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노량진수산시장' 사진집

눈빛출판사, 184, 25,000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눈빛출판사에서 펴내는 오늘의 다큐일곱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오늘 발생한 사회 제 문제를 사진가들이 어떠한 관점으로 사진에 담아냈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집 총서다.

 

 

 

이 책은 서울시민의 집단기억이 숨 쉬고 있는 노량진 구수산시장이 선진화와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어떻게 풍비박산되었고,

그곳을 생계의 터전으로 살아온 시장 상인들의 삶이 변모하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서울시민들에게 수산물을 제공하고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의 역사는 멀리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1928년 서울역 염천교 근처에 경성수산주식회사가 생겨난 이래 서울의 대표적인 이 수산시장은 1975년 한국냉장()이 시장을 인수해 노량진으로 장소를 옮긴다. 겉으로 보면 싱싱한 해산물의 도소매가 이뤄지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날 것 같은 수산시장이지만 2002년 공기업 민영화가 시작되면서 갈등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수산물유통체계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현대화사업이 추진돼 2016년부터는 신시장에서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40퍼센트 가량의 구시장 상인들은 신시장 입주를 거부하고 노량진 구수산시장 부분존치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여오고 있다.

 

 

 

이 사진집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인기씨가 지난 3년 동안 노량진 구수산시장 상인들의 생업과 투쟁 현장을 기록한 컬러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비린내 물씬한 수산시장과 활기 있는 상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들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킹 크랩을 자랑스레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손님이 뜸한 틈을 이용해 좌판 옆에서 잠이 든 할머니, 수조에 생선을 넣는 청년 등 수산시장의 일상적인 장면들로 이 사진집은 시작된다. 연탄난로에 발을 녹이는 할머니, 주문한 음식을 머리에 이고 배달 가는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장이 파한 후 한데 모여 여흥을 즐기는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화 이전 구시장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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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생계 터전은 현대화와 법을 앞세운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경찰의 비호 아래 용역들이 들이닥치고 상인들은 이들과의 힘겨운 공방 끝에 202010월 지하철이 다니는 25천 볼트 고압선 위 육교로 쫓겨나 지금까지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생업에 열중하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주변 동료 상인들과 어울려 살아온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이 갈등과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사진가는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기록하였다. 결국 이 사진들은 국가와 사회가 소시민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투쟁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직권남용에 대한 분노의 서사인 것이다.

 

 

 

지난 64일 오후630분경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사진집 출간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개막되었다.

 

 

 

전시장에는 사진가 최인기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엄상빈, 김보섭, 김문호, 정영신, 김동진, 김영호, 곽명우씨 등의 사진가들이 함께하여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전시와 사진집출간을 축하했다.

 

 

 

이 전시에는 다큐멘터리 은석 감독이 촬영한 '시장으로 가는 길' 도 함께 방영되었다.

 

 

 

눈빛의 이규상대표는 작가를 소개하는 인사말에서 사진가이기 이전에 투쟁현장의 전사로서 최인기의 부지런한 모습을 전하며 키가 작아 용역 깡패들 가랑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촬영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진짜 그는 못 말리는 전사고 못 말리는 찍사다.

 

 

 

60년대 말 청계천을 기록한 빈민들의 성자 노무라목사의 영향을 받아 사진의 길로 들어선 사진가답게 특정 도시공간 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들을 기록해 왔다3년 전에는 '청계천 사람들'이란 주제로 노점상들의 투쟁을 다룬 전시와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삶의 투쟁을 기록한 이번 사진집 표지 사진은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식칼을 허리 뒤에 감춘 크로즈 업 사진 한 장으로 전체 투쟁의 내용은 물론 사진집에 실린 상인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표현은 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쓰는 표현 방법이지, 당사자와 같이 살거나 함께 투쟁하는 사진가는 잘 선택하지 않는 접근법이다. 왜냐하면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인기의 표지 사진은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상인의 현장 모습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당사자와 함께하는 사진가는 일상적 기록 이외의 사진가적 욕심을 버리는 것이 도리이기도 하지만, 눈에 띄는 사진을 만들기 위해 사진 앵글을 과장하는 트릭이나 연출은 일체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6-70년대 청계천 사진이나 최인기 사진이 대표적으로 당사자와 함께하는 사진인데, 튀는 사진이 없어 지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민중들의 삶은 원래 자극거리가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다. 그러나 이런 사진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값진 진실 하나를 일깨워주고 있다. 세상에 따분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것들은 이상하게도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고, 또 싫증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대개 지루하거나 따분한 것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찍은 평범하고 소소한 기록들이야 말로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가치를 발휘해 인간 삶의 중요한 역사적 단서와 함께 사료가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출판과 전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진가 최인기씨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어떤 사진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다는 것이 제가 지속해서 전시와 출판을 하는 이유입니다. 가난은 드러내 공론화시킬 때 해결이 모색된다는 것도 평소 제가 가진 지론이기도 합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사진전은 13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 사진가 최인기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인기씨는 미투와 관련된 사건으로 불편한 관계라

