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최울가를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만나자고 한다.

속상한 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최울가 때문에 안 갈 수 없었다.

 

최울가는 부산 시절부터 알던 동생 같은 후배인데, 만난 지가 삼 년 가까이 되었다.

자리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공간에서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가는 유목민 같은 작가라 자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권은 물론 파리에서 북미 지역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데,
서울에 오면 파주에 있으나 파주 작업실은 물론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 떠도는 유동성이 최울가 만의 방식이 되어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화이트, 블랙, 레드+’전도 보러 갔으나 작가는 만나지 못했다.

 

상형문자 같이 원시성을 띤 그림들은 자유로웠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는데,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고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 그림도 있었다.

 

최울가만의 독창성과 기발함을 세상이 모를 리 없다.

요즘은 스타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작가라 작품값도 천정부지다.

 

지하철에서 옛날 생각에 빠지다 보니, 금방 안국역에 도착했다.

유목민’에 가니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도 있었다.

 

안 쪽에는 최울가,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를 운영하는 김정대씨 내외도 와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최울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 요즘 좋은 곳에서 산다면서라는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전시 때 못 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을 전해 주었는데,

쓰리쿠숀으로 돌려 준 돈봉투에 삼십만원이나 들었네.

"고맙다. 그 돈으로 햇님이 지방선거 현수막 값이라도 좀 보태 애비 체면 좀 세울께.."

 

김명성씨는 얼마 전 울산서 전시한 박상진과 동지들이야기를 했다.

박상진 투사의 활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매국노 이완용 글씨까지 걸었다가

여론에 밀려 철수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단다.

 

그런데, 김정대씨가 4년 전에 결혼했다는데,

이렇게 젊고 예쁜 부인을 두었는지 미처 몰랐다.

소장수 같은 인상에 마누라 복은 있네요.

 

술 마시다 정선집 불난 이야기가 나오니,

30년 전에 최울가가 선물한 그림 생각이 났다.

 

화마에 휩쓸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 오는 날 개울가에 아이가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 앉은 그림이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인데,

그림을 그린 작가도 보고 싶어 했으나,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빠져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금새 취해 버렸다.

술집 실내에서 담배까지 피웠으니 취해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최울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탔는데, 불광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는 잠들어 버렸네.

 

돌고 돌아 녹번동을 찾아갔더니, ‘스마트협동조합이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취했고 서인형씨는 기다리다 취했으니, 용건이 뭔지도 모르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마시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언제나 술이 술을 마셔, 오바하는 것이 문제다.

속은 쓰린데다 엊저녁 실수한 일이 생각나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사진, / 조문호

 

 

 

'박상진과 동지들' 책표지 (가격 50,000원)

고헌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의사 순국 101주년을 기념하는 박상진과 동지들-민주공화국을 향하여가 발간되었다. 출판과 함께 지난 2 27일부터 3월27일까지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전람회도 열렸다.  배달 겨례의 의병전쟁 창의와 순국’, ‘혁신유림의 길-지신과 절의’, ‘민주공화국의 씨를 뿌리다-박상진과 동지들’, 대한독립선언서-무장독립전쟁과 육탄혈전’, ‘홍익인간과 통일-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 다섯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박상진과 동지들' 전시 포스터.

박상진의사는 1909년 하얼빈의거를 일으킨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를 잇는 광복회 총사령 출신으로 독립전쟁 자금마련을 위해 무장투쟁을 감행한 분이다. 구한말 혁신유림의 공화주의 사상으로 국내외 비밀결사의 독립전쟁을 실천한 민주공화국 건설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 되고 있다.

 

박상진 서간(書簡) 22.5x41cm 1911년 10월 11일 박상진이 부친 환갑을 맞아 자리를 빛내 달라고 부탁하는 사연을 담아 보낸 서간이다.

한일 강제합병 5년 뒤인 191512월 경북 경주 효현교에서 대구로 향하던 일제 우편마차가 권총을 든 청년 2명의 습격을 받아 현금 8700(현재 추정 가치 약 25천만원)을 털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경주 관금봉적사건으로 보도했지만, 이 사건은 그해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전국 규모의 비밀 독립운동단체 광복회가 만주 독립군기지 지원을 위해 벌인 첫 거사였다.

