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저녁 무렵 김명성씨와 김상현씨가 동자동에 찾아왔다.

성냥공장 불난 위로주를 한 잔 사려는 자리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자주 만날 수가 없었으니, 엄청 반가웠다. 동자동에는 손님 모실만한 마땅한 밥집이 없었는데, 마침 후암동 ‘속초식당’이 생각났다. 얼마 전 ‘KP갤러리’ 전시 개막식에 갔다가 들린 뒤풀이 집이었다. 대구탕을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생생했다.그 날은 시원한 지리 안주로 소주 한 잔 때렸는데, 기가 막혔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 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집은 김상현씨와 김명성씨도 다 인연이 많았던 집이다. 김상현씨는 음악하는 후배들과 어울려 여러 차례 만지산을 적시기도 했지만, 김명성씨는 만지산의 유일한 후원자였다.

 

 

 

20여년 전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을 시작으로 축제 때마다 후원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벌이도 없는 주제에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은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만지산 땅 문서를 가져가 돈을 얻어왔다. 내가 산 가격으로 넘겨 줄 계약서를 쓰고 500만원을 받았는데, 중도금도 잔금도 주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땅을 사기 위해 준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땅만 가져갔다면, 모든 걸 다 태우는 이 지경은 안 되었을 텐데 말이다.

 

 

 

술 마시며 만지산을 생각하니 또 다시 마음이 아파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비가 추적추적 내려 담배 연기에 시름을 날렸다. 세 사람이 소주 두병 시켜 반 병 남겼으니, 다들 엄청 약게 마신 것이다. 아쉽지만 일찍 헤어져 4층 쪽방까지 올라오느라 헉헉댔다. 그 정도로 빌빌거리는 걸 보니 봄날은 간 것 같다.

 

 

 

그 이튿날은 녹번동에서 개겼는데, 저녁시간이 되니 또 술 소식이 왔다.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씨와 최석태씨가 가까운 횟집으로 온다는 것이다. 가보니 비싼 회를 잔뜩 시켜 놓았는데, 맛도 모르는 촌놈이 혼자 다 먹었다. 그 곳에서도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어질어질 했다. 정영신씨 집으로 술자리를 옮겼으나, 뒷자리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만지산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화가 박건씨의 후원 요청으로 들어 온 돈이 무려 12,910,000원이나 되기 때문이다. 빈 집에 소 들어 온 격이지만, 심적 부담에 편하게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도움 준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창고’ 1호 만들 생각으로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단 오산에서 마무리 작업 중인 환경 친화적인 예술감독 안애경씨의 자문부터 얻기로 했다. 첫 번째 예술창고에 혼신을 쏟아야 하는 것은 제1창고 완공의 결과에 따라 제2, 제3의 예술창고가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를 뛰어넘는 공간으로 만들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공간은 69명의 예술가가 후원한 공유 공간이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번 주 목요일에는 오산에서 작업하고 있는 안애경씨를 만나기로 했고, 금요일부터 정선 현장에서 온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작정했다. 지자체 협조를 얻어야 할 일도 많고 주변 분들의 양해도 필요했다. 언제 쯤 예술창고 1호가 개봉될지 모르지만, 한 번 기대하십시오. 그 때 신명 난 만지산 잔치 한 번 열어 모시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신사동에서 ‘뮤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가 청담동에 ‘Salon de Mu/art 청담’을 열었다.

지난 26일 오후 7시 무렵 청담동 '뮤아트'를 찾아갔는데,

거리두기로 많은 분을 초청할 수 없는 사정이라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않았다.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 로데오역에 내려 4번 출구 부근의 '옴므빌딩'6층이었다.

 

들어서니, 흥겨운 재즈음악이 살롱을 흥청였다.

띄엄띄엄 앉은 좌석에 반가운 분도 더러 보였다,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이상원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메인공간을 장식한 신사동 '뮤아트' 실내사진에서 공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난, 뮤지션 김상현씨를 볼 때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에 탄복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삶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니, 음악 자체가 그에게 삶의 원천이다.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하여 가르치고 아껴주는 후배사랑 또한 가슴 뭉클하다.

