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사진읽기]

 

반듯하게 버티고 선 제빵사처럼 충실한 사람이 세계의 주인공

 

사진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일부를 담는다. 사진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순 없다고 하더라도 사진에 찍힌 현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이 직접적일수록 그 사진의 가치는 현실의 이면에 가린 내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실을 보여주고 실재를 창의적으로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독일의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1876~1964)는 1910년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원형적 초상을 집대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장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 돌입하였다. 그는 개인의 초상을 통해서 거대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가능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20세기의 인간상(像)'을 사진에 담았다. 농부로부터 시작해서 기술자·변호사·국회의원·군인·은행가·학자·예술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을 체계적으로 촬영한 인물 전도에 포함된 사진은 그야말로 방대했으며, 초상 사진 위주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형을 제시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시도로 평가된다.

잔더의 야심 찬 계획의 첫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얼굴'이 출간된 후 나치 정권은 그의 활동이 아리안 우월주의에 위배된다는 생각으로 그를 불온 사상가로 지목하고 원판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사람은 바뀌어도 사진은 남는다. 나치는 사라졌고 지금 우리는 잔더의 사진을 보고 있다.

 

                                                                                         ▲ 아우구스트 잔더, 제빵사, 1928.


 

그의 인물 사진은 1928년에 촬영된 이 제빵사처럼 어떠한 꾸밈도 없이 단순하고 직접적이다. 둥근 얼굴에 흰 가운을 입은 퉁퉁한 몸집, 반죽을 만드는 주걱과 그릇을 잡은 손, 흰 가루가 덮인 작업 공간은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과 반듯하게 버티고 선 두 다리 아래에서 검게 반짝이는 구두는 그가 비록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지만 누구보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회인임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진중하고 반듯하게 바라보는 방법만으로도 유능함과 자존감이 어우러진 자긍심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순수한 사진이 지금도 우리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잔더가 꿈꾸었던 사회적 가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진은 당대의 정치와 권력의 그림자를 벗어나면서 비로소 진정한 다큐멘터리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한 세기 전 평범한 제빵사 모습에서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떠나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다하는 사람들이 곧 시대와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철학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적 시각에 내재한 인간관은 존중과 자긍의 미덕을 일깨워 준다. 나와 남을 존중하고 긍정하는 태도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신념을 실천하게 하는 힘을 만든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 소양이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잔더의 눈을 빌려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필요한 자리를 지키는 모든 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신수진 /사진심리학자]

조선일보 2014.1.13 

요즘 자동차 없는 덕분에 산책시간이 좀 많아졌다.

산골짜기서 차 없이 산다는 게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에서 다시 한 번 뒤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빨리 빨리 보다 천천히 살자는 말은 자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현장을 쫓아다니는 다큐멘터리사진가에게는 그럴 여유도 없지만, 금세 잊어버린다.

십년 넘게 전국의 장터와 인사동을 기록하러 다니다보니 대인관계는 물론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다. 이젠 신용카드 없는 신용불량자에서 자동차마저 멈춰 섰으니, 완전 무장해제 된 기분이다.

요즘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에서 버스 정류소까지 2킬로 남짓한 산길을 자주 걷는다. 일하는 시간이 좀 줄긴 하지만, 대신 걷거나 버스 기다리는 동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십오 년 넘게  만지산을 오갔으나 이렇게 꼼꼼하게 자연환경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과히 생활의 재발견이라 할 만큼 모든 게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먼 산도 자세히 보니 미세한 숲의 일렁임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고, 뼝대의 속살이나 형상들은 어느 조각가도 흉내 못 낼 걸작들이었다. 길섶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의 속삭임과 흐르는 강물소리의 절절함에 이르기 까지 자연환경과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전국 장터도 대부분 찍었고, 인사동도 대충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사진원고를 정리해 출판사에 넘기는 일만 남았으니, 진짜 천천히 살아 볼 작정이다.

