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2019_0403 ▶︎ 2019_0416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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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홈페이지_www.kimsuk.com


초대일시 / 2019_04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생각'의 '조각'1. 김석의 인체조각엔 고독한 현대인의 고뇌가 묻어있다. 30여 년 전 초기작인 소조 브론즈작업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조각형식의 변주 과정에서도 인체조각을 통해서 이런 실존적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작에선 그런 포즈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할 정도로 감정선을 절제하고 있다. 현대인에 대한 입장을 진술하되,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어떻게 모던한 조각언어로 변환해서 제시할 것인지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서 그런 듯하다. ● 근작에서 김석의 이런 조형적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필로 만든 인체작업이다. 2016년 김세중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지름 15cm 정도 굵기에 길이 1~2m에 이르는 대형연필을 나무로 먼저 만들고, 그것을 구체관절 인형처럼 몸통과 사지로 서로 연결해서 조립한 모양이다. 여기에서 연필은 물리적 질료, 내용적 소재, 반성적 사유의 단서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연필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_부분


연필은 쓰는 사람의 현재 상태를 기록(Homo Biblos)·표현(Homo Imago)함으로, 향후 타자의 읽기·보기·느끼기·해석하기·판단하기(Homo Sapiens)의 시발점이 되는 사물이다. 즉 연필은 필기도구인 사람(Homo Ludens)도 되고, 넓게는 그런 사람과 사람을 연결(homo communicus)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김석의 작품에서 연필로 만든 인체는 기록하거나·표현하려는 사람의 현재진행형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과거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현재에 가장 충실한 행동인 그 행위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본능이자 의지이고 또 가치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 원인이다. 현재에 열중하라. 오직 현재에서만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있다"는 괴테의 문장 중에서 "현재에 열중하라"는 구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기록과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미래의 인류는 이 연필과 같은 도구에 의해서, 현재가 남긴 흔적(역사·예술)이 있어야만 비로소 과거인 현재를 통찰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시제를 넘나드는 김석의 작품명제는, 경화되고 고착화된 사고로부터 탈주하며 상대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그의 현재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바탕한 것이다.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한번 그것에 빠져들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까뮈의 지적처럼, 자신을 포함한 한국사회와 사람들의 이분법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자 그런 경계를 짓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집착에 대한 풍자적 레토릭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함몰되는 이항대립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관성적으로 고체화된 맹신적 관념과 절대적 개념을 거부하는 태도가 그 바탕임은 물론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4개의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180×120×20cm_2018



2. 앞서 거론했듯 김석의 연필은 사람의 형상이다. 머리인 지우개, 몸체, 팔다리, 사지가 결합된 뼈대다. 인체의 원형적 구조로의 환원은 브랑쿠시를, 지방질과 단백질을 소거한 길쭉한 몸에서 풍기는 멜랑콜리는 자코메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20세기적인 이런 특정 스타일의 특수성을 넘나들며, 지각과 감각이 동시에 노출되고 또 질량과 부피와 중량감이 거세된 이 조립식 인체조형은, 그 문체가 다면적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20세기 조각사를 관통한 이후, "바람에 걸리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자유롭게 형상의 내외공간을 관통한 모던한 작가의 내공이 그런 이분법적인 조형언어의 구분을 넘어서서 그런 것이라 하겠다. ● 이 인체들은 곧추서 있거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리키는 사람), 십자가의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외발로 벽에 기대어 있거나(지/그-4개의 연필), '펫 프로텍션 커버'를 목에 두른 작가의 자소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지/그-천국), 지팡이를 짚은 불균형한 자세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지/그-안녕하세요 노마드씨).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천국_나무, 금속, 반려견 목 카라, 나무에 페인트, 석고_165×110×48cm_2018



그 자세에서 신체의 끝부분-손끝, 발끝, 지팡이 끝, 목발 끝-은 깔끔하게 깎인 뾰족한 연필심이다. 긴장된 상황의 암시처럼 보인다(혹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상태로도 보이고). 미세하더라도 어떤 움직임에 의해 균형이 흔들리면 사지가 어딘가에 닿고, 그러면 자신의 체중과 하중에 따라 그 연필심의 마찰은 여러 종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가늘거나/길거나, 연하거나/진하거나, 직선이거나/곡선이거나, 끊어지거나/연속되거나.... 예측하기도 규정하기도 어려운 토로나 기록이 전이되는 이 불균형한 상태가 현대인의 보편적 일상이다. 그러나 쓰거나 그리는 행위와 더불어, 자신이 남긴 것을 보거나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건 큰 위안이자 고독을 극복하는 힘이다. 보편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작가 김석에게도 작업의 가장 큰 추동력이 되는 부분일 게다. 작품의 궁극적 가치는 작가인 '나'로부터 감상자인 '당신들'에 이르면서 발생하는 교감과 공감의 프로세스에 있기에.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안녕하세요 노마드씨_나무에 페인트, 금속_170×90×60cm_2018



