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인사동을 사랑하신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생전의 심우성선생 모습


심우성선생을 추모하는 2019 돌모루유랑예인축제가 지난 16일부터 이틀 간에 걸쳐 ‘공주민속극박물관’에서 열렸다.

심우성 선생의 발자취를 담은 ‘일인극 배우 심우성 아리랑’이 발간되었고,

당시 사진과 저서, 육필 원고 등을 돌아 볼 수 있는 ‘심우성의 1인극 인생’ 자료 전시도 있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정영신씨와 심우성선생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공주로 떠났다.

고속도로가 밀려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현장에 도착했는데,

'공주농악보존회'의 풍물놀이가 민속극박물관 야외 놀이마당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 외로 참석한 관객이 적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연극배우 최일순씨 뿐이었다.

그 많은 선생의 제자와 가까웠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더 아쉬운 것은 추모제가 열리는 어디에도 심우성선생을 그리며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모든 게 낯설었고, 심지어 포스터에 실린 사진마저 젊은 시절 모습이라 다른 사람 같았다.




'공주농악'에 이어 유랑음악가 오트곤바타르가 몽골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하였고,

저글링 코리아의 재주 부리는 보부상 묘기도 펼쳐졌다.

공연장에서 펼쳐진 논두렁 밭두렁의 ‘동학이야기’가 그나마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심우성선생께서 살아 생전 애써 건립한 ‘공주민속극박물관’을 두고

인사동 여관에서 체류하며 떠돌았던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심우성선생은 인사동을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다.

한 때는 인사동 벽치기 골목 초입에 있는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을 집필실로 삼아

식사는 '화목식당' 식권으로 해결하고, 잠은 신궁장여관에서 주무셨는데,

아마 그 때가 선생께서 가장 행복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춤꾼 이애주선생이 나타났는데, 다음 날 공연되는 ‘극단서낭당’(이애주, 최일순, 이재선)의

‘넋전 아리랑’에 출연하기 위해 오신 것 같았다.

그 공연은 보고 싶었지만, 하루 더 머물 형편이 아니라 아쉽게 돌아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4일 강민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정영신씨와 '분당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문병 갔다.

병원 휴게실에는 달마선생 내외 분과 정승재교수, 서정란씨 등 여러 명의 문인들이 먼저 와 계셨다.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먼저 다녀가셨고, 맹문제교수도 오실 것이라고 했다.






어디가 편찮은지 궁금해 “선생님 병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상사병이라고 대답하셨다.

다들 웃기에 먼저가신 사모님이 그리워 생긴 우울증 쯤으로 가볍게 여겼는데,

선생님 몰래 전해준 서정란씨의 이야기로는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암이 곳곳에 전이되어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의사선생으로부터 처음 검사결과를 들었을 때는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으나,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여유롭게 웃으셨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오래 전 입원하셨을 때, 병의 위중함을 아셨으나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수하며 틈틈이 인사동에 나와 주변사람들을 걱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무슨 말로 위안 드려야 할지 막막했으나, 내일이면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다니 눈앞이 더 캄캄했다.






늦게 오실 분을 맞으려면 피곤하실 것 같아 병실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제 인사동도 끝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떠나야 할 길이지만, 불 꺼진 인사동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선생처럼 온 몸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었다.

터줏대감이며 친구였던 심우성선생도 떠나시고, 이제 선생님까지 떠나신다면 누가 인사동을 지킬 것이란 말인가?






강민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2’ 황혼 편을 다시 읽어보자.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인사동 걷기는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열이 오르며 목이 마르다
잃어버린 불모의 사랑이 허공을 맴 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종로 쪽 멀리 남산이 다가오고
차츰 어둠의 장막도 깔린다.
나 이제 또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리
그이의 아지트였던 찻집<보리수>도 없어졌다
진공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돌아가리
돌아가리
그런데 이 끝없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눈물의 의미와 그리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밤의 공동(空洞)이 두렵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절한 선생님의 시에 눈물이 절로 난다.





인사동으로 돌아와 약속한 공윤희씨를 만났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 병문안드리지 못함을 애석해 하며,‘메밀란’으로 갔다.
그 자리는 ‘산타페’가 있던 자리인데, 돌아가신 여운 화백의 아지트가 아니던가?






그리고 맞은 편 잡초만 무성한 ‘목인박물관’은 흑백현상소 ‘꽃나라’가 있던 자리다.
‘꽃나라’를 운영하던 신작가도 여운화백도 다 떠나버린 인사동이 더욱 낯설기만하다.