식사보다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모처럼 ‘유목민’에 나갔더니, 다들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올린 꼴 페미 까는 글 보고 청탁한 원고를 취소한 터라

어색한 관계를 풀어야 했는데, 바쁜 이규상씨까지 나오게 해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최인기씨는 미워할 수 없는 사이다.

좋아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진판에 잘 못된 현실과 싸우는 그만한 전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내용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 평등 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선의의 피해자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는 세상이 되어바렸다.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악용되는 현실인데,

진보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략에 많은 국민들이 등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던 과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최인기씨를 꼴 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탁한 원고를 취소하는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냥 덮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페미니즘 문제라 

 꼴 페미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싶었다.

아마 내 글을 본 지인이 ‘눈빛출판사’에 연락한 것 같은데,

이규상대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 날 최인기씨는 죄송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의 사과라 더 이상 묻지도 말하기도 싫었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노령진수산시장 투쟁 사진집 서문은

최인기씨를 잘 아는 이규상대표가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번 책은 서문 없이 사진집을 내겠다 했다.

 

아무튼, 좋은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그날 이규상 대표가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가제본된 사진집 한 권을 내놓아 눈이 번쩍 띄었다.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정영신씨 원고가 선정된 것은 알았지만

사진집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유목민’ 안 쪽 테이블에서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도예가 변승훈씨가 나를 보더니 옮겨왔다.

변승훈씨는 백기완선생 문상 다녀 왔다는데, 이미 취해 말이 거칠었다.

이규상씨와 유근오씨는 서로 명함을 건네받으며, 원고 청탁도 하더라.

구체적으로 모르나, 문제만 일으키는 내 뒷조사 해달라는 말인지,

나에 대한 글을 청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필자와 좋은 편집자가 만났으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을 게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한 때 미투문제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의혹이 풀려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생사람 잡는 무기로 악용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파장 무렵에는 발렌티노 김이 나타났다.

서울특별시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요즘 청소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채 시험 면접에서 "서울을 자기 머리처럼

빤짝 빤짝 빛나게 하겠다"는 말에 배꼽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게 사는 최인기씨 주머니를 털어 마음은 편치 않지만,

나올 때 무거웠던 걸음에 비해 갈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알랑방구 낄 정영신씨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간 크게도 택시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요! 녹번동 가입시다. 택시비는 그 집 안주인한데 바드이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일에는 인사동 거리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맴돌았다.

봐야 할 전시도 두 곳인데다 길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조차 달랐다.

 

인사동 사진은 거리를 지나치며 찍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거리를 방황했더니 다리가 아팠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라도 둘러 보았으면 좋으련만

정영신씨와 같이 보기로 해 먼저 볼 수도 없었다.

 

거리는 구정을 앞둔 주말이라 평소에 비해 많은 사람이 오갔다.

더러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는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반가운 풍경은 행인들이 거리에 내놓은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영혼이 빠진 그림이지만, 가격이 너무 쌌다.

이 삼만원 대가 주류고 비싼 게 오 만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나왔는지 모르나 물감을 이겨 그린 그림도 있어,

인건비는 차지하고 재료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나무아트’에서 김진하관장이 나오고 있었다.

박건씨의 ‘나는 산다’전에 가자기에 사람 만나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진가 최인기씨가 드디어 나타났다.

조그만 양반이 도르르 굴러오듯 바쁘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빙그레 웃는 동안에 마음까지 포근해 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건, 며칠 전 경남 함안장에서 연락 받았다.

‘눈빛출판사’에서 노량진구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만드는데,

서문 좀 쓰 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사진가이기에 앞서 노동운동가다.

가끔 현장에서 만나 지켜본 바로는 성실하고 겸손한데다 투쟁력 또한 치열했다.

