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 ‘코로나’에 겁먹어 방구석에 처박혀 사는  이 비상시국에 김명성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지만, 온몸이 근질근질 하던 차에 냅다 진관동으로 달려갔다.


 

‘한옥집’이라는 삼겹살 집을 물어물어 찾아 갔더니, 김명성씨와 김상현, 심재문씨가 와 있었고,
나중에는 전활철, 유진오씨가 나타났다.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에서 한 잔하고 오는지, 둘 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왔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 만나 삼겹살 구워 술 한 잔 했다.




김명성씨는 독립운동자료 기획전을 추진하다 연기했다는데, 사태가 진정되면 전시를 열 모양이었다.
빨리 전염병이 사라져야 ‘한옥마을’로 봄나들이 갈 텐데, 일정이 맞아 떨어질지 염려된다.
이 달 중 20일 동안 어디 갔다 와야 할 일이 있어서다.




술자리가 끝나 김상현씨와 김명성씨 집에 차 한 잔 하러 갔는데,
혼자 사는 집이 티끌 하나 없이 반들반들 했다. 참 부지런하고 꼼꼼한 친구였다.
요즘은 음악에 심취해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마침 Ravel의 ‘Bolero’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음악에 미쳐 살던 아득한 옛 날이 떠올랐다. 
Deep purple의 ‘April’이 생각나 신청하였더니, 김상현씨가 찾아서 들려 주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노랫말처럼, 잔인한 4월을 맞을 것 같은 예감이었지만,
음악이 흐를수록 희열이 느껴졌다.




뒤이어 김상현씨가 선곡한 ‘Black Orpheus’ 반주에 푹 빠져 들기도 했는데,
추천 곡으로 ‘Once upon a time in america’도 시간나면 들어보라고 권했다.




음악도 마약 같아, 한 번 빠져들면 끝이 없어 겁난다.
젊은 시절엔 삼천여장이나 되는 LP판을 처분한 적도 있었는데, 왜 적당히 즐길 줄 모를까?




모처럼 옛날 생각하며 음악에 취한 즐거운 밤이었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왠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이 나이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ㅉㅉ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살아 생선 강민선생께서 주도하신 인사동 오찬 모임이 오랜만에 다시 열렸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부터 서서히 잊혀져갔는데,
강민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김승환, 방동규선생 등 다른 분마저 뵐 수 없었다.
언젠가 자리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서정란씨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다.



조문호샘 올해 가기 전에 송년회 한 번 해요. 강민 선생님과 친분 있는 분들이랑요

그래서 "얼씨구나" 만들어진 자리가 지난 30일 정오에 뭉친 나주곰탕오찬모임이다.

인사동 툇마루일층의 나주곰탕은 강민선생 단골이기도 했지만,

탕 속에 고기가 푸짐해 술안주로 안성마춤인 밥집이다.


 


약속장소는 손님이 꽉 차, 다들 그 옆에 있는 찻집에 앉았는데,

방동규, 김승환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희연, 서정란, 이명옥,

이은정, 전태수씨 등 여러 분들이 자리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보면 반갑고, 앉으면 빨고 싶은 분들이 아니던가?

강민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서정란씨 이야기가 오늘 점심은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산다는 것이다.

모임이 정해지고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았는데, 강민선생 아드님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자주 만났던 분들께 인사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었다.

이건 분명 강민선생님께서 저승에서 아들에게 지령내린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국서씨가 '나주곰탕'으로 급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가서 찻집으로 데려 왔는데, 차라도 한 잔 하며 여유롭게 즐기라는 계시였다.

다들 연말이라 모이는 곳이 많은 모양인데, 뒤늦게 이행자시인도 나타났다. 

뚜꺼비 같은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인증 샷만 찍고 도망치셨다.




 나주곰탕’에서 자리 비었다는 전갈에 다들 밥집으로 옮겼다.

소주 한 잔하며 탕 그릇에서 건져 놓은 수육을 보니,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생각났다.

술 안주로 건져놓은 수육을 매번 슬며시 내 접시로 옮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 같았다.

