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거리를 가득 메우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을까?
징그럽도록 많은 인파와 상인들의 장삿속에 진저리를 쳤지만, 막상 사람이 없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코로나 19’가 휩쓴 여파가 실로 대단했다.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문 닫은 가게가 속출하고 건물을 헐고 다시 짖거나 실내장식 하는 점포도 있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한동안 쉬면되겠으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 비싼 가게 임대료에 얼마나 버텨낼지 모르겠다.
소비심리마저 꽁꽁 얼어붙어, 이러다 나라는 배겨날 수 있을까?




남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제 사이비종교는 과감히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라지만, 사람을 쇠뇌 시켜 갈취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행사는 물론 사소한 모임까지 취소하는 판국에
신도들을 교회에 집결시키는 인간들이 살인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천지’란 정신 나간 교주 말에 어떻게 그 많은 신도들이
모든 걸 다 갖다 바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한 둘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이 영악해도 참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국 좋아 하지마라.’ 죽고 나면 한 줌의 흙일 뿐이니, 제발 사람답게 살아라.




인사동에 사람 찍으러 왔으나, 사람이 없으니 찍을게 없었다.
사람만 보이면 쫓아갔으나, 그마저 마스크로 무장한 괴한 같았다.
미세먼지도 심각한데다 전염병마저 설쳐대니, 머지않아 거리엔 얼굴가린 사람뿐일 게다.
어쩌면 산소 호흡기를 짊어지고 다닐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이달 전시소식지 한 권 구해, 손기환씨 판화전이 열리는 ‘나무아트’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관장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 관람객이 몇 명되지 않는다며, 한 숨을 쉬었다.




전시작을 돌아보니, 거친 칼질이 빚어낸 반 풍경적인 궤적들이 마치 지옥도를 보는 듯 했다.
분단현실을 상징한 정치적 도해가 한스럽게 또는 격렬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칼질의 힘을 한지릴리프기법에 의한 요철로 드러내어 더 강한 느낌을 주었다.
그동안 궁금하게 여겨 온 릴리프기법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김진하씨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그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룩해낸 작품들이라 작가에 대한 존경감이 일었다.




전시장에서 커피도 얻어 마시고, 제작기법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손기환 판화작품집도 한권 가져가란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판매하는 책을 어찌 그냥 가져올 수 있겠는가?
소중한 책 한 권 살 수 없는 형편이 부끄럽긴 했으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모두 돈을 우습게 여긴 죄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하고 거지같이 살지라도, 돈만은 발가락 사이 때보다 더럽게 여기며 살 것이다.




인사동거리는 가보지도 못한 평양거리처럼 적막에 휩싸였으나,
전시장에 들어가면 인사동만의 또 다른 기쁨조들이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야! 봄 가기 전에 빨리 물러가거라.
양심은 전당포에나 맡긴 정치꾼과 사기꾼들이 우글대는 이 더러운 세상,
꽃놀이라도 한 번 가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가.

사진, 글 / 조문호














손기환·목판화 2019-1981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20_0226 ▶︎ 2020_0310



글_손기환, 김진하 || 판형_국배판 22.5×28cm || 초판발행_2019년 12월20일

ISBN_979-11-88845-02-6(부가기호 97650) || 정가_20.000원 || 발행인_김진하 || 발행처_나무아트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405c | 손기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시공의 단층과 떨림-손기환 목판화의 역사적 형상성 ●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풍경이 어느 지점에서 단층처럼 어긋나고 다시 다른 시점의 풍경으로 연결된다. 또 그 풍경은 거기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고 진동한다. 대기도, 산도, 물도, 나무도, 기타 건물도 모두 비끼어서 흔들리듯 정지를 거부한다. 떨림-움직임-흔들림의 칼의 궤적, 시공을 건너뛰는 입체파적인 공간 몽타쥬, 호방하게 편집된 구도 등이 화면을 거침없이 견인한다. 그 화면은 "풍경화인가?" 싶을 정도로, 대상은 풍경으로 묘사되지 않고 활달한 필치의 밑그림과 듬뿍듬뿍 퍼낸 칼질로 거칠다. 풍경은 풍경이되 시각적 대상으로 소위 '멋진' 풍광은 해체되고 의도와 표현의 결과물인 어떤 상징이 '풍경'을 대신한다.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을 통한 작가의 이념 혹은 지향성의 기호라고나 할까, 그도 아니면 감각 뒤에 숨겨진 분단의 현실적 리얼리티를 풍경으로 번역한 것이라 할까. 그러니까 그것은 그 풍광을 감상이나 관조의 대상을 넘어서서 현재 그렇게 존재하는 풍경의 조건에 대한 인식적, 그리고 반어적 접근으로의 풍경, 즉 시각에 대한 '反-풍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A.P 1/ 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68×140cm_2017


"反-풍경. 풍경에 反한다는 것. 눈으로 보는 시각의 범주를 넘어서서 풍경을 풍경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 왜일까. 근대 이후 풍경은 죽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게 하라"는 명제처럼, 산업사회 이래로 인류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지명하고 그 능동성을 사살했다. 그런 폭력적 인위에 의해서 풍경도 자연과 함께 그 성격을 박탈당했다. 한국에서는 제3공화국에 들어서 서구의 근대적 개발방식을 추종했다. 국토는 난개발 되었고, 거기에 분단국의 군사적 목적까지 더해져서 풍경은 더 능욕을 당했다. 손기환의 「한강」연작은 이런 국토와 풍경의 죽음을 쓸쓸하게 독백한다. 자연은 간데없이 회색 가득한 화면에 GP와 벙커 넘버만 기입된, 전술적 작전지도의 개념이 '풍경화'를 대체한 현실을 형상 없이 그렸다. 뿐인가, 「DMZ-강박산수」연작에서는, 그가 근무했던DMZ의 기억과 전통적인 조선시대 문인화나 산수화에서의 풍경들이 오버랩되는 강박을 기록한다. 거꾸로 옛 산수화를 보면 DMZ의 풍경이 떠오르는 강박도 동시에…. 그것도 명료한 형광색으로. 그래서 손기환의 '산수山水'는 풍경이되 '反-풍경'이다. 한반도의 풍경, 그 표피적 일루젼 뒤에 감추어진 분단현실의 심리적 풍경이자,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도해라서 그렇다." (김진하,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손기환의 회화』 중에서, 나무아트, 2017)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A.P 1 / 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68×140cm_2017


'반-풍경' 작업을 하는 이유는 작가의 동시대적 상황에 대한 태도와 통일하는 미적 이념에서 기인한다. 즉 그의 세계관과 미학이 향하는 건 감상의 대상인 경치가 아니라, 그런 작가의 생각과 시선을 반영하는 감성적 기호(記號)로써 분단풍경의 드러냄이다. 손기환만의 개인적 서정과 역사적 서사, 조형방식, 화면배치, 판각기법 등을 통해서 형상화된 도상의 상징적 조형방식으로 말이다. 손기환의 목판화에서 상징을 유발하는 주된 매개 이미지는 산수(山水), 즉 산과 강이다. 풍경으로 산과 더불어 강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성을 아우르면서 항일, 분단, 그리고 그런 역사적 사건들이 문화적인 결과로 반영되는 시간적 흐름과 공간에 대한 서술적·상징적 표지(表識)다. 거기에서 물이란 소재는 한강이나 임진강 등을 의미하기도, 또 현재적 일상과 과거의 역사를 연결하는 시간성을 리드미컬하게 매개하는 역할도 한다. 실제로 물이란 소재는 문예작품에서 그런 이미지와 역할을 한다. 예컨대 한 시대와 지리를 가로지르는 장편의 문학작품엔 큰 강을 의미하는 대하(大河)란 접두어를 그 장르적 특성으로 쓴다. '임꺽정'이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이나 '한라산'과 같은 대하시처럼 물은 역사성을 함축한 의미다. 장엄한 국토풍경과 함께 민중에 대한 삶의 이력이 산과 골, 강과 호수, 도시와 마을마다 유장하게 배어있다. 그 삶의 애환이, 역사로, 그리고 현장의 삶의 애환으로 드라마틱하게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지는 것이 대하문학작품이다.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50×135cm_2016


