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포크의 거장’ 한대수(66)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사진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학생은 커녕 대학생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인 60년대, 한대수는 문화의 용광로 미국 뉴욕의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암실에서 필름을 매만지던 유일한 한국인 히피(Hippie)였다.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히피 문화를 받아들인 그의 음악은 가죽부츠를 구겨 신고 장발을 풀어헤친 외모만큼이나 당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섰다는 상찬을 받았지만, 당대에 그는 도망치듯 다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잠시 접은 그는 미국에서 사진작가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진작가 한대수는 대중이 잘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인생인 셈이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63) 연세대 교수, 변우식(43) 팝아티스트와 함께 ‘꿈꾸는 삼총사’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한대수가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지난 2000년 개인 사진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포크 음악의 전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 연세대 교수, 변우식 팝아티스트와 함께

‘ 꿈꾸는 삼총사’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가 전시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는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 작품,

헤럴드경제 /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한대수는 “60년대엔 미국 히피 문화를, 7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왔다”며 “보관 중인 필름이 50만 컷이 넘는데, 가능하면 일흔이 넘기 전에 정리하고 싶다. 이번 전시회는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온 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달리며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60년대, 한대수는 미국에서 공대와 경영학이 아닌 ‘돈이 되지 않는’ 전공으로 학업을 마친 괴짜였다. 사실 그의 첫 전공은 놀랍게도 수의학과였다.

한대수는 “조부가 수의학을 전공하면 목장을 주겠다고 제안해 뉴햄프셔주립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며 “캠퍼스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중 사진잡지 ‘파퓰러 포토그래피’,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 등을 접하고 사진에 매력을 느껴 수의학과를 중퇴하고 1967년 사진 전문학교인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한대수의 조부는 학비 지원을 중단했다. 고액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꼬박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야 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한대수는 “60년대는 음악, 미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문화가 폭발적으로 융성한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였고, 사진 역시 예술의 한 분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며 “지금도 뉴욕에서 유명한 식당인 ‘세렌디피티 3’에서 일하며 비틀스의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팝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수많은 명사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이 같은 경험은 고스란히 내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줬다”고 회상했다.

한대수의 사진작가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뉴욕의 ‘컬러 하우스’ ‘크로마 카피’ ‘스피드 그래픽스’ 등의 스튜디오에서 광고사진작가로 근무했다. 한때 그는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부 기자로 일하며 (주)헤럴드와도 밀접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건축사진가 너대니얼 리버만(Nathaniel Lieberman)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베스트셀러 건축사진집 ‘맨해튼 라이트스케이프(Manhattan Lightscape)’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대수는 “예전에는 사진을 배우려면 렌즈와 카메라의 특성, 현상과 인화, 모델을 다루는 방법 등 다양한 것을 익혀야 했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필름회사 코닥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지난 2012년 파산 신청을 했다. 지금 이 나이에 나는 젊은이들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마돈나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무리 많은 영화에 출연했어도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나 역시 뮤지션과 사진작가 둘 다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느끼고 바라봐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한대수는 이번 사진전에 초심을 담은 15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그중 7점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한대수는 뉴욕으로 건너가 암실에서 직접 사진을 인화했다. 그는 오랜만에 뉴욕에서 맡는 현상액과 인화액의 냄새가 반가웠다며 사진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설했다.

한대수는 “사진은 순간이다. 지지고 볶고 찐빵을 만들든 말든 사진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며 “1948년 영도다리, 2014년도 인사동 사진 한 장은 역사를 말해준다. 이는 어느 미술과 조각과 문학이 할 수 없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사진은 미술을 모방하면 안 된다. 사진은 사진, 미술은 미술”이라며 “순간의 표정에는 그 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나는 이스탄불의 어린 소녀의 눈물, 모래내 시장의 할머니 손의 주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대수는 지난해 핵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담은 싱글 ‘누크 미 베이비(Nuke Me Bady)’를 발표하고 최근 김광석 추모 앨범에 참여해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는 등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한대수는 “이제 주변에 내가 앨범을 만들겠다면 발 벗고 나서줄 실력파 음악인들이 너무 많아 고민이 즐겁다”며 “머지않은 시기에 새로운 정규 앨범으로 돌아올 생각”이라고 전했다.