 

박상진, 박시룡 회갑연 초대장 32.5X41cm 종이에 먹, 아버지 회갑연을 내세워 동지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

이를 지휘한 인물이 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을 맡은 고헌 박상진 의사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판사 발령마저 팽개치고 가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주 우편마차 외에도 평북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와 대구 친일부호 등을 습격해 독립투쟁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박상진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밥그릇

뿐만 아니라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단장 김원봉이나 신채호와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독립전쟁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 박상진 의사다. 만주 연해주 등 해외독립전쟁을 주도한 김좌진, 홍범도 같은 인물 역시 독립전쟁기지 구축과 전쟁자금 확보에 있어 박상진 의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주 김진우 '묵죽' 136X87,4cm 종이에 수묵

빅상진과 동지들에는 혁신유림사상의 위정척사파와 계몽운동가, 그리고 이들 투쟁노선과 사상을 융합한 광복회, 의열단, 무정부주의자 등 독립전쟁의 선봉에 선 투사들의 작품이 총 망라되었다. 퇴계 이황의 시 유거’, 남명 조식이 쓴 이백의 시 궁중행락사를 비롯하여 개화기와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침략과 중국과 일본의 역학관계 중심인물인 명성황후의 효제충신’, ‘예의염치도 수록되었다.

 

이강년 李康秊 1858~1908 이강년 '격고각도렬읍(檄告各道列邑)' 24x53cm 1907년 종이에 먹,

그리고 개화사상가인 서재필, 김윤식, 김옥균, 김좌진 합작의 시고족자를 비롯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신민회’, ‘협동학교’, ‘서전서숙’, ‘동창학교’, 관계 인물들의 간찰, 시고도 게재되었다. 자정순국, 의병전쟁, 독립전쟁의 주요인물 필적으로는 위정척사파로 병인양요 시 순절한 이시원의 절명 시고’,  박상진의 부친 환갑잔치 초대 서간’, 의열단장 김원봉의 단장지가’, ‘독립전가등이 있다.

 

강룡권(연변역사연구소) '서일묘소 탐사기' 26x19cm 1990년 4월 15일

특히 강룡권씨가 찾아낸 최초의 독립선언문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와 여기에 서명한 39인 중 김교헌을 비롯한 20여명의 간찰, 시고 등 여러 필묵도 소개된다.

 

이구영 인자무우127X33cm 종이에 먹

박상진과 동지들에 수록된 수많은 필묵과 서간들은 '독립투쟁사기념관 추진회' 위원인 김명성씨 개인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박상진 의사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그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그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와 공훈 등급 상향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병산 ‘목계’31X63cm 종이에 먹

그리고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인사동 인사 민병산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의 필묵도 실렸다그 외에도 독립운동의 시대적 상황을   상세히 알리독립 활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중근 의사의 총에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친일매국노 이완용 작품까지 실어 물의를 빗기도 했다

 

철거된 데라우치 마사다케 작품(좌)과 이완용의작품, 이토 히로부미 작품도 함께 철거됐다.

박상진과 동지들에 수록된 서간과 필묵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 박영효, 의친왕 이강, 이황, 조식, 김옥균, 최재우, 서재필, 민영환, 이준, 안중근, 홍범도, 이범석, 박열, 김좌진, 김구, 이승만, 여운형, 신채호, 신익희, 조소앙, 김창숙, 장일순, 이육사, 김진우, 김성일, 류성룡, 이하응, 이항로, 기정진, 전우, 송병선, 허묵, 허훈, 곽종석, 이기원, 최익현, 류인석, 기우만, 심상훈, 김세기, 권세연, 이인화, 최병심, 금달연, 서상렬, 이범직, 임한주, 이강년, 이규현, 김태원, 신보균, 정운경, 이승구, 문석환, 류준근, 김덕진, 정재규, 양재해, 오준선, 이남규, 김도화, 이설. 김복한, 노응규, 채광묵, 노병대. 이동수, 민형식, 김인식, 김동필, 정제두, 이건창, 이건승, 이승희, 김대락, 안창제, 정인보, 박시룡, 박시규, 허위, 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박규수, 김홍집, 류길준, 김윤식, 김상범, 이유인, 장지연, 이명룡, 임치정, 류인식, 이상룡, 김병식, 박광희, 이중태, 이원식, 이시원, 한규설, 김석진, 황현, 이성렬, 백인수, 정동식, 박세화, 김도현, 이만도, 조장하, 류필영, 류도발, 김근배, 이범진, 강원형, 한규설, 윤주백, 민영달, 장석영, 이직현, 윤용구, 김택영, 신돌석, 이상설, 안희제, 이진룡, 노백린, 이세영, 김재풍, 김후병, 권준희, 허병률, 김진만, 이중업, 김상기, 문영박, 김찬규, 손후익, 김창숙, 신태식, 김원봉, 김지섭, 김재덕, 이진영, 황옥, 사이토 마코토, 김산, 김교헌, 김약연, 이상룡, 여준, 신규식, 조성환, 손일민, 이세영, 박은식, 서일, 신팔균, 안병산, 이용직, 민충식, 최정식, 최해, 조용하, 이붕해, 전성호, 조명희, 이상화, 김동삼, 지청천, 손병희, 이시영, 나철, 오세창, 김철수, 전성호, 최현배, 김두봉, 나운규, 현순, 유일한, 최인훈씨 등이다