장모님 생신날에는 기차타고 갈 작정인데, 텃밭에서 뽑은 채소와 카메라, 옷 보따리 등 짐이 많아 걱정이다. 장에 나오는 노인들처럼 봇짐, 등짐 짊어지고 가야할 처지지만, 벌써부터 그 날의 기차여행이 기다려진다.

아래 사진들은 지난 15일 오전9시 무렵의 윗 만지산길이다. 집에서 귤암리 버스정류소로 가며 만난 풍경들이다.

 

 

 

 

 

 

 

 

 

 

 

 

 

 

 

 

 

 

 

 

 

 

 

 

 

 

 

 

 

 

 

 

 

커다란 길거리 거품과 꼬마 여권 화가

영국 인디펜던트 지 2일자에는 한국에 관한 재미있는 사진 2컷이 실렸다. 이 중 커다란 거품사진은 기자도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인사동 쪽에서 보았던 광경이다.

▲ 2 June 2014 Tourists react to a large bubble created by a street performer in Seoul Ed Jones/AFP/Getty Images(관광객들이 길거리 공연자가 만든 커다란 거품에 즐거운 반응이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기자 눈에는 사진 속의 사람도, 기자가 본 그 순간의 사람들도 관광객이 아닌 우리 시민들이었다. 하긴, 저꼬마 아이는? 하 하 ...

 

그 날 기자가 인시동에서 보았던 순간에는 거품이 잘 만들어지지 않아서 사진 찍는데 실패하곤 아쉬어 했다.  바로 그 거품이 영국 일간지에 실리다니 '호기심을 갖게 되는 사람의 느낌은 비슷하구나.'란 생각을 다시하며 우리 사진 대신 인디펜던트 지의 사진을 올린다.

 

또 다른 사진은 한국에 여행왔다  4살짜리 아들의 귀여운 장난 때문에 공항에 발이 묶인 중국인 가족의 사연으로 보는 이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재미난 그림들

 

보도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 성 천(陈)씨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공항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여권이 낙서장으로 변한 것을 알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씨가 웨이보에 공개한 웃음을 안겨주는 여권 사진.  큼지막한 눈, 턱에 난 수염, 사진 옆에 자리한 정체불명의 캐릭터까지. 이는 모두 천씨 아들의 작품이었다.

 

 

 

▲ 2 June 2014
Diners take lunch suspended in the air above the Parc du Cinquantenaire in Brussels."Dinner in the sky" is an "unique occasion" to discover Brussels's high cuisine and enjoy a spectacular view of the city from the air GEORGES GOBET/AFP/Getty Images.  (World News in Pictures. The Independant.)브러셀의  "Parc du Cinquantenaire" (50주년 공원) 공중에 떠있는 하늘 식당에서의 식사! 멋진 경관과 고품격 요리를 즐기는특별할 경험.

 
로타리 회원들과 그의 친구들이 시드니 하버 브릿지에 올라 세계 기록 갱신에 도전하고 있다. 한 순간에 가장 많이 올라간 사람들과 깃발들.
 

 

 

▲ 30 May 2014
Rotary members and friends climb Sydney Harbour Bridge in an attempt to break the World Record for the most people on the bridge at one time and also the most flags on the bridge at one time in Sydney  (World News in Pictures. The Independant.  PETER PARKS/AFP/Getty Images)

 

[고양인터넷신문 / 이나미]

-이 사람-



마음의 상처를 북장단에 날리는 최덕화씨


정선시장에서 품바로 신명을 풀어내는 최덕화(63세)씨는 홀아비다.
역마살이 낀 그의 팔자는 30여 년 전, 가족과 헤어지며 떠돌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아들 둘이 장성하여 가끔 연락은 한다지만, 이산가족 신세일 뿐이다.

평택이 고향인 그는 전국의 장터를 떠돌다, 6년 전 정선에 안착했다.
지금은 정선을 거점으로 대화 등의 변두리 장에 원정을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신명 푸는 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시장 상인공연단의 일원으로 사물놀이 팀에 합류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나서다 보면, 그의 본업인 엿 장사는 잠시 접어야 하지만,
장사보다 신명을 풀어내는 시간이 훨씬 더 즐거운 것을 어쩌랴.
엿을 팔아 한 달에 150만원정도 번다지만, 돈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라 항상 빈털터리다.
장돌뱅이 아니 품바생활 15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북, 장구 등의 악기들과 신명뿐이다.