 

수십 년 동안 ‘뮤아트’를 끌어 온 아집과 자존심도 대단하지만,

오뚜기 처럼 버텨 온 삶의 여정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얼마 전에는 암 투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그는 다시 일어섰다.

 

주변 지인의 전시나 문화행사에는 어김없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들고

축하 연주를 기꺼이 해 주는 그의 예술 사랑이 암담한 현실에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날 연주회는 하양수씨가 부른 ‘달링’이 예전과 달리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 첼리스트 카마코양의 ‘아베마리아’ 연주에 가슴이 시리더라.

그토록 애절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첼로 아래 원피스에는 수많은 벚꽃이 수 놓여 있었다.

여지 것 반일정서에 일본을 싫어했으나, 예술의 힘은 모든 걸 녹일 수 있었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해 신사동 ‘뮤아트’로 자리를 옮겼으나, 도착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보니, 새벽 두시였다.

 

옆에는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카마코양 등 여러 명이 있었다.

김명성씨와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돈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정신을 망치는 돈이지만, 멀리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다.

 

사진, 글 / 조문호

 

예전에는 인사동에서 술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은 은평 지역에서 마실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 곳에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김명성, 서인형씨등

가까운 분들이 많이 살아 종종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이 녹번동에 있는 것도 한 몫 하는 셈이다.

 

지난 25일 오후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녹번동 있으면 ‘마포나루’로 오라는데, 나의 움직임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녹번동으로 이동 중에 전화를 받아 술집부터 먼저 들렸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포나루’는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는 조그만 횟집인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의 넉넉한 인심까지 한 몫해 김명성씨 단골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에는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김명성씨 덕에 매번 나팔 부는 집이다.

지척에 이청운씨 화실도 있으나, 함께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갈 때마다 회에다 멍게, 전복, 생선구이 등 갖가지 해산물이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 오죽하면 거지 영양 보충하는 날로 여길까?

이 날은 모인 사람이 다섯 명이라 두 군데 나누어 술 상을 차려 놓았다.

 

김수길씨는 다음 주에 ‘마루아트’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김명성씨는 김상현씨의 두번째 ‘뮤아트’가 이틑 날 개업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그 날의 화제는 김명성씨 소장품전인 ‘백범 김구 쓰다’전과 관련된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였다.

사회적위치가 높은 사람들의 부친 친일이력인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로 조작한단다.

고증자료를 근거로 철저하게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 날은 소주 한 병 남짓 마셨는데, 숨이 차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김명성씨와 먼저 일어났는데, 조해인씨는 시동이 걸렸는지 일어 날 생각을 않았다.

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조해인씨는 달랐다.

몸도 챙겨야 할 나이지만,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로 끝장을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기다렸다.

얼마 전 만해도 매일 같이 소식 주워 날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렸으나,

이젠 다른 일도 있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아 일을 줄이기로 했다.

가급적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팅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 한다.

 

그전 같았으면 주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이젠 꼭 필요한 사진만 찍고, 찍어도 올리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평에서 만난 분들 사진을 함께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양산에 가 있는 공윤희씨가 전화를 했다.

역촌동 ‘양갈비에 꼬치다’에서 기다린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고깃집 이름은 흥미롭지만, 그 곳은 잘 가지 않는 술집이다.

가보니, 공윤희씨 뿐 아니라 조해인씨와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날은 폭설을 예고한 날이라 온종일 서울역 주변에서 맴돌았다.

백설이 휘날리는 서울역 전경사진이 한 장 필요했는데,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간간이 내린 눈도 금세 녹아버렸다.

술 마시러 오라는 공윤희씨 전화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달려갔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진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할 무렵 눈이 그쳐버렸다.

운이 없는 건지 찍지 말라는 건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부득이 눈 내리는 서울역이 아니라 눈 내린 전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사진은 녹번동 정영신씨 집을 방문한 최석태씨와 서인형씨 사진이었다.

