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1970년대의 탄광활황기엔 정선아리랑시장 만큼이나 문전성시를 이루던 철암장,

지금은 텅 빈 장옥에 단했던 삶의 흔적만 저탄장의 석탄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지난 10일, 강원도 오일장에서 유일하게 기록하지 못한 태백 철암장을 찾았다.

철암 천과 철암역을 끼고 있는 난장에는 장돌뱅이들이 펼친 천막 사이 사이로 

몇 명의 할머니들이 푸성귀와 어물을 팔고 있을 뿐,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철암장은 과거의 영화만 무성했고 앞으로의 대책은 막막했다.

삼방마을에서 내려다 본 철암장터와 판자집들, 철암천 좌측이 장터이고 윗쪽으로 저탄장도 보인다.

철암장을 찾아 나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

 

 

 

 

 

 

 

 

 

 

 

장옥 건너편 철로변으로 자리잡은 검은 선탄장에서는 탄가루를 잠 재우느라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맞은 편 산 중턱에는 판자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는데,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이란다.

삼척MBC에서 정영신씨 취재 나온 황지웅PD와 함께 삼방동을 찾아 나섰다.

 

마치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였다.

닭장처럼 붙은 판잣집 담벼락에 그린 벽화들은 통영 동피랑 마을을 연상케 하지만,

광부들이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과거로의 여행이 재밋다.

 

 

이 삼방동 마을은 서양화가 허강일(40세)씨의 고집어린 집념이 지켜낸 산물이다.

삼방동 촌장이나 다름없는 허씨를 만나 삼방동과 어린 시절의 철암장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태백황지고와 강릉대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도시재생사업에 관심을 가져 광산촌의 옛 추억을 담은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울한 폐광 마을에 활기찬 웃음을 그리며 고향마을 보존을 위해 열심이지만,

태백탄광역사촌을 조성하는 관료들의 생각이 허씨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삼방마을에서 내려다 본 선탄장 풍경

 

장터에서 올려다 본 고즈넉한 삼방마을 풍경

아직까지 삼방마을에는 연탄이 공급되고 있다.

철암시장 취재에 나선 삼척MBC 황지웅PD가 삼방마을을 오르고 있다.

 

삼방마을 지킴이인 허강일씨가 여러가지 문제점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선탄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겠다는 정영신씨

 

얼마나 지붕이 낮은지, 평상에서도 지붕에 오를 수 있겠다.

 

도처에 널린 폐가들을 보수하여 예술가들 작업장으로 제공하면 어떨까?

 

 

 

 

 

이 건물들이 까치발 건물이다.

 

 

광산촌 철암동의 호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는 석탄이 없었다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지금의 태백시 인구가 5만명이 채 못되지만,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고 한다.

대개 탄광촌에 발 들인 사람을 '막장 인생'이라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도시에서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이었던 '대구관'의 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광부에게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에 비견될 만큼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보존한다고 했다.

 

철암동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태백광산역사체험촌' 조성 사업은 1980대 말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폐허가 된 철암역 일대를 역사 속의 탄광마을로 재탄생시키는 사업이다.

태백시는 철암동을 그 옛날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지역으로 재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철암역 선탄장은 '살아 있는 석탄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등록문화재 21호로 지정돼 있다.

까치발 건물은 또 석탄 산업이 호황을 이루던 시절에 철암 시내의 번화했던 거리 모습이 어땠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이 건물들이 개발이 되고 나면, 철암역 일대도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광부들이 살았던 삼방마을이 제외되어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석탄산업에 찬바람이 몰아친 1989년부터 사람들은 떠나고 외지인의 발길마저 끊겼지만

지난해 백두대간 협곡 관광열차가 운행되면서 방문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 주인들은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호남수퍼 등 최근까지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오랜 추억을 되세기게 하는 과거로의 아날로그 여행을 한 번 떠나 보심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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