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독립이 맞습니까?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지난 12일 오후5시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요즘은 손님 많은 개막식은 잘 안 가지만, 이 전시는 안 갈수가 없었다.

전시된 독립자료들이야 촬영할 때 여러 차례 보았지만,

선열들의 의연한 기상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더구나 전시 자료들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가

긴 세월동안 어렵사리 찾아 낸 유적들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으면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을 통해 전시를 알렸겠지만,

모임이 흐지부지 한데다 시절이 사람을 많이 불러 모을 때는 아니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통해서만 알렸는데, 대충 아는 듯 했다.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려 하루에 500여명은 찾아오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아는 체하면 웃거나 손을 흔들지만, 누군지 분간 안 되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코로나 방역이 생활화되었지만, 사람들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입에다 팬티를 걸치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숨이 차 못 견디겠다.

 

전시장에는 이성 구로구청장과 구로문화재단 허정숙대표이사, 김명성 독립투쟁사 추진위원겸 에술 감독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을 비롯하여 구중서, 방동규, 박기정, 무세중, 무나미, 정기범, 이정숙, 손연칠, 김규선, 김상환, 김연갑, 박동웅, 강찬모, 최효준, 박인식, 조해인, 김수길, 송일봉, 최유진, 조준영, 박윤호, 김상현, 권경일, 전인경, 전인미, 정영신, 서길헌, 노광래, 이만주, 전활철, 김 구, 임경일, 이상훈씨 등 알아챈 분은 이 정도지만, 10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행사에 앞 서 가진 국민의례는 다른 행사와 달리 꼭 필요한 의례였다.

그 자리에서 어찌 고개 숙여 묵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최 측과 내빈께서 차례대로 나와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전시된 갤러리 ‘구루지’는 미술관 사정이 열악한 서울 서남권의 대표 갤러리로

도약하기 위해 확장 공사를 가진  후 첫 전시라고 했다. 전시장 짜임새도 흥미로웠다.

마치 독립투사들의 밀회장을 연상할 수 있는 은밀한 전시 공간이 두 곳이나 있었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100여 년 전으로 세월을 되돌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안타깝고 분한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시원과 아우 이지원이 목숨을 끊기 전에

올린 절명시를 비롯하여 박열열사가 옥중에서 쓴 칠언절구 2수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철망 안에서 보내는 나날, 낙원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귀신이 베갯머리 나타나 신선 같다고 속삭인다."

 

그 유묵과 서찰들을 살펴보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이루었건만, 아직까지 친일세력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전시 제목처럼 ‘독립이 맞습니까?’란 물음이 절로 나왔다.

모두들 이 전시를 찾아보며 친일청산에 나서야 한다.

 

일본 놈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무참하게 죽인 백선엽 같은 인간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일제에 빌붙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왜놈 앞잡이들이 아직까지 깽판치는 세상이 아니던가?

 

다들 인근에 있는 뒤풀이 장소 ‘내고향 숯불갈비’로 자리를 옮겼다.

전시장에선 다들 방역규칙을 잘 지켰지만, 입을 가리고야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여지것 입막고 고생했던 일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신의 뜻에 맞길 수밖에 없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술을 퍼 마셨다.

이렇게 기분 좋게 어울려 대취할 수 있는 기회가 살아 생전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고기굽는 아주머니의 엉덩이가 내 옆구리에 부딪혔다.

이것도 미투 대상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 기분만 좋더라.

좋을 때는 넘어가고 나쁠 때는 미투가 되는 세상, 여성 혐오감만 짙어가니 이 일을 어쩔까?

 

문제가 되었던 박재동화백은 결백이 밝혀졌지만, 박원순 시장은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장 최효준씨는 아직까지 미결로 남았다.

당사자가 제거되면 누가 득을 보는지, 그걸 보면 알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 사람은 기획된 함정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맞은 편 자리에는 사진가 박윤호씨가 앉아 있었다.

오래 전 페북 사진 때문에 페친관계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미안했다.

올 년말에 사진전을 연다는 반가운 소식은, 한 사람을 모델로 찍은 표정사진이란다.

 

그 전에 문제가 되었던 것도 얼굴을 너무 가까히 찍어 혐오감을 일으켜서인데,

모델만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그 방법을 재연했다고 한다.

나 역시 사진을 찍지만 얼굴에 바짝 렌즈를 들이밀고 반복해서 찍으면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 사진으로 전시를 한다니 할 말은 없지만, 일단은 축하할 일이었다.

 

먼 뒷자리에는 인연을 끊은 선배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전시장에서도 부딪히는 걸 의식적으로 피했으나, 후배의 도리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 준 모욕적인 험담은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렸다.

 

사진사가 사람이 싫다고 객관적인 기록을 않는다는 것은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 선배가 일어서니, 때 마침 '뮤아트'의 김상현씨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서럽도록 불렀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뛰어나가 그 선배 일행을 찍고 말았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노객의 뒷 모습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곳은 동자동도 인사동도 아닌 구로동이 아니던가? 은평방면으로 갈 사람을 모았다.

조해인, 김수길, 정영신, 박윤호씨 등인데 택시 한 대에 다 탈수가 없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라고 우겼는데, 다섯 명이 한 차에 탈 수 있도록 눈감아줬다.

 

얼마나 끼어 앉았으면 주굴 주굴한 얼굴이 땡겨 펴질 지경이었다.

스님들이 저지르는 불법도, 무임승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30여분 동안 곤욕을 치르고 끌려간 곳은 조해인씨 집 부근에 있는 ‘치킨호프 응암점’이었다.

 

내일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마시고 볼 일이었다.

정영신씨를 위해 김수길씨가 와인까지 사 왔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자기는 와인보다 소주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입에 털어 넣는 만용을 부리면서....

 

이미 술이 취해 술이 술을 마시는 격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사실은 박윤호씨가 술과 담배를 끊었단다. 그 긴 시간동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독립투사들 덕에 술 얻어마신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귀신 술이라 그런지 술은 술술 넘어갔지만,

그 이튿날 방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속죄해야 했다.

다시는 귀신 술에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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