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운동의 초석을 다진 불굴의 혁명가 백기완 선생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긴 세월 민주화운동은 물론 민중의 생존을 다투는 싸움터 앞자리는 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항상 앞장서 실천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지요.

이제 누가 선생님의 그 자리를 대신하겠습니까?

 

선생님! 그토록 그리던 북녘 땅 한 번 돌아보시지 못하고 가시면 어쩝니까?

선생님을 따르는 그 많은 분들의 비통함은 또 어쩌라고요.

 

선생님께서 나오시면 다들 기념사진 찍으려고 추근댔으나, 언제나 웃으시며 반겼지요.

나라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물러나 있었더니,

애석하게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오래 전에는 사진하는 김영수씨의 소변 색깔을 보시더니,

당장 술을 끊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 말을 듣지 않던 김영수는 결국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토록 건강에 해박하신 선생님은 왜 못 챙기셨나요?

 

선생님의 이름자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어, 나 역시 하나를 고르자니 망설여집니다.

진보운동의 거목,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 불굴의 투사, 웅변가,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

조선의 삼대구라, 우리말 구사의 대가. 시인, 문필가, 사상가, 진보진영의 큰 어른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저는 민중해방의 혁명가로 기억하겠습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등을

주도한 혐의로 여러차례 수감되어 선생의 몸은 혹독한 고문으로 반쪽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깡마른 몸에서 나오는 쩌렁쩌렁한 기백은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 같았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었지요.

결국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지만,

그 날 대학로에서 가진 선생의 유세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 찍은 선생님 사진이 몇 장남아 그 날을 추억해 봅니다.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쓴 시 ‘묏비나리’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이 되어,

5.18에서부터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힘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

독재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요.

 

 그 뿐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셨지요.

‘달동네나 새내기, 동아리 등의 순수 우리말이 정착하도록 노력 하셨지요.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출판을 통해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실천하였고,

1999년에는 계간지 '노나메기'를 창간하여 시민운동을 이끌었지요,

민중해방이 실현된 새 세상을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 되,

함께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노나메기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생님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음을 선생님의 부재로 알게 되었답니다.

비록 선생님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뜨거운 영혼만큼은 대대로 영원할 것으로 믿습니다.

 

선생님!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 없이 따르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선생의 시를

소설가 황석영씨가 다듬고, 작곡가 김종률씨가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 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장례는 19일 오전8시에 서울대병원에서 발인하여, 오전9시에 대학로에서 노제를 지낸다.

오전11시에는 시청 앞에서 영결식을 갖고, 하관식은 오후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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