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욱 'inside mountains'사진전


일시 : 2014년 3월 2일부터 3월 28일까지

장소 : 아라아트센터 (지하1,2,3,4층)  

개막식 : 3월 5일 오후6시

주관 : 아라아트센터

기획 : 박인식

 

 

 

 

 

 

 

 

 

 

 

 

 

 

 

 

 

 

 

 

 

 

 

 

 

 

 

 

 

 

 

 

 

 

 

 

 

 

 

 

 

 

 

 

경남 하동장은 작년에 들려 일정에도 없는 코스였으나 네비게이션 조작 실수로 가게 되었다.

고금장을 떠나며 무주 설전면사무소로 찍었으나 난데없는 남해 설전면사무소가 찍혀 안내된 것이다.

두 시간 넘게 엉뚱한 길로 달리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과오도 있지만, 인간이 기계의 속물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기분 나빴다.

없는 돈에 기름 값과 통행료 날린 속상함도 한몫해 괜히 옆 자석의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리고 하동장에 내리며 아내에게 한 말은,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웃겼다.

“본전 찾아야 하니 좋은 사진 찍기 전에는 갈 생각 말아라“

이미 파장이 된 장터에는 할머니들만 띄엄띄엄 지키고 있어 골목과 외진 구석들을 찾아 다녔다.
어느 한 골목을 들어서니 일전에는 본 적이 없는 개인 장옥 한 동이 눈에 띄었는데,
고색창연한 외양이 일단은 눈길을 끌었다.
창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아주머니 혼자 운영하는 뻥튀기집이었다.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진인들과 기자들한테 시달렸으면 사진쟁이 둘이나 침입했으나

미소로 반길 뿐이었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촬영해도 하던 일만 반복할 뿐이었다.

일하며서 간간이 묻는 말에 답은 했으나 이름과 나이 등의 인적사항은 노코멘트였다.
그 자리에서 4-50년을 장사했다는데, 집 구조나 집기들은 오랜 연륜을 보였지만
주인이 너무 젊어 보여 좀 믿기지 않았다.

붉은 백열등 불빛을 받은 뻥튀기 기계 두 대가 연이어 터져댔다.
재료에 따라 가열시간이 다른데도 쉼 없이 해내는 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여태껏 장터에 따라붙는 다양한 뻥튀기 행상들을 봤지만 이런 가게는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주로 난전에서 튀겼으나 지금은 대부분 차를 개조해 포터 위에서 튀긴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내키지 않아 그냥 지나쳐 왔던 터다.
그런데 이곳은 난전도 아닌 판자집 안인데다, 아주머니 혼자 억척스럽게 일해 구미가 당겼다.

판자집 구조도 뻥튀기 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문이라고는 입구문과 조그만 창 하나가 전부였으나, 터질 때마다 김이 쉽게 빠져 나갔다.

이름 없는 뻥튀기 집이지만 오래된 추억들과 함께 그 곳 사람들의 구수한 인정까지 골고루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밤을 튀겨 가는 한 아낙은 밤 세알을 내 손에 살짝 쥐어 주었고, 주인 아낙은 튀긴 메밀을 맛보라며 내놓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장마당의 인정이다.
그 집을 나오며 아내에게 말했다.

“본전 찾았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박대원씨 ‘아이스께끼 파는 여인’ 

 

 

 


