밑천으로, 이원식이 한테 달라 붙어, 따기도 잃기도 했다.

시간 보내기는 좋았지만, 술 한 잔 얻어마시기는 힘들었다.

 

유행가 가사 한 소절이 생각나 바꾸어 불러본다.

“세상을 원망하랴~ 네 팔자를 원망하랴~
한 푼 없는 독거들아, 행복하게 살아다오.“


사진, 글 / 조문호

 

 









연휴를 맞은 인사동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날씨 덕택에 대여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밝은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러나 거리에 널린 잡화점에는 중국산 싸구려 상품들이 점령한지 오래고,
오래된 가게나 전시장들은 텅텅 비어있다.
아무도 길거리에 쏟아지는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일 생각조차 않았다.






2011년도엔 국내 선호관광지 5위였던 인사동이 지난해는 7위로 떨어졌다.
인사동의 매력은 점차 사라져 앞으로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인사동을 지켰던 고시계점 ‘용정’이 문을 닫았다.
그 뿐 아니라 필방, 표구, 골동상 등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인사동은 본래 ‘문방사우’의 거리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40여 곳의 크고 작은 필방들이 늘려 있었다.
문방사우와 표구, 골동가게들로 채우진 인사동이 관광 거리가 되면서
기념품과 화장품, 식당과 커피 가게 등으로 서서히 바뀐 것이다.
남아있는 오래된 점포란 ‘통문관’. ‘구하산방’ 등 손에 꼽을 정도지만, 이마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그 날도 그토록 사람들이 몰렸으나, '통문관'은 아예 문이 닫혀 있었고, 필방들도 파리 날렸다.






뒤늦게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상인들이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곧 열리게 될 박람회를 시작으로 인사동 골목길과 숨은 장인들을 알리고,
인사동 최고의 멋으로 뽑힌 인사10길을 집중 홍보할 예정이란다.
인사10길은 한옥갤러리와 도자기매장 등 전통매장이 많이 몰려있고,
한옥식당이 몰려있는 인사동14길과 홍보관이 있는 11길도 관심을 끌고 있다.



인사10길

인사14길

인사11길


아무리 노력해도, 잡화 장사에 재미 본 길가 상점들의 변화 없이는 어렵다.
긴 세월 보존되어 온 전통도 망가지려면 금방이지만, 다시 되돌리려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상인들보다 인사동에 애착을 가진 예술가들이 나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상인들의 개인적 욕심이 버티고 있는 한, 인사동 되찾기는 말짱 도루묵일 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문화투데이] 2017년 10월 07일 (토) 00:06:29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어버이날 이어 두 번째 빨랫줄 전시 추석날에도 열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명절날이면 모처럼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온 집안이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나지만 명절이지만 더 외롭고 쓸쓸히 보내는 이웃들이 있다.

다행히 이번 추석은 서울시가 쪽방주민에게 고향방문을 지원해 일부는 고향을 찾아갔지만, 쪽방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공원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 동자동을 기록하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 Ⓒ 정영신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씨가 오갈 데 없는 쪽방 사람들을 위한 두 번째 위안의 자리인 '동자동 사람들' 사진 나눔전을 지난 4일 동자동 새빛공원에서 열었다.

지난 5월 어버이날에 처음 시도한 빨랫줄전시는 주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는데, 이날도 그들에게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 빨래줄 전시를 구경하는 주민의 모습 Ⓒ 정영신



동자동 사람들은 빨래줄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어! 여기 용성이 사진 있네, 라면 먹고 있잖아”, “준기 썬그라스 죽이는데!” 등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치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듯 이야기꽃이 피우기 시작했다.

또한 동자동 ‘나눔의 집’에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추석한가위 합동제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들려 술을 올리며 조상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고향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조상을 찾아뵙지 못한 불효 때문인지 침울해 보였다.