 때늦은 사진이지만, 그 날은 대취해 그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또 언젠가는 연신내 청구병원 앞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화가 박불똥씨 였는데, 장경호씨 집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사진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진은 어딘가 남아 떠돌테니까...

 

사진, 글 / 조문호

 

 

항일 무장투쟁 100주년과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백범 김구 쓰다'전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14일 김명성씨 연락으로 박물관에 갔는데, 개막한지가 두 달이 넘었더라.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입구에는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이성 구로구청장 내외,

최효준 전 시립미술관장, 화가 강찬모, 전인경씨, 뮤지션 김상현씨등 여러명이 먼저 와 있었다.

 

유묵 소장자인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김시업 '은평역사박물관장'과

이랑 학예사의 해박한 설명아래 백범 김구선생의 유묵전을 살펴보게 된 것이다.

 

이 전시는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임시정부의 활동을 조망하고

김구선생의 결기에 찬 글씨를 통해 민족 지도자로서의 정신력과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 깊은 전시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주석에 이르기까지 27년간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전시에는 해방 후 4년동안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며

민족 분열을 막기 위해 남긴 주요 작품 30여점을 비롯한 68점이 나왔다.

김구선생은 해방 이전에도 많은 글씨를 썼으나 전해지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김구선생은 글씨를 여기(餘技)로 쓰지 않았다.

그의 글에는 혼란스런 해방 정국과 나라의 앞날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어

그의 글씨는 곧 통일운동이었다.

 

이번에 내놓은 ‘백범 김구 쓰다' 기획전은 '백범 김구‘선생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다.

독립운동 사료와 독립지사들의 유묵들을 다수 소장한 김명성씨가 

지난 해 ‘구로문화재단’에서 전시 한 "독립이 맞습니까?"전에 이은 전시다.

 

김명성씨는 “중후한 글맵시와 강직한 기개가 돋보이는 현판 글씨에는

단순히 필획의 형식미를 뛰어넘어 민족주의자가 지닌 신념과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가슴에 맞은 총탄으로 수전증을 얻어 손 떨림이 붓끝에 전해졌으나

정신의 웅장한 기세는 그대로 살아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백범은 1945년 환국 당일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陳中吟)을 남겼다.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그의 글에는 해방된 조국의 포부가 넘쳐난다.

 

1946년 겨울에는 비서 김우진에게 남이 장군의 시를 써줬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없애네’(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로 시작하는 시로 호연지기가 넘친다.

 

이 전시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73년 만에 처음 공개된 백범의 ‘일송오강’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

일송오강’은 사람의 도리를 요약한 5개 강령으로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우고, 나를 위해 도를 세우고, 백성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만세를 위해 규범을 세운다’는 뜻이 담겼다.

 

이 글은 심산 김창숙선생의 손자가 가보로 간직해온 글을 처음 공개했다.

백범의 평생 동지였던 성균관대 초대 학장을 지낸 심산께 써 준 글이라고 한다.

유묵 6점을 소장한 심산의 손자 김위(83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라.

“이 글은 할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전해주셨고, 201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제가 보관해왔습니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백범 선생에게 이 문구를 요청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백범 선생은 할아버지의 스승인 대계 선생도 잘 알고 계셨거든요.”

 

김구와 김창숙 지사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는데,

비타협 정신으로 일관한 대쪽 선비로, 서로 뜻이 통했다고 한다.

‘일송오강’은 중국 만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세웠던

대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이 지어 매일 외던 글귀로 심산에게 좌우명 같은 경구였다.

나라의 장래를 위한 문구로 부족함이 없었다.

 

심산사상연구회장을 지낸 김시업 '은평역사박물관장'은

“‘일송오강’은 백범이 심산에게 써준 글이지만, 백범의 마음 자체였다”며

“그들은 반일,·항일이란 민족적 사명 앞에서 손을 잡은 혁명적 인간 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백범 글씨의 재평가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글씨는 곧 그 사람’(書如其人), ‘사람과 글씨는 함께 익는다’(人書俱老)는 말처럼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백범의 행적과 정신세계를 두루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백범과 심산의 또 다른 글씨도 처음 공개됐다. 백범이 늘 마음에 새긴 칠언구가 그중 하나다.