불의에는 칼날처럼 매서웠던 강민선생님의 그 자상한 모습이 떠오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눈물이 탕 그릇에 떨어지는 거야 괜찮으나, 누가 볼까 쪽팔려 미치겠더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요량도 못한 채 취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정원으로 차 마시러 갔다.

, 까발리는 걸 좋아하는데, 다들 비밀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비밀정원에 가 있으니, 다른 곳에서 한 탕 뛰고 온 김명성씨가 나타났.

기국서씨는 술이 부족했던지, 보드카처럼 생긴 독주 한 병을 사 왔다.

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두 잔만 마셨는데, 그 술을 혼자 홀짝 홀짝 다 마셨다.


 

오늘은 빠질라고 작정하고 왔어요’라고 했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기상천외의 퍼포먼스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 나 남녀가 약속이나 한 듯 갈라졌다.

방배추선생께서 기국서, 김명성씨등 꼬봉들을 거느리고 유목민을 습격한 것이다

가보니 송일봉씨가 입구에서 뭔가를 정탐하는 것 같았고,

안쪽에는 시인 정동용, 기타리스트 김광석, 발렌티노김도 보였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 찍을 일도 많은데, 방배추선생 구라 듣느라 퍼져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이 누구더냐?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선생은조선의 주먹등 최고로 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노동판에 일하러 가고, 체육관에 다니며 체력 관리하는 분이다.

, 한마디로 선생님을 義人이라고 생각한다. 옳지 못한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태극기부대나 가셔야 할 분이 촛불집회마다 쫒아 다니신다.

얼마 전 김정헌씨 작품 보러 간 영종미술관에서 그림 보며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엠블란스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뒤늦게 들었다.


 

그 날 하신 말씀도 놀랄 노자다.

여지 것 청년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노인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살아온 그 소설 같은 실화를 기국서씨 더러 극화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 날 이야기만도 밤 샐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기국서씨는 귀가 어두워 여기 저기 귀 기울이는 꼴을 보더니, 날 더러 탐색가라 했다.

내 귀에는 색을 탐하는 자로 들렸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번째 툇마루에서 열릴 인사모시간이 늦어버렸다.

정동용씨 더러 있으라 해놓고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달려갔는데,

가서 된장비빔밥에 술말아 또 한 잔 걸친 것이다.

반가운 분들과 노닥거리니, 시간은 잘도 갔다.


 

작별 인사하기가 무섭게 유목민으로 달려가니, 이미 술꾼이 바뀌었더라.

방동규선생을 비롯한 잔당은 물론 정동용, 발렌티노김, 김광석씨도 다 사라져버렸다.

새로 등장한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사진하는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다.

금주 한지가 두 달이 넘었다는 이정환씨는 소주잔에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그나저나 긴장이 풀려 그런지, 술이 슬슬 올랐다.

쪽방 계단 오를 일이 겁나 줄행랑쳤는데, 인사동 밤거리는 축축했다.

어떤 미친 할매라도 납치되고 싶었다.



쇼윈도를 올려다보니, 처녀귀신이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네 이놈! 아직 정신 못 차리고 탐색하냐?

강민선생께 일러바쳐, 저승 오면 곤장이 백대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사진






































지난 28일은 인사동 가는 길을 소녀상이 있는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잡았다.
나올 때 치를 떨며 보았던 위안부 사진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녀상을 지키는 학생도 천막 안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사진은 위안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길 때, 주변을 보지 못하도록 트럭에 장막을 쳤다.
잠시 멈춘 트럭 주변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서성거리는 여성은, 일본놈 완장인 것 같았고,
트럭 안에서는 한 여인이 뭔가 적은 쪽지를 전달하고 싶어 안달했는데,
그 안타까운 마음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이런 걸 보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놈들은 사람새끼가 아니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하니,
소녀상 철거가 아니라, 일본대사관을 철거해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북인사 마당으로 옮기니, 인사동 상징 조형물이 좆처럼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다른 때보다 사람도 적은데다 거리도 낯설었다.
큰 길가의 상점도 바뀐 곳이 많지만, 골목 안 술집 간판도 많이 달라졌다.
그중 아쉬운 건, 추억이 오롯이 남은 ‘인사동 사람들’이 곰탕집으로 바뀌었더라.