다행스럽게 찻집 ‘초당’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초당보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아 늦게 나오고 일찍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고, 나 또한 떠나가리라.



사진, 글 / 조문호

























넋전 춤에서 절규하는 심우성선생



인사동,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
우리 전통문화와 인사동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심우성선생께서 지난 23일 오후1시 숙환으로 소천하셨다.




인사동 '신궁장여관' 계실 때의 모습



심우성선생께서 '공주요양원'으로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었다.
몇 달 전에 전화 드렸더니, 목소리에 외로움이 절절했다.
“한 번 내려와”를 반복하셨는데, 미루다 기어이 가지 못했다.
철천지한을 남기고 말았다.



인사동 '푸른별이야기'구석방을 사용했던 집필실에 계시는 모습


심우성선생은 인사동을 짝 사랑하여 상사병 난 분이시다.
다들 변심한 풍정에 고개 돌리지만, 인사동을 그토록 못 잊어 했다.
한 때 인사동 벽치기 골목 '푸른별이야기' 구석방을 집필실로 삼아,
밥은 '화목식당'에서, 잠은 신궁장여관에서 주무셨지만,
그 때가 선생께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민시인의 생신을 맞아 많은 친구분들이 모였다.


"무정한 세월아! 제발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다 데려가면 남은 사람 어찌 살란 말인가?”


어쩌면,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게 사람인지 모른다.
잘 나갈 땐 파리떼 처럼 들끓어도, 기력 쇄하면 금세 사라진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까지도...






얼마나 외로움의 한이 컸으면, 태풍까지 몰고 오셨겠는가?
부디 노여움 거두시고, 넋전 춤으로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장례식장 : 공주장례식장 101호 (041-854-1122)
발인 : 2018년 8월25일 오전9시
장지 : 의당면 율정리 향원
상주 : 심하용, 심가용




민속학자이며 연행예술가인 남천(南泉)심우성(沈雨晟 :1934.6.28~2018.8.23)선생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였으며,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위원과 공주민속박물관장(1996∼2010)을 역임했다.
민속 문화를 연구 계승하는 데 평생을 바치며, 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와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도 지냈다.
1959년 ‘꼭두각시놀음’을 재연하여 민속놀이 1인극에 큰 족적을 남겼고, '민속문화론 서설'등 10권의 저서와 2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작으로는 "심우성일인극장", "문", "장안산조", "무등산조", "남도들노래", "판문점별신굿", "넋이야 넋이로구나", "새야새야" "결혼굿",

“넋전 아리랑” 등의 공연활동을 이어오며, 서울시 문화상, 향토문학예술상 수상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아래사진은 살아 생전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선생의 삶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란다. 












































































심우성선생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던, 두 살무렵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인사동 터줏대감인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요즘 몸이 불편해 요양원에 계신다.

인사동 시궁창(신궁장)여관에 투숙하시며, 투덜투덜 인사동을 떠도시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규하는 선생님의 넋 굿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선생님 팔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나 흘러 버렸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무심한 세월아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귀한 사람 다 데려가고 남은 사람은 어찌 살란 말인가?”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것은 사람이다.

잘 나갈 때는 파리무리처럼 들끓던 사람들이 기력 이 다하면 금세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 까지도...

엊그제 선생님의 넋 춤 제자였던 양혜경씨가 올린 글을 보고, 요양원에서 외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에 있는 아내와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다 무엇하고, 왜 공주까지 홀로 떠나셨는지 모르겠다.

이게 사람 사는 도리인가?




선생께서 외로워하신다는 양혜경씨의 문자메시지에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싶지 않은 것이 사람 사는 현실이다.

통화는 가능하다기에 전화로나마 문안인사 드렸더니, 엄청 반가워 하셨다.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씀에 외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평소 가까이 지낸 지인들은 전화로 문안인사라도 드렸으면 고맙겠다.

행여 공주방향으로 가는 걸음이 있다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생 길,

따뜻한 선생님의 손 한번 잡아드리자.

전화 010-9940-1299 / 공주 에덴요양병원 201호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날 오가며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일찍부터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오셨습니다. 맛있는 점심 사 주겠다면서요.

아내와여자만에서 쌈밥 얻어먹고, 허리우드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전시장으로 돌아오니 부산에서 최혜영씨와 사진가 김지연, 시인 김생나씨가 오셨고,

사진가 양시영씨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넋전 춤을 추는 양혜경씨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심선생께서는 신궁장여관이 리모델링한다며 숙소를 옮긴다는 말씀을 들었으나,

어디로 옮겼는지 궁금했는데, ‘종로오피스텔로 옮겼다네요.