 

 

 

금정총림 범어사가 사진명상가인 관조 스님의 20만장에 달하는 유작필름을 경내 성보박물관에 관리 보관한다.

범어사(주지 수불 스님)와 관조스님문도회(대표 승원 스님)는 4월10일 범어사 주지실에서 ‘관조스님 유작필름 관리 및 사용에 관한 협약식’을 가졌다. 협약을 통해 범어사와 문도회 측은 공동의 협의 아래 관조 스님의 사진작품 전체에 대한 관리와 활용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기로 했다. 문도회 측은 지난해 1차분 파일 100개를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입고했으며 협약식을 통해 관조 스님의 유작필름 19만 7846장과 이를 247개의 파일로 정리한 목록집 전체를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입고했다.

10일, 문도회와 관리․사용 협약
범어사성보박물관 수장고 보관
문도회 “범어사는 스님 의지처”

관조스님 문도회 대표 승원 스님은 “스님의 입적 후 작품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과정만 6년이 걸렸는데 이제야 은사 스님께서 항상 정신적 의지처로 삼으셨던 범어사로 모든 작품 파일을 이관하게 됐다”며 “앞으로 은사 스님의 작품은 범어사와 함께 전시, 출판 등 공동사업을 통해 한국불교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협약의 의미를 설명했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도 “엊그제 스님을 보내드리는 영결식을 치른 것 같은데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정성을 다해 스님의 작품을 분류하고 정리해 온 문도회의 효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다시 범어사에 기증한다는 사실에 부담도 큰 것이 사실이지만 스님의 작품을 통해 불교미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한편 관조스님문도회는 오는 9월24~30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2층에서 ‘관조스님 석불 사진전’을 개최한다. 또 석불 사진집 출판과 전자책의 한글판 및 영문판 제작 등도 추진한다.

법보신문 /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서울=뉴시스】박영주 기자

 

 

 

김주희(33) SBS 아나운서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7전시실에서 26일부터 4월3일까지 사진전 ‘인 드림스-리멤버’(In Dreams-remember)를 개최한다.
김주희는 지난해 12월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첫 전시회, 올해 1월부터는 한 달간 서울 아트클럽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를 여행하며 만난 잠자는 고양이, 노란 골목 같은 일상의 풍경과 아빠 품에 안긴 아이,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쉬고 있는 여인 등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 42점을 선보인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일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김 아나운서의 사진이 보는 이들에게 따스한 감성을 전달해 줄 수 있어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주희는 “대학(연세대 영어영문) 시절부터 문학적 감성을 키워오던 곳에서 전시회를 하게 돼 영광이며, 많은 분이 바쁜 생활에서 잊고 지낸 작지만 소중한 시선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gogogirl@newsis.com


(30)부산 구포장


 

부산 최대 5일장, ‘구포국수’ ·가축시장 유명
만세운동·한국전쟁 추억 ‘오롯’

 





장터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봄꽃이 아니라 봄나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작디작은 새싹으로 비집고 나와 찬바람을 견뎌낸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를 비롯한 온갖 봄나물이 난장에서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선산을 가꾸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는 박기성 할아버지(76)는 장에 나와 이것저것 파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기 사는 재미 아이가. 장에 나오마 살맛이 난다카이.” 박씨 할아버지는 “자연이 보물창고”라며 손수 캔 칡 한쪽을 내준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오면 매운맛이 나는 갖가지 나물을 희고 검고 노랗고 붉고 파란 다섯 가지 색으로 맞춰 오신채(五辛菜·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생채 요리)를 해 먹었다고 한다. 봄을 맞은 구포장은 그 오신채를 통째로 차려놓은 듯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봄나물 냄새가 가득하다.