물론 손기환의 회화나 판화는 장르와 형식적 조건상 그런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길고도 긴, 질기고도 질긴, 민중의 역사가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고 환원된 형상을 띄는 핵심적 이미지로, 손기환의 정서와 지향성을 드러내는 표현적이면서도 개념적인 사유의 결과다. 작가는 그 핵심적 형상으로 말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에 대해서, 분단조국의 현실에 대해서, 월남한 아버지의 기원과 자식인 자신의 희구를 반영하면서 목판화란 장르형식과 드로잉, 그리고 칼과 맛 프린팅으로… 바로 그런 과정이 화면에서 목판화적인 상징성으로 돌올하게 된다. 특히 근작에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조형적 질료인 '물(水)'은 새로운 형식인 '릴리프'기법을 구사하는 더 큰 단서가 된다. 물이 있는 빈 여백을 채우는 묘철의 한지 표정으로 말이다. 이런 손기환의 목판화를 통해서 40여 년을 가로지르는 작업의 줄기는, 결국 역사는 단절되거나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시제와 공간을 유동하며 넘나드는 움직임 혹은 운동의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의 판화에서 한강이나 임진강(『강 건너 고향』 연작), 기타 통영이나 제주 풍경 등에서 물의 흐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시간성과 공간성이 역사성으로 대체되는 한 징표다. 그것은 일종의 염원이다. 크게는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대체하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통일, 작게는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식민지와 분단 이후 군부독재로 대변되는 산업화시대를 거친 지식인 작가가 조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인식의 문제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한 부친의 실향에 대한 슬픔-망향-그리움-귀향에 대한 간구가 그의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피난과 이산을 통해서, 남쪽에서 정착하는 과정과 그 이후 귀향에의 염원을 안고 사는 것은, 분단이라는 정치사회적 사건과 문화현상의 한 전형이라 하겠다. 문학에서야 분단문학을 통해서 이런 크고 작은 실례들이 다양하게 형상화 되었지만, 미술에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서구 미술의 세례를 받은 모더니즘 형식론이 화단의 축을 형성하면서 그 서사적 형상성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런 와중에 손기환은 회화와 만화를 통한 '팝 Pop'적인 방식으로 대하적 역사성을, 목판화를 통해서는 가족사로부터 분단으로 확대되는 제유(提喩)방식의 서사적 서정성을 펼쳐 보인다. 「물의 노래」, 「의병」, 「강 건너 고향」, 「우리 동네」 등으로 명제화 된 다소 을씨년스런 풍경들의 '분단기호'를 통해서 그의 이 '반(反)풍경'적인 풍경들은 한스럽게, 때로는 건조하고 을씨년스럽게, 또 때로는 장렬하고도 크게 우리 근현대사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풍경화'나 '산수화'의 자연 감탄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게 한국현대사적 맥락으로 '山水'를 소환하며 재개념화하면서 내용과 형식의 연관이 자기 완결성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손기환의 목판화가 주목받아야 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기실, 한국 근현대목판화에서 역사·정치·사회를 정면으로 소재화해서 다루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았고 또 단편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양기훈의 『혈죽도』, 1909년 『대한민보』의 이도영 그림-이우숭 판각의 만평 형식의 연재물, 그리고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의 이상춘 삽화가 있다. 이후 해방공간에서 정현웅·손영기·최은석 등의 좌파적 문예운동 이후 1980년대 민중미술에 이르기까지 그 맥락은 끊어졌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 오윤과 이상국의 등장, 80년대 이철수·조진호 · 홍성담 · 『두렁』 · 『목판모임-나무(손기환 · 이상호 · 이섭 · 정원철 · 김억 · 김진하…)』 · 화가 문영태가 기획한 『시민미술학교』 · 홍선웅 · 김준권 · 류연복 · 최병수… 등의 활동, 90년대의 이윤엽으로 다시 연결된다. 그러니까 손기환은 80년대 초반부터 『서울미술공동체』 · 『민족미술협회』 · 『목판모임 나무』를 통해서 목판화운동의 주역 중 하나로 지금까지 작업해오고 있는 것이다.

손기환_물의 노래-한강, The song of Water-Han river_A.P 2 / Ed. 25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물의 노래-한강, The song of Water-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최근 손기환의 목판화는 그 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일단 스케일이 대형으로 커지고, 그다음으로는 프린팅 과정에서 한지릴리프(Relief) 기법을 수용했다. 규모가 커진 작업은 판각이전 활달하고 액티브한 드로잉의 힘을 묘철의 표정으로 더 깊이 반영한다. 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몸의 반응을 실어냈다는 것. 저간의 손기환의 작업은, 회화와 판화를 막론하고, 디테일을 생략한 채로 짧은 작업시간의 집중력에 의한 표현성과 작업내용의 통일이 빚은 형상으로 그 개념성이 강했다. 그런데 큰 판화로 전이되면서 드로잉의 붓 맛은 더 강하되, 칼의 쓰임이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심미적인 '기운'이 더 '생동'하게 된 것이다. 뭐랄까, 서사적인 풍경화의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추상표현주의적인 몸짓으로 드로잉하고 판각한 화면은, 그래서 살아서 진동하고 요동치는 듯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역설적으로 한지 저부조(低浮彫) 기법의 장인적 과정을 수용하면서 더 꼼꼼해진 입체적 화면은, 한지의 물성을 제대로 발현하며 질료적 물질성과 촉감이 더 견고해졌다. 판각하고 찍은 판화를 다시 빈 여백에 묘철로 텍스쳐를 준 판에 대략 6~7겹의 배접으로 릴리프를 한 이런 방식은 한지로만 가능한 기법이다. 긴 시간 반복되는 단순한 노동력과 작업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드로잉과 판각에서의 회화적인 액션과, 릴리프 과정에서의 정교한 공예성을 합치면서 이전의 판화와는 다른 얼굴이 탄생한 것이다. 작업 내용과 개념이란 몸과 뼈대는 여전하나, 피부와 옷은 훨씬 세련되고 중후한 묵직함을 더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 조형적 근육을 더 튼실하게 키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기환_희망 Hope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44×38cm_1994


한편 손기환의 또 다른 특징인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를 많이 생략해버린 실루엣의 형상은 여전하나, 근골과 뼈대로 구축된 대상의 형태감과 큐비즘적 공간 및 시간의 몽타쥬 형상은 강력하고 동적인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거기에 대담하고 호방한 터치를 곁들인 칼의 구사는 소재인 강과 산, 그리고 여타의 구조물과 건물들을 진동시키듯 시공을 흔든다. 대상의 정밀한 재현보다는 화면 전체를 동적인 움직임의 궤적으로 표현해냄으로 인해서 가능한 방식이고, 그것은 실루엣으로 대상의 외적 형태를 취했을 때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제거된 평면성의 형태적 미감과 칼의 표정 때문에 그렇다. 마치 수묵화에서 운필의 운용이 빚은 이미지가 대상의 객체성을 대체한 주관적 표현성처럼 말이다. 이 지점은 손기환의 회화와 목판화가 완전히 다른 조형적 감수성을 띄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념과 인식을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발언하고 소통하는 '물리적 풍경'이란 반성적 사유의 회화에 비해, 이 목판화는 '심리적 풍경'으로 좀 더 강한 표현적 감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월남한 부친의 귀향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손기환이 대신해 드러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기환_6월-고문 June-pain_A.P 1 / Ed. 5_한지에 목판화_38.5×65cm_1987


이처럼 미디어와 장르에 따라 같은 소재라도 작가적 어법과 장치를 달리하는 건 분명히 긍정적이다. 다양한 여러 장르의 미디어를 다루고 있는 작가(손기환은 회화, 만화, 애니메이션, 목판화 등의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에게서는 각 미디어마다의 특징에 따라 진술방식을 달리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의 면모가 필요하다. 회화와 목판화에서는, 적어도, 손기환이 나름의 자기 언어와 스타일을 각기 독립적으로 확보했음은 분명하다(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쪽은 필자가 그 정보나 전문성이 모자란지라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증거하는 그의 독자적 시각작업의 형식성이 정치적 함의를 자연스레 발생시키는 소통성으로 연결되는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관객들에 대해서 계몽적인 태도로부터 벗어난 수평적인 작품의 언술과 제시방식이 주는 교감의 폭이 넓어서 그렇기도 하다. ● 손기환은 난해한 미학적 수사를 통해 관객에게 선험적인 미적 아우라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미적 방식인 '팝'적 이미지와 거기에서 연유하는 소통과정의 정치적 공감력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내용과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목판화에서 이런 소통의 시도는 자연스럽다. 형식이 내용을 견인할 수 있는 튼실한 기량이 있어서다. 미술작품의 이미지가 어떻게 소통의 정치학으로 연결되는가는 작가의 세계와 작업에 대한 태도와, 거기에 비례하는 매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표현 역량에 의해서 증명된다. 목판화를 다루는 손기환은 능숙하다. 그러면서도 기술적·기능적으로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테크닉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 많은 목판화가 작가의 뛰어난 기술력은 보여주고 있으나, 적어도 자신의 미학적 이념과 목판화라는 매체의 개념적 합일에 대한 인식적 논리를 드러내는 경우는 빈약하다. 그런 기술과 기교가 무기력하고 무용한 이유다. 손기환은 자신이 목판화를 진행하는 분명한 목적성과 거기에 따른 문제의식을 스스로가 작업으로 증명하고 있기에, 우리시대 중요한 목판화작가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목판화 작업에 대한 관념적·문화속물주의자의 껍데기는 모조리 벗어 던진 채 자신의 미학적 목표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하다. 특히 그의 근작은 이런 지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Well made'의 미적 표현성과 함께,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말하는 그의 목판화에 대한 역사적·조형적 문제의식으로 말이다. ■ 김진하



Vol.20200223a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인사동에 볼 만한 전시가 여럿 열려, 내친 걸음에 모두 돌아보았다.