‘가지를 붙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쉬우나, 낭떠러지에서 붙잡고 있는 손을 놓는 것이 가히 대장부다.’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심산은 송나라 학자 정이의 ‘청잠’(聽箴)을 썼다.

‘사람이 떳떳한 마음을 가진 것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나 앎이 외물에 유혹을 받아 그 바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人有秉彛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심산의 글 앞에 찍힌 한반도 모양 낙인도 눈길을 끈다.

도장에 ‘남북일가’(南北一家)를 새겼다. 하나 된 남북에 대한 희구다.

 

그리고 백범의 유묵 외에도 임시정부 활동상과

서재필,·이상룡,·조소앙, 박열, 지청천,·이범석 등 다른 독립지사들의 유묵도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체적 활약상도 소개한다.

임시의정원의 임시헌장을 비롯해 광복군 자료와 미주 동포의 의연금 영수증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3·1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대한국민의회 선언서도 함께 공개된다.

 

이랑 은평역사박물관 학예사는 1947년 쓴 ‘독립만세’와

1948년 쓴 ‘광복조국’은 완전한 독립과 광복을 웅변하는 걸작이라고 소개했다.

“김구선생에게 민족의 완전한 통일국가 수립은 1919년의 3·1운동에 이은 제2의 독립운동 이었다”면서

“남·북한의 분단정부 수립과 함께 실패로 끝난 백범의 꿈이 담긴 글로,

마지막 내면세계가 진하게 밴 유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김구선생은 민족의 완전한 자주통일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김구선생의 유묵에서 못다 이룬 꿈과 마지막 내면세계를 만나보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전시는 3월 28일까지 열린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휴관을 고려해 전시 일정을 연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오후 5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휴관 / 관람료 1,000원

은평한옥역사박물관: 서울, 은평구 연서로 50길 8 / 은평한옥마을 / 전화 02-351-8524

 

지난 주에는 정영신의 전시 핑계로 술 마실 일이 많았다.

 

27일 저녁에는 '한국스마트협동조합' 팀들이 정영신씨 녹번동 집으로 들이 닥쳤다.

해적도 아니면서 참치 한 덩어리를 들고 왔더라.

 

이사장 서인형씨와 최석태, 이미경씨가 왔는데,

집구석이 얼마나 넓은지, 다섯 사람이 앉으니 꽉 찼다.

사실, 춤 출 일 없으면 술 마시는 데는 좁을수록 술맛난다.

코로나놈 알면 큰 일 나겠지만...

 

스마트협동조합으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 '일자리가 급하다'

 

서인형씨는 내일 키움 일자리 채용을 비롯하여 일이 많아 요즘 얼굴보기 힘들다.

'내일 키움 일자리'는 예술인들에게 2개월 동안 최저임금을 주는 사업인데,

300명 채용에 700명이 넘는 인원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사장과 황경하씨가 하루 17시간 가까이 일한, 주 100시간 넘는 일을 해냈다.

 

신청인원이  너무 많아 10여명씩 동시에 면접 심의를 하는 장면

 

그 짧은 기간에 사람 모아 분류하여 심사하는 등 완전 한 판 전쟁을 치룬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을 해 냈으나, 심의 기준에서 제외된 분들이 안타까워 추가 모집을 협의 중이란다.

예술가들의 삶이 힘들다는 방증인데, 고생은 하지만 조합원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안주로 가져 온 냉동 참치가 녹아 식칼로는 먹히지 않았다.

칼로 자르는 것이 아니라 톱으로 자르는 것 같았다.

주방장 솜씨 탓이 아니고 연장 탓이지만, 어쨌든 회는 맛있었다.

한 점만 넣어도 입안이 그득했으니까... 언제 이렇게 먹어 본 적이 있었더냐.

우물우물 맛있게 먹은 생각을 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양조장 술까지 잘 익어 그 날 밤은 애들 말로 해피한 밤이었다.