 1919년 3월2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포장(부산 북구 구포동)은 1972년부터 상설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오일장의 명성이 더 높아 3일과 8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계절 따라 나오는 온갖 농수산물과 이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다.

 장에 들어서면 가축 골목을 시작으로 채소·과일 골목, 수산물 골목, 의류 골목, 약재 골목, 먹거리 골목이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낀 골목에는 농산물 보따리를 갖고 나온 할머니들이 난전을 펼쳐놓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요지에 자리해 예부터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지금도 장날이면 김해·양산·밀양·창원뿐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에서도 숱한 장돌뱅이들이 몰려온다.

 구포장은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장이 처음 들어선 17세기에는 곡물이나 가축, 소금, 수공업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장터에서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구포국수’가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그 시절 추억이 가미된 맛이라고 한다. 하기야 어떤 이는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택가 골목길에 선 난전으로 들어서자 양산시 물금읍에서 온 최해식 할아버지(84)가 직접 농사지은 연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거 무마(먹으면) 치매도 안 걸리고 머리도 조아집니더. 연근 좀 사 가이소.”

최씨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연근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젊었을 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최씨 할아버지. 지금은 천원짜리 하나를 팔더라도 진심을 다한다며, 그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장사하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연근을 사 가는 강씨 할머니(76) 봉지에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덤이라며 넣어준다. 요즘 제철인 연근은 비타민C와 비타민B가 많아 피부미용과 해독에 좋단다.

 구포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장이다. 매년 10월 말이면 ‘정이 있는 구포시장 장터축제’도 열린다. 주택가 골목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 앞은 봄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와 더불어 따뜻한 정이 장터에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가축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놓여있는 것도 더러 볼 수 있다. 연신 죽어가는 가축의 속내야 어찌 알까마는 삶의 무상이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한 풍경이다.

 42년째 떡을 팔고 있는 주씨 할머니(81) 쟁반 위에는 ‘천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떡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다. 떡을 참 잘 썬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석봉 엄마가 살아 와도 내보다는 못할 끼다”라며 옛날에 장바닥에서 불렀던 노래를 들려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력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장 외에 부산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오시게장·하단장·월내장(2·7일), 사덕장·녹산장(1·6일), 덕두장·좌천장(4·9일), 송정장(5·10일) 등이 있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사진, 회화, 조각, 퍼포먼스, 비디오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뒤섞으며 작업하는 스페인 작가 프란체스카 마티(Francesca Marti)의 국내 첫 개인전이 개막됐다.

서울 소월로 표갤러리 서울(대표 표미선)은 ‘The third sense:제 3의 감각’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14일 마티의 서울 전시의 막을 올렸다. 이번 작품전에는 마타가 지난 14년간 작업해온 Fly, Soul, Dreamers, Tears and Scream, Nomad 시리즈가 최초로 공개된다.

마타는 강렬한 색채및 명도 대비를 꾀한 도발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작업으로 유럽및 미국에서 입지를 굳혀가는 작가. 미국,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이집트 등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MoMA)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4월 4일까지.

 


 
프란체스카 마티 Sin II, Photograph, 170x125cm, 2000, edition 1/3 [사진제공=표갤러리] 


프란체스카 마티 White Shadow on Blue,Diptychwith video projection,two paintings on canvas,

 200x125 cm(each), projector, 2006 [사진제공=표갤러리]


 프란체스카 마티 Darkness I, Photograph and paintoncanvas,100x100cm,2008 [사진제공=표갤러리]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한 여성과 키스를 나누는 해병의 모습.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에 실렸던 ‘종전 기념 키스’라는 이름의 유명한 사진이다.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앨프리드 아이젠슈타트가 1945년 8월14일 촬영한 이 사진은 2차 세계대전 종전의 기쁨과 전후의 희망을 담은 상징처럼 여겨졌다. 사진 속 주인공, 해군 참전병사 글렌 맥더피(사진)가 지난 9일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가족들이 15일(현지시간) 밝혔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캐너폴리스 태생인 맥더피는 2차 대전에 징집됐다가 1945년 종전과 함께 제대했다. 종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맥더피는 1960년부터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우편배달부와 아마추어 야구선수로 일하며 평범한 일생을 살아왔다.