    

▲ 추석한가위 합동제례에 함께한 주민이 절을 하고 있다 Ⓒ정영신



쪽방은 도시 빈민 주거형태로 1997년 IMF 이후 저임금 단순일용직 도시빈민이 발생하면서 노숙의 위기에 처한 빈곤 계층의 마지막 숙소다. 쪽방하나에 대락 15만원에서 23만원에 이르지만 돈만 있으면 곧바로 입주가 가능한데, 서울에만 다섯 군데의 쪽방촌이 있다.

    

▲ 도시락을 받아와 딸과 밥을 먹는 엄마의 모습 Ⓒ정영신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점심시간에 맞춰 주민들에게 도시락과 붉은 사과 한 알씩 나눠 주기도 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 뒤에는 도시락과 사과를 안고 흐뭇해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쪽방에서 일년남짓 살았다는 김모씨(65)는 처음에는 먹는 것 때문에 줄서는게 부끄러워 굶는 쪽을 택했다가 옆방의 동생이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후로는 일상처럼 편해졌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세번까지는 부끄럽던게 나중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했다.



    

▲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시락을 받기위해 줄을 서고 있다 Ⓒ정영신



한쪽에서 한 여인이 도시락을 펼쳐 딸아이 입에 밥을 넣어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빨래줄 사진전에서 이변이 생겼다. 작은 남자 한 분이 나타나 전시된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몇 장을 골라 '도끼로 목을 친다'는 등 끔찍한 욕설을 입에 담아가며 박박 찢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현장을 지켜보던 김원호 어르신이 화를 내며 사진을 찢는 사람더러 나무라기도 했으나 조문호 사진가는 제지시키기는 커녕 빙그레 웃고 있었다.



    

▲ 본인의 사진을 들고 좋아하는 김용만씨 Ⓒ 정영신


사진가 조문호는 쪽방사람이다. 일년 전부터 동자동쪽방촌으로 이주에 살면서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년이라는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는데도 불구하고 초상권을 빌미로 시비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한참 소동을 부리던 사람이 떠나자, 또 다른 사진 주인공들이 나타나 싱글벙글 자기 사진을 골라갔다. 동자동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조문호 사진가에게 앞으로 작업에 대해 물어보았다.



    

▲ 본인의 사진을 들고 있는 이기영씨 Ⓒ 정영신


그는 “일년으로 동자동기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솔직히 사진쟁이로서 욕심도 생겼다. 빈민들이 사는 쪽방촌이 서울에만 5군데라고 하는데 동자동을 거점으로 다섯 군데 다 기록하고 싶다. 한 지역을 2년만 잡아도 1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쪽방촌을 기록하고 싶다. 또한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빨래줄 전시도 매년 어버이날과 추석날로 정해, 앞으로도 전시를 계속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 쪽방에 들어앉아 책만 본다는 조장섭씨 Ⓒ 정영신



쪽방촌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친구삼아 살아간다. 제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쪽방에서 일년만 지내면 반쯤은 미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이 쪽방촌이라며 외로움을 이기지못해 자살도 시도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차별없이 존중받아야한다.



추석 전 날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빨래줄에 걸 사진 값이 없어 허둥대다 전시를 하루 남긴, 밤 늦게서야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주인도 없는 남의 작업실에 들어가 자정까지 사진 뽑아, 자르고 정리하느라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일어나보니 오전 아홉시였다.

부랴부랴 공원으로 달려가 빨래 줄에 사진을 걸었는데, 마침 강 호씨가 공원에 나와 있어 많이 도와주었다.

오전10시경 준비를 끝낼 수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추어 전시 할 수 있었다.






그 때야 동자동사람들이 새빛 공원으로 하나 둘 모여들어 빨래줄에 걸린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여기 용성이 사진 있네, 라면 먹고 있잖아”, “준기 썬그라스 죽이는데!”라는 등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또한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추석한가위 합동제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술을 올리며 조상님께 큰 절을 올렸다.

다들 고향을 찾지 못하는 불효막심에 용서를 비는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오전 11시경에는 주민들에게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도시락과 붉은 사과 한 알씩을 나누어 주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그렇지만, 받아들고는 공원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식사하는 모습에서 연민의 정이 일었다.





그런데 빨래줄 사진전에 이변이 생겼다.


