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
100Days Document for Kwanghwamun Art Activity展
2017_0501 ▶ 2017_05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 +82.(0)2.722.7760



광장의 미술, 미술의 광장 - 보고 혹은 설명 ● 박근혜에 대해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간 진행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OVER THE WALL"이란 붙박이 타이틀 아래 크게 세 개의 마당과, 15개의 작은 소주제로 14주 100여 일간 진행되었다. 「퇴진행동」본부와 「예술인 텐트촌」의 전체행보에 컨셉을 맞춤과 동시에, 미술행동이 자체적으로 지향한 방향성으로「차벽공략→차벽 넘어 광장으로→촛불광장」이란 진행과 정적 슬로건을 설정하고, 거기에 당시 긴급한 시국현안에 조응하는 시의적절한 실행 타이틀로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을 진행하며 촛불시민들과 소통했다. 그 15개의 슬로건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벽공략 Project  

- 2016. 12. 24: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 2016. 12. 31: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君舟民水"  

- 2017. 01. 07: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 2017. 01. 14: "응답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   


2. 차벽 넘어 광장으로 Project  

- 2017. 01. 21: "동녘이 밝아온다"  

- 2017. 01. 28: "촛불시민 만복래"-캠핑촌예술위와 설날 한마당  

- 2017. 02. 01: "광장목판화전"(궁핍현대미술광장)  

- 2017. 02. 04: "새로운 나라로! - 彈劾大吉 建陽多慶"  

- 2017. 02. 11: "대선? 탄핵이 먼저다!'   

- 2017. 02. 18: "黑雲萬天 天不見"   


3. 촛불광장 Project  

- 2017. 02. 25: "임을 위한 행진곡"  

- 2017. 03. 01: "민주주의 촛불공화국 만세!"  

- 2017. 03. 04: "역사, 광장민주주의"  

- 2017. 03. 11: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 합니다"  

- 2017. 03. 14: "촛불 역사전"(궁핍현대미술광장)


이런 정규적인 메인프로젝트 사이로 국회의사당, 검찰, 세종시 문화부 등에서의 현장 작업과,

여타 궁핍미술광장 목판화전 등의 다양한 부정기적 프로젝트 참여 등이 있었다.




12월 24일에 시작해서 네 번 진행했던 『차벽공략 Project』를 1월 중순에 『차벽넘어 광장으로 Project』란 슬로건으로 바꾸면서, 광장 한쪽 끝인 미대사관 앞 차벽으로부터 광장 중앙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미술행동의 『차벽공략 Project』 작업이 촛불시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특히 1월 14일의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기념하며 기획한 "응답하라! 1987, 한걸음 더 2017!" 은 현장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기획이란 판단이 들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2월 말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인용될 거라는 예측하에 광장 가운데서 시민들과의 '조우'와 '합류'가 우리들의 희망사항이라서 그렇기도 했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중심 무대, 그 열린 광장에서 우리들의 미술행위도 촛불시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래서이기도 했고. ● 우리는 미술행동의 작품을 설치하는 주 무대를 경찰차벽에서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편의 8개의 조형물 기둥 사이에 'Open Air Gallery'란 이름으로 터 잡았다. 4회의 현장작업 진행하고 마침내 미술행동은 차벽을 넘어 광장에 이른 것이었다. 얼마 뒤 백기완 선생은 영어가 아닌 순우리말로 '바람찬 전시장'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시민들은 우리들을 더 환영했고, 또 시민들 스스로 미술행동의 현장프로젝트에 더 많이 참가했다. 또 그 결과물들을 더 가까이서 더 기꺼이 감상하고 향유했다. ● 그러나 2월로 예상되었던 탄핵인용은 다시 미뤄졌다. 광화문집회도 얼마나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총 10개의 프로젝트를 소화한 뒤, 3월을 목전에 둔 2월 마지막 주부터 이제는 미술행동이 곧 촛불시민이고 또 광장의 한 주체라는 자부심에서 『촛불광장 Project』이라고 명명했다. 미술행동이 촛불시민들 한가운데에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도 될 만큼 상호 간 소통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서였다.





