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나이프갤러리' 한정욱관장 인터뷰]


"칼 전시한다니 처음엔 `조폭 무기고` 의심, `이태원살인` 진범 가려주자 경찰 태도바꿔.."


사진설명칼의 매력에 빠졌던 보이스카우트 소년은 세월이 흘러 전통 도검을 만드는 칼 전문가가 됐다.

서울 인사동 나이프갤러리에서 한정욱 관장이 자신이 직접 만든 환두대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승환 기자]



"한국 전통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 있나?"

한정욱 나이프갤러리 관장(66)이 일본인 친구에게 받은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칼을 수집하며 지식을 쌓아 왔지만 모래에서 쇠를 얻는 `사철 제련`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관장은 그때부터 역사 자료를 공부하며 전국 각지 사철 광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면 자신이 전통 문화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였다. 보이스카우트에서 처음 만났던 칼은 한 관장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가 됐다.

국내 최초로 도검 전시장을 연 인물. 전통 제련 기술을 복원해 칼을 만드는 인물. `이태원 살인사건` 해결에 기여한 도검 전문가.

모두 한 관장을 설명하는 단어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나이프갤러리를 찾아가 한 관장을 만났다.

칼에 대한 얘기를 쏟아내던 그는 자신이 사라진 뒤에는 사철 제련 방식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칼에 빠지게 됐나.

▷중학생 때였다. 보이스카우트에 들어갔더니 제복을 입을 땐 군용 대검 하나를 차고 다니는 걸 용인해 줬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 미국 M1 대검을 샀다. 당시 1000원 정도였다. 1960년대 초반이라 물자가 흔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전쟁 직후라 그런지 칼은 많이 있었다. 그때부터 칼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도검 박물관이라는 게, 의심스러운 시선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처음에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조폭 무기고 같다는 말도 들었다. 신청서가 두어 번 반려됐는데 이후 새로운 분이 담당 과장으로 왔다. 성매매와 전쟁을 치르며 `청량리588` 없앴던 김강자 총경이었다. 그분이 그냥 반려하지 말고 직접 둘러보고 확인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더라. 찾아온 경찰에게 인사동 문화거리에서 도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봐달라고 했다. 그 뒤에 허가가 났다.

―그래도 경찰에서는 여전히 껄끄러운 시선을 보냈을 것 같다.

▷불법무기 판매 혐의로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검찰에서 몇 시간씩 조사를 받다 보니 자살하는 사람 심정도 이해가 가더라. 경찰 과학수사대(CSI)가 생겼는데, 여기서 자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그때부터 관계가 많이 나아졌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흉기가 있으면 사진과 실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유통 경로나 제작자를 물어봤다. 상처를 보고 살의를 갖고 찔렀는지, 그냥 찔렀는지 이런 것도 물어본다.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을 잡는 데에 기여했다고 하던데.

▷그게 결정적이었다. 재수사를 맡은 검찰에서 경찰에 연락해 자상 전문가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 검찰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불법무기 판매로 조사받던 그 방이었다. 아직도 조사할 게 남았느냐고 했더니 도움받을 일이 있다며 2시간만 내달라고 하더라.(웃음) 당시 용의자가 두 명이었는데, 진술서를 각각 검토하고 의견을 달라고 했다. 진술서가 누구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한쪽에는 여섯 개를 붙이고 한쪽에는 아무것도 안 붙였다. 자상을 보니 평소 칼을 다뤄본 사람의 소행이었다. 이런 걸 이야기하고 직접 실연해 줬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법정에 가서도 세 번이나 실연했다. 그렇게 실연하는데 먼발치에서 학생 어머니 모습이 보이더라. 얼마나 힘드셨겠나.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피의자가 확정됐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겠다.

▷증인 출석 때였는데, 우발적인 범행인지 의도적인 살해인지 질문을 받았다. 다른 곳을 먼저 찔러 쓰러뜨린 다음 작심하고 목을 찔렀다는 의견을 냈다. 그 용의자(패터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건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이프갤러리는 어떤 사람이 찾나.

▷다섯 살 난 친구부터 여든 노인까지 찾아온다. 디자인과 다니는 대학생도 오고, 만화가도 온다. 단순해 보이는 칼도 디자인이 수천 가지가 된다. 네이버에서 웹툰 `칼부림`을 연재하는 고일권 작가도 1년에 1~2회씩 방문한다.

―기억에 남는 손님도 많을 듯하다.

▷조그마한 칼을 수집하던 손님이 있었다. 이분이 1개당 단가가 100만원 정도 하는 걸 100개가량 모았는데, 암으로 돌아가셨다. 부인에게 이 칼을 나이프갤러리에 가서 상담받고 처분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더라. 그렇게 주인이 죽으면 칼이 다시 갤러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참 묘해진다.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며 돈과 관계없이 내림굿에 쓸 정말 좋은 칼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사람도 있고, 칼을 불당에 놓고 싶다며 찾아온 스님도 있었다.

―원래 칼과 관련된 일을 했는지.