정영신씨와 인사동 간 지난 5일은 날씨가 추워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었는데,

전시장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리는 이재삼씨의 달빛 녹취록이었다.

목탄으로 드러낸 자연의 형태는 단순한 풍경을 너머, 깊은 어둠속에 잠긴 침식된 풍경을 보여주었다.



홍매화를 비롯한 소나무, 대나무, 물안개, 폭포 등의 대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빛이란 제목을 붙인 거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요한 적막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장엄한 분위기가 처음엔 긴장감을 주었으나, 이내 마음이 편해지며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마치 깊은 산중의 새벽 법당에 홀로 선 것처럼...



수행하는 스님 방에 작품을 걸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을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빛 소리 같기도 했다.



가슴에서 밀려오는 감흥은 보는 이의 신체 오감을 자극했다.

신종 코로나에 주눅들지말고, 신비로운 달빛에 한 번 취해봄이 어떨까?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소개된  이재삼씨의 글과 작품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59



 

두 번째는 갤러리 미술세계’ 5층에서 열리는 고 이존수의 재조명전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를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화가 정복수씨를 만나 전시장 순방에 함께 했다.


 

이존수씨는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불운의 화가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변방의 작가였다.

부산에서 활동한 70년대 만난 오랜 지기지만 80년대 초반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많은 벗들을 사겼으나, 특히 중광스님과 친하게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이존수씨가 중광스님의 그림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상경할 때는 그도 개털신세라 사는 게 어려웠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빨래집게 전시로 조명받아 유명세를 탔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 유명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는데, 없는 사람이 돈이 생기면 이렇게 변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유명화랑과의 전속계약을 노예계약이라며 법정투쟁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작가의 생명줄을 쥔 화랑 측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였다. 


 

한 동안 그를 잊었는데,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것도 죽은지가 한 참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기구한 운명에 억장이 무너졌으나 흐르는 세월에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전시소식에 죽은 사람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 성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개의 작품들은 줄거리 없는 설화성을 띄고 있다.

마치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 조각들을 형상화시켜 놓았다.

그건 작가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같았다.

그 형상들은 전설로 떠도는 설화가 아니라 오늘의 신화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이었다


 

 

전시장에는 세로 1,4미터에 가로 26미터에 이르는 대작이 걸려 있었다.

평생도라 이름붙인 작품에는 삼라만상 희노애락과 우주의 신묘를 다 담아 놓았다.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 이존수의 선험적인 신기어린 세계에 한 번 푹 빠져보시길...


 

 

그 전시장에서 한층 내려와 유혜정씨의 그림읽기 내친걸음전에 들렸다.

이 전시는 평창동 아트스페스 퀼리아에서 끝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열려 내친걸음이라 했으나,

뜻은 내친(內親) 걸음이다.



마침 작가가 자리에 있어 차 한 잔 얻어 마셨는데,

마치 은밀한 여인의 방에 들어온 듯, 눈 높이을 깔아야 했다.

작품들이 도발적이라, 훔쳐보듯 살펴보았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성에 대한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냈는데,  작가의 그림일기 같았.


 

작가는 이 작업을 하게 된 동기가 무의식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그렸는데, 성에 과민 반응하는 세태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을 쉬쉬하며 웃음거리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춘화라고 하대했던 옛날이야 그렇다치고, 지금이 어느 때인가?

세상에 성애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게 어디 있나.


 

이 그림들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이성으로 볼 수 있으나,

작가는 여성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를 그렸다.

그 본질은 여자라기보다 그녀가 아우르며 풍기는 밝음이다.



아무튼, 유혜정씨의 그림은 매혹적이다.

때에 따라 변하는 감정의 찌꺼기까지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적나나하게 드러냈으나 작품들이 음란하기보다 맑다.  

그 해맑은 여인의 꿈길을 한 번 걸어보심은 어떨까요?


 

네 번째 들린 곳은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류연복씨의 온 몸은 길이다전이다.


 

이 전시가 열리는 나무아트는 민중미술의 본산이다.

그림마당 민에 이어 93년도에 문을 열었는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다.

'나무화랑'처럼 좋은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이 인사동에 별로 없다.

오층 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보석같은 알짜배기다. 


 

정복수, 정영신씨와 전시장으로 올라가니, 전시작가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흥덕, 송 창, 김재홍, 장경호, 성기준, 김이하씨 등 많은 분이 와 있었다.

반가워도 전염병에 주눅들어, 싫어 할까바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진천 전시 빠진 작품과 신작도 있었다.


 

류연복씨의 목판화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베어있다.

때로는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칼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정적이다.

국토를 온 몸으로 껴안은 내면에는 민중의 한이 서려있다.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류연복씨를 좋아하는 이유다.

비실비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목판화와 함께 한 세월이 어언 35년인데, 한결 같은 뚝심의 화가다.

우리 현대목판화사에서 족적을 분명하게 남긴 문제 작가다.

그의 목판화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국토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올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글과 전시작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75



한 걸음에 장엄함과 선험적이고 매혹적이며, 민족적 한의 정서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으니,

일타 쌍피가 아니라 일타 사피가 아니겠는가?

주말부터 날씨도 풀린다니, 인사동에 전시보러 가자.



이재삼 달빛 녹취록‘ / 3월 3일까지 / 갤러리 그림손

이존수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 / 2월 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5층

유혜정, '그림읽기, 내친걸음' / 2월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4층

류연복 '온몸은 길이다. / 2월 24일까지 / 나무화랑

 

사진, 글 / 조문호













 

 

 

 




안녕하세요. 인사동을 사랑하는 분들이시여!




지난 10일 ‘툇마루’에서 오랜만에 ‘인사모’ 모임이 있었다.
민건식회장을 비롯하여 김완규, 박일환, 윤경원, 전국찬, 박원식씨가 나왔는데,
'인사모' 회원의 절반도 나오지 않았다.
다들 바빠서 못나왔을까? 아니면 인사동의 매력을 잃어서 일까?




그 날 나오다 보니, 옛 민정당사 자리의 건물이 완공되어 문을 열었더라.
상호가 ‘안녕 인사동’이라는데, 안녕이란 인사말이 왜 작별을 연상시킬까?
인사동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건축물이 주는 위화감에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 그럴 것 같다.




‘안녕 인사동’은 상업공간과 나인트리호텔, 인사센트럴뮤지엄으로 구성된 복합몰이다.
상업공간은 먹거리, 멋거리, 즐길 거리, 볼거리로 구성되었다는데,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인사동에서 가장 넓은 ‘인사센트럴뮤지엄’이다.
지하1층에 약850평의 전시공간이 마련되었는데,
오는 22일부터 열리는 첫 전시는 ‘미니언즈 전시’라고 한다.




맞은편 자리에는 대법관을 지낸 박일환 변호사가 앉았는데,
법란이나 마찬가지인 요즘의 시국을 보는 솔직한 견해를 듣고 싶었으나,
자칫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될까 입 다물었다.




요즘 박일환변호사는 '차산선생 법률상식'이란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법률 이야기를 들려주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치솟고 있다.

검찰조직을 잘 알아 요즘의 시국에 대해서도 사이다 발언이 나올 만도 한데 말이다. 


 

마침 옆자리에는 정복수, 김진하, 손기환씨 등 화가들이 앉았는데, 축하할 소식을 들었다.
정복수씨로 부터 제31회 이중섭미술상을 받게 된 시상식 안내장을 전해 받은 것이다.
시상식은 11월7일 오후5시에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리니, 다들 축하해 주시기 바란다.