박대원씨 <아이스께끼 파는 여인>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금융노조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노동운동도 하다가 정년퇴직한 박대원(72)씨가 손자가 태어나면서 장롱 속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 10여년 찍은 사진과 글을 묶어 첫 사진집 <아이스께끼 파는 여인>을 냈다.
여기까지 보면 고 전몽각(1931~2006) 작가가 딸을 찍어서 펴낸 <윤미네 집> 같은 가족앨범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제목부터 범상치 않고 책의 내용도 판이하다. <아이스께끼 파는 여인>은 정년 후 매일같이 동묘, 인사동, 황학동 등지로 출근하는 그 나이 또래의 다른 노인들처럼 대중교통수단으로 서울 도심을 다닌 결과물이다. 다른 노인과 차이가 있다면 그의 손에는 늘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그의 카메라는 꽃이나 풍경이 아닌 평소 동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진마다 사람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사진철학은 어떤 풍경에 사람을 넣는다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사람이 있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기 위해선 다가서야만 한다. 그는 “내가 속해 있는 동호회 ‘라이카클럽’에선 ‘쉽게 사람에게 접근해서 잘 찍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누구든지 스스럼없이 접근해서 이야길 건넨다.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선 안 되지. 이걸 몇 년씩 반복하면 웬만하면 다 찍을 수 있었다. 특별한 재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사진집의 처음과 끝은 박씨가 ‘황학동에서 만난 첫 친구’ 김창복씨의 얼굴 사진이 3년의 간극을 두고 등장한다. “첫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아주 나쁘진 않았다. 나날이 병이 깊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사진집에는 이처럼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재 현장에서 만난 소방관, 레미콘 타설 후 쉬고 있는 노동자, 노점상, 뭔가를 지키는 경찰, 잃어버린 10살짜리 시베리아허스키 ‘꼬마’를 찾는 전단을 붙이는 이, 그리고 동묘 옆 골목길에서 정담을 나누는 노인들 등이 이어진다. 중간에 손녀도 한 컷, 암투병하던 동서도 한 컷,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박대원 본인의 모습이 찍힌 한 컷도 유리 진열장 속에 비쳐서 보인다. 그 또한 책 속의 다른 타인들처럼 느껴진다. 노숙자는 좀처럼 찍지 않으려고 피해왔는데 “한 장 찍어주소”라고 말을 먼저 건네와서 알게 된 이름 모른 사내의 넋두리가 절절하다. 박대원은 “아마도 지금은 세상을 떴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의 후반부엔 이처럼 박대원이 사진을 찍기 전후에 사람들과 나눈 사연을 따로 모아두었으니 사진을 보고 느낀 감정을 글에서 찾아서 확인해보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된다.
책으로 낼 만한 수준의 사진들이다. 하지만 일흔 넘은 나이에 뜬금없이 첫 사진집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도 작품의 완성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세상살이는 이런 것이다’라며 들려주고 싶은 사진과 글이란 마음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흔 넘은 나도 이렇게 하는데 사진에 뜻을 둔, 아직 젊은 누군가에게 제 책이 용기와 희망을 주는 한 줌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다”고 밝혔다.

 

 

곽윤섭 기자, 사진 박대원씨 제공


지난 12월부터 경기도 일원의 장터를 찾아 다녔다.
대개 가까운 지역은 하루 촬영하고, 하루는 사진을 정리하는 식이라 힘들지는 않으나,

장이 너무 늦게 서 여러 장을 돌아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난장의 할머니들도 없는 장돌뱅이들 뿐이라 기록에 더 의미를 두어야 했다.

새해 들어 세 번째 나선 지난 6일 촬영지는 강원도 휴전선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고성 거진장에서부터 인제 서화장, 철원 와수장으로 향하는 이동 경로는 최전방이라 군부대와 군인들이 많았는데,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길가에는 눈들이 쌓여 있었으나 꼬불꼬불한 도로를 군인들이

깔끔하게 치워 놓아, 설경을 가로지르는 휴전선 드라이브가 꽤 괜찮았다.

간간히 펼쳐지는 이국적 낯선 풍경에 매료되기도 하고....

오전 여덟시 무렵, 거진장에 도착했으나 너무 일렀다. 겨우 서너 명의 장꾼들이 나와 전을 펴고 있을 뿐, 장옥은 텅 비어있었다.

눈이 오면 미끄러워 할머니들이 나오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날씨가 추워 장꾼들이 늦게 나온다는 것이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인접한 거진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진항에는 마침 고기잡이 배가 들어와 여러 가지 잡어들을 내려놓았는데, 게와 도치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생전 먹어 본 적도 보지도 못한 ‘도치’라는 생선은 복보다 좀 크게 생겼는데, 주로 탕으로 끊여먹거나 횟감으로 쓴다고 했다.

도치가 죽으면 먹을 수 없어, 대개 그 지역사람들만 즐겨 먹는 생선이라기에 군침은 돌았으나 참았다.

비릿한 냄새에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사들인 생선들을 고르고 옮기느라 정신없었다.