‘동자동 사랑방’의 강동근 사업이사가 돌아다니며 5,18묘역 참배사진을 골라 찢고 있었다.

그것도 도끼로 내 목을 친다는 등, 끔찍한 욕설까지 퍼 붇는데, 귀가 막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원호씨가 강씨더러 죽일 놈이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분께서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강씨가 찍힌 사진은 지난번 광주 5.18묘지에서 찍은 공식적인 사진들이다.

강씨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동자동 사랑방' 임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자가 막말을 해대며, 허락도 받지않고 남의 사진을 손괴한 것은 초상권 침해가 아나라 범죄행위다.

이건 분명 개인적 앙심에 의해서거나, 아니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헤프닝일 것이다.

.

그 사진은 개인 기념사진이 아니라, 주민들의 시대적 역사성도 지닌다.

구린데가 있어 자기의 모습을 숨겨야 한다면 임원직을 맡아서는 안되고,

그런 공적인 자리에는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찍을 때 포즈는 왜 취했는가?




당장 공개적인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며,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임원이란 자체가 조합원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다.

그 자리에는 동자동 식구들만 있었던 자리가 아니라, 신문 기자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찢은 일곱장의 518묘역 참배사진은 단체사진이라 먼저 본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 찢던 말 던 상관할 바 아니지만, 전시사진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찢는 건,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사람까지 못 가져가게 방해하는 꼴이니,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나.


저런 자가 어떻게 '동자동사랑방'의 사업이사가 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공동체 자체의 존립이 의심스럽다.






그자가 떠나고 나니 김용만, 이기영, 송범섭씨 등 또 다른 사진주인공들이 나타나 싱글벙글 자기 사진을 골라갔다.

뒤늦게 나타난 정용성씨는 자기 사진이 없어졌다며 울상이었고. 정재헌씨도 사진이 없어졌다며 찾고 있었다.

용성이네 가족과 정재헌씨 사진은 그들만 찍힌 사진들이라 누가 전해주려 챙겨 두었을 것이라며 달랬다.


마침 취재를 나왔던 정영신씨가 이제 일 년 동안 동자동을 기록했으니, 끝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사진을 훤히 아는 자가 이 무슨 소린가? 이제까지 주민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시작일 뿐인데...






솔직히 사진쟁이로서의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빈민들이 사는 쪽방 촌이 동자동 뿐만 아니니, 서울의 중점 관리지역 다섯 곳이라도 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곳에 2년씩만 잡아도 10년이나 걸리는데,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겠나?

그 동안 정들었던 사람이 눈에 밟히기도 하고...






추석 하루전인 3일은 ‘동자동사랑방’에서 마련한 합동제례에 음식을 나누며 노래자랑까지 하였으나,

사진 때문에 허둥지둥 돌아다니느라, 가 보지도 못했다.





찍힌 사람들과의 약속이 추석이기도 하지만 사진 뽑을 돈이 없어 미루다, 임박한 3일에서야 간신히 준비를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정선아라리촌의 ‘문학콘서트’에서 만난 김여옥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려고 꼬불쳐 두었다며 10만원을 주었고,

서초동에서 밥 집하는 누님이 과일이라도 차례상에 올리라며 보내 준 돈으로 사진 만들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러한 급박한 시기에 정영신씨 프린트기에 이상이 생겨버렸다. 분명 잉크가 남았는데, 없다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연휴라 수리기사를 부를 수도 없지만, 새 잉크를 구입할 가게도 없었다.

다행히 사진하는 후배 하재은씨에게 부탁하여 주인도 없는 작업실에 처 들어가,

자정이 가깝도록 프린트 해, 어렵사리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재은씨에게 재료비라도 보내드리려고 연락했더니, 황송하게도 받지 않겠다는 거다.

전시협찬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이 돈은 내년 어버이날 사진제작비로 쓰기위해 묻어두었다.





사실, 이번 빨래줄 사진 나눔전도 ‘동자동사랑방’에서 행사를 치루는 3일에 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치루는 4일에 할 것인가? 망설였으나

일이 풀리지 않아 떠 밀려 4일에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더 잘된 것 같았다.