돌아오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다가 사진가 이정환씨를 만났다.
이처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골목골목 박혀있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 들어 선 건물 상호가 ‘인사동 안녕’이 아니라 ‘안녕 인사동’이니, 한 번 희망을 가져볼까?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박재송사진]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성난 민심이 서초동 검찰청 앞을 가득 메웠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에서 개최한 제7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당초 십만명을 예상했으나
그 보다 열 배나 되는 백만 여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정치검찰의 표적수사와 그들이 흘린 정보를 받아쓰는 언론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성공적인 촛불집회를 점치기는 했으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스크랩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그동안 보름넘게 끌어온 감기몸살로 꼼짝 못해 이번엔 꼭 나가기로 다짐했으나,
몸 추스르기 위해 전 날 정영신씨 따라 봉화장에 간 것이 무리수였다,
촛불집회가 있는 날 자리에서 일어나다, 한쪽 다리가 힘을 쓰지 못해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스크랩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그 동안 전시나 문상을 가겠다는 약속조차 번번이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구급차에 실려서라도 갈 것이라고 큰 소리쳤으나, 또 헛소리한 셈이다.
결국 이불 밑에서 만세 부른 꼴이 되고 말았다.
하기야! 그 많은 인파에 늙은이는 나오지 말라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스크랩 / 박재송사진]


박근혜 탄핵이 1차 촛불혁명이라면, 검찰 적폐를 척결하라는 이번은 2차 촛불혁명"이다.
이제 정치 권력화 된 검찰의 대 수술은 피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공수처’ 설치와 함께 검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물갈이해야 한다.



[스크랩 / 안창홍작]


지금 문제를 만드는 윤석렬 검찰총장만 해도 검찰조직이 얼마나 섞었는지 잘 보여주지 않는가?
윤석렬 검찰총장은 현 정권에서 검찰개혁을 위해 민정수석이었던 조국 장관이 내 세운 인물이었다.
그동안 정치권력에 얼마나 알랑방귀 뀌었으면, 그를 믿고 맡겼겠는가?
사실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배반하고 '검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이제, 검찰이 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절대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칼 자루는 현 정권이 잡고 있으니, 국민들의 강렬한 요구를 거역할리 없다,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법적폐를 매듭 짖고, 산적한 국정에 전념하기 바란다.


[스크랩 / 성유나 사진]

그 날 밤늦게 SNS에 올라오는 사진으로 현장 분위기를 감지했는데, 짜릿한 감동이 일었다.
'서울중앙지검'을 가로지르는 8차선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에 놀란 것이다.
‘광화문미술행동’ 팀에서 판화를 찍어 주거나 서예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 날 현장을 지킨 반가운 분들의 사진도 여러 장 올라 와 있었다.


[스크랩 / 김진하 사진]
 
그러나 현장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 올릴 사진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빌리기도 하고, 언론사나 지인들이 올린 사진들을 양해없이 스크랩했다.
도적질 소식이나마 검찰개혁을 위해 널리 양해해 주길 바란다.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이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국민의 명령이다,

“공수처를 설치하라. 검찰조직을 개편하고, 부패 검찰을 처단하라”




[스크랩 / 김진하 사진]


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박재송, 정영신, 김진하, 이태호, 이정환, 성유나 /그림 안창홍작 / 글, 조문호 '




[스크랩 / 김진하 사진]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 문영태, 변혁기의 作家 혹은 志士-


<작가·선비·지사>

영태형님은 사람들에게 인정 많고 관대했으되 그의 세계인식은 매우 단단한 분이었지 싶다. 80년대를 오로지 미술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신학철 선생 말씀처럼 큰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지사였다. 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등의 활동 땐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이며 지원을 했고, 「민미협」창립과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운동의 전면에 나설 때도 그랬다. 90년대 이후 김포로 낙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운동에 관한 자신의 전력을 자랑하거나, 타인들을 비방하거나, 서운해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여러 지식에 관해서는 달변이었지만, 미술판 얘기가 나오면 먼저 상대방의 말을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듣고 나서 말했다. 선비 같은 담담함. 신사이자 지사였다.


그러나, 확고한 세계인식과 담백한 인격은 작가로서의 출세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작가는 자신의 내·외면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해서 집요한 욕망으로 표현하거나 발언하는 존재인데, 그러기엔 영태형님은 그 품성이 너무 담백했다. 또 개인적 작품보다는 미술운동이라는 명분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온존한 개별성과, 시대현실과 더불은 운동미술과의 사이에서 작업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을 것이다. 괴리와 간극이 컸고 고민이 많았을 터인데, 작가적 욕망보다는 문화운동가의 대의를 선택했기에 영태형님의 작업은 자연스레 소극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람의 재주는 그릇과 같아서 모나고 둥글고 한 것을 함께 갖출 수는 없다"라는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한 구절을 옮겨 썼듯이, 그 스스로가 대의와 명분에 따라 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여겨진다.


「그림마당 민」 관장직을 내려놓은 이후인, 91년도 '경의선' 모임을 통한 분단현장과 DMZ를 탐사한 사진작업의 국토문예적 '다큐' 혹은 '르포르따쥬' 작업은 영태 형님의 미술운동가와 작가 사이 간극을 성공적으로 좁혀주었다. 민중미술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수용한 작업이고, 또 그 개념적 접근이 성공적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찌프차와 발로 답사하며 기록한 이 작업들을 형님은 개인전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작가 문영태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80년대 미술운동으로 중단되었던 작가로서의 위치를, 이 변주된 장르와 형식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2000년대 이후엔 거의 형님을 만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세속의 출세에 초탈한 선비라서 그랬을까. 맑은 물에 사는 물고기가 탁류에선 살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랬을까…

언급했듯이 문화운동가인 영태형님은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로 진보운동권 및 문화운동 사이 각 장르 간의 연대와 공동활동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나 엄연히 그의 미술운동의 출발점은 화가였다. 80년대 초중반 당시 20대였던 나를 비롯한 또래의 후배들에게 문영태 형님(이하 존칭 생략)은 스타였다. 후배들의 미술운동을 뒤에서 진심으로 지원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81년도 개인전의 '심상석' 연작의 깊은 인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심상석'으로부터 문영태란 작가의 이후 작업과 운동은 시작된다.


<심상석 心象石>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 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다. 그리고 그 인과의 단서로 '상 象'이란 연결고리가 작용하는 보통명사다. 그런데 약간 갸웃거려지는 게 있다. 보통 '형상'이라고 하면 '코끼리 象'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人'이 붙은 '형상 像'을 쓰는데, 그래야 '마음이 새겨진 돌의 형상'이라는 의미가 정확해지는데, 문영태는 굳이 '象'을 쓴 것이다. 한문 내지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이유가 있을 터, 곰곰 생각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본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모 박사가 전한 '코끼리象' 문자가 만들어진 과정 얘기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거기에서의 설명은 이렇다. 본디 고대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코끼리를 묘사하는 설만 풍성했다. 말이 있으면 표기할 문자가 필요한 법. 코끼리를 묘사할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코끼리를 본 적조차 없으니 난감한 일. 결국 살아있는 코끼리를 히말라야 넘어 중국으로 운송하기는 불가능해서 코끼리 뼈만이라도 갖고 오게 했다. 그리고는 갖고 오는 도중 순서가 바뀐 뼈를 바닥에 나열하고 살이 없는 그 형상에 다녀온 사람의 설명과, 문자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을 첨가해서 '象'이란 문자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치하며 그 상형을 본뜬 모양이다. 즉 '象'이란 글자는 상형이되, 입체가 아닌 평면적 형상이고 거기에 상상과 추리가 개입된 문자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문영태가 이미 개념적으로 규정된 형상을 의미하는 '像'을 선택하지 않고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象'으로 '심상석 心象石'이란 작품제목을 정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물이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돌이라는 의미. 즉 현상인 마음과 물질인 돌의 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숱한 사람(민중)들의 접힌 주름 속의 삶과 상처와 애환에 대한 그의 마음을 표제화한 의도를 말이다.


'심상석'연작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종이는 펄프성분이 많은 다소 거친 마닐라지 계열 같다. 충무로 인쇄골목 지업사를 돌며 물어보니, '코끼리 똥지'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래서 습기에 약한 그 용지엔 현재 얼룩덜룩한 무늬가 자연스레 남아있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텍스쳐 효과를 위해서 표면이 거친 이 용지를 선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의 형상들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 타제·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로부터, 심리에 이르는 형상성, 기복적인 민중신앙과 같은 샤먼이나 토템적 아우라(1977-78),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한恨(1979-80),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1980),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이 흔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다.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이 작가가 지향했던 세계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신학철 선생의 언급처럼, 문영태의 초기 작업은 오윤의 그것처럼 기층민중적 한·투박한 생명의지·토속신앙적 생명관 등이 얽혀져 있다. 문영태가 자신의 호를 귀신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의 '집신集神'이라는 전통적 샤먼의 의미로 지칭했음을 보면 그것은 더 선명해진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 글쓰기를 통해서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 문화를 연구했음을 보면 그의 내면적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미술로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믿고 지향했을 터다.