추운 겨울 새벽 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꿈틀거림, 생동감을 거진항에서 만난 것이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난로 가에는 장정들이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날리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생선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과 풍경, 사물까지도 정겨웠다.

행복감이 손에 쥐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고영준씨는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와  만난 사진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 가장 절친했던 사우다.

80년대 초반, 그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일 할 때였다.

 

쥐꼬리만 월급으로 사는 주제에 내가 회사에 면접보러 간다니까 "옷이 그래가지고는 않된다"며

자기 카드로 양복을 사주었던 그런 인정많은 친구다. 

 

그 당시 인사동의 '꽃나라'흑백 암실에 드나들던 사진인 모임이었던 '진우회'(일명:진로회) 맴버로 시작하여  

'한국환경사가회'와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현대사진가회'까지 오랜 세월 같이 일해 왔다.

지금도 사진을 전업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 당시는 여유있는 사람 아니면 버텨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10여년 전 느닷없이 태국으로 돈 벌러 간다며 자기가 아껴 입던 옷가지를 골라 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곳은 더운 나라이기에 정장이 필요없다지만, 그 속 깊은 마음을 모를리가 없었다.

이 친구, 처음에도 옷을 사 주더니 떠나면서 까지 옷을 주어, 영원한 작별인사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가끔 한국에 다니러 올 때 만났는데, 태국에서 벌인 사업이 궤도에 올라 돈 걱정없이 산다기에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몇일 전 아내의 핸드폰으로 그가 한국에 왔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즘은 장터 촬영으로 바쁜 나 날을 보내기에, 지난 일요일에서야 그를 인사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번 서울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정기검진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 좋아하는 술을 끊은지는 오래지만, 심장수술로 담배마저 끊고 이제 목숨 끊는 일만 남았다며 실없이 웃었다.

사동집에서 술 한 잔 없는 만두전골로 재미없는 식사를 하고, 허리우드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판기 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했는데, 비슷하다며 가져 온 이름도 모르는 커피는 맛보다 크림 문양이 일품이었다.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 태국에서 사진은 찍지않고 골프치는데 소일 한다는 그의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도 무시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건 아니다 싶었다.

언젠가 틈을 내어 그의 주변 상황을 살펴 본 후, 다시 카메라를 잡도록 설득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는 선배 사진가들의 안부로 화제를 바꾸었고, 선배들이 찍어두었던 사진 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특히 사회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사회 생활상의 단면을 찍어 온 다큐멘터리사진들이야 말로

지금은 세월의 무게에 그 가치가 날로 높아가지만 스스로 과소평가하거나, 생활고에 쫓겨 거뜰 떠 볼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에 전혀 주목받지 못한 채 사장되어가는 들의 원고를 찿아내야 한다는데 생각이 모아졌다.

이 사진들을 발굴하려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은 물론,

그 원고들을 검토하여 고르는 것에서 부터 옛 필름들을 스캔하고 수정하는 일들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은 돈이 필요했다. 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장되기 쉬운 한국사의 중요한 기록물 수집은

정부에서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누가 그들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요즘 이사장 선거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는 도대체 무엇하는 단체인지....

 

 

 

 

 

 

 

 

 

 

 

 

 

 

 

[2013년 12월 28일 작성]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더라면...

 

죽을 구덩이를 파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옆에 서서 웃고 있는 군인의 가증스런 모습에 더 분노를 느낀다.

 

자신이 판 구덩이에 들어가 억울하게 죽어가는 부역자들

 

 

얼마 전  부역자들의 참혹한 학살 장면들이 담긴 눈빛출판사의 ‘한국전쟁’을 보며 그 끔찍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물며 짐승이라도 그렇게 죽일 수는 없을텐데,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는지 전쟁의 잔혹성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 부역자들을 일렬로 기둥에 묶어 총살하는 장면은 더러 접한 적이 있으나 쉽게 사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란히 눕혀 총살하거나 그도 못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한 곳에 몰아넣어 총살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더욱이 부역자란 죄목으로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명예회복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 것은 이 책들이 세상에 빛을 본지가 어언 10여년이 되었는데도 여지껏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소설가 박 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드나들며 발굴한 사진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3권을 출판하였고, 2010년에는 ‘한국전쟁’이란 제호로 개정판을 냈는데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 숨어있는 전쟁사진들을 세상에 끌어 낸 박 도선생의 끈질긴 집념이나 눈빛출판사의 노력에 새삼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한국전쟁하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있었다.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축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곳 곳에 널려있는 시체들과 부상병들의 참혹한 모습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혹시 '한국전쟁'사진집에 그 때의 기록도 있을까 하여 살펴보기도 했다. 

