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5일 정영신씨를 통해 사진가 오현경씨로 부터 오찬 초대를 받았다.
지난 번에 전시한 ‘그림자를 지우는 비’ 사진전에 참석해 준 인사라는데,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십 수년을 사진 찍어 올리며 전시리뷰를 써 왔으나 이런 인사받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카메라에 이상이 생겨 사진도 찍지 못하고 몇 줄의 전시소식만 올린터라, 송구스러웠다.






인사동에서 오현경씨를 만나 ‘사동집’에 들렸더니, 주인 송점순씨가 죽은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전골에다 귤전까지 잔뜩 시켰는데, 써비스 음식까지 갖다주어 그 날 저녁식사는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낮 술은 가급적 피하지만, 맹숭맹숭하게 밥만 먹을 수 없어 막걸리도 한 병 시켰다.






오현경씨는 지나치다 더러 만났지만, 식사를 함께하기는 처음이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매혹적인데, 인사성까지 밝은 줄은 미처 몰랐다.

마주 앉아 얼굴도 못 들고, 정영신씨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음식만 허겁지겁 먹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비오는 풍경을 열심히 찍었다는 고백에, 그 사진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전시할 생각은 없었으나, 주변에서 부추기는데다 초대전 기회가 생겨 했다는 사정 이야기도 했다.






즐겁게 식사 한 후,  인사동 거리를 스냅하며 걷다보니 너무 많이 가버렸다.
남인사마당에서 헤어져 되돌아왔는데, '툇마루'에서 저녁 모임이 있어 집에 갈 수도 없었다.





남는 시간은 '정독도서관'에서 정선 가느라 못한 일을 하려고 노트북까지 챙겨 왔으나,

막걸리 한 병에 곤죽이 되어 만사가 귀찮아졌다. 이젠 아무래도 술과의 인연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드러누워 쉬려고 '정독도서관' 대신 '백상사우나'로 간 것이다.

모처럼 뜨거운 물에 들어 앉아 자성의 시간을 가졌는데, 오현경씨의 따뜻한 배려가 일깨운 바가 컸다.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사방 팔방 쫓아 다니며 나부댄 것 같았다.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지만, 이제 전시장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글 올리는 짓은 그만두어야 겠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무슨 사명감처럼 일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시를 하면 보도 자료를 만들어 언론사에 돌리지만, 요즘은 보도 자료도 만들지 않았다.

자료가 없어 전시된 작품을 찍어야 했고, 유리에 반사되면 도록을 사서 스캔 받아 올리기도 했다.

아마 전시 홍보를 하지 않겠다는 심사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돈 들여 전시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언론사에 전시리뷰를 투고해 신문에 게재하는 열성까지 보였으나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신문기자가 올리는 기사야 월급 받고 하는 일이라 그냥 지나칠지 모르나, 난  다르지 않은가?

작가를 배려해 나쁜 면은 감추고 좋은 면만 내 세우는 쪽팔리는 리뷰라 때로는 얼굴이 간지러울 때도 많았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고맙다는 댓글 한 줄이 그렇게 어려울까?

자기가 잘 나거나 전시가 좋아 올린다고 생각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래도 물러 날 때가 훨씬 지난 꼰대가 아직 꿈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쓸데없는 일에 개고생하며 열 받는지, 이제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작가의 초대가 없는 전시장 개막식은 일체 가지 않기로 했다.
젊은 사람 모임에 늙은이가 끼이면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리고 평소 신세졌거나 가까운 분의 부탁이면 모르겠으나, 전시장 사진을 찍거나 글 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남을 배려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이제 죽을 때가 되었는지, 사람 좋아하던 내가 사람이 점점 무서워진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 더 좋다.



사진, 글 / 조문호












열흘 전 쯤, 인천 무의도를 예술 섬으로 만들려는 정중근씨와 소리꾼 조수빈씨를 인사동에서 만났다.

화가 이봉기씨 전시 뒤풀이가 열리는 '장군보쌈'에 있었는데, 그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모처럼 인사동 나온 김에 얼굴 한 번 보려한다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해 가기 전에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망년회를 한 번 열자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쌍수들고 맛 장구쳤겠지만, 요즘은 동자동 쪽방에 빠져있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들 한 번 만나고도 싶은데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박근혜 하야를 위한 성토대회라도 열고 싶었다.