▷아니다. 대학 때만 해도 교육학을 전공했다. 처음 꿈은 교사였다. 교생 실습도 나갔다. 그러다 집안이 어려워졌고 직종 불문하고 취직을 했다. 당시 OB오리콤에서 마케팅을 하고 금강기획에서 국장까지 재직했다. 문화일보에서도 부국장으로 1년 있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아침 7시 30분 전에 경기 양주에 있는 공방에 도착한다. 대장장이 일이 쉽지 않다. 하루에 한 4시간 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일을 하고 나면 젓가락질이 제대로 안 된다. 손가락이 꺾이지 않는다. 여름엔 더운 게 문제다. 더운 날 불을 제대로 때면 실내 온도가 52도까지 올라간다. 오전 내내 작업을 하고 오후 2시쯤 나이프갤러리로 와 손님맞이를 한다. 




―칼을 만드는 사람은 종종 있다. 그런데 자연에서 원재료를 구해 칼을 만드는 사람은 처음 들어봤다.

▷나이프갤러리를 열자 일본과 미국 친구들이 놀러왔다. 일본 친구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전통 방식으로 칼을 만드는지 물어보더라.

미국 친구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한국이 5000년 역사를 가졌다고 하는데, 무기 문화는 누가 이어받았느냐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냥 철판 잘라 만든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에 전통 방식으로 칼 만드는 사람은 10명 정도 된다.

그런데 도검 원료인 철이 없어 강철판을 많이 쓴다.

―양산되는 철을 쓰면 안 되나.

▷철은 넓은 범위다. 칼을 만들 때 쓰는 건 강철이다. 사철을 가지고 녹이는 것을 제련, 철광석을 갖고 만드는 건 제철이라고 한다.

제철소는 철광석을 가져와 녹인 뒤 쇳물을 뽑는다. 사철을 통해서 나온 쇠와 철광석을 갖고 만드는 쇠가 다르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칠지도는 사철이다. 전통 방식은 사철을 써야 한다.

―모래에서 철을 뽑으면 칼을 만들 정도로 쇠가 만들어지나.

▷순도가 뛰어나지 않다. 그냥 만들면 시커먼 칼이 나온다. 쇠를 자르고 접어 안에 들어 있는 불순물을 뺀다.

이 과정을 반복해 강철을 만든다. 단접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백제시대부터 있던 기술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이 기술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 기술이 다 사라졌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4년 정도는 쇠를 만드는 게 잘 안 됐다. 많이 실패했다. 사철을 녹이려면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숯을 피워야 한다.

거기에 바람을 넣어야 하는데 잘 녹지 않는다. 조건을 맞춘 실험실이 아닌 야외 흙바닥에서 하다 보니 잘 안 됐다.

그때 돈도 많이 까먹었다.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다.

▷제련작업이란 게 사람 뜻대로 잘 안 된다. 귀신이나 부처님에게 기도를 많이 한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자연에 도와달라는 의미다.

제련을 1년에 1~2회 한다. 작업 들어가기에 앞서 북어와 막걸리를 놓고 제를 지낸다.

절을 할 때 부모님에게 1배 반, 돌아가신 분께 2배 반, 부처님께 3배 반을 한다.

제련에 앞서 하늘에 절을 드릴 때는 4배 반을 한다. 이런 절차는 꼭 지킨다.

―전통 기술 복원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해오셨는데, 국가에서도 지원이 나오지 않나.

▷2015년에 중요문화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전승 활동이 미비했다는 이유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걸 중요하게 평가하는데, 아버지나 스승에게 전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다.

사실 전승이 안 되고 끊어진 걸 복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인데 그걸 모른다. 사철을 캐는 방법을 아는 학자는 있다.

그런데 사철을 얻어 제련을 해본 사람은 없다.

호주 철광석을 가지고 와서 만든 은장도를 우리 칼로 볼 수 있나.

정부는 재료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존하는 데는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평생 망치질을 하기는 힘들지 않은지, 후계자에 대한 생각은.

▷망치질은 75세까지만 할 예정이다.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이런 문화를 유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고, 지원도 없다. 내가 75세가 되면 사철 제련 명맥이 다시 끊기는 것이다. 후계를 구할 생각도 없다. 포기했다는 게 정확하다.

지금 다섯 명이서 공방과 나이프갤러리를 운영한다. 월세와 인건비만 생각해도 칼 팔아서 2500만원이 남아야 한다. 너무 힘들다.

체계적으로 제련 문화가 이어지려면 대학에서 후계자를 길러내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한정욱 관장은… 

1954년 서울시에서 태어났다. 경복중과 경복고를 거쳐 성균관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중학생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면서 칼에 흥미를 느꼈다.

1981년부터 전통 방식으로 채굴과 제련 작업을 시작해 칼 제작에 뛰어들었다.

오리콤 금강기획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001년 수집한 칼과 액세서리 1000여 점을 가지고 국내 최초 나이프갤러리를 개관했다.

2016년 이태원 살인사건 진범을 가려내는 데 일조하며 이름을 알렸다.


[스크랩] ⓒ 매일경제 & mk.co.kr,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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