광장의 주체는 시민이다. 미술행동은 시민들이 제공한 무대에서 미술이란 특수한 분야를 실행한 또 다른 소수의 시민이었다. 민주주의란 보편성과 미술이란 특수성이 결합하고 융합하면서 불의한 권력과 공권력에 감성적인 '이미지투쟁'·합리적인 '상징투쟁'·그리고 역사적인 '기억투쟁'('상징투쟁,'과 '기억투쟁'이란 용어는 미술평론가 김준기선생의 글에서 차용)을 실행하면서, 동시에 촛불시민들과의 동지적 배려를 통해서 진심을 소통하는 겸손한 운동방향을 세웠고, 이는 미술행동의 기본적 태도이기도 했다. '진심과 전략'을 모토로 실행한 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참여작가 대부분이 쉰을 넘긴 나이였으나, 그럼에도 이 광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프로젝트는 대부분에게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당수 작가들은 젊은 시절 민중미술운동의 주역들이라 능동적으로 자기작업의 포지셔닝을 이해했지만, 시민운동으로 그 틀이 바뀐 지금의 방법은 과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적인 프로젝트 진행의 이런 기획/진행 방식은,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염두에 둔 전투성과는 또 다르게 작용하는 현장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원작자-기획자-시민들 사이에서 이해의 폭이 넓게 기능했다. 특히 기획자의 의도대로 작가들의 원작이 아닌 디지털 출력물들을 이미지 소스(Source)로 활용함으로, 원작의 아우라(Aura)나 '팍투라'를 거세한 '팍토그라프'적 정보 중심의 대중적 소통방식이 유발하는 현장성은 파괴력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교하게 결과를 예측하고 준비를 하는 전시장 중심의 전시에 비한다면 상당 부분은 그 밀도감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술로서의 작품 감상이 아닌 현장에서의 실제적 소통효과를 내야만 하는 목적에서 보면 기민하고 유격적인 작품제작/설치/향유의 방식으로선 좋은 전략이었다.





지난 100여 년간 근·현대 한국의 미술은 시민들과 겉돌았다. 현대미술이나 미학이 작가중심적인 것이고, 또 대부분의 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제도적인 감상/거래의 대상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시민들과의 일상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 소통문법과 교감의 독법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의 실험과 시도가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했다. 특정한 장소를 반영구적인 고체로 모뉴멘트化 하는 공공조형물들의 하드웨어적 속성과는 달리, 이렇듯 공공적 집회와 시위에서 기민한 순발력의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게릴라식 즉흥·즉발적 미술행위의 유연한 개입과 탈주의 현장성은, 한마디로 미술과 대중의 살아있는 호흡을 이루기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 작업실에서처럼 작업의 고립된 주체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의 상호 의견과 작업프로세스와 정서를 나누는 한사람의 '시민'일 때도 여전히 미술은 그 표현과 전달력이 강력하다. 미적으로 발달된 기능을 가진 '작가시민'이 마음만 있는 '일반시민'을 미술이란 공감의 과정으로 불러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조우에 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 발생한다. 그 '발생'의 과정과 결과물이 특정한 공적 현장성과 정치적 이념성을 담보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미술의 작용을 감동스럽게 나누고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실, 미술의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다. 특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입장·태도도, 작업의 내용·형식·이념도, 관객의 관람과 수용하기에도 어떠한 룰이나 제도도 개입할 수 없다. 작업실에서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소요하는 작가나 공공현장에서 사회적 가치를 부르짖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미술의 개념이나 소통의 작동방식에도 당연히 틀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현대미술은 제한된 제도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거기에 집단적 논리가 자리 잡았고, 자본과 기득권이 생겨났고, 그 결과 미술은 부와 명예의 코스프레를 위한 장식품이자 기호품의 이미지로 박제화되었다. 유통제도권 내에서 그림값이란 숫자로 대체된 미술은 2016, 7년의 겨울 광장에선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이 빛나게 한 민주주의를, 미술이 또 향유하는 역동적인 운동장이었다. 미술은 그곳에서 작가명 없는 익명으로, 자본가가 아닌 시민들을 만나고·호흡하고·울고·웃으면서 미술의 근원적 기능을 누렸다.




