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













 

 

 


최북단마을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려...

[서울문화투데이]2018년 05월 22일 (화) 13:34:56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문영태추모위원회’에서 기획한 문영태 유작전이 지난 19일 오후4시, 북한을 눈앞에 둔 최북단마을 김포 월곶면에 자리한 갤러리 ‘민예사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유작전은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을 운영하는 미망인 장재순씨가 미술관을 새롭게 개관하며 마련하였다.

민중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에는 80년대 작업한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에서 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 심상석-상황, 종이에 연필, 53X53cmX4


3주기에 맞춰 마련한 문영태 유작전 개막식에는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의 사회로 진행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문영태의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분단의 문제로 보인다. 그의 ‘심상석’(心象石) 연작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기에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모더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자화상,종이에 연필, 31X49cm, 2002


이재권 동문은 ”대학 다닐 때의 문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도 도를 보는 관점, 칼라를 보는 관점이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다고도 했다.


린다노클린은 "예술의 목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그 시대의 세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상이나 상징보다는 사회적 제 조건과 보다 간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 장재순'민예사랑'대표 Ⓒ정영신


민중문화운동가였던 문영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을 추진하였고,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면서 출판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동시대의 삶을 성찰해왔다.


▲ 천지인 115X77X20cm 상석에 조각 1995


화가 박건씨는 1980년 문영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시대정신>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술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담론지로서 나중에 ‘민미협’과 ‘민예총’으로 가는 다리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문영태는 “공공성과 민중문화에 대한 존중감이 높은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 나무화랑 대표이자 평론가 김진하씨 Ⓒ정영신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문영태의 심상석 연작은 1977녀부터 1983년까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심상석’은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이다.


▲ 심상석-결합, 종이판화, 44


타제 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심상석’작품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며,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한,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의 흔적이 심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라며,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난다고 작가론에 적었다.



▲ 심상석 78-3, 종이에 연필, 168X122cm, 1978


특히 문영태는 1990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 작업도 했다. 문영태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물로 ‘눈빛출판사’에서 ‘분단풍경’사진집을 펴냈다.

▲ 국도 7번 도로변- '분단풍경'사진집에서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로는 김포 월곶리 자택에 칩거하며 평소 관심가진 전통적인 민중성과 민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문화를 연구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지향해 왔다.


▲ 시대정신 창간호,1983-1987


새롭게 자리잡은 ‘민예사랑’개관과 문영태 3주기 유작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예총’이사장 박불똥씨, 화가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씨, 사진가 조문호, 판화가 홍선웅, 미술평론가 김진하, 동영상을 제작한 양정애씨등 ‘문영태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친지와 많은 지인들이 찾아 와 고인을 추모하며 유작전을 관람했다.



▲ 김포 월곶리 '민예사랑' 전시된 작품 Ⓒ정영신


이날 추모전시에서는 ‘나무아트’대표 김진하씨가 만든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 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선생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까지 한데 모아서 엮었다.



▲ 좌)'심상석-문영태'도록표지, 우)'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책표지


문영태선생의 유작전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문의 (010-5357-5256 민예사랑)




 



손기환의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 2부작이 오는 51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현상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은 기민한 만화적 순발력을 회화에 끌어들여,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 타타타타타이 얼마나 간단명료한 메시지인가?

무장헬기의 굉음을 소리로 나타낸 이 글은, 시각적 재미와 함께 문학적 요소도 가미되었다.

위로는 군화발이 부각되고, 아래로 몇 명의 군인들이 메 달려 지나가는 낯설지 않은 풍경은,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는 군사문화의 폐해를 한 마디로 정리한 걸작이다.


 

기울어져 있는 잠실 롯데타워 옆에 새떼와 전투기가 함께 나는 풍경도 있다.

녹색의 지평선과 주홍색의 하늘이 어긋나 불안감을 조성하는 이 장면은

성남비행장 활주로의 방향을 틀어 가며 빌딩을 세우게 한 정경유착을 꾸짖는 비판적 시선에 있다.


 

그리고 희뿌연 ‘DMZ 풍경은 마치 안개 낀 정국을 보는 것 같다.

풍경 위로 GP(초소)OP(관측소) 그리고 GOP에 관련된 일렬번호와 지뢰표시만 표기하므로,

추상적 현실을 구체적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남북대치정국의 실감나지 않는 비현실적 현실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그 그림은 비현실적 공간이 돼버린 DMZ의 오늘에 대한 고발이며 응전이었다.


 

‘DMZ-마주보기시리즈에는 권력자들이 망원경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김정은과 이명박도 있고, 박근혜도 있다. 이들이 보고 싶은 것이 도대체 뭘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빅 카드라도 찾고 싶었나? 아니면 유치한 야동이라도 보고 싶었을까?