 

이번 전시와 출판은 울산 출신 독립 운동가이자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와 함께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조국 광복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조문호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박상진과 동지들' 전시장 풍경

며칠 전 모처럼 김명성씨 댁을 찾아갔다.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작품 전해주러 갔는데,

때마침 김상현씨와 임성익씨 등 여러 명의 손님이 와 있었다.

 

중국집에 요리시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벽에 걸린 이청운씨 그림 두 점이 유독 눈길을 끌었.

여러 번 보았지만, 보면 볼수록 더 좋았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이청운씨 명작만 모은

전시라도 한 번 하면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판화전을 열기 위해 작가 측과 협의 중이라고 했다.

 

마침 초창기 중앙미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 외에

중요한 작품은 작가가 갖고 있다니 볼만한 전시가 될 것 같다.

 

좋은 작품은 나누어 갖는 의미도 있지만,

오랜 투병에 지친 이청운씨 병원비라도 보탤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그림에 손 놓은 지가 오래되어 판화에 서명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잘 성사되어 이청운 화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2021.9,23

지난 23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도 ‘유목민’ 담벼락에 내 걸어, 옛말처럼 떡 본 김에 제사지낸 것이다.

현수막전은 서울역이나 동자동에서 해야하지만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전시였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부터 들렸는데,

환자들이 많은데다 물리치료까지 받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와 정영신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는데, 끝나고 가니 떠나고 없었다.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아산 공유공간 ‘마인’ 김선우씨와 양햇살, 김온 군이 와 있었다.

사진가 전제훈씨는 일찍부터 왔으나 문이 잠겨 한 참을 기다렸단다.

마침 사진집을 가져온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와 계셨다.

 

아산 팀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담벼락에 현수막부터 설치했다.

아침 식사를 못해 전제훈씨와 '툇마루'에 갔다 오니, 그때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 보러 오신 분들이 현수막 전에도 들려 ‘유목민’ 골목은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즈음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신용, 조해인, 김이하, 김명성, 김상현, 함창호, 조준영, 노광래

김문호, 장경호, 김수길, 김발렌티노, 최인기, 김종준, 윤 관, 이택근, 강기식, 조경석, 이두엽, 한상진,

김 구, 나종희, 노영미, 이상근, 이광군, 임경일, 최명철, 김효성, 서인형, 김성은, 김재홍,

이인섭, 김진하, 이창수, 이한복, 김영진, 곽명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난처하게도 ‘뮤아트’ 김상현, 김병수씨 일행은 악기를 가져 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를 축하 한다지만 옆에 노숙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내세워 잔치 벌이는 꼴이 된 셈이다.

흥겨운 음악이 아니라 애잔한 슬픔이 깔린 음율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경이 곤두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끝난 후 나온 술 값이 한 달 생활비가 넘었다.

허구한 날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참에 술 한 잔 대접한 것이다.

그나저나 술집 앞에서 열리는 전시라 끝나는 날까지 살아 남을지 모르겠다.

 

멀리서 와 주신 전제훈, 함창호씨를 비롯해 온 종일 일을 도와 준 아산 '마인'팀,

그리고 전시를 축하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선우촬영

 

 

 

김신용 시인이 인사동에 뜬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목민에 출몰하는 디데이는 7일 오후 네 시로 잡혔다는데, 아마 손님 없는 낮 시간을 택한 것 같았다. 

마치 간첩 접선 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구신들 모이 챙기느라 좀 늦었는데, 한 낮의 술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신용, 김명성, 조해인, 장경호, 김원명, 노현덕, 김수길 씨가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있었는데,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뒤늦게는 김상현씨와 안원규씨도 왔고, 딸 같이 예쁜 소녀 조은영, 박지수양 까지 합류했다.

