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하는 사람으로 이명동선생 모르면 간첩 소리 듣는다.
한국사진계에 끼친 영향력도 워낙 크지만 보도사진가로서의 기자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4,19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에서 찍은 사진과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서민호선생을 찍기 위해 위장한 사건 등으로 사진계에 전설을 일구어 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올해로 95세를 맞은 원로 사진가다.
어린 시절, 소 판돈 들고 나와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종군기자로 시작된 사진인생은 육군본부에서 주최한 전투사진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막을 열었고,

화랑무공훈장을 무려 3개나 받았다.
동아일보 인촌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을 지켜, 갑자기 조문 온 이승만대통령을 찍어 특종 하였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여지껏 사진기자 출신으로 부국장 반열에 오른 사람도 없거니와, 

일하는 동안 몸 아끼지 않는 그만의 기지로 많은 특종을 만들어 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시작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살롱사진, 사진단체 창설 등 사진사에 남을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생께서 주도하셨다. 대학에서 보도사진을 강의해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선생의 날카로운 사진비평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계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한국화보'와 '서울화보'를 발간하여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렸으며, 그 이후 '사진예술'을 창간하여 낙후한 국내사진잡지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동안 사진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현대사진문화상, 제비꽃 특별사진가상, 옥관문화훈장, 건국포장, 언론부문의 인촌상 등을 받아 온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의 전설이자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지난 2월 24일 아침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지도 않은 이명동선생의 전화를 받아 어리둥절했는데,

자택이 있는 약수동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는 말씀이셨다.

선생님을 만나뵙고 갈비탕과 차를 들며 즐거운시간을 가졌지만,

계산을 먼저 해 민망하게 만들었다. 
사시는 모습을 기록하려 찾은 자택에는 사모님 혼자 계셨는데,
거동이 불편한 사모님을 위해 직접 밥을 지어 차려주고 나오셨다는 것이다.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시장보아 음식 만들고, 간병까지 한다니 기가 막혔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많은 공적과 화려한 명성도 세월 앞에는 다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좁은 방에서 장모님 간병하는 아내가 안타까워 투정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한 수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갑자기 전화주신 것도 내 처지를 아셨던 모양인데, 이것이 말없는 교육이었다.
떠나올 때, 장모님 맛있는 음식 사드리라며 주머니에 강제로 찔러 넣어 준,
꼬기 꼬기 접은 오만원권 지폐 두 장이 결국 나를 울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