그러나 보람은 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가위질까지하는 일인다역의 광대놀음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의 신명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관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백발을 휘날리며 열광적으로 북에 몰입할 때는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얼~ 시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로 시작되는 품바들의 각설이타령은
들을 수 없지만, 그의 신바람 난 북장단이 정선아리랑시장을 흥건히 적신다.

지난 일들을 잊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북장단에 몰입하겠지만,
하루를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그 허전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거냐?
어차피 부초처럼 떠돌고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잊혀진 대한조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우리의 마지막 황실 사진자료로서 잘 간직해 후세에 전해야합니다

서울대박물관이'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특별 사진전을 개최했다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호머 헐버트씨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
.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 독일어로‘Palastdame’(궁녀),
영어로‘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상중의 연미복 입은 고종황제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영녕전 참배의식중인 영친왕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촬영)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시절의 덕혜옹주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1월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하는 영친왕

 

홍릉입구의 홍살문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해지지 않는 문이다.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융희황제(순종)의 장레식(국상)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나인들 모습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사진인듯.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교과서에 쓰여진‘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융희황제(순종) 장레식(국상),국상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촬영)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영친왕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19년2월9일 고종황제가 승하한 창덕궁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은 이 사진은 1918년1월21일 촬영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가마에 탄 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1월13일오후9시,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으로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사진
1962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左부터)
 

 한자리에 모인 구한말 황족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은 사무관

대원군의 생일 기념사진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통감을 설치,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길은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2월 3일, 73세로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의 순종과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내용 미상

 

소재 불명

 

 운현궁 양관

 

창경궁 궁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

 

 

(32)경주 양북장

70여년 애환 녹아있는 고풍스러운 장옥 그대로…



5·10일 든 날 열려
경주 동쪽 해안가에 위치
싱싱한 해물 많아 어물전 커
파종기 종묘상엔 사람들 북적
쇠락의 길 걷지만 인정은 여전


 

 

 

“논두렁에서 캔 씀바귀 좀 사이소. 이거 무마 안 늙는다 카드라. 내 얼굴 좀 보래이. 우리 영감이 지금도 각시 같다 안 카나.”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산다는 황정분씨(73)가 나물을 다듬으며 자랑을 한다. 봄날 장터는 산과 들에서 불려 나온 원추리와 돌나물·취나물·머위·부추·달래·냉이·쑥부쟁이·씀바귀·미나리 등이 가득 펼쳐져 마치 나물 전시장 같다. 황정분씨 자랑처럼 장 안은 봄나물의 쌉쌀한 향기로 가득하다. 저 먼 산과 들에서 내지르는 봄나물들의 소리 없는 함성이 신라 천년의 역사가 서린 장터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경주의 동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양북장은 감포에서 경주 가는 길목인 양북면 어일리에서 5일과 10일이 든 날에 선다. 찬란한 문화유적(문무대왕릉)과 첨단 에너지산업(월성원자력발전소)이 공존하는 양북면은 서쪽으로는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이, 동쪽으로는 문무대왕릉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문화재가 지천이라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노천박물관이나 마찬가지다.

 1942년에 개설된 양북장은 고풍스러운 옛 장옥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장터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장터 입구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새 주인을 만나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범곡리에서 온 이군자씨(73)가 그 앞으로 다가간다. 강아지 한 마리를 잡아 암놈인지 수놈인지 구분하려고 치켜든 모습이 마치 자식을 대하듯 다정하다. “식구를 한 명 들이는데 우째 그냥 사겄노? 그런데 이기 암놈 맞나?” 하고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살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씨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양북장은 지척에 바닷가가 있어 싱싱한 해산물이 많이 나온다. 자연산 전복을 비롯해 살아 있는 생물이 많아 어물전이 큰 편이다. 생선 눈만 보면 냉동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박씨 할아버지(83)는 어물전에서 장사한 지 53년째다. “여가 어일리(魚日里) 아이가. 마을 앞산이 고기 한 마리 뒤집어놓은 것 같아서 고기 어(魚)자를 붙였다 카드라.” 요즘 제철인 도다리와 소라가, ‘고기 박사’로 통하는 박씨의 말솜씨에 꿈틀거린다.