그러니까 1977~79년에 이르는 작업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돌 자체에 대한 관념성(일테면 청마의 '바위'처럼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의지나 경외심 같은 샤먼적 요소)이나 석기시대 도구 같은 호모사피엔스의 문화인류학적 시점이 공존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민중들의 주름진 삶의 표정이,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두부에 가해진 물리적 상흔이 주 테마로 등장한다. 돌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작가의 경험적 서사에 의해서 어떻게 심리적인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민중성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이 작품들은 증거해준다. 특히 마지막 심상석에서는 광주항쟁에서 군부가 광주시민들에게 가한 폭력성이 물리적 상흔(Scar)과 정신적 상처(Trauma)로 동시에 흔적화된 묵시적 형상성으로, 그리고 비판적 정치성으로 확장된다. 이 단계가 비로소 '심상석'이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을 그 내용으로 견인해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심상석 연작은 여기에서 중단된다. 그 이유는 문영태가 80년대 내내 작업실에서의 작품제작보다는, 미술현장에서의 기획과 운동으로 활동의 방향성을 틀어버려서다. 작품의 소통을 통한 내용전달의 간접적 정치기능보다는, 실질적인 저항을 이끌어 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문화운동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1984년의 '힘전'사태를 통해서 현실권력이 미술에 가하는 부당한 탄압과, 이에 대치하는 조직인「민족미술협의회」가 생기기 전 80년대 초반 미술운동의 양상은 다양했다. 현실과 발언을 필두로 광자협·임술년·실천그룹·에스파그룹·목판모임 나무 등과 같은 정기적 단체전은 차치하고라도, 젊은 의식전·80년대 미술의 조망전·횡단전·시대정신전·토해내기전·거대한 뿌리전, 삶의 미술전·푸른 깃발전… 등의 단발 기획전, 거기에 문영태가 주축이 된 민중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공동으로 작업과정을 공유하는 「시민미술학교」의 개설 등 그 양상들은 쉽게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게다가 작품의 경향들은 풍자적인 사회적 발언뿐만 아니라, 서술적 역사성, 개인적 실존성과 심리, 문명비판, 꿈과 환영을 그린 초현실성 등 70년대 모노크롬 미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상성의 경연장이었다.


전두환정권의 탄압으로, 「민미협」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독재권력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미술운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양상을 중심으로 전열이 가다듬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략 이 시기부터 문영태의 '심상석'작업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학적 입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필요한 조직적 미술운동의 입장에서 '심상석'과 같은 내용과 형식의 미술은 구체적인 기능이 어려운 것이었다. 미술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기획과 더불어 「그림마당 민」의 전시까지 관여하면서 따로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정치미술의 환경과 문영태 본연의 민중적 생명관은 쉽게 용해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시대였다. 정치와 미술전·통일전·반고문전·여성과 현실전·탄압사례전·풍자와 해학전 등을 통해 공권력과 마찰한 현장인 「그림마당 민」책임자로서 더더욱 '심상석'과 같은 상징적 관념성은 진행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작가는 체질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인식으로 작업할 순 있으나, 의식과 체질로 작업하는 이에게는 쉽지 않다. 심상석은 그런 체질을 반영하는 유형의 작업이었다. '심상석'과 90년대 분단현장을 가로지르는 현장 다큐사진작업 전인 83~87년 시기, 간간히 단체전에 발표한 복사기를 활용한 흑백 몽타쥬 작업의 게릴라성에 주력하되, 회화작업을 계속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진다.


<문화운동 기획들>

'심상석'개인전(1981, 관훈미술관)과, 겨울 대성리전(1981~83)의 현장 작업 이후, 종이판화(紙版畵)개인전(1983, 그로리치화랑)을 전후해서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미술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동안의 작업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의 결과였을 것이다. 문영태 본인의 개인적인 관념세계와 시대현실과의 결절점에서, 작가이자 지식인의 실천적 미술을 지향한 것이다. 이미 '겨울 대성리전' 기획팀에의 참가도 기존 제도적 미술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띈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공고화한 사회적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 동시대적 책무를 수행하는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행동이라 여겨진다. 여기서부터 문영태의 미술에 대한 실천은, 시민들을 향한 구체적인 소통을 담보하는 '문화운동'으로 바뀐다.


일반시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시민미술학교」(1984), 뜻이 맞는 후배들이 창립한 「서울미술공동체」(1984)의 회원가입, 화가 박건과 '시대정신기획위원회'를 결성하고 1983년 제1회 『시대정신展』기획 및 1984년 한국 최초의 미술무크지『시대정신』지 창간(1984~1986),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아랍미술관, 1985), '20대에 의한 힘전' 탄압사태 대책기구,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아랍미술관, 1985), '해방 40년 역사전'(광주, 대구, 부산, 마산, 서울, 1984)참여, 이후 「민족미술협의회」창립위원(1985), 김용태·홍선웅·유홍준과 더불어 「민미협」의 전시기구인 「그림마당 민」(1986)운영에 관여하고, 또 관장을 역임(1987~88)하면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7년 정치와 미술·우리시대의 판화전·장망 판화전·우리시대의 성전, 만화정신전, 통일전·천상병 시화전·반고문전·기금마련전·여성과 미술전·통일전·중국목판화전·풍자와 해학전·그리고 기타 여러 재야단체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기금마련전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림마당 민」을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림마당 민」은 그 한 해 전에 개관한 비판적 형상미술 중심인 「한강미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안공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림마당 민」은 제도권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과감히 수용하며 5공 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미술문화운동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문영태의 진정성과 헌신성이 그 바탕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영태는 민중문화협의회(1984)-민중문화운동연합(1987)-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1989)에도 참가하며 문예운동을 실행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 및 대학가의 각종 집회 현장과의 연대와 이미지 제공을 실행했다. 대표적으로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의 시위현장에서의 대형 초상화와 소형전단목판화(류연복 판각)를 기획해서 미술의 현장적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이런 가파른 운동의 와중에 문영태가 개인 작업을 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그 결과, 90년대가 되었을 때, 화가의 리듬과 체질적인 내면의 드러냄이 중단되어 버린 상태에서 다시 화가로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대신 변혁기 미술의 대 사회적·정치적·역사적·문예적 기능과 가치를 깨달았던 문영태는 사진매체를 통해서 다큐사진으로 작업을 전환한다. 80년대를 통해서 대중적 미디어가 갖는 위력을 절감한 터라,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90년대식 역사적 담론을 위해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그 활동의 결과물들로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다. 또한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사람』이라는 글+사진집도 간행한다. 사진과 미술과 출판과 춤을 엮어낸 실험적 기획이었다. 90년대라는 바뀐 문화지형에서의 능동적인 발언을 모색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전통적인 민중문화와 민속문화의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1996~19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과,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와 같은 민속사회학적 글이 그것이다.


사실, 문화운동가로서 문영태는 일찌기 출판미디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미술보다 대중적인 출판미디어의 소통성을 일찍 깨달아서 그렇겠지만, 그 자신의 독서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시장 미술로부터, 현장미술, 그리고 출판미디어의 활용 모두를 아우르며 미술이 어떻게 동시대적 문화로 그 정치성을 확보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시대를 증거하는 아카이빙 기능에 대한 판단도 있었을 것이었다. 분단풍경 이전인 80년대에도 부정기 간행물이자 전시도록을 겸한 『시대정신』1·2·3권을 비롯해서, 정기간행물이자 민미협 회지인 『민족미술』, 『80년대 탄압미술사례집』등의 발간에 관여하며 동시대 문화의 정치적 운동성과 그 당위에 대한 소통공간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기획력과 실행력,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80~90년대를 관통하면서 민족민중미술에 뚜렷한 문화운동의 족적을 남긴 문영태였지만, 작가로서는 다소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운동으로 인한 본인의 작업단절도 그렇지만, 90년대 야심차게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작업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해서다. 화가가 다큐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천성이 무욕인 문영태는 자신의 작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작가로서의 지명도를 확보하는 데 대해선 무심했을테니 더 그렇다. 그래서 힘들게 DMZ를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발표도 하지 않고, 타계할 때까지 그의 서재 깊숙한 곳에 보관만 한 것이다. 물론 90년대 후반의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 연재에 대한 글쓰기의 연구와 부담감이 작용했었을 터이지만, 어떻게 보면 문영태는 참으로 욕심 없는 사람이라서 한편으론 아쉽다. 운동가로 또 한 인격체로서는 지금까지도 존경할 만한 선배지만, 그의 투명한 빈 마음으로 인해 축소된 작가적 활동은 우리 미술계에선 공실률이 커서 그렇다. 다만 이번에 그가 불편한 몸으로 직접 국토를 횡단하면서 남긴 90년대 '분단풍경' 다큐사진의 발견은,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작가로서 문영태의 삶과 내공도 기획자로서의 그것 못지않게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팔방미인. 속되지 않음으로 속세의 출세는 못했으나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롯이 순수한 사람이자 운동가이자 작가로 남는 존재. 문영태는 바로 그런 선배였다.