가게가 바뀌고 술집이 바뀌는 건, 주인이 바뀌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인사동 풍류가 사라지고, 사람들 마음이 바뀌는 게 더 서글펐다.
온 종일 거리를 헤매었으나,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가고 싶은 찻집이나 술집도 없었다. 마치 무인도에 홀로 선 것처럼...




밤에는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백상사우나’에 들어갔다.
예전에는 백상사우나에 가도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탕 안에서 가만히 생각하니, 헛 웃음만 나왔다.
대관절 무엇을 찾는 것인가? 누굴 기다린단 말인가?




실연한 사람처럼 밤거리를 휘적거리다, 지하철을 탔다.
마침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형 뭐해? 저녁이나 같이 먹지” 김명성씨 전화였다.
인사동에서 녹번동으로 발길을 옮겼드니, 조해인씨와 김광만씨도 있었다.




중국집에서 유산슬 요리시켜 고량주 한 잔 했다.
독립운동사를 훤히 꿰고 있는 김광만씨와 김명성씨가 뭉쳐
큰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날 우연히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복동 할머니의 편지도 읽었다.
또박 또박 써 내려간 피눈물 나는 사연에 가슴이 미어졌다.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어디 인사동뿐이더냐?
아! 졸라 슬픈 하루였다.




30일 정오에는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방배추선생과 기국서씨를 만나고,
그 뒤 인사동을 돌아다니다, 저녁 여섯시에는 '툇마루'에서 ‘통인’ 인사모 팀과 술 마시고,
일곱시가 넘으면 ‘유목민’에서 놀다, 인사동을 마무리하련다.




온 종일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만 찍을 작정이니,
시간 있으신 인사동 사람들은 모두 나와 함께 추억합시다.
약장사 말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사동 마무리를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성씨가 왔는데, 별일 없으면 집에 놀러오라는 것이다”
별 일도 없지만, 구로구청장 이 성씨 본 지가 오래되어 진관동으로 달려갔다.

이성씨에게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안 한다고 했다.
할 만한 사람은 관심 없고, 썩어빠진 인간들만 몰리니 정치판이 개판 아닌가?




창밖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쓸리는 “솨~솨~”하는 바람소리가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다.

김명성씨 독립운동자료전을 비롯한 은평 한옥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김명성씨 더러 은평구청장을 한번 만나보라며 이성씨가 다리를 놓았다.
허물없는 사이인지 일요일인데도 김미경 구청장께 전화를 걸었다.


좀 있다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답이 온 모양인데,
한참 후에 나타난 김미경 구청장이 정희석 은평구 정책관을 대동했다.
김명성씨는 물론 나 역시 김미경 구청장을 처음 만났다.
오죽하면, 선거 포스트 사진보다 훨씬 인간적이라는 소리까지 했을까?




진관동 일대를 문화관광벨트로 엮기 위해 애 쓰는 은평구청장과
진관동 주민이며 문화전략가인 김명성씨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았다.

구체적인 논의보다 첫 인사나 나누는 만찬자리였으나,
돌아가는 분위기가 은평 한옥마을에서 좋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은평구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관광 체험 도시’를 만들고 있다.
수려한 북한산자락에 들어 서 있는 100여채의 한옥마을을 거점으로
2025년까지 옛 기자촌 자리에 “국립한국문학관”을 건립한다.
그리고 문화 예술인들이 창작 활동을 펼치고 시민들이 예술 체험을 즐기는
문화 아지트(예술인마을)도 조성할 계획이다.
진관동 일대를 ‘문화·관광 벨트’로 엮는다는 구상이다.




영원한 사진동지 정영신씨도 은평구에서 수 십 년을 살았지만,
아들 햇님이도 은평구에 산지가 오래되어, 여자로 치면 은평구가 친정 같은 곳이다.
이왕이면 친정 동네에 문화아지트 생기면 좋지 않겠는가.

전시장도 여러 군데 있다니, 좋은 전시를 유치하는데 힘을 보탤까 한다.


더구나 은평구 응암동에는 천재화가 이청운씨가 살지 않는가.
지금은 병석에 있지만, 대부분의 이청운 걸작들이 응암동작업실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김명성씨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진귀한 자료를 대부분 소장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 그 많은 자료를 촬영하여 데이터 베이스화 했는데, 대관절 나라에서 그동안 뭐했는지 모르겠더라.