광장은 용광로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용해해서 공동체적 발언을 주조해 낸다. 지난 100일간 광장에선 미술도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작가와 기획자, 작가와 작가, 작가와 시민, 시민과 시민들이 담장을 헐고,용융하고, 융합했다. 미술도 미적 조건 없이 시민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고 행동했다. 작가들의 그림에 시민들은 낙서를 했고, 거기에 작가들은 또 그림으로 응답했다. 작가/시민, 주/객, 예술/낙서, 토로/독백, 함성/속삭임, 그림/글, 이미지/리터러티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 함께 어울리며 광장을 거대한 표현과 발언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 자유로웠던 것이다. 미술행동과 시민 사이에서 즉발적으로 발생하는 작용과 교감과 행동에 의해, 공동작업의 결과가 전혀 새롭게 생성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적 이미지의 우연한 발생은, 기존의 미술 관습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기도 했다. 굳이 미술이란 범주의 안팎 어느 지점에 있어도 상관없을 그런 열린 소통과 교호작용이었다. (다만 오랜 기간 고답적인 미술계와 그 구조 안에서 살아온 필자 같은 경우엔, 이 현상의 교감 내지는 정보전달작용의 싱싱함에 다소 낯선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 아직은 논리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체험이지만, 광장에선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이 훨씬 건강하게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감지된다. 일찍이 미술에서 시민이 미술가들과, 또 미술가들이 대중들과 이렇게 수평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관객 참여형 해프닝·이벤트·퍼포먼스도 기획자의 로드맵이나, 작가의 아우라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이, 작가들과 함께, 작품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현상은 2016~7년의 여기 광화문 광장에서만 있었다. 기존 미술계 시스템의 바탕에서 자본, 인맥, 학맥, 기타 제도화된 미술의 한계에서 일탈하는 거대한 열림의, 또 다른 미술의 개념과 프로세스와 장르적가능성을 보았다면 내가 지나친 걸까.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흥분해 있다. 기존의 제도와 양식과 개념의 틀로부터 일탈·이탈·돌파를 시도하는 미술은 얼마나 짜릿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말이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그 광장에 빠지지 않고 내가(그리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거기서 능동적으로 시민들과 미술로 함께 했다는 사실에 난 얼마나 뿌듯해하는가. 감동이었다. 촛불시민이자 미술인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신-에피소드 1 ● 황당한 일이었다. 분명 정부종합청사를 가로막은 경찰차벽 앞에서 '광화문미술행동'이 시민들과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을 붙이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경찰버스가 나오지 않은 것. 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인데 그 대상인 경찰차벽이 없다니 닥친 현장에서의 그 난감함이란. 그 자리에 있던 미술행동 대장인 김준권 형과 부대장인 류연복 형, 총무 김남선씨와 나, 그리고 몇 명의 멤버들 모두 허탈했다. 리어카에 가득 실어온 각종 그리기 도구들이 무색했고, 그 리어카 한쪽 귀퉁이에서 하릴없이 혼자서 펄럭이는 '광화문미술행동' 깃발이 야속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적당한 한기와 바람이 우리들의 눈에서 초점을 흐리게 했다. 준권 형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떡하지?"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탄식이다. "다른 자리를 찾죠, 뭐. 여기만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닐 테니."라고 대답하는데, 연복 형이 끊고 들어온다. "아무 차벽이나 골라서 하자고. 다 광화문인데. 괜찮아." 모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후 1시의 광장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모두의 눈이 동시에 모아진 곳은 미대사관 앞에 장기적으로 정박(?) 중인 굳건한 경찰차벽이었다. 바로 앞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광장도 넓게 비어있다. '퇴진행동'의 메인 무대로 치자면 맨 뒤쪽이니, 행사가 시작되어도 다른 곳에 비해선 인구밀도가 다소 낮은 곳이라 작업조건도 좋은 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미 대사관 앞으로 갑시다. 저기 경찰차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뿌릴 내리고 있을 터이니"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권 형과 연복 형은 김총무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곤 벌써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가고 있다. ● 불과 이삼일 전에 급하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직 어떤 계획도 없었다. 준비고 뭐고 게릴라 특유의 현장 임기응변으로 첫날 작업을 하기로 했다. 준권형과 김총무는 부랴부랴 청계천과 여기저기에서 사다리·실사출력천·물감·크레용·기타 물품들을 준비했고, 웹자보를 이은걸씨가 디자인했다. 난 2주쯤 뒤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한 터라 지금은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할 일밖엔 없었으니,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에 이르자 바로 출력 롤지를 대략 15m씩 너덧 개를 바닥에 테이프로 고정하며 낙서를 시작했다. 제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거기에 쓰고, 낙서하고, 그리고, 밟고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 이 즉흥적인 첫 번째 해프닝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들과 작가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는 시민 관객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자 곧바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깔깔거리면서 낙서를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서예가 여태명 선생의 온몸을 사용하는 큰 붓질로 서예퍼포먼스(김준권 형이 미리 기획한 프로그램)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그 현장을 둘러싸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또 낙서에 동참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민주주의 만세!" 