<분단풍경>

1991년 문영태는 사진가 이지누와 화가 16인, 총 17명으로 '경의선' 그룹을 조직한다. 「그림마당 민」관장을 그만두고 난 얼마 뒤다. 이때 활동한 내용들을 엮은 책이『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다. 그리고 곧 이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분단된 국토의 현장과 현실을 조망하는 작업을 자신의 작업테마로 잡고 사진가 이지누·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분단현장. 그 공간은 한반도 왼쪽 끝 서해 백령도부터 오른쪽 끝인 동해 고성·양양의 7번 국도에 이르는 DMZ 남쪽, 북위 38~37°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서해안 교동도부터 서도면-강화도-김포반도-자신의 집이 있는 월곶면 보구곶리-임진강-오두산전망대-전곡-통일촌-도라산전망대-경의선잔해-경원선-전진교-철원-월정리-구철원-백마고지-태풍전망대-평화의 댐-생창리-백골전망대-땅굴-적근산·대성산-명월리-양대리-해안분지-땅굴-심곡사-을지전망대-도솔산-대암산-삼재령-까치봉-통일전망대-7번 도로 해안 등 한반도의 중앙을 수시로 횡단하면서, 90년대의 분단현장·분단현상·분단문화·야생식물·문화재·풍경·사람들의 모습 등 인문지리적 요소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35mm 슬라이드가 대략 수천 장 남아있으나, 96년부터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에 연재하는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20년 이상 장기보관만 한 탓인지, 슬라이드 표면의 화학적 변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아쉽다).


'심상석'과 같은 내면적 관념으로부터의 회화작업에 비해서, 역사적 현실인식이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다큐사진의 소통성은 문영태에겐 분명 매력적이었다.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객관적 '인식'으로의 작업태도 변화는 결국 '회화'에서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탈바꿈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0여년 만의 사진을 통한 개인 작업으로의 전환도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영태는 이 작업도 공동체적인 입장과 미학을 바탕에 두고자 했다. '경의선'모임을 조직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기존의 사진가들과는 또 다르게 화가들의 시선이 반영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것이고, 동시에 사진가들과 보다 풍부한 내러티브와 형식의 결합도 바라서였을 것이었다. 분단시대 '분단'의 전형성을 찾기 위해서 동료작가들과의 공동체적인 협업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인 공론화를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선후배나 동료들과의 인간적인 스킨십을 좋아했던 그의 성격상 작업과정도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발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경의선'은 각 작가들마다의 스케줄로 인해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영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진가 이지누, 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155마일 DMZ를 횡단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때 동행한 김하기는 이 경험을 써서 답사기행집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문학동네, 1995)를 발간했다.


회화·지판화·드로잉·복사와 마스타 인쇄방식의 판화·사진작업을 진행했던 문영태의 궤적 중에서 80년대 초반의 '심상석'과 90년대의 '분단풍경' 사진작업이 문영태 작가궤적의 뼈대로 보인다. 대략 15년여의 간극을 둔 시각물 작업인데, 이 두 작업의 내용만큼이나 그 장르와 매체적 특성도 다르다. 또한, 주관적인 내면·이웃들의 삶의 애환·거기에 80년 광주의 상흔을 오버랩하면서 민중적 서정성과 서사성을 확보하는 단계가 '심상석'의 진행과정이었다면, 10여 년의 문화운동가를 거친 후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에선 철저하게 역사적 현장성을 기록하는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가 된 점이 달라진 점이다. 이 분단풍경 사진 작업으로 인해, 문영태가 문화운동가가 아닌 분단을 말하는 작가로서 최소한의 자기 소임이자 책임을 다했다고 여겨진다.


현재 남아있는 수천 장의 분단풍경 사진들은 동시대 현실과 역사를 관통하려는 문영태의 실존적·실천적인 작가적 '태도'를 증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겸허하고 성실하게 분단현장을 답사하고 연구한 정직성의 증거물이다. 작가적 성공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이 땅의 민중미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작업이었던 듯싶다. 그래서인가,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미술'에 대한, 혹은 '작업'이라는 것에 대한, 아니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선험적·제도적 명제를 버리고 그저 담백한 인간 문영태의 흔적인 자연스런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 이전에 민중미술가·문화운동가·인간 문영태의, 속기나 작위성 없는, 선비·지사·민중적 작가의 풍모가 환기되어서 그럴 것이다.


<글쓰기>

다재다능한 사람은 남기는 것도 여러 가지다. 문영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로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습득한 여러 지식의 잡학/박학다식, 미술에 관한 전문적 지식, 여타 인문학에 관한 폭넓은 독서는 문영태의 평소 언변과 잡설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평소 과문하다가도 대화가 될 양이면 그의 눈은 반짝이고 집중도는 깊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문영태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예의 그 느리되 약한 경상도식 억양으로 즉흥적이고 재미있는 얘기를 엮어냈다. 이쪽저쪽, 전통/현대, 한국/외국, 미술/인문, 고전/뉴스 등을 넘나들면서 여타의 우스개 농담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즐겁게 얘기할 때면, 말뚝이의 그것처럼 재미와 흡입력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 형님은 장편을 쓰면 정말 잘 쓰시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글쓰기도 그랬다.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김포에서 집중한 글쓰기, 특히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을 보면 온갖 지식들이 종횡으로 엮여진 이야기꾼의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특한 문장과, 구어체, 가끔씩 구사되는 비문, 그리고 술에 취해서 쓴 듯이 널뛰는 단락 넘나들기 등은 그야말로 생생하게 날 것의 이야기체다. 재미지다. 잘 다듬어진 글쟁이들의 세련됨에 비하면 이 덜 다듬어진 문체의 맛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진중하다가도 가볍게 직진하고, 심각하다가도 농담이 튀어나오고, 인문적이다가도 세속적 세태가 엮어지면서 한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처럼 풍자적이고도 해학적인 입담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이르면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젠더적 사유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걸진 음담패설로 전통적 풍속에 대한 재미를 돋우면서도 그 행간에서 남성중심의 위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한 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정치·사회·민속·민예·미술·여성·역사·신화·그리고 풍속에 관한 다양한 시점(視點)으로 통섭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성에 관한 이 글은, 글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고담준론의 학자가 아닌, 전래적 이야기꾼이나 판소리 한가락처럼 민중적이다. 탁빼기 왕대포 한 잔 마시며 말하고 듣는 얘기처럼 흥취도 돋는다. 술술 읽힌다. 찰지다. 그래서 문영태'적(的)'이다. 거기에 비하면 2001년에 『디새집』에 연재한 「문영태의 궁시렁궁시렁-한국의 집 이야기」는 훨씬 소담하다. 재미진 요소를 빼고 다소 담백하게 썼다. 집을 의인화해서 접근한 민속적 생태성에 관한 서술방식이 새롭다. 아마도 화가의 글쓰기라 그런 모양이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한 서술성보다는, 그런 고착된 시선이나 감성의 서술방식을 전복하는 입체적 시각과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파격에 대한 문영태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 글쓰기는 문영태의 작품·미술운동과는 또 다른 인문과 그의 삶이 교직된 세계다. '학자'라고 하는 특정한 영역으로 좁혀지지 않는 지식인이자 이야기꾼으로 자기 역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던 셈이다. 김포에 은거하며 평소 관심 있었던 전통적 민중성과 민속적 영역에 대한 홀로서기 같은 작업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글쓰기에서도 문화운동가로서 문제의식은 여전히 드러난다. 미술운동판을 떠나 유유자적하게 책읽기와 한학(漢學), 그리고 낙서들을 즐기면서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통찰은 가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질이다. 그 기질이 오롯이 드러난 작업이 글쓰기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다른 장르이자 내용인 그림도, 사진도, 글쓰기도 모두 문영태'적(的)'이다. 팔방미인이되, 무엇을 하든간에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영태는 '자기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그의 인격 아닌가.