한 마디로 보여 주기 위한, 국민을 기만하는 쇼에 불과하다.

노동자시인 김신용씨의 시어처럼 , , ~”,


 

손기환의 이미지 저장고는 수많은 시각적 기억들로 넘쳐난다.

오래된 사진 이미지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딱지, 만화, 카툰, 민화, 책표지 등

이미 기호화된 대중적 이미지를 끌어들여 다양한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적절한 이미지로 동시대의 정치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만화와 회화와 판화가 지닌 표현기법과 양식적 특성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풍경을 연출해 낸 것이다.


 

작가가 분단과 DMZ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실향민 2세라는 성장 배경과 DMZ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군대 생활도 연관 있다고 한다.

전쟁 직후 태어 난 세대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반공을 세뇌시키는 획일화된 교육환경과 유신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광주학살의 만행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대를 체험하며 자라난 저항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니 전시 작품이 압수되고 구속되는 수난을 겪으며 이마에 별을 달기도 했다.

그런 몸소 겪었던 체험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녹아 난 것이다.


 

손기환은 파인아트에서 기피하는 시각물을 가감하게 끌어들여 대중적 보폭을 넓히고 있는데, 고급문화의 속성을 거부하는 측면도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도 노란색이나 보라색 등 약간 병적인 색깔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팝적 요소를 구축하여 성공적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손기환이 누구인가?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 민정기, 박불똥 등 우리나라 민중미술을 이끌어 온 몇 안 되는 용병 중 한 사람이다.

다채로운 형식으로 정치적 모순을 비판하며 권력에 저항해 온 역전의 용사다.

지금은 국제 만화에니메이션 페스티벌 SICAF의 집행위원장과 잡지 만화정신의 발행인으로 화단보다 만화계에서 많이 활동하는데,

상명대학교 만화에니메이션과 교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2부 전시가 시작된 18일 오후5시 무렵, 화가 김정헌씨가 포장된 액자 하나를 들고 전시장에 나타났다.

사연 인즉, 김정헌씨가 옛날에 손기환씨와 화실을 같이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김정헌씨는 대학원생 시절이고, 손기환씨는 균명중학교 3학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손기환씨가 김정헌씨에게 사례로 드렸다는데, 그 그림을 46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찍부터 손기환씨의 작가적 기질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전시를 축하하러 오며 아득한 추억 하나 챙겨 왔는데, 손기환씨는 46년 전의 감상에 젖는 또 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림으로 맺은 기나긴 세월의 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작품집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고착된 기존의 제도적, 조형적 미학적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손기환의 작업은 작업내용 뿐만 아니라 생태적인 면도 정치와 유사해 보인다. 또 기존에 제도화된 작가 중심의 미적 기득권의 고착된 위계를 해체하기 위해, 미적 근거를 대중적 의 영역에 두고, ‘적 언어를 차용해서, ‘적으로 관객과의 감각과 인식의 평등한 대면과 연대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적 감각의 분배도 일정정도 떠 올리게 한다. 자신을 포함에서 이미 사회적으로 제도화, 권력화된 미적 이데올로기나 위계에 대한 파열을 시도하며, 관객들 개별적인 감각으로의 수평적인 소통전략을 취하는 미적 태도다.“고 적었다.


 

이 전시는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에서 51일까지 열린다.

전시와 함께 손기환,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작품집(가격50,000)나무아트에서 발행되었다.

276면의 방대한 자료집이라 소장가치도 높다.

 

/ 조문호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18_0404 ▶ 2018_0501



손기환_벽화를 위한 습작-불청객_혼합재료_190×300cm_198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226c | 손기환 -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404_수요일_05:00pm


손기환 화집출간 기념展

1부 / 2018_0404 ▶ 2018_0417 / 1980~90년대 작품

2부 / 2018_0418 ▶ 2018_0501 / 2000년대 작품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중략... 손기환은 어째서 '정치적 팝'이라는, 기시감이 들 되 낯선 경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일까.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의 회화와는 다른 단서로 목판화를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손기환의 목판화작업은 회화에 비해 서정적이다. 또한 액티브한 칼맛과 이미지는 회화에 비해 표현적이기도 하다. 회화는 소재들과 역사적 의미항들의 재배치로 인한 사회적 사건과 현상을 '진술'하고, 목판화에서는 거기에 개인적 감성을 덧붙여서 '표현'한다. 다루고 있는 장르나 매체에 따라 자신이 정한 내용 전달방식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만화와의 융합을 시도하는 회화, 정서적인 감수성의 회화적인 목판화, 기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의 혼성적 형식이 손기환의 작업들에서 장르들 간의 속성을 넘나들면서 서사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손기환_불청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1985