그처럼 역사를 소홀하니, 역사를 뒤 집는 인간도 생기지 않더냐.
그 방대한 자료를 한 번에 전시하려면 '국립현대미술관' 전관을 빌려도 안 될것 같았다.

아무튼 은평구가 우리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우뚝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글 / 조문호














지난13일 연극 연출가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아니라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전갈에 괜히 쫄았네.

주인공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와 언론인 윤상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비가 내리다 멈춘 인사동 길은 은행잎이 떨어져 보도블록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 걸음에 밟혀  은행 터지는 소리조차 정겨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담커피숍에 김명성씨가 기다리고 있었.


 

 전활철씨의 안내로 유목민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춘천의 유진규씨가 나타났다.

뒤 이어 김상현씨와 조해인씨가 왔고, 나중에는 김수길, 이인섭, 최일순씨도 만났다.

기국서씨 훈장 덕에 반가운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귀한 훈장 술이라 술은 술술 넘어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

매년 30명이나 훈장과 상을 주면서 기국서씨를 왜 이제 주었을까? 

기국서씨 수훈도 공적에 비해 늦지만, 유진규씨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리고 문화훈장은 상금도 없는데다,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했다.

무공훈장처럼, 사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특혜도 없지 않은가.

금붙이가 아니라 전당포에도 잡혀주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밥 먹지 않고 명예만 먹고 사나?

대개의 예술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도움 되지 않는 훈장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에서 주는 훈장이 이 모양이니, 신문사에서 주는 문화대상도 상금 한 푼 안 주는 곳도 있다.

상으로 작가를 우롱하고 장난 치는 곳이 많으니, 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관객모독이 아니라 훈장모독이란 연극도 무대에 올려야겠다.


 

몇 일전에는 '이중섭미술상' 받는 정복수씨 시상식에 갈 일도 있었지만

주관하는 조선일보가 꼴 보기 싫었다. 어찌 치욕적인 사옥에 발 디딜 수 있겠는가?

그 곳에는 상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권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

일억을 상금으로 내놓은 '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이 더 좋은 상으로 친다.


 

훈장에 초치는 소리 집어치우고, 술자리 이야기나 해야겠다.

그 날의 화제는 70년대 시절 이야기가 많았는데, 명동 심지다방을 비롯한 다양한 추억담이 나왔다.

그 당시는 부산에 살아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말짱 도루묵이네. 


 

조해인씨는 영화 도둑들에 출연한 기국서씨의 연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장면들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기국서씨는 연출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명성씨는 몇 일전 무세중씨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는데,우리 상복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 했단다.

그렇기야 하지만, 한복이라면 모르나 흰 양복이 어울리겠는가? 전통장례를 두고 다들 서양식 장례를 택하니 어쩌겠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유진규씨는 어머니 임종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곁에 누워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말씀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잠 들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는데, 이보다 행복한 임종이 어디 있겠는가?


 

70여 편의 창작으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씨 문화훈장 수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번 수훈이 창작활동의 결실인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기국서씨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며 늦도록 축배를 들었다.

기분좋게 만취한 것은 좋으나, 버스타고 졸다 종점까지 가버렸네.

 

사진, / 조문호
















김수길사진















김수길사진

















조해인사진




















 

 




지난 토요일은 여의도 촛불집회장에서 인사동으로 호출되었다.
인사동에서 김명성씨와 화가 최울가씨를 만나기로 했다.

최울가는 유목민처럼 떠도는 작가라 쉽게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같이 간 동지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끊겨, 나 혼자 지하철 타고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위치만 바뀐 게 아니라 주인까지 바뀐 건지,
예약한 게 없다며 불친절 했다.
뒤 따라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여자만’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울가는 70년대 후반, 내가 서울 올라 올 무렵 상경했다.
부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올라 온 화가로는 박광호, 이존수씨도 있다.
이존수씨는 대학로에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대관절 그 놈의 돈이 무엇인지, 돈이 생기니 사람이 변하더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뒤늦게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생선 뼈만 줄창 그리던 박광호도 지난 달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게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제 세 사람 중 최울가만 남은 것이다.