그동안 쌓인 분노를 망년회 술잔에 풀자는 생각에 어렵사리 받아들인 것이다.


참가비는 만원으로 못 박았으나, 초과되는 비용은 정중근씨를 비롯한 독지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 날 소리꾼 조수빈씨의 소리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즉흥 퍼포먼서도 있으니,

일정을 참고하시어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 :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오후7시
장소 : 인사동 ‘사동면옥’ 2층

참가 자격: 인사동을 사랑하는 국민이면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 식사준비 관계로 인원 수 파악이 필요하오니, 전화나 메세지 또는 댓글에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화 / 조문호 010-9436-6144

         정영신 010-2955-8926










묵향 그윽한 인사동이 그립다.
예스러운 멋을 간직했던 인사동이 바람난 여자처럼 화냥기를 풀풀 풍긴다.

인사동만의 고풍스러움이나 전통성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이제 먹거리마저 따로 놀고 있다.

가게서 파는 우리 물건까지 중국산이라니, 차이나타운이나 다를 바 없다.

인사동을 아끼고 사랑했던 분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 여기저기 뿌리고 다닌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

“문디 자슥, 문디 자슥”을 연발하던 ‘귀천’의 천상병시인, 민화를 한국 주요 전통문화로 드러낸 조자용 선생,

백자와 전통문화를 품위 있게 누린 ‘아자방’ 김상옥시인,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등 많은 분들이 그리워진다.

아직까지는 송상욱 시인 방 하나가 인사동에 꿀단지처럼 박혀 있으나, 그마저 머지않을 것 같다.

인사동의 변절을 안타까워하는 분이야 많지만, 인사동에 유령처럼 떠돌며, 마음 바뀐 여인네 치맛자락 잡듯

안절 부절 하는 분으로는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강민 시인을 꼽을 수 있다.


바람난 여인네를 다시 돌려 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
누구를 탓하랴? 다 돈이 유죄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이율곡 집터‘에 남은 하회나무 고목을 서낭처럼 모시고,

경인미술관을 정원 삼아, 골목이라도 지켰으면 좋겠다.

그리고 골목골목의 정취어린 주청에서 반가운 님 만나, 옛 추억이라도 되세기고 싶다.

“인사동아~”
미워도 다시 한 번 불러본다. 사랑했으니까...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블랙리스트덕에 술 마신 지난 18일 찍은 거리풍경이다.

인사동에 낯선 빌딩도 들어섰더라.

이사 온지 얼마 안 된 서울문화투데이사무실에 들려 이은영씨와 임동현기자도 만났고, ’사동집에 들려 송점순여사도 만났다.































해방71주년을 맞은 지난15일, 유진규씨 퍼포먼스 보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갔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하는 행위 예술가들의 모습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마지막으로 사형장에 몰려가 벌인 난장의 한마당에서 통쾌한 감격의 순간도 맛보았다.

행사가 끝난 후, 몇몇 사람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오후6시가 되었으나, 그 때까지 “유목민‘과 ’푸른별 이야기‘는 문이 잠겨있었다.

하는 수 없이 피맛골로 옮겼는데,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남인사마당에서는 궁중무용 ’여민자락 처용지무‘ 공연이 막 끝나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기념사진 한 장으로 갈음해야 했다.

장경호, 이명희, 손병주, 정영철, 케이필, 강경석, 문형석씨 등 여덟 명이

피맛골 ‘불타는 조개구이’ 야외 홀에 자리 잡았으나, 모두들 더위를 먹었다.

갈증을 느껴 술을 퍼 마시기 시작했으나, 술자리에 가난한 사람뿐이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아니라 다를까, 무일푼이 세 사람이라 가난한 연극배우 이명희가 그 몫을 감당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자리는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았다.
이젠 술자리가 힘들기도 하지만, 돈 없이는 술자리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동집’들려 송점순 여사와 시름 달랬다.


사진,글 / 조문호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갔다.
지난 14일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리는 마동욱씨 사진전도 도와야 하고,

인사동 사진축제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나, 장모님 병원 모시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오후 6시 무렵의 인사동 거리는 여느 때와 달리 한산하였는데,
길거리에서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를 만나기도 했다.