 

그 다음 날인 토요일엔 경의선 책거리 ‘예술산책’에서 김수길씨를 만났다.

오랜만에 김보섭씨도 만나, 김수길씨는 응암동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진데다 공사 차에 막혀 골목에서 한 참 갇혀 늦어버렸다.

찿아 간 ‘푸른 언덕’에는 김수길씨와 조해인씨, 둘이서 마시고 있었다.

 

기분 좋게 술을 얻어 마신 것만도 고마운데, 조해인씨가 술 한 병을 선물로 주었다.

‘죠니 워카 블루’인데, 독주를 싫어해 선물 받은지가 2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고맙게 받아 녹번동 주막에 맡겨 두었다.

그런데, 그 날은 바쁜 걸음 치느라 권총을 차에 두고 내려 사진 한 장 못 찍었네.

 

일요일 오후에는 김상현씨와 김명성씨가 녹번동으로 찿아왔다.

양조장에 술이야 있지만, 안주 준비를 못해 단감으로 때웠는데,

나야 술만 좋으면 손가락을 빨아도 괜찮지만, 김명성씨가 성이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부경찰서 뒤에 좋은 횟집이 있다며 끌고 간 것이다.

길이 헷갈려 간신히 찾았는데, 횟집 이름이 ‘마포나루’였다.

네 사람이 여러 가지 회를 양껏 먹었으나, 십 만원 남짓이었다.

가격이 싼데다 맛있고 가까우니 죽기 전에 한번은 더 올 수 있겠다 싶었다.

‘마포나루’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뿔뿔이 헤어졌다.

 

파장 잔치는 언제 쯤이나 끝날까?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재즈의 메카 ‘Mu/art’ 28주년 가을페스티발이 지난 12일 열렸다.

 

청각에 문제가 생겨 '뮤아트에 간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충무로 브레송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에서 만난

들과 어울린 술 자리에 있었으나, 안 갈수가 없었다.

 

빨리 오라는 김명성씨 전화에 서둘러 지하철을 탔는데,

오래간 만의 걸음이라 신사역 출구조차 헷갈려 한 참을 헤메었다.

 

어두컴컴한 '뮤아트'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 있었.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이상훈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보였다.

 

그런데, 그 날이 뮤 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 생일이라 했다.

오길 잘 했으나, 아무런 준비를 못해 축하인사 밖에 할 수 없었다.

 

고맙게도 후배 한 분이 발렌타인 21년산 한 병을 내 놓았다.

덕분에 좋은 술에 행복하게 취할 수 있었는데, 공연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째즈 보컬에 Ahreum Ash Hanyou, 피아노에 정태호,

바이얼린에 송정민씨 등 트리오 앙상블에 귀가 번쩍 뜨였다.

피아노와 바이얼린 연주도 훌륭했지만,

보컬의 음색이 늦가을처럼 처연하고 노란 은행잎처럼 영롱했다.

 

그 뿐 아니라 김상현씨와 하양수씨가 들려주는 노래 울림도 깊었다.

김상현씨의 노래는 들을 때마다 그의 삶처럼 애잔한 슬픔이 느껴진다.

 

오로지 음악에 빠져 삼십년 동안 한길을 걸어 온 그의 집념이 존경스럽다.

돈보다 음악에 목숨을 걸어 온 그의 일념이야 알지만,

긴 세월 뮤아트를 끌어 왔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몸쓸 병마까지 닥쳐 죽을 고비까지 넘기지 않았던가?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흥겨운 시간이 되었는데,

김명성 시인은 술만 마시면 시를 쓰는 습관이 있다.

하기야! 술자리처럼 한가할 때도 없지만, 술 기운이 시상을 촉발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주류시인이 아니겠는가? 

 

 '뮤 아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먼 훗 날 '뮤 아트'를 추억하는 이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실 것이고,,,

 

사진,  / 조문호

 

 

2020년 뮤아트 28주년 가을 festival

 

 

추석을 맞아 이청운화백 문병가자는 연락이 왔다.

