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경주 양북장

70여년 애환 녹아있는 고풍스러운 장옥 그대로…



5·10일 든 날 열려
경주 동쪽 해안가에 위치
싱싱한 해물 많아 어물전 커
파종기 종묘상엔 사람들 북적
쇠락의 길 걷지만 인정은 여전


 

 

 

“논두렁에서 캔 씀바귀 좀 사이소. 이거 무마 안 늙는다 카드라. 내 얼굴 좀 보래이. 우리 영감이 지금도 각시 같다 안 카나.”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산다는 황정분씨(73)가 나물을 다듬으며 자랑을 한다. 봄날 장터는 산과 들에서 불려 나온 원추리와 돌나물·취나물·머위·부추·달래·냉이·쑥부쟁이·씀바귀·미나리 등이 가득 펼쳐져 마치 나물 전시장 같다. 황정분씨 자랑처럼 장 안은 봄나물의 쌉쌀한 향기로 가득하다. 저 먼 산과 들에서 내지르는 봄나물들의 소리 없는 함성이 신라 천년의 역사가 서린 장터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경주의 동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양북장은 감포에서 경주 가는 길목인 양북면 어일리에서 5일과 10일이 든 날에 선다. 찬란한 문화유적(문무대왕릉)과 첨단 에너지산업(월성원자력발전소)이 공존하는 양북면은 서쪽으로는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이, 동쪽으로는 문무대왕릉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문화재가 지천이라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노천박물관이나 마찬가지다.

 1942년에 개설된 양북장은 고풍스러운 옛 장옥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장터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장터 입구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새 주인을 만나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범곡리에서 온 이군자씨(73)가 그 앞으로 다가간다. 강아지 한 마리를 잡아 암놈인지 수놈인지 구분하려고 치켜든 모습이 마치 자식을 대하듯 다정하다. “식구를 한 명 들이는데 우째 그냥 사겄노? 그런데 이기 암놈 맞나?” 하고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살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씨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양북장은 지척에 바닷가가 있어 싱싱한 해산물이 많이 나온다. 자연산 전복을 비롯해 살아 있는 생물이 많아 어물전이 큰 편이다. 생선 눈만 보면 냉동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박씨 할아버지(83)는 어물전에서 장사한 지 53년째다. “여가 어일리(魚日里) 아이가. 마을 앞산이 고기 한 마리 뒤집어놓은 것 같아서 고기 어(魚)자를 붙였다 카드라.” 요즘 제철인 도다리와 소라가, ‘고기 박사’로 통하는 박씨의 말솜씨에 꿈틀거린다.

 파종기를 맞은 종묘상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선 강의실을 방불케 할 만큼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다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지만, 그 많은 친구들도 이젠 하나둘 떠나가 시골 장터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장터 모퉁이 모퉁이에는 사람 사는 정이 피어나고 있다.

 “내사 마 봄만 되믄 가슴이 벌렁벌렁 한다카이. 산에 피는 꽃과 나물도 이뿌지만 요새가 일하기 딱 좋은 날씨 아이가. 내가 탯자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늘 같은 하늘만 이고 산 토백이라 카이.”

 호암리에서 씨앗을 사러 나온 양씨 할머니(78)의 말이다. 꽃이 피면 힘든 한 해 농사일이 시작되긴 하지만, 꽃밭에서 꽃잎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씨앗 떨어지는 소리처럼 정겹기만 하단다. “할 일이 없으면 사는 것 같지 않고 일을 해야만 사는 것 같다”는 양씨 할머니는, 분단장한 지가 언젠지 뒤돌아본 적도 없다며 살포시 웃는다. 고추·토마토·하수오·마·도라지·콩·호박 등 온갖 작물을 심고 가꾸는 방법에 대한 양씨 할머니의 강의는 끝이 없다.

 경주 최씨 집성촌인 봉길리에 산다는 최씨 할머니(79)가 “니만 입이가? 나도 좀 하자” 하며 끼어든다.

 “여가 절과 탑이 많은 건 알지예? 절이 얼매나 많으마 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했겠노. 여가 부처님 세계인기라.”

 도라지는 3년은 돼야 약이 된다는 이야기와, 봄볕이 아까워 흙 묻은 몸뻬 바지 주물러 빨랫줄에 걸어놓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할머니들의 소박한 삶이 눈에 아른거린다. 밭이 자꾸 불러낸다는 최씨 할머니가 호박씨 심어야 한다며 훌훌 털고 가는 길을, 봄도 덩달아 졸래졸래 따라간다.

 경주에는 양북장 외에도 대표적 전통시장인 성동장(2·7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가는 서면장(1·6일), 감포 방파제가 있는 감포장(3·8일), 재미난 그림이 있는 외동장(3·8일), 불국사가 인근에 있는 불국시장(4·9일), 싱싱한 수산물이 많은 안강장(4·9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남장(4·9일), 옛 장옥이 그대로인 건천장(5·10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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