전 날은 박원순 시장을 비롯하여 기자들까지 달라붙었으니,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성격이 짙어 부담스러울 뿐더러, 추석명절이 아닌, 하루 당겨 합동제례를 치루는 것도 마땅찮았다.

추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진짜 오 갈 때 없는 빈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씩, 어버이날과 추석마다 사진을 돌려 줄 생각이다.

때로는 사진 값 조달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이들의 흐뭇한 표정에서 보람도 느낀다.


특히, 그 날은 사진 찍는다고 멱살까지 잡았던 분이 찍어 달라 했고,

평소에 카메라를 피해 다니던 분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내가 하는 일이 단발성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그 진정성을 읽은 것이다.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일들이 하나같이 아슬아슬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아마, 만지산 산신령님이 도와주는 것 같다.


“산신이시여!  이 늙은 몸 하나 제물로 바치려 하오니,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남원 '다담 콘서트'에 가다 시껍하고 돌아와서, 정영신씨와 살아 온 기념으로 또 한 잔 마셨다.

그러나 적당히 마시고 자야 하는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된다. 

술은 넘쳐야 하고 님은 품에 안겨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술 병은 비워야 하지 않겠느냐?

내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 정선 가야 하는데, 자정이 넘어 자빠졌으니, 또 바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알람이란 놈의 성질머리를 알았으니,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새벽 네시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지난 29일 오전 8시에 만지산에 들려 사진액자 두개 챙겨, 9시까지 화암면 그림바위 G갤러리에 전해 줘야 했다.

시간 맞추어 전해주고, 느긋하게 돌아 오는 귤암리 조양강변의 정취는 너무 포근했다.


만지산 살팔봉은 이미 익어버렸고, 조양강은 온천처럼 그 때까지 김이 무럭무럭 나더라.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급변하고 있다는 평범한 자연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만지산 집으로 올라가니, 입구에서 코스모스가 너울너울 날 반기는데,

오래 전, 삼겹살 구워먹던 불판 가마솥까지 코스모스가 점령해 버렸더라.


"네 이놈~ 네 놈이 빨지산이냐? 계엄군이더냐?"

갑자기 고은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더라.

갈 때 못 본 불판, 돌아오니 화분으로 보이네.


예전엔, 친구 올 때 삼겹살 구워먹는 불 판이었는데, 

그 좋아하던 친구들을 일 하느라 멀리하였더니,

가마 솥 불판도 알아차려, 화분으로 둔갑해 버렸구나.

그래도 끝까지 지켜주어 고맙다. 힘없어 일 못하고 만지산에 돌아 올 때만 기다려다오.


그리운 친구 하나 하나 불러모아, 삼겹살 구워 소주 한 잔 마시게...

내가 그 때까지 살지도 모르지만, 친구들도 그때가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그 건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만지산 신령님만 알 것이다.

난, 십년 전 '농심마니' 박인식씨 패거리를 만지산에 불러와 

산삼 심어드리며 알랑방구 뀌어났으니, 좀 봐줄 것 같다.





이튿 날, '정신아리랑제'에 정영신씨가 온 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술 한잔 먹여 잡아 먹으려고, 정선시장에서 전어 열 댓마리 사다놓고,

강기희 사단의 '문학콘서트' 차에 달라 붙어 오는 정영신씨를 찾아 아라리촌으로 갔다.


'문학콘서트'에서 많은 반가운 사람들 만났으나, 술은 차 때문에 딱 두 잔만 얻어 마셨다.

사진은 200장이 넘게 찍어두었으나, 일은 언제 할지 모르겠다.


정영신씨를 납치해 만지산으로 돌아 와, 가을전어 노리짝하게 구워놓고 술 잔을 들었다.

저 푸른 초원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싶은 꿈을 꾼게 아니라, 남진의 노래를 불렀다.

한 잔하니. 천하가 내 손에 있더라. 대마까지 한 분위기 잡아주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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