병문안 간지가 2년이 넘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 걱정되었다.

이미 간다는 약속이 된 터라 내가 안 된다고 우길 일은 아니었다.

 

죽고 사는 것은 운에 맡기고,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에서 따라 나섰다.

약속한 서부경찰서 앞으로 가니, 전활철, 김명성, 조해인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이어 김상현씨가 나타나 다섯 명이 모여 병문안을 한것이다.

 

이화백이 자리에 누운 지가 벌써 6년이 지났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부인 이상랑여사가 반겼는데, 얼마나 고생 했으면 늙어보였다.

밤낮을 지극히 보살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듯, 자리 털고 일어날 때도 되었다.

 

! 그런데 이청운화백을 보니 화색이 좋아졌고, 눈빛에서 재기의 자심감이 보였다.

오래 전 만났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애통한 눈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 빨리 일어나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그림에 혼을 불어 넣어라.

 

오래 있을 수 없어 다들 연신내로 자리를 옮겨 술 한 잔 했다.

미리 약속했는지, 선수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먼저 온 네 사람 외에도 김각환, 최석규, 이상훈, 서길헌, 강찬모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복권 일등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연신내 복권매장에서

김명성씨가 복권10장을 사와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나야 복권 살 돈도 없지만, 어떻게 번호를 맞추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도 한 장 얻었는데, 주머니에서 돌아다니다 결국 확인도 못한 채 버렸다.

평소 요행을 바라지도 않지만,

만약 일억짜리에 당첨되었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물음에 멍해졌다.

돈이 생겼다는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팠다.

 

방향이 같은 조해인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코로나는 물러가고, 이청운화백도 일어나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가 무색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에는 광화문광장 시위에 일장기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 난지 75년이 지났건만,

친일 청산은 커녕, 오히려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란 전시 제목이 실감났다.

 

다시 한 번 미치광이 전광훈 개독집단과 꼴통 보수 세력이 친일 잔재라는 걸 입증했다.

그 뿐이던가?  맞장구치며 부추기는 보수언론이 더 문제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씹는 보수언론 논리에 귀가 막혔다.

 

독재자 이승만의 일제 계승과 무고한 민중 학살을 몰라서 하는 말이던가?

그렇게 일제 치하가 그리우면 국적을 바꾸던지, 차라리 일본으로 이민가라.

언론이란 가면을 쓰고 국민을 이간질 시키는 무리부터 척결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위급한 때가 아닌가?

도저히 쪽방 구석에 처박혀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갔다.

시위를 끝내고 지하철로 몰려드는 늙은이들의 행렬이 측은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거리로 내 몰았을까? 역병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요즘 떠도는 유행어처럼 독립운동은 못해도 꼬장은 부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원칙도 가치관도 없이, 젊은이들로 부터 지탄 받고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인사동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거리엔 발길만 분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리 사진부터 찍었겠지만, 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유목민’ 앞에 연출가 기국서씨와 김명성씨 모습이 보였다.

김명성씨가 추진한 독립 자료전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개막식이 있던 날은 작업 때문에 밀양에 있었단다.

 

모처럼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기국서씨가 고충을 털어 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했다

결과에 돈이 걸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미칠 것 같단다.

 

비록 기국서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주변과 얽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도 권력이나 돈에 치우치면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나 친일시인 서정주와 다를 게 무엇인가?

차라리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한 쪽 자리에는 ‘뮤아트’ 김상현씨가 후배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유진오씨는 분주히 ‘유목민’ 일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출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인 이승철씨, 박재웅씨 일행에 이어 단청장 이인섭씨가 나타났다.

좀 있으니, 시인 정희성씨와 소설가 현기영, 산악인 박기성씨가 왔다.

 

이 우울한 날 어찌 술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때와 달리, 기국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시국처럼, 술자리마저 흩어져 사분오열이었다.

‘유진커피숍’에서 팥빙수에 더운 속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꼭 찾아갈 곳이 있다.

바로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전이다.

그 전시를 보며,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되새기자.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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