미디어마다의 어법이나 조형적 맥락을 달리하듯, 회화에서도 손기환의 소통을 위한 전략적 형식선택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다큐멘터리사진·만화·카툰·민화·문인화·근대기 딱지본 책표지·딱지·극장 간판 형식 등 이미 기호화되고 양식화된 대중적 시각이미지의 차용에 따라, 비슷한 주제라 하더라도 구사하는 문법과 형식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효과적인 전달을 확장하기 위한 형식 실험을 계속 진행한 것. 적절한 시각적 표지와 이미지를 제시하며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해온 것이다.


손기환_타!타타타타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1985


이런 방식은 표현적·서정적 회화가 갖는 작가의 주관적 감성보다는 객관적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적 기호들을 분단의 기표로 전환시키며 시각적 관습의 해체 및 의미구조의 재생산을 꾀한다. "뻔"한 대중적 기호들을 차용하면서, 그 뻔한 소재들의 의미를 박탈하고 이를 또 다르게 재맥락화하는 데콜라주Decollage 혹은 브리콜라주Bricolage로, 그 의미를 전유하고 또 재전유Re-appropriation한다는 것. 손기환 본인의 사회·역사적 관점을 정치적 통찰로 번안하기 위해 팝적인 소재와 어법들을 전용한 것인데, 이는 기성정치와는 다른 화가의 시점에서 현실을 조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손기환_우리동네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4cm_1992


손기환_홍길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cm_2000


대중매체를 통해 소비되어진 보도(광고)사진이나 만화도상들의 차용은 스투디움Studium의 범주에, 그런 소재들을 차용한 재배치는 특정 의미로 작용하는 풍크툼Punctum으로 진화해서 기의화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풍크툼은 보통의 회화들과는 달리 '표현'에 의한 감성적인 '결론'보다는, 공감과 인지적 해석을 통한 내용 전달의 메카니즘을 말한다. 손기환의 작업이 작업내용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매체의 개념까지, 즉 정치성을 담보하는 소통구조와 기제를 아우르는 인지적 연상과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며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직접적인 선전과는 다른 지점이다.


손기환_DN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200cm_2015


손기환_3。-죽음의 백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584cm_2017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손기환(뿐만 아니라 모든 참여적 작가의) 작품이 당장 정치적으로 기능을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알제리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빵 한 조각보다 유용하지 못한 소설쓰기의 무력감을 토로했던 샤르뜨르의 경우처럼, 정치를 다루거나 말하는 작품들도 현실정치에 곧바로 작동될 수는 없다. 현실정치와 문화정치학적 입장으로 개진되는 예술행위와의 간극이다. 작품이 현실정치에 작동하는 것은, 미적 형식의 감상과 함께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의 다층적 작용에 의한 해석의 결과로 인해서다. 작가의 기표가 관객의 기의로 콘텍스트화된 메시지가 공감을 통해서 증폭하며 사회적 연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중략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손기환의 회화 중에서) ■ 김진하



Vol.20180405c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지난 16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강행복씨의 목판화 ‘UNTITLE‘ 아티스트 북 설치작업을 보았다.

전시된 아티스트 북은 읽는 책이 아니라 느끼는 책이었다.

추상적인 조형성이 면면으로 연결되어 그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들을 모두 펼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모두 단 한권씩 밖에 없는 오리지널 작품인데, 전시는 9월5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과 화가 송용민씨를 만났다.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
100Days Document for Kwanghwamun Art Activity展
2017_0501 ▶ 2017_05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 +82.(0)2.722.7760



광장의 미술, 미술의 광장 - 보고 혹은 설명 ● 박근혜에 대해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간 진행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OVER THE WALL"이란 붙박이 타이틀 아래 크게 세 개의 마당과, 15개의 작은 소주제로 14주 100여 일간 진행되었다. 「퇴진행동」본부와 「예술인 텐트촌」의 전체행보에 컨셉을 맞춤과 동시에, 미술행동이 자체적으로 지향한 방향성으로「차벽공략→차벽 넘어 광장으로→촛불광장」이란 진행과 정적 슬로건을 설정하고, 거기에 당시 긴급한 시국현안에 조응하는 시의적절한 실행 타이틀로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을 진행하며 촛불시민들과 소통했다. 그 15개의 슬로건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벽공략 Project  

- 2016. 12. 24: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 2016. 12. 31: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君舟民水"  

- 2017. 01. 07: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 2017. 01. 14: "응답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   


2. 차벽 넘어 광장으로 Project  

- 2017. 01. 21: "동녘이 밝아온다"  

- 2017. 01. 28: "촛불시민 만복래"-캠핑촌예술위와 설날 한마당  

- 2017. 02. 01: "광장목판화전"(궁핍현대미술광장)  

- 2017. 02. 04: "새로운 나라로! - 彈劾大吉 建陽多慶"  

- 2017. 02. 11: "대선? 탄핵이 먼저다!'   