 

오랜기간 신문과 TV는 물론,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잡지 한 권 사 보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세상물정도 어둡고, 사진판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른다. 얼마 전에는 핸드폰마저 내버려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아날로그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달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족에게조차 연락할 수 없었던 일이 생긴 후로 아내의 강압으로 다시 휴대폰을 개통하게 되었고, ‘눈빛서원전’의 충격으로 사진잡지도 한 권 쯤은 구독할 작정이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있었던 ‘눈빛서원전’은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임을 확인시켜 준 전시였다. ‘한국전쟁’을 위시하여 청계천변 판자촌들을 기록한 ‘노무라 리포트’, ‘일제강점기’, ‘신동삼 컬렉션’, 등 보석 같이 귀중한 사진집들이 수두룩하건만 전혀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시작한 첫 날은 지방촬영으로 너무 늦게 참석하여 책들을 볼 시간이 없었고, 두 번째 초대한 날은 오랜만에 만난 사우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볼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전시가 끝나기 전 날 다시 들려 전시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좋은 사진집들이 너무 많아 무슨 책부터 살지 망설이기도 했으나, 일단은 눈빛의 엄청난 업적에 놀랐다.

 

 전시된 사진집들을 고르고 고르다 눈빛 아카이브에서 몇 권 골라왔는데, 그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느라 주말을 온전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데 소진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교훈과 채찍이 되어 준 보람된 시간이었다.

 



-눈빛 도서전에서 구입했던 사진집들-

다음 기회에 구입하고 싶은 책은 '일제강점기', '개화기의 대한제국', '신동삼 컬렉션'등이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에서 엮은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총768면 / 가격 29.000원]

 

-'한국전쟁1'에 실린 수 많은 사진 중의 한 장-

 

진주 주민들이 북한군이 학살한 가족의 시신을 찾고 있다.

당시 무고한 사람 수 백명이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

 

 

 

 박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아 내 출판한 '지울 수 없는 이미지'1-3권을 모은 사진집이다.

[총768면 / 가격 29.000원]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이 사진들을 발굴한 소설가 박 도씨는 이 책 외에도 '지울 수 없는 이미지','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개화기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을 눈빛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지금은 '미군정기'를 집필 중이며 앞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계속해서 펴 낼 것이라고 한다.

 

부역자들의 시신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확인사살하는 헌병들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68년부터 3년동안 청계천변 움막집들을 기록한 사진집-

[총528면 / 가격 29,000원]

 

이 사진집을 보며 놀란 것은 움막집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의 생활상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 무렵의 청계천사진으로 구와바라 시세이, 홍순태 선생께서 기록한 청계3가에서 6가 사이의 판자집들은 보았으나,

답십리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널려 있었던 움막집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가도 아닌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73년부터 76년까지 기록해 두어 그 실상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그 당시 무엇을 찍고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사진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청계천변 개미촌 움막집 소녀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개미촌 움막집의 사람들 /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어진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

1976년 판자촌 철거와 함께 정비되어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1967년부터 79년까지, 제3공화국의 유신시절의 보도사진들을 집대성한 사진집이다.

[총500면 / 가격 29,000원]

 

한국사진기자협회에서 매년 발행해 온 보도사진년감이 정선의 우리집 서재에 모두 꽂혀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뒤져 필요한 자료 찾기도 쉽지 않고, 분량이 너무 많아 쉽게 손이 가지 않기에 구입했다. .

13년 동안의 중요한 기록들만 집대성하여 한 권으로 묶은 이 책은 살아가는데 반면교사가 될만한 중요한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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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파동의 소용돌이가 학원으로 번져 동국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500여명이 교문 밖으로 나오다 기동경찰대의 제지와 헬리곱터의 권유로 일단 해산됐으나

일부는 장충단공원 쪽으로 빠져 투석전을 벌이다 완전포위되어 포로아닌 포로가 되었다. [이창성기자]

 

겨울마다 찾아오는 연탄전쟁은 서민들의 생활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눈이 오는 추운 날 서민들이 리어카로 연탄을 실어 나르고 있다.