반가운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래층의 공창호씨가 장구경 하러왔고, 좀 있으니, 가수 최백호씨도 왔습니다.

잇따라 강 민선생께서 시인 천성우, 이혜선, 김정남선생과 함께 다시 오셨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강민선생의 옛 친구 박병선선생도 지나치다 올라 오셨는데,

구수한 냄새에 끌려 왔더니, 옛 친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끝 날 시간이 가까워 오니, 곤충사진가 이수영씨가 나타났습니다.

유민목에 장경호씨가 있다는 귀뜸을 전했더니, 거기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일어났습니다.

뒤따라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내외가 오셔서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로 소주 한 잔 했습니다.

소주 딱 두병만 까고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이수영, 장경호, 공윤희씨가 마시고 있더군요.

막차시간 놓치지 않으려는 이수영씨 따라 일어남으로 하루를 잘 넘겼답니다.









 

그 이틑 날은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상만회장께서 일찍부터 오셨습니다,

연이어 연극연출가 기국서, 울산의 기와장 오세필, 건축가 임태종씨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 날은 장흥에서 이대흠시인과 성은정내외 분이 오셔서,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대흠시인은 아내의 장날사진집 서문을 쓴 인연이라 더욱 기다렸는데,

첫인상처럼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더군요. 시간 만들어 장흥에도 꼭 한번 들릴 작정입니다.

















전날 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밤을 꼬빡 새웠는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 구석에 누워 잠들어 버렸는데, 이대훈, 노인자 내외분이 오셔서 자는 모습을 찍어,

칠순의 아기천사라는 제목까지 달아 카톡으로 날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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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문화의 날이라 밤 열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으나, 술친구 채근으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 날 페북에 공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밤 여덟시에 문을 닫는 실수를 그만 저질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진가 박영환씨가 뒤늦게 다녀 간 흔적이 방명록에 적혀 있더군요.

확인했을 때는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에 안절부절 하였으나, 결국 젊은 후배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그 날은 유목민에서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와 거나하게 마셨습니다.

옆 자리에는 임태종씨가 친구들과 있었고, 김명성, 이상훈씨도 있었답니다.

좀 있으니 오세필씨가 국민은행에 있는 노처녀 지점장 최명숙씨와 김용식 부장 등 여성분들과 나타났습니다.














일행이 있어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인사동 곳곳에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버스킹에 나서자며 길모퉁이 자리잡아 퍼질러 앉았습니다.

난 모자만 내려놓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나, 이대훈씨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아한 노래에 한참 빠졌는데, 눈을 뜨보니, 모자에 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담겨있더군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 놈이 먹는 꼴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돌아왔답니다.

하하하~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좌로부터 김승환, 박정희, 강민, 추은희, 심우성, 장소임, 채현국, 신경림, 김희연, 장경호씨, 앞엔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민선생의 생신기념 오찬회가

지난 3일 인사동 가회에서 있었다.

 

끈질긴 감기로 어렵사리 나갔더니, 인사동은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옷을 너무 두텁게 입고나와 걱정스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돌아보니, 그림 그리는 장경호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재환선생 전시 때문에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깜빡 잊어버린 일을 새겨 주었는데, 시간이 남아 함께 갔다.

 

가회오찬장에는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여럿 나와 계셨다.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 시인, 소설가 김승환,

김희연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요즘 유명세를 타는 채현국선생,

도서출판 답게장소임대표 등 아홉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본래 2월이 생신이었던 강 민선생께서 따뜻한 3월로 바꾸셨다는데,

답게출판사 장소임씨가 매년 생일 오찬회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풍성한 음식에 배 두드려가며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한 때 탄광을 운영하신 채현국선생의 말씀으로는,

그 당시 회사 경리직원이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소임씨라는 것이다.

회사에 강도가 들어 와 금고에 있는 돈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죽을힘을 다해 돈 보따리를 잡고 늘어져 기어이 뺏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감한 소녀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신 채현국선생과 신경림선생은 키가 엇비슷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어느 분이 큰지 여쭈었더니, 신경림선생께서 좀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민 영시인도 키가 작은 분이나, 그중 나아 항상 어깨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 그런데, 두 선생님을 나란히 세워 확인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회입구에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 민, 김승환, 신경림, 장경호씨만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재환선생의 전시 개막식에 가려면 시간이 남아 예당에서 한 잔 더 하실 모양이었다. 

감기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인사동 거리나 쏘다녔으면 좋으련만,

시간만 죽이다 학고제 가야 했다.

 

강 민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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