좋아하는 후배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 바쁜 시간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명절선물이라며 보리굴비까지 들고 왔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받은 선물도 다른 분 줄 정도로 선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굴비는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생선이라 점수 따기 딱 좋았다.

 

마침 정오 무렵이라 ‘툇마루’에 밥 먹으러 갔다.

술 마시러 간 것이 아닌데도, 쥔장의 도토리묵 서비스까지 받았다.

맛있게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 ‘귀천’ 목영선씨의 모과차도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진 자료 담긴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헤어졌다.

 

그도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나 또한 정영신씨를 만날 시간이 되어서다.

지하철 역 방향으로 마중가니, 총총걸음으로 정동지가 나타났다,

바쁜 분 만나려니, 이 몸까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아지트갤러리’로 갔더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줄줄이 걸렸더라.

전시 개막 직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 최경태씨 그림에 마음이 아팠는데,

작가 박 건씨와 김진하씨가 나타났다.

 

박건씨의 공산품 아트를 비롯하여 김주호, 김환영, 류연복, 박불똥, 박영숙,

성병희, 안창홍, 이윤엽, 이현정, 이하, 정영신, 정보경, 정복수, 정정엽, 하일지 씨 등

내 노라 하는 분들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박건씨의 혜안으로 모운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 기분 좋은 건 작가의 권위를 지키려는 거품은 모두 빼버렸다,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이치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다음에 들려야 할 전시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었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지 35년 만에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자음을 윷놀이 하듯 화면에 던져놓았는데, 문자와 디자인이 결합한 독창적 언어였다.

작가로부터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동에서의 일정은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동자동에서 일해야 하고, 그 다음 날은 경북 상주장에 가야했다.

무슨 놈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 똥오줌 못 가릴 지경이다.

 

서울역 홈리스 원고는 탈고한지 오래지만, 노숙인 코로나 확진자가 100여명이나

나온 데다 동자동 쪽방 촌 공공 개발 소식에 추가 할 원고가 생겨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며,

필요한 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한 사진도 있었는데,

필름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했던 사진도 수정 이미지를 못 찾아 재 수정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얼마나 마우스를 잡고 낑낑거렸으면 아직까지 어깨가 결린다.

오죽하면 오래된 필름 정리해 스캔 받아 두라는 정동지의 성화를 뭉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고려장 할 나이에 이처럼 일이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욕이라면 욕이다.

 

그토록 바삐 쫓겨 다녔으니 최인기씨 원고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2월 중순까지 요구한 글이라 추석연휴에 쓰려고 밀쳐두었으나,

원고료 부담에다 자료 담긴 유에스비 조차 열어보지 못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믐 날 제사음식 준비 하는 중에 최인기씨로 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렵게 전화한 듯, 정중하게 원고 청탁을 거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앓던 이 빠진 것 시원해 받은 원고료를 즉각 돌려보냈는데,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필자를 구했거나,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으나,

20여일 전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말하고 싶다'전 포스팅에

“언제까지 미투로 생사람 잡을거냐?“는 글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미투였다.

 

고질적인 성희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미투 운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진짜 미투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폐단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여러 차례 페북에서 지적한 바 있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집착하는 폐단이 떠올랐다.

그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걸 여태 보지 않았던가?

 

개안적 견해에 불과한 미투의 문제점 제기에 안면까지 몰수할 정도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안타까운 실정에, 페미니즘 문제까지 부채질 한다.

 

메주알고주알 까발리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동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절벽으로 내몰린 구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과 연대하여

투쟁을 벌이는‘예술해방전선’ 전사들의 전시와 공연이

지난 17일부터 25일까지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열렸다.

 

‘노량진 : 터, 도시, 사람’ 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상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술로 형상화한 작업에는

그림, 사진, 음악, 영상 등 여러 장르의 젊은 작가 40여 명이 참여했다.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의 싸움은 5년 넘게 이어왔다.

2016년 시장 부지를 소유한 '수협'이 현대화를 명목으로

새 시장을 열고 옛 시장 철거에 나서면서 부터다.

 

상인들은 2017년 4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10차례에 걸쳐 강제집행을 당했다.

'수협'의 명도집행과 '동작구청'의 행정대집행을 동시에 당한 이들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쫓겨난 상인 80여명은 노량진역 인근 육교 위에 텐트를 치고 반대했다.

 

'서울민예총' 사무국장인 황경하 작가는 지난해 10월부터 동료 작가들과 힘을 모아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공연을 여는 등, 힘을 실어주며 상인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노량진수산시장 문제를 기록해 온 사진가 최인기씨도 합류했다.