등과 같은 낙서가 대세였다. ●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는. 마침 화가 송용민씨가 붙박이로 붙어서 현장관리를 한다. 자발적이고 자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멤버들의 참여 시스템은 그렇게 자연스레 파르티잔의 게릴라 전술처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12월 31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이나믹한 이미지들이 수십 미터의 대형 천위로 집적되었다. 촛불시민들의 박근혜정권에 대한 심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은 컸다. 그것을 차벽에 붙일 때(경찰들과 실랑이가 있었고, 또 12월 31일의 작업 중 가장 큰 차벽작업은 분실되기도 했다)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미술행동의 '차벽공략'이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추신-에피소드 2 ● 해가 바뀐 2017년 1월 7일. 새해 첫 프로젝트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衆志動天"이란 타이틀을 실행했다. 새해 초부터 준권형과 전화로 컨셉, 타이틀, 방법 등에 관한 많은 협의를 했으나 당장에 어떤 작가도 1~2주 만에 신작을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라, 80년대 오윤·이철수·홍선웅·이상호의 목판화와 류연복의 근작·정찬민의 근작·이윤엽의 백남기 농민 등의 목판화를 대형 실사출력한 사이로 이윤엽의 파편화시킨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거기에다가 시민들이 참여하고 낙서할 빈 여백을 만들었다. 시민들과 작가들의 경계가 없어지는 작업이다. ● 이날도 또 재미있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지난주까지 차벽에 작업을 부착할 때 우리를 바라만 보던 경찰이 이날은 부착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실갱이를 하던 우리는 긴 그림은 들고 서서 전시를 하고, 3m높이의 그림은 차벽 앞 도로바닥에 작품을 설치했다. 벽화가 바닥화로 바뀐 것. 차벽에 그림걸기라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에, 또 즉흥적인 바닥화로서의 데몬스트레이션을 추가한 행위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그림을 함께 들어주기도 했고, 또 정찬민의 '세월호 미귀환자 초상'에는 촛불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 7~8시경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한 틈을 타서 우리는 급하게 이 그림들을 차벽에 부착했다.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격려의 함성을 우리에게 보내며 부착을 도와줬다. 그러다가 한 10분쯤 뒤에 보니 그림 한 점이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난 위치를 바로잡으려 까치발로 그림을 떼서 손에 든 채로 돌아서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는 것 아닌가. 시민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나를 빙 둘러싸고는 포박하듯 내 양팔을 붙잡고 "당신, 누구야? 왜 그림을 떼는 거요?, 당신 경찰이야? 아니면 박사모야?"라며 소리쳤다. ● 이런 황당한 일이... 바로 옆에서 울리는 메인 무대의 거대한 마이크 소리 때문에 "내가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입니다"라고 나를 밝히는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아서, 1분 정도를 난 멱살이 잡힌 채로 그들에게 '박사모'로 오인되어 혼쭐(?)이 났다.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이 차벽의 그림을 내가 폐기하는 줄 오해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림을 떼지 않겠다는 내 몸짓이 그들에게 입수된 다음에 비로소 내 멱살은 풀렸다. 봉변(?)을 당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행히 민주시민들이라 폭력은 당연히 없었던 터, 시민들은 이 그림을 자신들의 마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기에 나를 제어한 것이었으니까. 언제 미술이 대중들에게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흐뭇함과 함께 그간의 시민들과 유리된 채로 오로지 자본적 가치로만 존재해 온 미술에 대해서 약간의 자괴감도 동반되긴 했다. ● 확실히 광장에서는 작가가 아니라 시민과 대중이 주체다. 생각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을 운영한 건 작가들이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건 촛불시민들이었다. 자본을 가진 재벌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이 '메쎄나'였다. 십시일반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어주고, 작은 판화전에서 작품을 사주고, 일회성 경매에서 판화나 글씨를 응찰해주고, 또 어떤 분들은 따로 봉투를 전해 주고... 바로 그런 시민들이 마련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함께 뒹굴고 놀았던 것이었다. 재미있게 놀아서 이런 사랑도 받았다. 불의하고 불법적이고 무능한 정치권력 앞에서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한 사회에서 참여하는 시민들의 윤리적·정치적·사회적 의식의 성숙도가 이리도 높을 수 있는지를 1980년의 광주에서 전해들은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내가 있었다. 광화문미술행동도 있었다. 시민이자, 작가이자, 기획자로 바로 거기에 우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정치적 승리이자 미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숭고함과 넉넉한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으랴. 이런 미술행동의 동기를 제공해 주신 촛불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촛불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 김진하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책 출간  

김준권, 김진하 엮음  

ISBN: 978-89-966435-9-3  

나무아트 刊 / 100페이지 / 24*19cm / 800부 한정판 / 값 15.000원


Vol.20170504d |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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