최울가는 20여 년 넘게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작업해 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순수하고 자유롭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곧 강남에서 전시를 한단다.




최울가는 요즘 잘 나가는 몇몇처럼 스타 반열에 오른 작가다.
오랜 만에 쌍팔 년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놓았다.




날 더러 쓰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이기는 하나
분에 넘치는 돈이라, 돈이 돈 같아 보이지 않더라.
그의 말로는 “40여년 전 부산에서 ‘한마당’할 때 준 삼 천원을 갚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 말을 하며 작품을 준적도 있지만, 난 오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 때는 라면도 마음대로 끓여 먹을 돈이 없었다고 했다.
모처럼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개가 눈에 밟혔다는 것이다.
그 어려울 때 쌀을 살 수 있는 삼천 원이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았다.
아픈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 듯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단다.
처음 서울 올라 와 그림 둘 곳이 없어 박광호씨 셋방에다 맡겨두었는데.
‘집에 불이나 작품이 다 타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초기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도 스폰서 나타나기만 기다린 일이 하나 있었다.
몇 달 전 안경을 잃어버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빌려 쓰고 다니니,
세상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더구나 밤에 운전하다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겨, 염체 없지만 챙겨 넣었다. 


 

김명성씨가 이차를 가자며 데려 간 곳은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였다.
모처럼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박성식씨도 만났다.
와인에 젖는 기분 좋은 늦가을의 밤이었다.




울가 덕에 다음날 다초점 렌즈를 장착한 30만 원짜리 안경을 맞추었더니 세상이 거울처럼 밝아졌다.
밀린 과태료도 내고 어려운 동지도 도와주며 고맙게 잘 썼다.



언젠가 갚아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인천부두에 라이타돌 실은 배 들어오는 날 말이다
그 배만 오면 백배로 갚아 줄 텐데, 기별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 오후2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연극연출가 기국서씨가 영예의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 날 시상식에 초대받았으나 사진 강의와 겹쳐 참석하지 못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김명성씨가 보도자료를 보내 주어 기쁜 소식을 전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문화훈장’ 수훈자 18명,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표창) 수상자 5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체부장관 표창) 수상자 7명 등 총30명을 선정했다.




아래는 훈장 수훈자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상 과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 명단이다.




은관 문화훈장의 문학부문에는 현기영씨와 (고)황현산씨, 미술 분야에는 (고)곽인식씨,

공예디자인 분야는 한도용씨, 음악 분야에는 나덕성, (고) 노동은씨 등 6명이 수훈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시상식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보관 문화훈장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 수립에 기여한 

(고)김혜원 전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부위원장과 만화가 이상무씨,

(고)하동호 전 공주대학교 교수, (고)강국진 전 한성대교수, 이보형 고음반연구회장 등 5명이 수훈했다.




옥관 문화훈장은 연극작품 70여편을 창작하며 다양한 연극적 시도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 ‘극단76’ 예술감독을 비롯하여 이용남 한성대학교 명예교수, 배병길 도시건축연구소 대표,

김해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4명이 수훈했다.


좌로부터 '인사동 사람들' 회원인 김상현, 김명성, 기국서씨


화관문화훈장은 지역문화 환경 개선과 지역주민의 문화향수 증진에 기여한 이준호 서산문화원 원장을

비롯하여 한국적도자를 세계에 알린 김시영씨, 극단자유 배우 오영수씨 등 3명이 받았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은 문화일반 부문에서는 이재춘 안동차전놀이 보존회 회장,

문학부문에서는 김혜순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미술부문에서는 김영식 조선요 대표,

음악부문에서는 강은일 단국대학교 교수, 무용부문에서는 김지영 경희대교수가 대통령 표창과 함께 상금 천 만원을 받았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미술 부문에 정은영, 공예디자인 부문에 이석우 에스더블유앤에이 대표,

건축 부문에서는 안기현 한양대학교 부교수, 음악부문에서는 피아니스트 양성원씨,

전통예술 부문에서는 국가무형문화제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윤주씨, 연극부문에서는 정범철 극발전소301대표.

무용부문에서는 안무가 권령은씨 등 7명이 문체부 장관 표창과 상금 오백만원을 받았다.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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