 

 

 

 



 [신수진의 사진 읽기] 

 

시각적 혁명이 만들어낸 혁명적 시각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나팔 부는 개척자, 1930

예술이 지니는 사회적 기능에 대한 예술가들의 자각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와 장면을 꼽는다면 아마도 혁명기의 러시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르 로드첸코(Aleksandr Rodchenko·1891~1956)는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와 새로운 미학적 시도라는 두 토끼를 모두 잡은 작가로 꼽힌다. 그는 사진과 그래픽 디자인, 조각 등 다양한 표현 매체를 섭렵하면서도 기하학적 표현 양식이나 천장에 매다는 설치 조각 등 획기적 구성주의(constructivism) 실험에 매진했다.

로드첸코의 인물 사진은 사회 구성원이 시대에 맞는 시각을 가지게 하기 위한 자극제이자 활력소가 되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 위와 아래를 뒤집는 간단한 방법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인물 사진은 정면 얼굴을 찍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그는 과감하게 카메라를 턱 밑으로 들이댔다. 눈높이에서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수직적 시각으로 미학적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턱 밑에서 올려다보니 배경이 단순해지고, 단순해진 배경은 인물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는 시도만으로도 시대의 개척 정신을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그가 찍은 인물 사진에서 주인공은 모두 이 사진 속 소년처럼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과감한 시점의 선택으로 사진 속 인물은 '개척자'가 되었다. 그의 사진이 비록 사회주의 혁명의 안정화에 기여하는 선전선동에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그의 '새로운 시각(new Vision)'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동시대 독일 바우하우스의 주역들은 물론이고 후대의 수많은 예술가가,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전혀 다른 방향과 환경에서 바라보려는 시도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그의 신념과 실천에 공감했던 것이다.

 


두 명의 나팔수가 앞장을 선다. 음악까지 등장시킨 것으로 봐서 꽤 그럴싸한 행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팔수 뒤로는 키 순으로 늘어선 체육복 차림의 빡빡머리뿐이다. 절도는 있지만 좀 어설퍼 보인다. 그나마 그 절도도 양복을 빼입은 채 학생을 인솔하는 행진 오른쪽의 선생님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의미심장한 행진의 정체는 도열 끝 피켓이 쥐고 있다. 바로 쥐 잡는 날. 쥐잡기 운동이 온 나라에서 펼쳐지던 1967년 풍경이다.

반공방첩대회며 전국체전, 국군의 날 등 걸핏하면 학생들이 봉처럼 행사 들러리를 서던 ‘관제동원’의 시대였지만, 특히 그 무렵 쥐잡기는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해서 쥐잡는 일은 학교 공부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당시 농림부가 추산한 쥐는 9000만마리로 한 가구당 평균 18마리가 살고 있었고, 이 쥐들이 축내는 식량만도 곡물 총생산량의 무려 8%에 달했다.

쥐 박멸을 향한 대국민 프로젝트는 1970년대에는 더 규모가 커져 1972년 쥐띠 해에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당시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던 숙제는 회충 검사를 위한 ‘똥 봉투’ 제출과 쥐를 잡은 증거물로 제출해야만 하는 ‘쥐꼬리’였다. 신문마다 경쟁처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죽은 쥐를 소개하고, 신문 하단에는 쥐약 광고가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자의든 타의든 쥐약을 먹고 숨을 거두는 사건·사고도 흔해서 ‘쥐약이나 먹고 죽어 버려’라는 욕설까지 유행을 타던 시절이었다.

부천시가 부천이라는 행정명을 쓴 지 100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에는 이처럼 꽤 흥미로운 사진들이 많이 등장한다. 복숭아밭에서 공업단지를 거쳐 아파트 신세계로 변해온 작은 도시의 변천사는 지난 100년 한국의 변화상을 정교한 샘플처럼 제공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 도시의 변화 속도는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 두려울 정도다. 이 무서운 속도에 밀려 아파트공화국 다음에 정녕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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