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자칭 ‘또라이’ 산악인 사진쟁이 안승일(68)은 (‘만인보’가 소개한 적이 있는) ‘또라이’ 산악인 글쟁이 박인식이 백두산 가자고 꼬드기는 통에 인천항에서 배를 탔다. 북한땅 삼지연으로 해서 장군봉에 가야지, 그까짓 중국 쪽으로 가는 게 무슨 백두산이냐고 투덜투덜대면서 난생처음으로 천문봉에 올라갔다.

그랬는데, 백두산과 천지를 보는 순간 확 밀려드는 경외감으로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말았단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이 산’에서만 ‘저 산’을 제대로 보는 이치로, 한반도에서 보면 중국 장백산이고 중국 쪽에서 찍어야만 진정한 백두산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거다. 안승일은 이때부터 꼬박 20년 세월을 백두산에만 매달려서, 백두산 사진만 줄기차게 박았다.

아예 백두산 하늘 아래 첫동네 이도백하에 작업실을 차리고 1년 중 8개월 이상은 백두산을 헤매고 다녔다. 간첩질로 오해한 ‘변방참’(국경수비대 초소부대)에 체포된 일도 여러 번이다. 날씨도 좋았는데 그만큼 봐줬으면 얼른 찍고 갈 일이지, 왜 그리 오랫동안 국경을 어슬렁대느냐는 거였다. 나중에는 그 군인들과 도수 높은 중국술을 나눠마시며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백운봉에 두어달 텐트 치고 틀어박히고, 용문봉 무단 입산자 통제소에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석 달씩 얹혀 살기도 했다. 겨울철은 수은주가 영하 30~40도까지 꼬나박는 천지 주변 눈구덩이에서 “곰처럼” 동면했다. 눈보라 땜에 밖에 못 나가면 천막집에서 김치전 부치고, 눈 녹인 물로 커피 타 마시고, 멸치 육수 내서 칼국수도 해먹었다. 일출 하나 건지려고 서백두 청석봉 산마루에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앉은 게 “100번에서 1000번 사이”란다. 한번은 30m 높이의 산불감시용 철탑에 올라갔다가 사진기를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내가 안 떨어졌으니 됐지 뭐.” 헬기를 빌려 타고 항공사진을 찍는 호사도 누렸다. 그게 다 지금은 10년지기, 20년지기가 된 한족 동무들 덕이란다.

 

그런 안승일 사진에는 백두산 장기체류자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백두산은 기상변화가 워낙 심해 하늘이 허락하는 ‘진경의 순간’은 눈깜짝할 새 휙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에 딱 거기에 있기’가 바로 그의 사진 찍는 방법이다. 테크닉은 두 번째다. 그는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이 사진을 정말 찍은 건가. 어릴 적부터 왼쪽 다리를 살짝살짝 저는 안승일은 일찌감치 산에다 마음을 뺏겼다. 중학교 때는 사진에 취미 붙여 삼각산을 오르내렸다. 건국대 원예과 2학년 중퇴, 서라벌예대 사진과도 잠깐 다니다 말았다. 대신 틈만 나면 사진기와 등산장비를 걸머지고 입산했다.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던 시절이었으니 가는 데마다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끌려갔다.

결혼을 하고는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내고 광고사진을 찍어 돈을 아주 잘 벌었다. 어느 날 500만원이 든 묵직한 돈배낭을 메고 아버지께 갔다. 그때 경기 시흥 달동네, 20여㎡(6평)짜리 아버지 집이 100만원쯤 했다. 평생 철도원으로 산 아버지가 호통쳤다. “야 이놈아. 집을 늘릴 게 아니라 네 사진집을 만들어야지.” 첫번째 사진집 <山>이 그렇게 나왔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로는 산 밑에 방을 얻어 몇 년씩 작업하는 식으로 <삼각산> <한라산> <굴피집>을 냈다.

 

 

안승일은 체크무늬 남방셔츠에다 후줄근한 점퍼만 고집한다. 어머니 장례식도 검정 점퍼 하나 걸치고 치렀다. 1998년 부산에서 북한의 김용남과 함께 백두산 2인전을 열었다. 마침 부산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이 전시장에 왔는데, 양복 입기 싫어서 서울로 내뺐단다. 평생에 딱 한 번 소위 정장차림이란 걸 해봤다. 2001년 평양에서 남북공동사진전을 열었을 때다. “김정일 형님 오신대서 악수하고 사인도 받으려고” 넥타이 매고 기다렸다. 딱 30분 동안. 전시회에 김정일은 안 왔다. 그의 산사진 열정과 함께 산악계와 사진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다.

안승일이 백두산에 바친 건 세월과 열정만이 아니다. 젊어서 광고사진 찍어 벌어둔 부동산까지 거의 모두 털어넣었다. 아직도 옛날 사진기에 필름 넣어 찍는 안승일 사진은 무쇠솥에 장작불로 갓 지은 밥과 같다고 박인식이 말해줬다. 가령 여느 사람이 때깔 고운 조모락지 승용차라면 그는 커다란 바윗돌을 한 차 가득 싣고 며칠이고 달릴 수 있는 대형트럭이라고도 했다.

 





안승일은 “감히 백두산의 영혼을 찍고자 했다. 더불어 백두산에 숨쉬는 민족혼도 담으려 했다”고 힘차게 말한다. 이번에 그 대단한 사진들 수만컷 중에서 추리고 추려낸 60점을 서울 인사동 한복판 아라아트센터에 내걸었다. 지난 20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예정으로 열고 있는 전시회 제목이 ‘불멸 또는 황홀’이다. 혼자서 3300여㎡(1000평)나 되는 5개층 9개 전시실을 모두 채웠다. 초대형 사진들이 많아서 안승일의 평생 산동무인 고령산악회 늙수그레한 회원들이 노련한 암벽등반 솜씨로 천장에 자일을 걸고 매달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덕분에 산행 때 걷는 위치에 따라 조망이 달라지듯, 중정이 뚫린 여러층을 오르내리며 아주 특별한 백두산을 만날 수 있다. 산에 간다고 누구나 다 산을 보는 게 아니듯, 이토록 다각적이고 다양한 입체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백두산 사진은 여태껏 못 봤다. 아무리 백두산에 가봤자 이런 풍경 못 본다.



안승일은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인 백두산에서 마늘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곰에 더 가까워졌다(그의 별명이 백두산 곰이다). 그런 애니미즘 신앙을 가졌던 고대 사람 같달까. 전시회 개막식 날, 원래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백두’의 안승일이 사람들 앞에서 “이제 더 이상의 백두산 사진은 없다. 통일이 될 때까지 더는 백두산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재주가 아무리 좋단들 어느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해? 산에 구덩이 파고 먹고 자면서 사진 찍을, 그런 놈 없어!”

안승일은 백두산 사진작업이 통일을 위한, 통일 후의 민족화합에 초점을 두었다고 했다.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찍은 백두산 사진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말해준다. 그러니 ‘통일대박’을 말씀하는 이, 거기 가서, 백두산을 봐야 한다. 안승일은 이번 전시가 끝나면 처음 산사진을 시작했던 삼각산을 찍겠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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