 파종기를 맞은 종묘상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선 강의실을 방불케 할 만큼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다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지만, 그 많은 친구들도 이젠 하나둘 떠나가 시골 장터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장터 모퉁이 모퉁이에는 사람 사는 정이 피어나고 있다.

 “내사 마 봄만 되믄 가슴이 벌렁벌렁 한다카이. 산에 피는 꽃과 나물도 이뿌지만 요새가 일하기 딱 좋은 날씨 아이가. 내가 탯자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늘 같은 하늘만 이고 산 토백이라 카이.”

 호암리에서 씨앗을 사러 나온 양씨 할머니(78)의 말이다. 꽃이 피면 힘든 한 해 농사일이 시작되긴 하지만, 꽃밭에서 꽃잎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씨앗 떨어지는 소리처럼 정겹기만 하단다. “할 일이 없으면 사는 것 같지 않고 일을 해야만 사는 것 같다”는 양씨 할머니는, 분단장한 지가 언젠지 뒤돌아본 적도 없다며 살포시 웃는다. 고추·토마토·하수오·마·도라지·콩·호박 등 온갖 작물을 심고 가꾸는 방법에 대한 양씨 할머니의 강의는 끝이 없다.

 경주 최씨 집성촌인 봉길리에 산다는 최씨 할머니(79)가 “니만 입이가? 나도 좀 하자” 하며 끼어든다.

 “여가 절과 탑이 많은 건 알지예? 절이 얼매나 많으마 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했겠노. 여가 부처님 세계인기라.”

 도라지는 3년은 돼야 약이 된다는 이야기와, 봄볕이 아까워 흙 묻은 몸뻬 바지 주물러 빨랫줄에 걸어놓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할머니들의 소박한 삶이 눈에 아른거린다. 밭이 자꾸 불러낸다는 최씨 할머니가 호박씨 심어야 한다며 훌훌 털고 가는 길을, 봄도 덩달아 졸래졸래 따라간다.

 경주에는 양북장 외에도 대표적 전통시장인 성동장(2·7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가는 서면장(1·6일), 감포 방파제가 있는 감포장(3·8일), 재미난 그림이 있는 외동장(3·8일), 불국사가 인근에 있는 불국시장(4·9일), 싱싱한 수산물이 많은 안강장(4·9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남장(4·9일), 옛 장옥이 그대로인 건천장(5·10일)이 있다.

경북 군위군 의흥면은 한 때 군소재지로서 우보, 산성, 고로, 의흥 등 4개면에서 모여드는 군위 동부권의 중심축인 장이었다.

1919년에는 3. 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힘입어 우보면에서 짚신을 만들던 70세노인 조성우옹이 의흥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꾼들의 궐기를 꾀하다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번성했던 의흥장의 명성도 이제 옛말이 된지 오래고, 한가로운 장터에는 장꾼들과 노인 몇몇이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자체에서 퇴락해가는 의흥장을 살리려고 2008년 새 장옥까지 지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사람이 없는데, 장옥 짓는다고 없는 사람이 생길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의흥장터의 명물인 병팔이네 소머리국밥은 아직도 그 맛을 지키고 있다.
대를 이어 장사한다는 박세훈(54세)씨는 장이 서기 전날 밤부터 소뼈를 우려낸다고 한다.

그 구수한 진국 맛을 보려고 장날이면 장보러 오기보다 소머리국밥 먹으러 나온 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장작을 미처 준비 못했는지 공사장에서 나온 폐자재들로 불을 지펴 장터주변이 온통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5일과 10일에 서는 의흥장은 마늘과 양파가 많이 나온다.

혹시 지나치는 길에 날자가 맞으면 병팔이네 소머리국밥을 꼭 맛보시길...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