 

예술이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 돈만 쫓는 현실에,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 행동인가?

예술의 목적이 약자의 마음을 다독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되어준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예술은 없을 것이다.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이 생업을 밀쳐두고 애쓰는 고마움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작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늙은이가 끼이면 자유로운 활동에 장애가 될 뿐이다.

뒤늦게 전시라도 참여하라는 제안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함께 싸우지 않고 이름만 올린다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차라리 돈이 있었다면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일정이 마무리되는 지난 25일 전시와 공연이 열린 아현동 '행화탕‘을 찾았다.

공연준비에 바쁜 황경하씨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작품 설명을 해주어 미안스러웠다.

나이가 무슨 벼슬도 아닌데, 서로 편하게 웃으면 그만인데...

 

전시장에는 ‘예술해방전선’ 소속 예술가들이 철거현장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재현해 상인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벽면에 길게 널린 천에는 살아있는 고양이와 생활 집기를 포클레인이 움켜쥐고,

그 밑에는 경찰무리가 차지해 철거현장의 공포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지난 2월21일 노량진역 인근 노점 철거 당시의 현장을 지켜 본 이난영씨 그림으로,

당시 네 명이 다쳤고 상인 두 사람은 병원에 이송되었다고 한다.

 

한쪽에는 탁자 위에 정사각형 패널이 놓여있었다.

패널에는 못이 촘촘히 박혔다. 못과 못 사이 좁은 공간엔 글자가 한자씩 적혔다.

글자들은 가로·세로로 모여 갖가지의 단어를 이뤘다.

그 단어는 사라진 상점 이름이라고 한다. 바로 잊어버린 이름 찾기 작업이었다.

 

전시된 사진에는 평생을 시장바닥에서 조개 까느라 갈고리처럼 휘어진 상인들의 손가락도 있었고,

투쟁하는 상인이나 노량진 수장시장의 현실들이 마치 철거 현장처럼 여기 저기 덕지덕지 걸려 있었다.

한 쪽에서는 타큐멘터리 영상도 상영되고 있었다.

 

상인들은 일터를 잃은 것에 앞서 삶을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다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어찌 서울 한복판에서 아직도 용역이 사람을 때리는 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생활터전을 잃은 상인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폐허가 된

구 노량진수산시장 터는 굴착기 소리만 요란하다.

저녁이 되면 상인들은 난민촌처럼 길게 줄 선 텐트 안에서 하루를 마감한단다.

 

절망의 나락으로 내 몰린 그들에게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노량진 역 앞에 삼삼오오 모여 위로 공연을 펼쳤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십개월 여 지속되어 온 젊은이들의 예술행동은

마음 기댈 곳 잃은 상인들에게 큰 위안이고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위대한 이름이 '예술해방 전선'이다.

 

공연장에 노량진 수산시장 철거 상인 30여명이 등장하여 자리를 메웠다.

상인 대표 한 분이 나와 상황을 설명했고, 한 분은 뽕짝 노래까지 불러가며 격의 없이 연대했다.

제주에서 올라 온 ‘여유와 설빈’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함께 어울렸다.

뒤이어 ‘삼각전파사’와 회기동단편선, 바리케이트톨게이트, 공연이 펼쳐지는 등

9일 동안의 예술행동이 서서히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구 노량진시장 시민대책위’는 ‘국민권익위원회’ 제소 건을 검토하고 있다.

상인들의 구청 앞 농성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동작구청의 행정대집행에 맞서 결사항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해방전선’의 연대도 멈추지 않는다.

매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열렸던 노량진전철역 앞 공연이 계속된다.

시민대책위는 8월 중에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벼룩시장도 준비하고 있다.

 

십시일반 벌이는 예술투쟁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노량진: 터, 도시, 사람”전에 참여한 작가들

 

시각 : 건주, 김경진, 김수현, 등작, 박산들, 세민, 안명현, 양세진, 애나, 이난영, 이승휴, 이준용, 최인기

음악 : 가족사물놀이패 동동, 건주, 경하와 세민, 길가는 밴드 장현호, 김예원, 곽푸른하늘, 권나무, 노승혁,

        맑은, 바리케이트톨게이트, 박준, 삼각전파사, 손병휘, 손현숙, 여유와 설빈, 연영석, 유동혁, 유혜정,

        이산, 정수민, 조이영미블랭크, 지누콘다, 하늘소년, 출장작곡가 김동산, 하늘소년, 황푸하,

        회기동단편선

영화 : 편안한 밤, 시정잡배, 한 사람을 위한 음악회2

 

사진, 글 / 조문호

 



사진가이자 빈민운동가인 최인기의 ‘청계천 사람들’ 사진전이 지난 11일부터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전시된 사진들은 청계천 투쟁의 역사고 최인기의 삶 자체였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노동운동에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다.
최인기 역시 카메라를 도구로 가난한 청계천 사람들을 지키려 온몸을 던지고 있었다.