연필 인체는 그런 김석의 다양한 심리와 생각의 조각적 페르소나이자,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이 본능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페이소스의 단서이기도 하다. 작품이 읽히는 영역에서부터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겠지만, 그들이 좀 더 흥미롭게 읽고 보도록 소통체계를 흥미로운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다. 나무와 흑연(사물)-연필(도구)-기록·표현(기능)-읽히고(해석)-소통(현상)-의미(가치)에 이르는 제작과 소통과정 전체가 김석이 관심의 범주로 삼은 이유다. 의미 매개항(연필인체)-조형적 결과물(조각)-소통과정(개념적 사고)으로 주제에 이르는 프로세스와, 질료의 건조한 표정으로 구성된 이 기하학적 조형방식은 기존 조각의 관습으로부터 일탈하고 이탈하려 선택한 작가의 문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가리키는 사람_나무에 페인트, 금속_202×117×80cm_2018



김석의 이 연필작업에서는 인체를 형상화하되 시각적/물질적 대상묘사의 방식에서 벗어난 점이 먼저 두드러진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들뢰즈의 이 말처럼 김석의 연필인체는 대상의 재현적인 서술방식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조각에 흙을 붙이거나 돌을 깎는 질료성과 신체적 표현성으로부터도, 또 조형으로 환원하는 추상성으로부터 비껴나간 것이기도 하다. 비물질적·비표현적·비서술적인 중성적 기호로, 그리고 그의 '생각'을 '조각'하는 '개념'적 문법으로, 대상의 재현에 가려졌던 힘인 '현대적 사유'를 들추어내려 한 것이다. ● 그래서 그는 "이렇다"라고 그가 규정한 내용을 작품에 담거나 제시하지 않는다. 기록과 표현을 남기는 현대인들의 실존적이고도 다층적인 상황만 새로운 조각형식으로 제시할 뿐이다. 작가인 그의 '생각'이 관객들 각자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점을 이루는 지점을 확인하려는 의도다. 관객이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의 기의를 읽어내려고 다가오는 장소 말이다. 그곳은 작품의 소통회로와 소통현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생각의 활동공간이기도 하다. 그 장소를 비워놓은 채로,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동시에 해당하는 조각적 대화를 화두이자 공안으로 삼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나'와 '당신'이 발견한 생각과 그것 사이를 잇는 또 다른 기록과 표현의 조형화가 바로 그의 연필형상 이면에 숨은 주제다. "당신이 본 이 조각이 당신에게 과연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요?"라는...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절름발이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217×48×7cm_2018



3.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기록과 표현의 원형이다. 그 자체가 기표이자 기의들의 분모다. 호흡하는 짧은 순간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뇌에 축적된 생각의 양은 방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많은 것을 망각하면서 저장된 데이터의 양을 축소한다. 또는 외적인 이유로 그 데이터들을 유실하기도 한다. 넘치는 기억과 정보량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처해진 현실에서의 심리나 욕망 관념과 해석의 편차에 의해서, 그 기억은 다시 취사선택되고 편집되어서 전혀 다른 의미망으로 변주되거나 새로운 해석의 단서로 작용하기도 한다. ● 하물며 그 기록·표현을 읽거나·보는 타자의 해석이 개입하면, 텍스트가 콘텍스트로 전유되는 과정마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에 의해 배태된 차이의 너비는 더 넓어진다. 거기에서 '아포리아'라는 유격현상도 발생한다. A=B라는 등식의 고착을 넘어서서, 관객의 해석과 상상에 따라 A=B일 수도 C, D, E일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지시언어나 객관적인 기록조차도 사람마다 입장에 의해 다양한 코드로 변주되고 전치되어서 작용하는데, 상징적인 구조의 미술작품 해석은 더 많은 관념·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불특정하게 단절되면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 이럴 경우, 롤랑바르트에 의하면, 타자에 의한 해석만 남고 저자(의 의도)는 죽은 것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탈 지시 언어와 비유나 상징이 야기하는 이런 해석 불일치야말로 현대미술의 꽃이 아니겠는가. 비껴가는 해석의 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다양한 편차에 의해서 결국 관객과 작가가 만나는 통로(작품)는 고립되지 않고 더 다양하게 넓어진다. 김석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작가의 주제 제시와 관객 수용과정의 불일치라는 이런 소통과정에 대한 그의 입장도 담겨 있다. 세계와 조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각'해서, 다른 생각의 관객과 만나는 개념의 광장에 가 있겠다는 열린 태도 말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녹색 바니타스_깨진 소주병 파편, 폴리에스터_22×20×15cm_2019