김신용씨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하며 잠적했으니 근 이년이 가까워 온다.

 

그동안 월북한 게 아니라 시작에 몰입했다고 한다.

이사도 두차례나 했다는데, 다음 달엔 다시 홍제동으로 온다고 했다.

돈 벌려고 이사를 자주하는 복부인과는 달리 빈자의 설움이다.

한 편으론 사는 환경에 따라 시적 대상도 새로워 질 수 있겠더라.

 

이 얼마만의 인사동 유민들의 만남이며 얼마만의 술판이던가?

그동안 수행하듯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니, 몸은 좋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김신용씨가 몸만 온 게 아니라 새로 낳은 시집 .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를 챙겨왔다

 시가 전과는 달리 짧아졌는데, 시처럼 시집도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았다.

 

 

김신용의 아홉 번째 시집에는 90여편의 짧은 시가 실려 있었다.

시의 대상이 자연적인 사물과의 대화에 집중되고 있었는데,

서사적 구조에 중점을 둔 종전과는 달리 함축된 미학적 탐미가 두드러졌다.

'백조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가격은 9,000원인데, 갖고 다니며 읽기 딱 좋았다.

 

김신용 시인은 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양동시편-뼉다귀집6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밑바닥 인생인 지게꾼으로 살며 버려진 사람’, ‘개 같은 날들의 기록등을 발표한 대표적 노동자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기며 시도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하잘 것 없는 사물과 대화를 나눈 도장골 시편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몸으로 부딪힌 시에서 감성으로 부딪힌 시로 바뀐 것이다.

 

그동안 장편 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를 비롯하여

산문집 저기 둥글고 납작한 시선이 떨어져 있네등을 발표한바 있다.

문단의 주목을 받아 온 김시인은 '천상병시상', '노작문학상'도 수상했다.

 

김신용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더 이상 입 아픈 소리는 그만두고

시집에 실린 시 안개’나 맛보기로 소개하련다.

 

안개 자욱한 봄의 들녘에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안개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다.

이제 곧 햇살의 작은 새 떼들이

안개의 심장 속을 날아올라

아침을 깨우리라

 

박형준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맑게 빛나는 사물의 영혼과 손을 맞잡은 느낌이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이런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숨결 같기도 하고 이슬 같기도 한 이 아련한 따뜻함이 정겹다.

김신용의 시는 작고 여린 사물이 서로 맞잡은 손에 가만히 쥐어준 손수건 같다.

옹이, 풀잎, 이슬, , 수박, 목화씨 등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해준

위로의 힘 덕분으로 나는 그대와 처음 손잡고 걷던 그 길을 다시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에 그때의 벤치가 남아 있다면, 사물들의 영혼이 건네준 손수건을 깔고 함께 앉아

그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의 살아온 숨 냄새를 맡고 싶다.“

 

다른 때 같았으면 출판을 기념하는 잔치가 떠들썩했을 텐데,

이 미친놈의 코로나가 무서워 간첩 접선하듯 만난 것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로 위안한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불러주는 축가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조용히 살자고 명세에 명세를 하였건만, 술만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막힌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건, 노래가 아니라 피 토하는 각혈환자의 절규였다.

 

술과 안주는 또 얼마나 푸짐했으면, 아무리 먹고 마셔도 계속 나왔다.

그 술값은 긴 세월 인사동 유민들을 챙겨온 김명성씨가 냈다.

그 역시 형편이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제 버릇 개주지 못한다.

 

헤어질 때도 하나하나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졌는데,

은밀한 접선이라 은밀하게 헤어졌다.

 

지하철을 탔으나,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에 미쳐 있었다.

시집을 꺼내 보고 싶어도 꼰대로 보일까바 참았다.

 

머리에 박힌 고드름시 한 편을 되뇌어 보았다.

물이 되어 흘러내리다 문득 걸어 온 길 되돌아보는,

저 서늘한 눈빛

 

사진, 글 / 조문호

 

 

 

무더운 날씨에 술을 마셔 그런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은 편이지만 도저히 못 견뎌 물을 덮어썼는데,

몸만 식히지 죄 없는 머리는 왜 밀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토요일 술 한 잔하자는 김명성씨 연락을 받았다.

일전에 최옥영씨 대지미술 보러가자며 연락해도 몸이 아파 못 간다더니 이제 좀 살만한 모양이었다.

 

그날은 전화기를 꺼 두어 정영신씨를 통해 연락을 받았으나, 약속된 ‘마포나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기가 없어 무작정 기다렸더니, 조해인시인과 뒤늦게 나타났다.