사진들을 돌아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청계천 빈민들 피를 빨아 대통령 자리까지 꿰 찬 도둑놈 이명박의 반들거리는 대갈통을 도끼로 갈기고 싶었고, 오세훈은 밟아 버리고 싶었다.
한 놈은 청계천을 뒤집어 가난한 노점상과 철거민을 내 몰았고, 한 놈은 시민들의 추억과 삶의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설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
그 긴 시간의 긴박한 순간순간을 최인기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본령이 무엇이던가?
약자의 편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데 기여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카메라를 저항의 도구로 활용했다.
핍박받는 노점상을 대변하며,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찍은 모든 것은 사람이 우선이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삼 년 가까이 지켜보았는데, 최인기씨 처럼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돌 콩처럼 착해 빠진 양반이 악바리로 맞서는지 모르겠다.




청계천은 최인기씨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청계천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신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삼일아파트의 옥상과 복도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도시를 돈으로 보는 돈 벌레들이 빈민들의 삶은 물론 최인기씨의 유년기 추억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권력에 눈깔이 뒤집혀 청계천을 완전히 갈아엎은 것이다.
그에 맞선 최인기는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위한 사회’를 부르짖으며 '기록하는 빈민운동가'로 나선 것이다




원로사진가들이 찍은 오래된 청계천 판자촌 사진들이 지나치며 눈으로 찍은 사진이라면,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을 이어받은 그의 사진은 빈민들 속에 들어가 온 몸으로 찍었다.
그 사진들은 청계천이 바뀌는 과정부터 핍박받는 모습까지 하나의 일지처럼 담아 낸 청계천 저항의 역사다.




사진치유자 임종진씨는 최인기의 ‘청계천 사람들’사진집 서문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청계천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상들은 아마도 치열한 빈민운동가이자

단호한 어조로 인간의 존엄성을 전하고자하는 최인기의 존재적 의미의 기호이자 발원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예술이라는 미학적 표현의지를 타고 넘어 너나 할 것 없는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소소한 이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최인기의 시선은 늘 사람이 우선이고 가장 최선이다.

그럼으로 최인기의 사진은 정녕 사람이요 삶이다.“




최인기씨는 “저는 이 사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을 통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고 말한다.




난, 사진가 보다 빈민운동가로서의 최인기를 더 좋아한다.
난, 사진보다 최인기의 따뜻한 마음을 더 좋아한다.

사진으로 사회를 바꾸려고 싸우는 그 투지를 좋아한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20일까지 이어진다.




청계천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최인기 사진집

펴낸 곳 : 리슨투더시티
270페이지, 가격 35,000원



전시가 개막된 11일 오후6시에 들린 전시장에는 사진인보다 그와 함께 한 분이 더 많았다.
노점상을 비롯하여 ‘민주노련’ 사람들이라 성함을 잘 모른다.



아는 분이라고는 73년부터 76년까지 청계천 사람들을 기록하여 ‘노무라 리포트’를 펴낸 노무라 모토유키,
노점상대표 우종숙씨, ‘빈곤사회연대’ 윤애숙씨, ‘동자동사랑방’ 전도영씨 뿐이고,
사진가로는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하는 공감아이’ 임종진대표,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안해룡, 김영호, 이세연, 곽명우, 김 헌, 안미경, 이광숙씨가 고작이다.




노무라 모토유키선생과 임종진, 우종숙씨 등 내빈의 축사와 최인기씨의 인사말을 들은 후

뒤풀이 장소인 ‘충무해물탕’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가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뒤풀이 비용을 모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풀이 장소에서 최인기씨를 말하는 이규상씨의 열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역시 이규상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야 투사적 기질이 나오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빈민운동 사진가 최인기씨, 6월 25일 종자동에서]



지난 25일, 빈민운동가이자, 사진가인 최인기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청계천 사진집이 나왔다며, 책을 한 권 가져 온 것이다.
어렵게 만든 사진집이라 사고 싶었으나, 기어이 주겠다는 것이다.