4. 이번에 김석은 연필인체와는 전혀 다른 표현적 맥락에서 깨진 술병의 파편을 집적한, 새로운 시도의 서정적인 작품도 전시한다. 녹색 소주병 파편을 가공해서 일일이 붙인 해골 형상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녹색 바니타스」, 역시 소주병의 날카로운 파편을 집적한 「녹색숙취」, 와인병의 긴 파편을 활용한 「청춘숙취」란 인물 흉상이다. ● '현대인'이란 내용적 문제에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그의 작업이, 연필인체 작업과는 다른 질료·어법·표현·분위기로 또 어떻게 새롭게 시도되는지 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깨진 술병과 파편이라는 날카로운 녹색의 물성이 빚어내는 서늘하고도 비애로운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이 즉물적인 형상은 생각과 판단 이전에 시각과 촉각의 범주에서 관객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권진규의 자소상 흉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이 흉상은 어떤 정신적 초월성의 이미지로도 연결된다. 실존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도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스스로 어떤 가치를 향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왜일까. 어째서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문법과는 정반대의 직접적 감성에 의한 표현을 시도하는 것일까. 술병의 유리 파편은 당연히 술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재다. 물리적 재료가 내용적 소재와 자동적으로 그 이미지의 일치를 이룬다. 깨진 술병조각으로 구성된 형상은 술 마시는 사람이나 행위로 연결된다.


김석_청춘숙취_깨진 와인병 파편, 금속_58×50×33cm_2019


술은 인간 스스로 자기정화 할 수 있는 기제이자, 자기를 혼탁하게 만드는 물질이기도 하다. 술의 위로와 해악은 기실 술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다. 술을 마신 사람의 반응에 의해서 술에 대한 긍/부정의 관념이 구축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마시면 즐겁고 흥겨운 신명이, 또 어떤 이는 심각하고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나는데, 다른 어떤 이가 마시면 꼴불견과 폭력이 노출된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상황·기분·함께 마신 사람과의 관계 등에 의해서, 그때와 지금의 현상과 행동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김석의 이 술병파편 조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갖는 판단과 편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관념이나 개념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모든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순수한 '백지환원'의 입장에 서있는가 하는 질문으로써 말이다. 김석은 선험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상성으로부터 존재와 현상을 인식하려는 태도의 인간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다만 술병 파편의 날카로움과 작업결과인 묵직한 형상의 오버랩은, 연필인체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서부터 탈주를 꿈꾸는 작가의 다음 작업에 대한 예시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다른 형식에의 본능적인 욕망과 이질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는, 늘 어떤 작업인가의 진행과정에서 나온다.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작업와중에 표현적인 충동이 이는 거, 작가의 곤두서있고도 벼려진 조각적 질료감과 감각으로 인해서다.



김석_미메시스풍경-명암_하네뮬레 파인아트지에디지털 파인아트 프린트_97×97cm_2018



5. 지난 30년간 김석은 질주하는 현대미술의 장르파괴 현상에 동승하지 않고 조각이란 장르를 구심점에 두고 실험과 변주를 시도해왔다. 이번의 연필인체 작업이 낯설되, 한편으로 친숙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렇듯 조각이란 장르에서 이탈하지 않아서일 거다. 다만 흑묘든 백묘든 고양이만 잡으면 되듯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미학적 형식이 중요하지 그 장르적 카테고리가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의 주제에 대한 형식적 대처가 작가로서 그의 몫이고, 그의 조각적 비유들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와 분별에 대한 유연한 넘나듦을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조각적 '장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조각적 형식으로 구사하는 타고난 '조각가'란 생각을 한다. 개념적인 문법과 소통방식을 추구했더라도, 그가 만든 인체는 물질을 가공해서 형상을 구축하는 전통적 조각 장르의 범주에 있어서다. 또 거기에 반응하는 그의 질료에 대한 반응 또한 여전히 뛰어난 몸의 감각적 반응으로부터 출발해서 인식의 지점에 닿는 과정을 보여서다. 그의 시도가 기존 조각으로부터의 탈영토화라기보다는, 장르의 경계에서 조각적 영토확장의 실험으로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물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제작과정에서 보이는 그의 조각가적인 조형근육과 의지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큰 이유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의 뚝심은 그야말로 '조각가'다. ■ 김진하



Vol.20190403d |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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