- 2017. 02. 18: "黑雲萬天 天不見"   


3. 촛불광장 Project  

- 2017. 02. 25: "임을 위한 행진곡"  

- 2017. 03. 01: "민주주의 촛불공화국 만세!"  

- 2017. 03. 04: "역사, 광장민주주의"  

- 2017. 03. 11: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 합니다"  

- 2017. 03. 14: "촛불 역사전"(궁핍현대미술광장)


이런 정규적인 메인프로젝트 사이로 국회의사당, 검찰, 세종시 문화부 등에서의 현장 작업과,

여타 궁핍미술광장 목판화전 등의 다양한 부정기적 프로젝트 참여 등이 있었다.




12월 24일에 시작해서 네 번 진행했던 『차벽공략 Project』를 1월 중순에 『차벽넘어 광장으로 Project』란 슬로건으로 바꾸면서, 광장 한쪽 끝인 미대사관 앞 차벽으로부터 광장 중앙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미술행동의 『차벽공략 Project』 작업이 촛불시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특히 1월 14일의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기념하며 기획한 "응답하라! 1987, 한걸음 더 2017!" 은 현장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기획이란 판단이 들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2월 말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인용될 거라는 예측하에 광장 가운데서 시민들과의 '조우'와 '합류'가 우리들의 희망사항이라서 그렇기도 했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중심 무대, 그 열린 광장에서 우리들의 미술행위도 촛불시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래서이기도 했고. ● 우리는 미술행동의 작품을 설치하는 주 무대를 경찰차벽에서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편의 8개의 조형물 기둥 사이에 'Open Air Gallery'란 이름으로 터 잡았다. 4회의 현장작업 진행하고 마침내 미술행동은 차벽을 넘어 광장에 이른 것이었다. 얼마 뒤 백기완 선생은 영어가 아닌 순우리말로 '바람찬 전시장'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시민들은 우리들을 더 환영했고, 또 시민들 스스로 미술행동의 현장프로젝트에 더 많이 참가했다. 또 그 결과물들을 더 가까이서 더 기꺼이 감상하고 향유했다. ● 그러나 2월로 예상되었던 탄핵인용은 다시 미뤄졌다. 광화문집회도 얼마나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총 10개의 프로젝트를 소화한 뒤, 3월을 목전에 둔 2월 마지막 주부터 이제는 미술행동이 곧 촛불시민이고 또 광장의 한 주체라는 자부심에서 『촛불광장 Project』이라고 명명했다. 미술행동이 촛불시민들 한가운데에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도 될 만큼 상호 간 소통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서였다.





광장의 주체는 시민이다. 미술행동은 시민들이 제공한 무대에서 미술이란 특수한 분야를 실행한 또 다른 소수의 시민이었다. 민주주의란 보편성과 미술이란 특수성이 결합하고 융합하면서 불의한 권력과 공권력에 감성적인 '이미지투쟁'·합리적인 '상징투쟁'·그리고 역사적인 '기억투쟁'('상징투쟁,'과 '기억투쟁'이란 용어는 미술평론가 김준기선생의 글에서 차용)을 실행하면서, 동시에 촛불시민들과의 동지적 배려를 통해서 진심을 소통하는 겸손한 운동방향을 세웠고, 이는 미술행동의 기본적 태도이기도 했다. '진심과 전략'을 모토로 실행한 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참여작가 대부분이 쉰을 넘긴 나이였으나, 그럼에도 이 광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프로젝트는 대부분에게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당수 작가들은 젊은 시절 민중미술운동의 주역들이라 능동적으로 자기작업의 포지셔닝을 이해했지만, 시민운동으로 그 틀이 바뀐 지금의 방법은 과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적인 프로젝트 진행의 이런 기획/진행 방식은,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염두에 둔 전투성과는 또 다르게 작용하는 현장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원작자-기획자-시민들 사이에서 이해의 폭이 넓게 기능했다. 특히 기획자의 의도대로 작가들의 원작이 아닌 디지털 출력물들을 이미지 소스(Source)로 활용함으로, 원작의 아우라(Aura)나 '팍투라'를 거세한 '팍토그라프'적 정보 중심의 대중적 소통방식이 유발하는 현장성은 파괴력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교하게 결과를 예측하고 준비를 하는 전시장 중심의 전시에 비한다면 상당 부분은 그 밀도감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술로서의 작품 감상이 아닌 현장에서의 실제적 소통효과를 내야만 하는 목적에서 보면 기민하고 유격적인 작품제작/설치/향유의 방식으로선 좋은 전략이었다.