그를 알게 된지는 동자동에 들어 온 이후였으니, 한 이년 가까이 되었다.
노점상 집회나 근로자 집회에 가면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차를 대접하거나 밥을 샀다.
보나마나 돈 안 되는 사진 찍으며 빈민 운동하느라 어려울 것은 뻔한데, 
신세지는 것이 결코 편치는 않았다.
아마 어려운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하는 그의 천성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에 펴낸 청계천 사진집은 사진이기 전에 최인기의 삶 자체였다.
그는 사진을 예술의 사진보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알리며
저항하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핍박받는 노점상을 대변하며,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든 것에는 사람이 우선하고 있었다.

원로사진가들이 찍은 오래된 청계천 판자촌 사진들이 지나치며 찍은 사진이라면,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기록을 이은 그의 사진은 주민의 한사람으로 온 몸으로 찍었다.
그 책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청계천이 바뀌는 과정 과정에서,
빈민들을 핍박한 내용이 일지처럼 적혀 있었다.
잘못된 도시정책에 저항해온 이들의 사진 역사책이었다.

이명박은 청계천복원공사를 강행하며 가난한 노점상과 철거민을 내 몰았다.
오세훈은 시민들의 추억과 삶의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설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 밀고 당기는 긴박한 순간순간을 최인기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난, 최인기를 사진가로서 보다 빈민운동가로서 더 좋아한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빈민들의 열악하고 핍박받는 현실을 기록하며
주민들과 함께 싸워 온 지칠 줄 모르는 그 투지를 좋아한다.

청계천은 최인기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청계천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신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삼일아파트의 옥상과 복도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도시를 돈으로만 보는 인간들은 빈민들의 삶은 물론
최인기의 유년기 추억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가난한 이들의 삶이 짓밟히며 공동체가 파괴되는 악순환을 지켜본 것이다,

도시 공간의 공공성은 권력 있는 한 두 사람에 의해 구성 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함께 논의되었을 때 성립할 수 있다.
이제 낡은 청계천과 을지로의 골목도 우리 문화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도시가 되어야한다. 화려하고 새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정책입안자들도 가진 자보다 없는 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최인기는 “저는 이 사진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을 통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고
작업노트에 적고 있다.


사진집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속적인 빈민 기록을 위해 한 권 구입 합시다.



“청계천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펴낸 곳 : 리슨투더시티
270페이지, 가격 35,000원







가난한 이들의 춥고 힘들어 하는 목소리가 서울 장안에 울려 퍼졌다.


‘빈곤과 불평등의 도시를 고발한다! 빈곤을 철폐하자!’는 빈곤철폐 퍼레이드가

지난14일 오후1시부터 4시까지 동대문에서 출발하여 광화문광장까지 이어졌다.


이날 행사는 ‘건강세상 네트워크’를 포함여여 50여개 민간단체들이 참여한

‘2017 빈곤 철페의 날 조직위원회’에서 빈민들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은 DDP에서 종로와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세종문화회관 앞까지 행진하며 장애등급제 폐지,

노점상 강제철거 중단, 공공주택 확충과 전·월세 상한선 도입 등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시종일관 빈곤을 철폐하라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쿨레칸의 신나는 춤판도 벌어졌.






목적지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쿨레칸의 춤 외에도 민중가수 안상호씨의 ‘청계천8가’도 들었다.
발언자로 나선 이는 ‘노점상연합’ 중부지역장 우종숙씨, 용산지역장 백화영씨, 권익옹호활동가 권영은씨, ‘홈리스야학’ 림보,

‘성소수자인권연대’ 김수환씨, ‘민노총’ 위원장직무대행 최종진씨, ‘전국철거민연합’ 남경남의장, ‘전국빈민연합’ 심호섭 의장,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씨 등 많은 분들이 나와 부당한 사례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날 홈리스야학 학생회장 김종언씨 발언문 일부를 한 번 들어보라.


