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무렵, 인사동 ‘나무화랑‘의 박근혜를 끌어 내리려는 ‘병신무란 하야제“ 전에 들렸다.

요즘 하는 일 없이 바빠, 출품작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개막식에 잠시 들린 것이다.

이미 전시장 바닥은 풍성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야제’ 전시를 기획한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인철, 박불똥, 박은태, 김사빈,

사진가 박영환, 시인 정동용, 강고운, 성효숙씨 등 여러명이 모여 박근혜를 술안주로 씹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우두머리급인 신학철선생 작품도 걸려 있었다,

몸이 편치 않은데도 빠지지 않고 출품해 주어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입구에 걸린 장경호씨 작품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허수아비 박근혜 얼굴에다 무술처럼 침을 꽂은 작품인데,

저주의 힘이 섬뜩했다. 찢어 진 종량제쓰레기 봉투 틈으로 박근혜가 보이는 김진하씨 작품도 흥미로웠다.

국민들이 얼마나 원하는지, 박근혜 하야를 발표한 호외 신문까지 등장했다.

이인철, 박불똥. 홍성담, 박 건, 윤 엽, 이 하, 장 백, 김이하, 정평한, 강기욱, 이종구, 정정엽, 김기호, 박영환,

권 홍, 류우종, 김종찬, 이영학, 김수연, 김 술, 이진우, 이재정, 성효숙, 박은태, 정동용, 김사빈, 박세라, 신미란,

정영신, 류성환, 이동슈씨 등 우리나라 민중미술작가들과 사진가, 시인 등 각 계의 예술가 40여명의 작가들이

여한 전시에는 다양한 풍자화가 선보였다.


그런데도 얼굴에 철판 깐 박근혜는 도무지 물러 날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의 저항이 하늘을 찌르지만,

끝까지 버텨보려는 심보다. 아예 검찰조사도 받지 않겠다는 뻔뻔스러운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야! 혼자서 꼼짝도 못하는 허수아비가 이 엄동설한에 교도소 갈 생각하니, 아찔할 것이다.

나라 망친 죄가 만 천하에 드러나 전 국민이 하야을 외치고 있으나, 반성은커녕, 빠져 나갈 구멍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광화문 텐트촌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워 잠을 못 이루는데도, 그는 “잠이 보약이다”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런 개같은 또라이가 대통령이라는 게, 정말 미칠 것만 같다.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후손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야 한다.

정치판 곳곳에 기회를 노리는 이와 비슷한 모리배들이 득실대고 있다.

다시는 이런 정치풍토가 발 붙이지 못하도록, 내일은 촛불보다 햇불 들고 거리로 나서자.

이 하야전은 박근혜가 하야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지만, '나무화랑'에서는 29일까지다.

인사동거리나 광화문광장으로 나갈 작정이라, 참여 작가들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유 무명을 가리지 않는 하야전은 아무런 제한이 없다.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내용이면 되고, 참가비는 2만원이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데, 다 같이 동참하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 뒤늦게 출품작을 급조하여 전시장에 들렸더니,

장경호, 정복수, 박홍순, 김사빈씨 등 여러명이 전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지난 1일 오후3시부터 경찰 물대포 맞아 돌아가신 백남기선생의 추모대회가 대학로에서 열렸다.

삼만여 명의 추모인파가 “우리가 백남기다”, "국가폭력-살인정권 끝내자",“책임자처벌‘을 외쳐댔다.

단상에서도 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작은 딸 백민주화의 울음섞인 호소였다.

‘물대포로 인한 사망이 분명하다면 왜 부검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인의 증거가 넘쳐나는데

어느 자식이 아버지의 시신을 또다시 수술대에 올려 정치적인 손에 훼손시키고 싶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백씨는 “저희 아버지를 두번 세번 죽이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5시부터 시민들은 대학로에서 종각 앞까지 3.5㎞를 박근혜 정부퇴진을 요구하는 팻말과 백남기 농민 영정을 들고 행진했다.

보신각 사거리부터 서대문구 경찰청 앞까지 행진하겠다고 투쟁위에서 신고했지만,

경찰은 추모대회 당일  ‘행진 구간은 주요 도로’라는 이유로 행진을 금지시켰다.

대학로를 출발한 시위대가 종각 사거리까지 왔지만, 경찰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한 것이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자리에서, 헌화하기로 한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시민들은 종각 앞에 임시분향소를 차리고 백씨의 영정사진 앞에 헌화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날 시위는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많은 시민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장경호,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이 울분을 토해 냈으나,

장순향교수는 여자의 몸으로 경찰저지선을 뚫기 위해 온 몸으로 밀어 댔다.

나 역시 죽음을 불사하고 나왔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날따라 사진 찍을 의욕조차 잃었다.

오죽하면, 기자들이 다 기록하는데 사진은 찍어 뭐하겠냐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현장에는 ‘한겨레’ 강봉규기자, ‘오마이뉴스’ 유성호기자 등 반가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 글 / 조문호










































형상미술가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오는 10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동화씨는 격정에서 경건이라는 제목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의 예술은 이성이나 사유가 아닌 본질적 감성의 촉수를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인지, 내눈에는 우리민족의 한과 분노로 읽힌 것이다.

