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태백 철암장

 

시간 멈춘 검은도시, 열흘에 한번
화려했던 지난날, 추억하는 상인들…

주변 탄광들 문닫으며 쇠락의 길로
매달 10·20·30일 장 열려
중부내륙순환·백두대간협곡열차 영향
관광객들 많이 늘어

 


“하늘만 빼곤 온통 까만 동네였드래요. 물도, 땅도, 아이들 얼굴도요. 겨울에 눈이 오면 하얀 이불 같다며 좋아했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철암장(강원 태백시 철암동)은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60년째 장사를 한다는 이준태 할아버지(80)는 철암장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처음 장에 나왔을 때는 지붕이 없어 밀가루 포대로 비바람을 막았는데도 사람들로 넘쳐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돈이 흔했다고 한다.

 생선을 다듬던 이씨 할아버지는 “저 앞에 보이는 삼방동 불빛이 나를 불렀어” 한다. 기차 타고 가다 삼방동 산비탈을 밝힌 불빛에 끌려 철암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부가 되려고 탄광을 찾아갔으나 키가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 장삿길로 들어섰단다. 철암장 맞은편에 자리한 삼방동은 광부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좁은 골목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바로 골목이 나와 마치 미로 같은 동네다.

 태백 철암장은 여느 장과 달리 열흘 만에 장이 선다. 매달 10·20·30일이 장날이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검은 도시의 텅 빈 장옥에는 번창했던 과거만 무성하게 남아 있었다. 머지않아 5월이면 헐리게 될 장옥을 지키며 지난날을 추억할 뿐이었다. 검은 석탄으로 철암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그 시절을 모두들 그리워하는 것이다.

 전국 석탄 생산량의 40%나 차지했던 철암의 탄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장터 뒤편의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국가등록문화재 제21호)’에선 아직까지 탄가루를 재우느라 연신 물을 뿜어내며 석탄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연탄 선탄(캐낸 석탄 가운데서 나쁜 것을 가려냄) 시설로, 근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시장 안에서 40년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진씨 아저씨(67)는 난로에 다리미를 달궈 다리미질하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흐뭇한 순간은 탄광에서 일하는 신랑이 결혼식에 입을 신사복을 빌리러 찾아올 때. 진씨는 그 젊은 광부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빌려주긴 했지만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늘 마음 한쪽이 아렸단다. 그래도 당시엔 공무원이나 상인보다 광부가 인기가 있어 광부증만 있으면 장가도 쉽게 갈 수 있었다. 광부 부인들은 막장에 들어가는 남편 운을 점치려고 무당집을 많이 찾았다는 게 진씨의 말이다.

 철암장이 상설시장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1970년대에는 시장 안에 무당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처럼 노점상도 많아 난전이 철암역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것.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대부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났고, 12만명이던 태백 인구가 지금은 5만명도 안 된다.

 아버지가 광부였다는 화가 허강일씨(40)에게 철암장은 떡볶이로 기억된다. 허씨는 엄마 따라 장에 왔다가 떡볶이라도 먹게 되면 일부러 옷에 빨간 국물을 묻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허씨는 삼방동 옛 우물 벽면에 엄마가 아들 등목을 시키는 모습을 강아지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삼방동에 폐가가 늘어나자 담벼락에 탄광촌의 추억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허씨는 최근 이 일대를 역사 속의 탄광마을로 재생시키는 ‘태백 철암탄광 역사촌’이 만들어져 다행이라며, 꼭 한번 들러보라는 당부까지 한다.

 요즘은 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와 백두대간협곡열차(V-트레인)가 운행되면서 철암장과 그 주변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장터 사람들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철암장과 연결된 까치발 건물. 철암에 사람이 몰리던 시절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느라 하천 바닥에 박은 건물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그 시절의 영화를 알려주는 명물이 됐다.

 따스한 봄날,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아득한 아날로그 여행을 떠나보자. 시간이 멈춰버린 검은 동네, 철암장이 그곳에 있다.

 철암장 외에 태백에서 열리는 장은 통리장(5·15·25일), 장성장(4·14·24일)이 있다. 모두 열흘에 한번씩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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