지난 100여 년간 근·현대 한국의 미술은 시민들과 겉돌았다. 현대미술이나 미학이 작가중심적인 것이고, 또 대부분의 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제도적인 감상/거래의 대상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시민들과의 일상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 소통문법과 교감의 독법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의 실험과 시도가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했다. 특정한 장소를 반영구적인 고체로 모뉴멘트化 하는 공공조형물들의 하드웨어적 속성과는 달리, 이렇듯 공공적 집회와 시위에서 기민한 순발력의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게릴라식 즉흥·즉발적 미술행위의 유연한 개입과 탈주의 현장성은, 한마디로 미술과 대중의 살아있는 호흡을 이루기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 작업실에서처럼 작업의 고립된 주체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의 상호 의견과 작업프로세스와 정서를 나누는 한사람의 '시민'일 때도 여전히 미술은 그 표현과 전달력이 강력하다. 미적으로 발달된 기능을 가진 '작가시민'이 마음만 있는 '일반시민'을 미술이란 공감의 과정으로 불러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조우에 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 발생한다. 그 '발생'의 과정과 결과물이 특정한 공적 현장성과 정치적 이념성을 담보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미술의 작용을 감동스럽게 나누고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실, 미술의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다. 특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입장·태도도, 작업의 내용·형식·이념도, 관객의 관람과 수용하기에도 어떠한 룰이나 제도도 개입할 수 없다. 작업실에서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소요하는 작가나 공공현장에서 사회적 가치를 부르짖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미술의 개념이나 소통의 작동방식에도 당연히 틀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현대미술은 제한된 제도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거기에 집단적 논리가 자리 잡았고, 자본과 기득권이 생겨났고, 그 결과 미술은 부와 명예의 코스프레를 위한 장식품이자 기호품의 이미지로 박제화되었다. 유통제도권 내에서 그림값이란 숫자로 대체된 미술은 2016, 7년의 겨울 광장에선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이 빛나게 한 민주주의를, 미술이 또 향유하는 역동적인 운동장이었다. 미술은 그곳에서 작가명 없는 익명으로, 자본가가 아닌 시민들을 만나고·호흡하고·울고·웃으면서 미술의 근원적 기능을 누렸다.