그가 갑자기 세상의 관심 속에 등장한 것은 2007년이었다. ‘종전 기념 키스’ 사진 속의 남성이 그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사진을 찍은 아이젠슈타트는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사진 속 남성의 이름 등을 공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신원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맥더피는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휴스턴의 법정 검시의인 로이스 깁슨이 아이젠슈타트가 남긴 100장 넘는 사진을 분석한 뒤 사진 속 인물임을 확인했다.

이 일로 맥더피는 뒤늦게 다시 유명세를 탔다. 맥더피는 2007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타임스스퀘어로 뛰어나갔다”고 회고했다.

미국 해군 병사 글렌 맥더피가 1945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한 간호사에게 키스하고 있다.

‘종전 기념 키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은 당시 시사잡지 ‘라이프’에 실려 유명해졌다.



사진 속 키스 상대인 간호사 에디스 셰인과는 그날 우연히 만난 사이였다. 맥더피는 “거리에서 눈빛이 마주치자 간호사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고, 기쁜 마음에 키스를 했다”고 털어놨다. 맥더피의 가족들은 “고인은 뒤늦게나마 자신이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걸 인정받자 몹시 즐거워했다”고 전했다.

맥더피는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국립묘지에 매장된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장터순례(29)전북 익산 북부장


“황토밭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전국 두번째로 큰 재래시장
전주·김제·군산·완주에 둘러싸여
교통 편리하고
채소·수산물 가격 싸
언제나 문전성시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선다.

▲익산 북부장은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이다. 이웃한 전주·김제·군산·완주 등에서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배 속에 들어간 건 절대 돈 받지 않는다”는 마이크 소리를 따라 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자 파는 강성구씨(30)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6년째 장사한다는 강씨는 배 속에 들어간 것은 무조건 공짜이니 많이 먹으란다.

 젊은 장꾼의 너스레에 끌려 맛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밑지지 않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할매들 장 한 바퀴 돌고 다시 찾아오는 것 보믄 아직은 정이 살아 있당께요” 한다. 과자 한 뭉치 산 허씨 할머니(76)도 한마디 한다. “얻어먹기만 하고 안 사면 쓰간디. 정은 주고받는 것이여.”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서 있다. 할머니들 앞에는 찹쌀·콩·고구마·땅콩·냉이와 말린 나물 등이 펼쳐져 있어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 마당 한 귀퉁이가 이사 온 것 같다.

 고구마와 말린 나물을 펼쳐 놓은 소씨 할머니(82)는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왔다. 할머니는 고구마 자랑이 한창이다.

 “황토밭에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땅이 너무 질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서 캔 것들이여. 이 고구마 맛 한번 보면 내 말 알 것이구만.”

 할머니 앞에는 고구마들이 등을 포개고 나란히 누워 햇빛과 노닐고 있다.

 1975년에 개설된 익산 북부장(익산시 남중동)은 전국에서 경기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으로, 끝자리가 4·9인 날이면 오일장이 선다. 전주·김제·군산·완주가 둘러싼 지역의 중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들 지역에선 어디서든 20~30분이면 올 수 있다.