‘토포하우스’에 들렸더니 이미 DP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작가인 마동욱씨를 비롯하여 엄상빈, 이규상, 박진화씨 등 몇몇 분이 계셨다.
작품들이 크고 많아 다소 답답한 느낌은 들었으나, 잘 정리되어 있었다.
좀 있으니, ‘한겨레’ 노형석기자도 들렸다.









그러나 서둘러 모임이 있는 ‘허리우드’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그 자리에 엄상빈, 이규상씨를 비롯해, 이규철, 이한구, 강제훈씨도 나왔다.
사진전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이 나왔고, 일할 사람들도 추천했다.
구체적인 기획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큰 틀만 짜고 헤어졌다.







엄상빈, 이규상, 강제훈씨와 마동욱씨가 있는 '토포하우스'로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 있던 노형석씨와 함께 ‘사동집’에서 만두전골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신방과에 제학 중인 마동욱씨 아들 마일훈군도 함께 했다.

마동욱씨의 파라만장한 삶과 사진이야기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문 닫으려 기다리는 주인장 송점순씨가 안 서러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던 노형석씨와 ‘유목민’에도 잠시 들렸다.
그 곳에서 김명성, 전활철씨와 어울려 소주 한 잔 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나, 막차시간이 임박해 더 머물 수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내일 인사동 ‘토포하우스’에 열리는 마동욱씨 전시개막식에서 한 잔 합시다.


마동욱의 ‘고향의 사계’ 사진전
장소 : 인사동 ‘토포하우스’
일시 : 2016년 6월15일부터 21일까지
초대일시 6월15일 오후5시





마눌님 책 심부름으로 '정독도서관'에 갔다.

무식한 나는 책 볼일이 별 없지만, 아내 때문에 가끔 들린다.

지난 11일 오후 여섯시의 도서관은 벚꽃에 뒤 덥혀 있었다.

화려한 꽃 천지가, 지는 햇살에 숨죽이고 있더라.

그렇게 놀다, 실없이들 가겠지!’

인사동의 봄은 오는 듯 가는 듯, 맥아리가 없다.

 

인사동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을 거리에서 만났다.

왜 그리 안 벼~ 심심해 미치것어! 봄 가기 전에 한판 놀아야제

퇴근 하시는 걸음에, 날 보고 반색하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을 못 만나, 점심 드시며 툇마루서 막걸리 한 잔

걸치는 게, 유일한 위안 주란다. 다들 힘들어하는 김명성을 그리워했다.

그랬다. 그는 인사동 유목민에게 유일한 위안이었고, 한 가닥 희망이었다.

 

오늘 끝날 내숭작가전 본다는 아내 연락에, 그 앞을 서성거렸다.

얼마나 짐이 많은지, 차가 여러 대나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동에 돈을 뿌리고 가는 구나!'.  푸념에 전시장 나온 아내가 답했다.

돈이란 저렇게 쓰는 거야.부러운 듯, 들렸다.

간이 적어 도적질도 못하고, 아둔해 사기도 못 치니,

내 죽는 날까지, 저런 호강은 못 시켜줄 것 같았다.

 

모처럼 인사동서 만났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잖다.

아내 좋아하는 사동집만두전골 먹으러 갔다.

주인장 송점순 여사가 반갑다며 굴전까지 서비스하는데,

카메라 전지가 다 돼, 인증샷도 못 찍었네.

배 터지도록 먹고 남아, 도시락까지 싸야 했다.

이 정도 호사면, 인사동 봄도 결코 서럽지는 않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 6시 30분, 사동집에서 조문호사진집 ‘청량리588’ 출판기념회가 조촐하게 열렸다.

최혁배변호사,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만화가 박기정, 박재동선생, 가수 최백호, 시인 김신용,

조준영, 김명성씨, 서양화가 신학철, 장경호, 서길헌씨, 행위예술가 임경숙씨,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부부,

사진가 김보섭, 곽명우, 고 헌, 정철균씨, 홍성식, 임경일, 강선화, 공윤희씨 등 50여명이 모였다.

연이은 전시라 메시지 외에는 별도의 통지를 하지 않아 50여명 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일찍부터 술이 취해 모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출판기념회에 책도 꺼내놓지 않아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술판기념회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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