광장은 용광로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용해해서 공동체적 발언을 주조해 낸다. 지난 100일간 광장에선 미술도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작가와 기획자, 작가와 작가, 작가와 시민, 시민과 시민들이 담장을 헐고,용융하고, 융합했다. 미술도 미적 조건 없이 시민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고 행동했다. 작가들의 그림에 시민들은 낙서를 했고, 거기에 작가들은 또 그림으로 응답했다. 작가/시민, 주/객, 예술/낙서, 토로/독백, 함성/속삭임, 그림/글, 이미지/리터러티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 함께 어울리며 광장을 거대한 표현과 발언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 자유로웠던 것이다. 미술행동과 시민 사이에서 즉발적으로 발생하는 작용과 교감과 행동에 의해, 공동작업의 결과가 전혀 새롭게 생성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적 이미지의 우연한 발생은, 기존의 미술 관습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기도 했다. 굳이 미술이란 범주의 안팎 어느 지점에 있어도 상관없을 그런 열린 소통과 교호작용이었다. (다만 오랜 기간 고답적인 미술계와 그 구조 안에서 살아온 필자 같은 경우엔, 이 현상의 교감 내지는 정보전달작용의 싱싱함에 다소 낯선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 아직은 논리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체험이지만, 광장에선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이 훨씬 건강하게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감지된다. 일찍이 미술에서 시민이 미술가들과, 또 미술가들이 대중들과 이렇게 수평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관객 참여형 해프닝·이벤트·퍼포먼스도 기획자의 로드맵이나, 작가의 아우라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이, 작가들과 함께, 작품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현상은 2016~7년의 여기 광화문 광장에서만 있었다. 기존 미술계 시스템의 바탕에서 자본, 인맥, 학맥, 기타 제도화된 미술의 한계에서 일탈하는 거대한 열림의, 또 다른 미술의 개념과 프로세스와 장르적가능성을 보았다면 내가 지나친 걸까.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흥분해 있다. 기존의 제도와 양식과 개념의 틀로부터 일탈·이탈·돌파를 시도하는 미술은 얼마나 짜릿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말이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그 광장에 빠지지 않고 내가(그리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거기서 능동적으로 시민들과 미술로 함께 했다는 사실에 난 얼마나 뿌듯해하는가. 감동이었다. 촛불시민이자 미술인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신-에피소드 1 ● 황당한 일이었다. 분명 정부종합청사를 가로막은 경찰차벽 앞에서 '광화문미술행동'이 시민들과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을 붙이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경찰버스가 나오지 않은 것. 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인데 그 대상인 경찰차벽이 없다니 닥친 현장에서의 그 난감함이란. 그 자리에 있던 미술행동 대장인 김준권 형과 부대장인 류연복 형, 총무 김남선씨와 나, 그리고 몇 명의 멤버들 모두 허탈했다. 리어카에 가득 실어온 각종 그리기 도구들이 무색했고, 그 리어카 한쪽 귀퉁이에서 하릴없이 혼자서 펄럭이는 '광화문미술행동' 깃발이 야속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적당한 한기와 바람이 우리들의 눈에서 초점을 흐리게 했다. 준권 형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떡하지?"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탄식이다. "다른 자리를 찾죠, 뭐. 여기만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닐 테니."라고 대답하는데, 연복 형이 끊고 들어온다. "아무 차벽이나 골라서 하자고. 다 광화문인데. 괜찮아." 모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후 1시의 광장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모두의 눈이 동시에 모아진 곳은 미대사관 앞에 장기적으로 정박(?) 중인 굳건한 경찰차벽이었다. 바로 앞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광장도 넓게 비어있다. '퇴진행동'의 메인 무대로 치자면 맨 뒤쪽이니, 행사가 시작되어도 다른 곳에 비해선 인구밀도가 다소 낮은 곳이라 작업조건도 좋은 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미 대사관 앞으로 갑시다. 저기 경찰차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뿌릴 내리고 있을 터이니"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권 형과 연복 형은 김총무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곤 벌써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가고 있다. ● 불과 이삼일 전에 급하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직 어떤 계획도 없었다. 준비고 뭐고 게릴라 특유의 현장 임기응변으로 첫날 작업을 하기로 했다. 준권형과 김총무는 부랴부랴 청계천과 여기저기에서 사다리·실사출력천·물감·크레용·기타 물품들을 준비했고, 웹자보를 이은걸씨가 디자인했다. 난 2주쯤 뒤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한 터라 지금은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할 일밖엔 없었으니,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에 이르자 바로 출력 롤지를 대략 15m씩 너덧 개를 바닥에 테이프로 고정하며 낙서를 시작했다. 제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거기에 쓰고, 낙서하고, 그리고, 밟고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 이 즉흥적인 첫 번째 해프닝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들과 작가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는 시민 관객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자 곧바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깔깔거리면서 낙서를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서예가 여태명 선생의 온몸을 사용하는 큰 붓질로 서예퍼포먼스(김준권 형이 미리 기획한 프로그램)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그 현장을 둘러싸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또 낙서에 동참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민주주의 만세!" 등과 같은 낙서가 대세였다. ●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는. 마침 화가 송용민씨가 붙박이로 붙어서 현장관리를 한다. 자발적이고 자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멤버들의 참여 시스템은 그렇게 자연스레 파르티잔의 게릴라 전술처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12월 31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이나믹한 이미지들이 수십 미터의 대형 천위로 집적되었다. 촛불시민들의 박근혜정권에 대한 심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은 컸다. 그것을 차벽에 붙일 때(경찰들과 실랑이가 있었고, 또 12월 31일의 작업 중 가장 큰 차벽작업은 분실되기도 했다)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미술행동의 '차벽공략'이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추신-에피소드 2 ● 해가 바뀐 2017년 1월 7일. 새해 첫 프로젝트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衆志動天"이란 타이틀을 실행했다. 새해 초부터 준권형과 전화로 컨셉, 타이틀, 방법 등에 관한 많은 협의를 했으나 당장에 어떤 작가도 1~2주 만에 신작을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라, 80년대 오윤·이철수·홍선웅·이상호의 목판화와 류연복의 근작·정찬민의 근작·이윤엽의 백남기 농민 등의 목판화를 대형 실사출력한 사이로 이윤엽의 파편화시킨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거기에다가 시민들이 참여하고 낙서할 빈 여백을 만들었다. 시민들과 작가들의 경계가 없어지는 작업이다. ● 이날도 또 재미있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지난주까지 차벽에 작업을 부착할 때 우리를 바라만 보던 경찰이 이날은 부착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실갱이를 하던 우리는 긴 그림은 들고 서서 전시를 하고, 3m높이의 그림은 차벽 앞 도로바닥에 작품을 설치했다. 벽화가 바닥화로 바뀐 것. 차벽에 그림걸기라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에, 또 즉흥적인 바닥화로서의 데몬스트레이션을 추가한 행위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그림을 함께 들어주기도 했고, 또 정찬민의 '세월호 미귀환자 초상'에는 촛불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 7~8시경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한 틈을 타서 우리는 급하게 이 그림들을 차벽에 부착했다.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격려의 함성을 우리에게 보내며 부착을 도와줬다. 그러다가 한 10분쯤 뒤에 보니 그림 한 점이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난 위치를 바로잡으려 까치발로 그림을 떼서 손에 든 채로 돌아서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는 것 아닌가. 시민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나를 빙 둘러싸고는 포박하듯 내 양팔을 붙잡고 "당신, 누구야? 왜 그림을 떼는 거요?, 당신 경찰이야? 아니면 박사모야?"라며 소리쳤다. ● 이런 황당한 일이... 바로 옆에서 울리는 메인 무대의 거대한 마이크 소리 때문에 "내가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입니다"라고 나를 밝히는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아서, 1분 정도를 난 멱살이 잡힌 채로 그들에게 '박사모'로 오인되어 혼쭐(?)이 났다.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이 차벽의 그림을 내가 폐기하는 줄 오해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림을 떼지 않겠다는 내 몸짓이 그들에게 입수된 다음에 비로소 내 멱살은 풀렸다. 봉변(?)을 당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행히 민주시민들이라 폭력은 당연히 없었던 터, 시민들은 이 그림을 자신들의 마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기에 나를 제어한 것이었으니까. 언제 미술이 대중들에게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흐뭇함과 함께 그간의 시민들과 유리된 채로 오로지 자본적 가치로만 존재해 온 미술에 대해서 약간의 자괴감도 동반되긴 했다. ● 확실히 광장에서는 작가가 아니라 시민과 대중이 주체다. 생각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을 운영한 건 작가들이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건 촛불시민들이었다. 자본을 가진 재벌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이 '메쎄나'였다. 십시일반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어주고, 작은 판화전에서 작품을 사주고, 일회성 경매에서 판화나 글씨를 응찰해주고, 또 어떤 분들은 따로 봉투를 전해 주고... 바로 그런 시민들이 마련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함께 뒹굴고 놀았던 것이었다. 재미있게 놀아서 이런 사랑도 받았다. 불의하고 불법적이고 무능한 정치권력 앞에서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한 사회에서 참여하는 시민들의 윤리적·정치적·사회적 의식의 성숙도가 이리도 높을 수 있는지를 1980년의 광주에서 전해들은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내가 있었다. 광화문미술행동도 있었다. 시민이자, 작가이자, 기획자로 바로 거기에 우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정치적 승리이자 미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숭고함과 넉넉한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으랴. 이런 미술행동의 동기를 제공해 주신 촛불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촛불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 김진하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책 출간  