 북부장은 익산 황토밭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 군산에서 나오는 각종 수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전국에서 고구마가 세번째로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자색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자주빛 고운님>은 이 지역에서 나는 천연 생막걸리다. 자수정처럼 고운 보석 빛깔을 품고 있어 익산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는 중이다.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품은 천혜의 곡창지대로, 백제 시대에는 왕궁이 있던 ‘서동요의 고장’이다. 또 이웃한 군산·강경과 함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화강암의 원산지로 오래전부터 석공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같은 석조 문화재들이 많아 근대 문명의 박물관으로 불리지만, 일제의 아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익산은 또한 102년의 철도 역사가 있는 교통 도시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보석박물관인 ‘주얼팰리스’도 있다. 주얼팰리스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유사한 모양으로 설계되었는데, 이곳에선 ‘나만의 보석 만들기 체험’도 가능해 목걸이나 휴대전화 고리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콩과 마늘을 갖고 나왔다는 구씨 할머니(85)는 오랜만에 나와 시세를 잘 모르겠다며 말을 이어간다.

 “오늘 사람 구경 많이 했응께 남는 장사 했제. 옛날에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 안 지응께 필요한 것끼리 모다 바꾸고 그랬어. ‘아짐, 오늘은 뭐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가 생각나서 한번씩 나오믄 사람 말을 안 믿고 ‘중국 것 아니냐?’ ‘농사진 것 맞냐?’고 자꾸 물어싸….”

 큰길가에서 김을 파는 염씨(46)는 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엠에프(IMF) 때 장돌뱅이 길에 들어섰다는 염씨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장바닥에서 흘려보냈다. 인근의 익산장과 군산 대야장, 완주 봉동장·삼례장을 도는데 사철 파는 물건이 다르다고 한다. “장터 흐름을 읽을 줄 알면 장삿길도 편하다”는 염씨는 장터에서 세상살이를 배워간다.

 익산에서 열리는 장은 이 밖에도 천년고도 마한백제가 살아 있는 금마장(2·7일), 함열장(2·7일), 여산장(1·6일), 조선 시대부터 장이 열렸다는 황등장(5·10일)이 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7년간의 옥살이로 고초를 겪는 등 민주 투사로서 활동해온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다른 길>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온갖 외지를 돌며 찍어온 7만 여 컷 중 엄선된 120여 장의 사진들이 선보인다. 사진은 시인의 따듯한 시선으로 흑백 필름 카메라에 포착된 아시아 변방의 전경들은 그의 고뇌와 환희의 감정들을 여과 없이 투사한다. 그야말로 박노해 시인의 정수를 한 자리에 압축한 전시다.

흑백 필름이 담긴 낡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14년간 외지를 방랑한 시인의 진정성은 사진과 하나의 소실점을 이루며 더욱 깊은 울림을 관람객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우리네 잃어버린 삶을 연상시키며 시간의 흔적을 반추하는 빛바랜 사진은 관객의 발길을 처연히 붙잡는다. 농담이 또렷한 시인의 흑백사진은 고요한 풍경 속에 자리한 인물들에게 더욱 포커스를 부각하며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짙게 건넨다.


 박노해. 노래하는 다리_Lake Inle, Nyaung Shwe, Burma. 2011 ⓒ박노해


하지만 한편에선 시인의 사진이 글로칼리제이션(Glocalization)의 시대적 트렌드에 영합하는 프레임적 시각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보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허나 그의 작품들은 우리 삶에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함축한다. 그곳엔 하루하루 정신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삶에 반성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기제이자,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고, 씨 뿌려 거둔 밀을 빻고, 물 항아리를 이고 집으로 향하는 정서가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다.



박노해. 인디고 블루 하우스_Gafa village, Rajasthan, India. 2013 ⓒ박노해


일례로 시인이 찍은 인레호수 마을과 고산족 마을을 이어주는 <노래하는 다리>는 우기마다 무너지지만 매년 소수민족들의 화합으로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 또한 이렇게 서로의 불신된 마음을 이어주는 ‘노래하는 다리’가 아닐까.

박노해의 <다른 길> 사진전은 시인의 이러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오는 3월 3일까지.

경향아티클 문정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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