<영태형님>

전 민예총 이사장 김용태 선생이 타계했을 때 영태형님은 한겨레신문의 「길을 찾아서-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란 연재기획에 추모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 시절의 추억 중에 이름 장난의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김용태 이사장, 문영태 본인, 후배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의 이름 마지막 글자로 말장난 농을 한 것이다. 이렇듯 이름자로 농을 할 만큼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현장에서 작고한 김용태 선생과 영태형의 헌신적인 역할과 동지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치열했으되 여유가 있었고, 긴박했으되 위트가 있었고, 조직적이었으되 인간적 의리가 있었다. 게다가 문화운동의 중심에서 동지애까지 끈끈했다. 그렇게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가로지르며 맺은 인연의 끈은 아직도 그를 흠모하는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 질기게 남아있다.

문화운동 하는 입장이니 본인도 별로 수입이나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도 어려운 후배의 전시에서는 그림을 사주었고 술값도 도맡아 내주었다. 그리고 명분 있는 사업엔 사재를 아낌없이 냈다. 『시대정신』 발간도 그랬고, 「그림마당 민」의 운영도 그랬고, 또 『디새집』 발간 때도 그런 태도였다.


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선 영태형님과 비교적 적게 어울린 어린 후배였다. 술자리도 그리 많이 가지지는 않았다. 다른 동료작가들과는 달리 화곡동이나 김포 형님 댁으로 가서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미술판에서 형님의 순수한 활동은 늘 보았고, 그런 형님을 마음으로 존중했다. 90년대 이후 가끔 내 사무실에 들러 장익화 형과 나를 앉혀놓곤 신명나게 얘기하거나, 인사동 길에서 홀로 마주칠 때의 다소 쓸쓸한 듯 조용한 미소를 대할 때나, 형수님과 퇴근하는 형님께 예의바른 인사를 할 때면 악수를 하며 인자한 표정으로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좋았다.

사람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영태형님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나 후배라는 형태 없는 물을 담아내는 형태가 있는 큰 그릇이기도 했고, 또 그런 여러 타인이라는 그릇들이 둥글든지 모나던지간에 각자의 그릇 형태에 담담하게 자신을 맞추어 주는 물이기도 했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이란 노자와, 이율곡의 '水逐方圓器 空隨小大甁'이라는 구절도 떠오른다. 그 많은 선배·동료·후배들과 함께하며, 그 다른 여러 개성들을 담아내는 그의 유연함의 크기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서 커진 마음으로 인해 가능했을 거다.

화단의 선배나 또래 작가들을 만나서 영태형님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이렇듯 같은 말을 한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태형님은 인자한 선배이자, 열정적인 문화운동가의 순수한 모습으로 비친다. 고행의 한 시대를 그리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런 삶은 쉽지도 않고 또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다. 80~90년대 작가시절, 그리고 인사동 문화운동시대, 그 이후 김포로 은거한 90년대 말부터의 고독한 글쓰기 세월, 그 격랑을 영태형님은 작가로, 문화운동가로, 학자로, 의리있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자신의 진짜 삶을 품위있게 살아냈다. 그래서 나는 영태 형님을, 그 삶의 궤적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는 사유가 깊었던 작가, 言과 行이 일치했던 문화운동가, 보고 따를 만한 진짜 '선배'이자 '형님'이었다는 생각에 말이다. ■ 김진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2019_0403 ▶︎ 2019_0416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019c | 김석展으로 갑니다.

김석 홈페이지_www.kimsuk.com


초대일시 / 2019_04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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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조각'1. 김석의 인체조각엔 고독한 현대인의 고뇌가 묻어있다. 30여 년 전 초기작인 소조 브론즈작업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조각형식의 변주 과정에서도 인체조각을 통해서 이런 실존적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작에선 그런 포즈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할 정도로 감정선을 절제하고 있다. 현대인에 대한 입장을 진술하되,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어떻게 모던한 조각언어로 변환해서 제시할 것인지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서 그런 듯하다. ● 근작에서 김석의 이런 조형적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필로 만든 인체작업이다. 2016년 김세중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지름 15cm 정도 굵기에 길이 1~2m에 이르는 대형연필을 나무로 먼저 만들고, 그것을 구체관절 인형처럼 몸통과 사지로 서로 연결해서 조립한 모양이다. 여기에서 연필은 물리적 질료, 내용적 소재, 반성적 사유의 단서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연필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_부분


연필은 쓰는 사람의 현재 상태를 기록(Homo Biblos)·표현(Homo Imago)함으로, 향후 타자의 읽기·보기·느끼기·해석하기·판단하기(Homo Sapiens)의 시발점이 되는 사물이다. 즉 연필은 필기도구인 사람(Homo Ludens)도 되고, 넓게는 그런 사람과 사람을 연결(homo communicus)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김석의 작품에서 연필로 만든 인체는 기록하거나·표현하려는 사람의 현재진행형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과거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현재에 가장 충실한 행동인 그 행위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본능이자 의지이고 또 가치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 원인이다. 현재에 열중하라. 오직 현재에서만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있다"는 괴테의 문장 중에서 "현재에 열중하라"는 구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기록과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미래의 인류는 이 연필과 같은 도구에 의해서, 현재가 남긴 흔적(역사·예술)이 있어야만 비로소 과거인 현재를 통찰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시제를 넘나드는 김석의 작품명제는, 경화되고 고착화된 사고로부터 탈주하며 상대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그의 현재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바탕한 것이다.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한번 그것에 빠져들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까뮈의 지적처럼, 자신을 포함한 한국사회와 사람들의 이분법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자 그런 경계를 짓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집착에 대한 풍자적 레토릭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함몰되는 이항대립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관성적으로 고체화된 맹신적 관념과 절대적 개념을 거부하는 태도가 그 바탕임은 물론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4개의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180×120×20cm_2018



2. 앞서 거론했듯 김석의 연필은 사람의 형상이다. 머리인 지우개, 몸체, 팔다리, 사지가 결합된 뼈대다. 인체의 원형적 구조로의 환원은 브랑쿠시를, 지방질과 단백질을 소거한 길쭉한 몸에서 풍기는 멜랑콜리는 자코메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20세기적인 이런 특정 스타일의 특수성을 넘나들며, 지각과 감각이 동시에 노출되고 또 질량과 부피와 중량감이 거세된 이 조립식 인체조형은, 그 문체가 다면적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20세기 조각사를 관통한 이후, "바람에 걸리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자유롭게 형상의 내외공간을 관통한 모던한 작가의 내공이 그런 이분법적인 조형언어의 구분을 넘어서서 그런 것이라 하겠다. ● 이 인체들은 곧추서 있거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리키는 사람), 십자가의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외발로 벽에 기대어 있거나(지/그-4개의 연필), '펫 프로텍션 커버'를 목에 두른 작가의 자소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지/그-천국), 지팡이를 짚은 불균형한 자세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지/그-안녕하세요 노마드씨).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천국_나무, 금속, 반려견 목 카라, 나무에 페인트, 석고_165×110×48cm_2018



그 자세에서 신체의 끝부분-손끝, 발끝, 지팡이 끝, 목발 끝-은 깔끔하게 깎인 뾰족한 연필심이다. 긴장된 상황의 암시처럼 보인다(혹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상태로도 보이고). 미세하더라도 어떤 움직임에 의해 균형이 흔들리면 사지가 어딘가에 닿고, 그러면 자신의 체중과 하중에 따라 그 연필심의 마찰은 여러 종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가늘거나/길거나, 연하거나/진하거나, 직선이거나/곡선이거나, 끊어지거나/연속되거나.... 예측하기도 규정하기도 어려운 토로나 기록이 전이되는 이 불균형한 상태가 현대인의 보편적 일상이다. 그러나 쓰거나 그리는 행위와 더불어, 자신이 남긴 것을 보거나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건 큰 위안이자 고독을 극복하는 힘이다. 보편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작가 김석에게도 작업의 가장 큰 추동력이 되는 부분일 게다. 작품의 궁극적 가치는 작가인 '나'로부터 감상자인 '당신들'에 이르면서 발생하는 교감과 공감의 프로세스에 있기에.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안녕하세요 노마드씨_나무에 페인트, 금속_170×90×60cm_2018