김준권, 김진하 엮음  

ISBN: 978-89-966435-9-3  

나무아트 刊 / 100페이지 / 24*19cm / 800부 한정판 / 값 15.000원


Vol.20170504d |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展




지난 일요일 오후6시 무렵, 인사동에 나갔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이흥덕씨 ‘지옥철’을 보고, ‘서울아트가이드’4월호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꾸물대다 허탕 쳤다. 도착하니 오후 여섯시가 지나버렸는데, 전시는 일정이 남았으나 책이 급했다.
인사동인근 갤러리의 전시일정을 스캔하여 월초마다 알려왔기에, 내일 다시 나와야 했다.

이틀에 걸쳐 두 차례나 인사동 거리를 돌았지만, 왠지 낯설어 보였다.
사람도 낯설지만, 내 기억의 풍경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본 이흥덕씨 드로잉 ‘지옥철’에서도 인사동이 연상되었다.
그의 그림들은 인간의 은폐된 폭력성에 의한 살벌한 사회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인성의 황폐함을 느끼게 하는 현대판 지옥도였다.

마치 이야기 하듯 풀어가는 그림들은 이기적인 인간 군상을 풍자했다.
인간의 불안의식과 저항성이 화면 곳곳에 꿈틀거렸다.
돈과 물질문명에 의해 망가진 인간성과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쓴 전시서문 한 구절을 옮긴다.


“이흥덕의 시선은 철저하게 관찰자로서의 전지적 시점이다. 또한 시간성은 늘 현재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현실, 거기에 반응하는 심리도상인 형상들은 즉물적이다.
(중략)
그 화면에는 작가의 주관적 감정의 축소와 객관적 심리(불안)의 증폭이 반영하는
우리시대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적 초상이자 전형성이 오롯이 드러난다.”