한민족의 한과 설음을 토해내는 강렬함이 엿보였던 것이다.


, 화가 이청운, 황재형, 권순철씨처럼 거칠고 암울한 붓 길을 좋아한다.

김진열씨 작품 또한 거칠고 투박함을 좋아하지만, 그만의 또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얼핏 보면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각이 아니다.

여수에 있는연도라는 섬에서 떠내려 온 철판이나 양철 등 폐기물을 주워와

작업의 질료로 이용하는데, 소금기에 절은 철판들은 시뻘건 녹물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걸 자르고, 버려진 마분지를 여러 겹으로 덧붙여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우리 민중들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제작한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칠한 거친 작품들은

외세에 의해 찢기고 분열되어 온 우리민족의 상처 같았다.

그리고 소나무의 투박한 결에서 강인한 민족적 정체성도 느껴졌다.

또한, 우리 민초들과 함께 해 온 장승같기도 하고...


김진열씨의 생김생김은, 마치 임꺽정을 연상시킨다.

임꺽정을 보진 못했지만, 수염만 깍지 않았다면, 꼭 산적 같은 모습이다.

임꺽정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고, 나쁜 놈들을 힘들게 했다.

좌절하지 않고 분노를 삭여가며, 싸우는 정신도 같다.


작가의 조형적 감수성으로 빚어 진, 투박한 노동의 힘,

거기에서 버려진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이 꿈틀거렸다.

말보다 강한, 상징의 힘에서 우레 같은 폭발력도 엿 보인다.


작가는 우리 민중들이 섬겨왔던 거대한 나무들을 모셨다고 했다.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민중들의 분노를 다독이며 위안하는 무속적 주술 같은 것도 읽혔다.


김진열씨가 보여 준, 질기고 강인한 힘은 결국, 우리 사회와 정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진, / 조문호

 

그 날 개막식에는 김진열 내외를 비롯해, 김진하관장, 목판화가 류연복, 사진가 한선영, 화가 장경호,

고옥룡, 김영진, 이흥덕, 송 창씨 등 십 여명이 부산식당에서 유목민까지 옮겨가며 잘 마시고 놀았다.

 유목민에는 불화가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이종률, 전활철, 공윤희, 임경일, 김 구, 노광래,

김기영씨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김진하 촬영













































































 

 

 

 

 

 

 

 




지난 28일 조준영시인과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강민 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정오 무렵, ‘포도나무집’에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이행자, 조준영, 김상현씨가 나와 있었다.

뒤늦게 장경호씨도 나왔으나, 주문한 음식들이 형편없었다.
주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인사동에 갈 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다.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충 허기를 메우고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민선생의 순례 코스이기도 하지만, 그 곳은 땅콩이 무제한 제공되는데다, 한적해서 좋다.

좀 있으니, 신경림 선생도 오셨으나, 자리가 편하지 않았던지 슬그머니 나가셨다.
강민 선생도 몸이 편치 않아,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셨다.







그 때부터 김상현씨의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신곡이 많았으나, 그의 음색에 잘 맞는 곡이었다.









그 무렵, '경기도미술관장' 지낸 최효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라 근황이 궁금했는데,
어디 갔다 오는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좋은 술이 있다며 배낭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주었는데, 감로주였다.

알콜 도수가 40도나 되어 그 자리에서 비우기는 좀 그랬다.
맥주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나누었으나,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옮겼더니,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준영씨는 신학철선생 계신 서울대병원으로 떠나고,
장경호씨는 전시 중인 ‘인디프레스’로 떠나며, 나중에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마침, 다음 달 12일까지 연장 전시된 김억의 목판화전이 생각났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과 정복수화백이 있었다.
좋은 작품에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니, 어찌 술병이 고개를 쳐들지 않겠는가?
감노주를 꺼내 마셨는데, 전주가 있어 그런지 금방 올랐다.
전시장에서 내려왔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가 없었다.













저녁 약속으로 다시 나와야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야했다.
몸도 피곤하지만, 아침일찍 일터에 나가던 아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다.
집에 들어와 숨도 고르기도 전에, 빨리 나오라는 전화가 이어졌다.






‘유목민’으로 나갔더니, 일터에서 곧장 온 아내도 와 있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편집국장과 임동현기자도 와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서 올라 온 변형주씨와 조준영, 장경호, 공윤희씨 등 여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은영씨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이라며 신문을 보여 주었다.

술 취한 분들이 신문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 같으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돈 안 되는 문화예술계 소식만 다루는 유일한 신문이 아니던가?

잘 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해야지,

신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만든 신문에 시비를 건단 말인가?

난, 어렵게 운영되는 신문을 아끼는 마음에서 원고료도 없이 글을 보내주고 있다.