뭔가 엇갈려 여지 것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모처럼 소라 멍게 등 해산물을 안주로 한 잔 마셨는데, 그동안 몰랐던 소식을 많이 듣게 되었다.

자기가 무슨 명탐정이라고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위장한 친일파 찾는다고 독립운동사 뒤져가며 살더니 몸이 못 버텨낸 것 같았다.

오십견에 버금가는 곤욕을 치루며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동안 별일도 많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에어컨 호스가 터져 온방에 물벼락을 맞았는데, 억대가 넘는 병풍이 젖어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요즘은 표구기술이 좋아 감쪽같이 원상복구는 되었으나 표구 값이 칠백만원이나 나와 겨우 오백만원으로 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구 값을 친동생인 김효성씨가 냈다고 한다.

여지 것 동생한테 도움 받아 본지가 없어 그런지, 그 날은 동생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기야! 요즘 효성씨가 신단수란 필명으로 신문에 운세를 연재하며 정치인 운세로 뜬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잘 나가는 상업 출판사와 10만부를 예상하는 출판계약을 맺었는데, 표구 값을 낸 것도 그 계약금 받은 돈이라고 했다.

 

동생은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다는데, 맞는 말이었다.

자기가 어려울 때도 남 도와주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그 복을 이제사 받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은 누워 있는동안 엄청난 생각을 해낸 것이다.

아직 공개할 때가 아니라 말은 못하지만 미술시장을 뒤집을 기획안이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김명성씨만의 사업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취해 버렸다.

술집에서 나와 커피 집으로 옮겼으나, 여섯시가 넘어 두 사람 이상은 안 된단다.

커피를 사들고 무더운 햇살아래 마셨는데,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다는 소리도 않고 도망쳐 나와 더위 먹은 개처럼 헉헉거렸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실에 들어가 물부터 뒤집어썼는데,

무슨 병이 도졌는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가위로 자른 후 신통찮은 면도기로 밀었는데, 위험천만의 일이었다.

나이가 많아 절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텐데 땡초가 되고 싶었을까?

 

간신히 치워놓고 나니 그때서야 집 주인이 나타났다.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사정없이 총을 갈겨 본색을 들키고 말았다.

바람 넣은 볼작을 똑똑 두드리며 선처를 바랬다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만봉 스님 기일이라는 전활철씨 연락을 받았다.

 

만봉스님 자제분인 이인섭선생께서 생일과 기일이 되면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오찬을 베푸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직접 재워두었다가 구워주는 소갈비 맛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가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다. 솔직하게 말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해 이번엔 만사를 제쳐두고 봉원사로 달려간 것이다.

 

입구에 걸린 고색창연한 ‘만봉불화전시관’이란 현판이 반겼는데, 안쪽에는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김명성, 안영희, 안완규씨등 뵌 지가 오래되어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님들이 선물로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는데, 스님 기일에 양주와 갈비 파티가 어울리지 않지만,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의 오랜 전통이니 널리 양해하시길...

 

다른 분들이야 가끔 인사동에서 만나지만, 만봉스님 제자였던 안영희씨는 너무 오랜 만 이었다.

예쁜 모습은 여전하지만, 곱게 나이던 주름을 보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끌고 와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다른 분들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좋은 술이 남아돌았다.

 

이인섭선생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전활철, 김명성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보러 간다는 전활철씨를 영천시장에 내려주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판화전시 보러 간다는 김명성씨 따라 나섰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겨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철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관객이 제법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전시였다. 판화의 진면목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이만한 기획전을 어디서 보겠는가?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김명성씨는 김억씨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에서 실내장식 중인 뮤지션 김상현씨를 만나러 갔다.

이제 ‘뮤아트’ 신사동 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태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약50여 평 되는 공간에 공사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신사동 ‘뮤아트’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될 것 같았다.

 

‘이태원 이모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했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재미있었다.

 

생각에 따라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주 화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김명성씨가 이승만에 의해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데,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조선의혈단’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서찰을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얼마나 독립운동사에 빠져 몰입하는지, 좋아했던 여자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선 집에 불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소송을 위한 비용은 화가 박건씨가 페이스북에 올려 들어 온 후원금 천만 원으로 우선 추진한다는 말에 김명성씨와 김상현씨도 보태겠다며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옆집의 뻔뻔하고 얄팍한 속내도 얄밉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름 원본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손해배상 규정에 맞서기 위해서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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