‘나무화랑’기획전 이흥덕의 ‘지옥철’은 4월28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삼일절에는 시청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로 뒤 덥혔지만.

보수단체들의 태극기에 대한 남용과 오용으로 참담한 하루였다.


선열들께서 피로 지켜낸 나라의 국기가 일제에 빌 붙었던 박정희 우상화와

그의 딸 박근혜를 지키려는 도구로 전락되고 있음에 얼마나 통탄 했겠는가?

이 날 내린 봄비가 선열들의 눈물인양 서글펐다.






난 여지 것 시청 앞에서 열리는 보수단체들의 관제데모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객관적인 눈으로 기록해야 하는 다큐멘터리사진을 해왔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사람을 찍어도 좋은 사람만 찍고, 싫은 사람은 카메라조차 들기 싫으니,

다큐사진가로서의 자격이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 번쯤은 가 보아야 할 것 같아, 이 날은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의 화장실 입구는 이른 시간부터 노인들로 붐볐고.

어떤 이는 박근혜 초상사진과 태극기를 들고 일인 시위하듯, 서 있었다.





시청광장으로 나가니 의자까지 준비된 삼일절 집회가 열리고 있었으나,

확성기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종북 타령과 박근혜를 옹호하는 선동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다.

연단에 나와 발언하는 사람들의 어투나 집회 분위기가 왠지 북한을 닮아가는 듯 했다.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며, 하는 짓은 그들과 똑 같았다.

그리고 삼일절에 태극기는 당연히 들고 나와야겠지만, 성조기는 왜 들고 나왔으며,

퇴역한지가 수십 년이 된 늙은이가 왠 군복을 입고 나왔는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보기에는 하나같이 평범한 분들인데, 하는 짓은 완전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같았다.






시청에서 광화문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가보니,

세종문화회관 방향에 대형 스크린과 고성능 확성기를 세워놓고 혼란을 부추키고 있었다.

경찰이 광장과 도로 사이를 차벽으로 갈라놓아 광장 통과하기란 삼팔선 넘어가기보다 더 어려웠다.

화장실이나 식당에 가려면 엄청난 인내가 요구되었다.






정오 무렵의 '광화문광장'에는 촛불시민이 그리 많지 않다.
노인들이 주축인 보수단체의 집회는 일찍 시작하여 일찍 끝나지만,

촛불시민들의 집회는 늦게 시작되어 늦게 끝나는데,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촛불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 보수단체 참가자들은 대부분 흩어 졌지만, 그들의 확성기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아예 스피커와 스크린을 촛불집회 방향으로 돌려 방해하기 시작했다.

확성기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촛불집회 발언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행진 목적지인 청와대로 가지않고, 왜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었는지?

그리고 촛불집회가 열리는 지척에다 대형스크린과 확성기는 왜 세웠는지?

일련의 의혹들이 경찰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촛불집회의 '퇴진행동' 최영준실장은  ‘박근혜 세력이 광화문에 집결하여

평화롭게 진행하는 촛불에 도발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중에도 30만에 달하는 많은 촛불시민들이 몰려나와 박근혜 구속과 황교안 탄핵을 외쳤다.

이날 광장에서는 윤승길(3.1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 사무총장의 사회로 ‘3.1정신 이어받아 통일독립 이룩하자!’는

‘제98주년 3.1절 민족공동행사’와 3,1국민주권선언대회 등 삼일절과 관련된 행사도 줄줄이 열렸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열한 번째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촛불공화국만세!!!’였으며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전은 '태극기 역사'전으로 시의적절한 태극기 자료전이 열렸다.

행진에 사용할 대나무 깃발도 대량으로 만들어졌고, 임실필봉농악의 대학생 풍물패들이 흥을 돋우기도 했다,

강병인, 김성장씨의 서예퍼포먼스와 시민들의 바닥 글쓰기, 촛불시민 인증샷 사진 찍기,

류연복 유대수씨의 촛불 목판화 찍기 등 다양한 예술행동이 펼쳐졌다.






이날 비를 맞으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는 국민들의 결기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날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은 태극기 집회에 나온 이모(51)씨가

자신의 집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붕대를 감고 나왔다는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목숨을 끊을 수도 있겠지만, 손가락 자른 이유가 너무 웃겼다.

“안중근 의사처럼 3·1절에 독립 운동 한 것처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패권력자 김기춘 구속에 따른 항의라고도 했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으니, 이보다 더한 코메디가 어디 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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