옆 자리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장성한 아들을 데려 왔는데, 음악을 공부한다더라.
기타를 연주하였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위키리의 ‘눈물을 감추고’란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얼마 전, 부친 상을 당한 이은영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던 노래라며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우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 ‘인사아트’의 ‘리얼리즘 복권’장에 신학철선생 만나러 갔다.
신학철선생을 만나 입구에서 담배피우다 반가운 사람들도 만났다.
‘나무화랑’의 김진하관장과 광주의 목판화가 강행복씨였다.
강행복씨가 3월 초부터 ‘나무화랑’에서 전시를 한다는데, 술 마실 건 수 하나 생겼다.

‘하늘풍경’의 정치판에서 한 잔 하고 ‘유목민’에 들렸더니,
강행복씨가 독작하고 앉았고, 뒤늦게는 유진오씨가 나타나더라.
그 날 신학철선생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하며 잘 마셨는데,
먼저 간 강행복씨가 우리 술값까지 내 버렸네.

좌우지간 강행복씨는 만나기만 하면 행복해진다니까ㅎㅎㅎ

2016. 2, 13 /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좋은 전시를 보았다.

지난 9일 ‘나무화랑’에서 유화가 장경호씨가 주동이 되어 판을 벌였더라.
원주의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정복수,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씨 등 여섯 명이 뭉쳤는데,
작가의 면면들이 모두 색깔 있는 작가라 기대한 바도 컸다.

전시장엔 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하태웅, 배성일씨도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전시장 한 가운데 서니 마치 고문실에 온 것 같았다.
전시장 구조도 그렇지만, 벽에 걸린 작품들이 하나같이
고통에 따른 상처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서문도 제목도 없이, 그냥 작품으로 말하더라.
잘 못된 정치, 사회구조를 향한 풍자며, 바로 저항이었다.
거창하게 난리법석 떠는 여느 전시와 달리 조용한 울림을 주었다.

이 말없는 항변은 15일까지 이어진다.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인사동 대로에서 30m쯤 내려와 왼쪽 건물. 4층이다.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들려보라.
(전화 02-722-7760)


조문호




















서양화가 정복수씨의 “뼈속 풍경” 바닥화 작업이 지난 11월 4일 마무리되었다.
전시 중반에 보긴 했으나 아쉬움이 남아 다시 방문했다.

전시장에는 이미 작가 정복수씨와  김진하 관장이 마지막 술판을 벌여놓았다.
그 곳에서 통인가게 김완규씨와 연출가 고상준씨를 만났다.
뒤 늦게는 아내 정영신과 서양화가 전인경씨도 찾아왔었다.

그림 속에 들어 와 술을 마시니 스스로의 욕망이 드러났다.
찬 바닥화에 앉아 눈을 감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을 가린 옷을 벗으니 마치 구천을 떠도는 것 같았다.

미술이 심리적 치료로 이어지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서양화가 정복수씨의 바닥화 및 벽화 제작 전시회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2주째 접어 든 지난 24일, 정복수씨의 신체 해부실을 찾아 나섰다.
시작한 날은 다른 일정도 있었지만, 작업의 전체적인 틀이 짜이면 볼 작정으로 미뤄뒀기 때문이다.

몇일동안 살벌한 현장을 상상한 탓 인지, 마치 유령의 집을 찾아 나선 듯 어시시한 느낌마저 일었다.
작업실을 들여다보니 정화백이 바닥에 웅크려 앉아 붓으로 뼈를 발라내고 있었다.
온 사방은 신체 부위들로 어지럽게 늘려 있었고,
그 영혼들은 좁은 공간을 허허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정화백은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을 난도질하는 인간백정이다.
인간의 모순성을 파헤치며,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작가도 드물다.

마치 신체구조가 건축도면처럼 나타나기도 했고, 입과 눈 내장들이 얼기설기 이어지기도 했다.
바닥은 물론 사방 벽에 양면성으로 위장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욕망만 나뒹굴고 있었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안고 나왔기에 욕망이 없다면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다.
세삼 스스로의 이글거리는 욕망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뒹구는 자궁 속으로 다시 기어들고 싶었으나, 그 또한 하나의 욕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부작업이 잠시 중단되었다.
‘나무화랑’관장 김진하씨가 막걸리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마이 뉴스’에 이번 바닥화 기사를 쓴 박건씨를 비롯한 몇 명이 둘러앉아,
피 같은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바닥화, 정말 난생 처음 대하는 독특한 체험이었다.
술잔이 놓인 바닥엔 나를 유혹하는 씹도 있고, 나를 지켜보는 눈도 있었다.
눈을 가만히 내려 감으니 온몸에 짜릿 짜릿한 기운까지 전달되었다.
마치 심령치료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피로 빚은 술 탓으로 돌렸다.

아무튼 온 몸으로 그림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김진하씨가 바닥에 깔린 정화백 그림 값을 호수대로 산출해보니 12억이나 된다고 하였다.
12억을 깔고 앉아 마시는 술 맛이 과연 어떻겠는가?

최고의 호사였다.
해부가 마무리되는 11월4일이 벌써 기다려진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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