연필 인체는 그런 김석의 다양한 심리와 생각의 조각적 페르소나이자,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이 본능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페이소스의 단서이기도 하다. 작품이 읽히는 영역에서부터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겠지만, 그들이 좀 더 흥미롭게 읽고 보도록 소통체계를 흥미로운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다. 나무와 흑연(사물)-연필(도구)-기록·표현(기능)-읽히고(해석)-소통(현상)-의미(가치)에 이르는 제작과 소통과정 전체가 김석이 관심의 범주로 삼은 이유다. 의미 매개항(연필인체)-조형적 결과물(조각)-소통과정(개념적 사고)으로 주제에 이르는 프로세스와, 질료의 건조한 표정으로 구성된 이 기하학적 조형방식은 기존 조각의 관습으로부터 일탈하고 이탈하려 선택한 작가의 문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가리키는 사람_나무에 페인트, 금속_202×117×80cm_2018



김석의 이 연필작업에서는 인체를 형상화하되 시각적/물질적 대상묘사의 방식에서 벗어난 점이 먼저 두드러진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들뢰즈의 이 말처럼 김석의 연필인체는 대상의 재현적인 서술방식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조각에 흙을 붙이거나 돌을 깎는 질료성과 신체적 표현성으로부터도, 또 조형으로 환원하는 추상성으로부터 비껴나간 것이기도 하다. 비물질적·비표현적·비서술적인 중성적 기호로, 그리고 그의 '생각'을 '조각'하는 '개념'적 문법으로, 대상의 재현에 가려졌던 힘인 '현대적 사유'를 들추어내려 한 것이다. ● 그래서 그는 "이렇다"라고 그가 규정한 내용을 작품에 담거나 제시하지 않는다. 기록과 표현을 남기는 현대인들의 실존적이고도 다층적인 상황만 새로운 조각형식으로 제시할 뿐이다. 작가인 그의 '생각'이 관객들 각자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점을 이루는 지점을 확인하려는 의도다. 관객이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의 기의를 읽어내려고 다가오는 장소 말이다. 그곳은 작품의 소통회로와 소통현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생각의 활동공간이기도 하다. 그 장소를 비워놓은 채로,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동시에 해당하는 조각적 대화를 화두이자 공안으로 삼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나'와 '당신'이 발견한 생각과 그것 사이를 잇는 또 다른 기록과 표현의 조형화가 바로 그의 연필형상 이면에 숨은 주제다. "당신이 본 이 조각이 당신에게 과연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요?"라는...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절름발이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217×48×7cm_2018



3.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기록과 표현의 원형이다. 그 자체가 기표이자 기의들의 분모다. 호흡하는 짧은 순간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뇌에 축적된 생각의 양은 방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많은 것을 망각하면서 저장된 데이터의 양을 축소한다. 또는 외적인 이유로 그 데이터들을 유실하기도 한다. 넘치는 기억과 정보량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처해진 현실에서의 심리나 욕망 관념과 해석의 편차에 의해서, 그 기억은 다시 취사선택되고 편집되어서 전혀 다른 의미망으로 변주되거나 새로운 해석의 단서로 작용하기도 한다. ● 하물며 그 기록·표현을 읽거나·보는 타자의 해석이 개입하면, 텍스트가 콘텍스트로 전유되는 과정마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에 의해 배태된 차이의 너비는 더 넓어진다. 거기에서 '아포리아'라는 유격현상도 발생한다. A=B라는 등식의 고착을 넘어서서, 관객의 해석과 상상에 따라 A=B일 수도 C, D, E일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지시언어나 객관적인 기록조차도 사람마다 입장에 의해 다양한 코드로 변주되고 전치되어서 작용하는데, 상징적인 구조의 미술작품 해석은 더 많은 관념·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불특정하게 단절되면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 이럴 경우, 롤랑바르트에 의하면, 타자에 의한 해석만 남고 저자(의 의도)는 죽은 것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탈 지시 언어와 비유나 상징이 야기하는 이런 해석 불일치야말로 현대미술의 꽃이 아니겠는가. 비껴가는 해석의 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다양한 편차에 의해서 결국 관객과 작가가 만나는 통로(작품)는 고립되지 않고 더 다양하게 넓어진다. 김석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작가의 주제 제시와 관객 수용과정의 불일치라는 이런 소통과정에 대한 그의 입장도 담겨 있다. 세계와 조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각'해서, 다른 생각의 관객과 만나는 개념의 광장에 가 있겠다는 열린 태도 말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녹색 바니타스_깨진 소주병 파편, 폴리에스터_22×20×15cm_2019



4. 이번에 김석은 연필인체와는 전혀 다른 표현적 맥락에서 깨진 술병의 파편을 집적한, 새로운 시도의 서정적인 작품도 전시한다. 녹색 소주병 파편을 가공해서 일일이 붙인 해골 형상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녹색 바니타스」, 역시 소주병의 날카로운 파편을 집적한 「녹색숙취」, 와인병의 긴 파편을 활용한 「청춘숙취」란 인물 흉상이다. ● '현대인'이란 내용적 문제에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그의 작업이, 연필인체 작업과는 다른 질료·어법·표현·분위기로 또 어떻게 새롭게 시도되는지 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깨진 술병과 파편이라는 날카로운 녹색의 물성이 빚어내는 서늘하고도 비애로운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이 즉물적인 형상은 생각과 판단 이전에 시각과 촉각의 범주에서 관객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권진규의 자소상 흉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이 흉상은 어떤 정신적 초월성의 이미지로도 연결된다. 실존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도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스스로 어떤 가치를 향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왜일까. 어째서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문법과는 정반대의 직접적 감성에 의한 표현을 시도하는 것일까. 술병의 유리 파편은 당연히 술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재다. 물리적 재료가 내용적 소재와 자동적으로 그 이미지의 일치를 이룬다. 깨진 술병조각으로 구성된 형상은 술 마시는 사람이나 행위로 연결된다.


김석_청춘숙취_깨진 와인병 파편, 금속_58×50×33cm_2019


술은 인간 스스로 자기정화 할 수 있는 기제이자, 자기를 혼탁하게 만드는 물질이기도 하다. 술의 위로와 해악은 기실 술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다. 술을 마신 사람의 반응에 의해서 술에 대한 긍/부정의 관념이 구축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마시면 즐겁고 흥겨운 신명이, 또 어떤 이는 심각하고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나는데, 다른 어떤 이가 마시면 꼴불견과 폭력이 노출된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상황·기분·함께 마신 사람과의 관계 등에 의해서, 그때와 지금의 현상과 행동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김석의 이 술병파편 조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갖는 판단과 편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관념이나 개념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모든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순수한 '백지환원'의 입장에 서있는가 하는 질문으로써 말이다. 김석은 선험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상성으로부터 존재와 현상을 인식하려는 태도의 인간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다만 술병 파편의 날카로움과 작업결과인 묵직한 형상의 오버랩은, 연필인체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서부터 탈주를 꿈꾸는 작가의 다음 작업에 대한 예시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다른 형식에의 본능적인 욕망과 이질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는, 늘 어떤 작업인가의 진행과정에서 나온다.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작업와중에 표현적인 충동이 이는 거, 작가의 곤두서있고도 벼려진 조각적 질료감과 감각으로 인해서다.



김석_미메시스풍경-명암_하네뮬레 파인아트지에디지털 파인아트 프린트_97×97cm_2018



5. 지난 30년간 김석은 질주하는 현대미술의 장르파괴 현상에 동승하지 않고 조각이란 장르를 구심점에 두고 실험과 변주를 시도해왔다. 이번의 연필인체 작업이 낯설되, 한편으로 친숙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렇듯 조각이란 장르에서 이탈하지 않아서일 거다. 다만 흑묘든 백묘든 고양이만 잡으면 되듯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미학적 형식이 중요하지 그 장르적 카테고리가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의 주제에 대한 형식적 대처가 작가로서 그의 몫이고, 그의 조각적 비유들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와 분별에 대한 유연한 넘나듦을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조각적 '장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조각적 형식으로 구사하는 타고난 '조각가'란 생각을 한다. 개념적인 문법과 소통방식을 추구했더라도, 그가 만든 인체는 물질을 가공해서 형상을 구축하는 전통적 조각 장르의 범주에 있어서다. 또 거기에 반응하는 그의 질료에 대한 반응 또한 여전히 뛰어난 몸의 감각적 반응으로부터 출발해서 인식의 지점에 닿는 과정을 보여서다. 그의 시도가 기존 조각으로부터의 탈영토화라기보다는, 장르의 경계에서 조각적 영토확장의 실험으로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물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제작과정에서 보이는 그의 조각가적인 조형근육과 의지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큰 이유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의 뚝심은 그야말로 '조각가'다. ■ 김진하



Vol.20190403d |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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