“2011년부터 서울역은 홈리스들을 내 쫓고 있다. 보증금 없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쪽방은 계속 철거되거나,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로 바뀌고 있다.
올해는 서울시마저 서울역 고가를 서울로라는 공원을 만들면서, 홈리스들이 공원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노숙행위’를 제한하도록 조례를 내놓기도 했다. 반발에 부딪혀 삭제하였지만, 여전히 그 조례는 ‘악취’, ‘혐오감’ 등을 제한하기로 한 조항이 남아있어 언제든 홈리스는 서울로에서 퇴거될 수 있다. 서울시의 조례는 홈리스를 마치 범죄자나 문제아로 취급해 사회에서 따돌려 버리기에 심각한 문제라는 거다. 홈리스 문제는 이렇게 분리시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억누른다고 해결될 가난이었으면, 가난 때문에 목숨 끊고, 가난 때문에 고독사하는 일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홈리스를 분리하는 정책을 당장 중단하고, 홈리스 복지를 강화하라.”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서민들의 삶부터 챙길 것으로 여겼으나, 아직 감감소식이다.
적폐청산도 중요하지만, 사람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빨리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챙겨주길 바란다.


복지제도 자체를 바꿀 일이 한 둘은 아니지만, 최소한 집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는 세상부터 만들어 다오.
그리고 더 시급한 문제는 거리에 내 몰린 홈리스 문제다. 당장 날씨가 추워졌지만, 그들은 대처할 능력조차 없다.






파지 박스 한두 장에 몸을 맡기고, 거리에서 벌벌 떨며 잠 못 드는 노숙인부터 먼저 생각하라.
물론 ‘노숙인 쉼터’란 걸 만들어 놓았으나, 통제나 내부규칙 때문에 외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수용이란 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냥 일인용 침낭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그 걸 맡길 수 있는 보관함부터 만들어 다오.
이 일은 어렵지 않은 문제로 생각하니, 빨리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이 날은 ‘동자동 사랑방’에서도 많은 분들이 나왔더라.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김원호, 선동수, 김정호, 강병국, 조인형씨와 사진하는 후배 최인기씨도 만났다. 


최인기씨는 노동과 세계사진기자로 일하는 변백선씨를 소개해 주며, 광화문 고깃 집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소주 한 잔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더 높다.
빈곤사회연대, 동자동사랑방 등 26개 단체가 연대한 ‘부양의무제 기준 폐지행동’ 발족 기자회견이

지난 26일 정오 무렵, 서울역 앞에서 열렸다.






‘법도 사람이 만드는데, 법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위의 소득으로 수급에서 탈락되어 살길이 막막해 목숨을 끊은 거제 이씨 할머니 유서에 적힌 글이다.

부양의무제가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며, 사람을 죽인 것이다.






빈곤사회연대 윤애숙씨를 비롯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배진수,

사진 찍는 빈민운동가 최인기씨 등 많은 단체에서 나왔고, 김종오, 이상준, 박정아, 선동수, 최남선씨 등

동자동 사랑방조합원들도 여럿 참석했다.





동자동에 사는 이상준씨는 “자식 어렸을 때, 내 몸 아프다고 돌보지도 못했는데,

자식한테 나를 돌봐달라고 어떻게 말합니까?

젊은이나 늙은이나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데 가족이 무슨 죄가 있다고 족쇄를 채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동자동 쪽방 촌에서 기초생활수급을 못 받는 대부분의 빈민들도 부양의무제에 걸려 못 받는다.

부양의무제기준은 가족을 가난에 빠뜨리거나, 가족관계까지 멀어지게 하는 천륜을 어기는 악법이다.






나 역시 살기가 어려워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한지가 두 달이 지났다.

매달 방세 낼 때마다 입이 바짝 바짝 타들어 갔으나, 담당공무원은 천하태평이었다.

연락 끊긴 딸의 동의가 없다며 미루더니, 기자회견이 있는 26일에서야 방문했다.


다음 달부터 지급 된다니 일단 마음이 놓이긴 하나, 이제부터 소득 생기는 일은 하지 못한다.

수입만 생기면 잘리거나 돈을 적게 주니 누가 일할 생각 하겠는가?

자립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 완전 사육하는 제도였다.






여지것 미운털 박혀 그런지, 번번이 제외되었으나, 이제 출판이나 전시지원도 받아서는 안 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창작발표마저 봉쇄된 것이다.

다른 수급자들이 돈 벌이에 나서지 못하는 것처럼 족쇄를 채워버렸다.

가족에게 짐을 지우는 부양의무제의 조속한 폐지와 함께 수급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간디는 ‘빈곤은 가장 잔인한 형태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가난하다는 그 자체로 가혹하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끊게 하는 참혹함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빈민을 위한 정책부터 우선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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