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지난 22일 오전 6시 55분 먼 길을 떠나셨다.
이제 천국에 잘 도착하여 사랑하는 이국자선생님도 만나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신봉승, 심우성선생 등 먼저 가신 친구들 만나
인사동 이야기들 하시느라 바쁠 것이다.




 선생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 예?

 그 곳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는 차별의 세상도 아니고요.

설사 차별이 있다 해도 집사님 빽으로 지옥에 내치지는 않겠지요.

머지않아 선생님 좋아하시는 복분자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눈물이 말랐네요.

고마웠다는 인사도. 먼저 떠나 섭섭하다는 원망도,

모두 바람에 날아 가 버렸습니다.


선생님! 사람 사는 게 바람처럼 이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요즘 부쩍 눈물이 자주 흐르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봅니다.

후회가 더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인사동은 불 꺼진 등불입니다.

누가 선생님처럼 가슴 아파하며 골목골목을 찿겠습니까?

외로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제자들 불러내어 곰탕 건대기 건져놓고

소주 잔 부딪히는 그런 시간을 어찌 만나겠습니까?

또, 김승환선생과 방동규선생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사동을 방황하던,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생각납니다.

단골로 드나드셨던 나주곰탕을 비롯하여 귀천’, ‘인사동 사람들’, '여자만'

포도나무집’, ‘유목민어디를 가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조를 사랑했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노래 인사동 아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인 바뀐 황량한 인사동 골목 어디에선가 선생님의 시가 흘러나올 것이다.

선생님의 슬픈 인사동 노래가...


 

그동안 미친 망둥이처럼 날 뛰는 나를 보며 마음은 또 얼마나 졸였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전시 사진 들고 동오리 찾았을 때 일입니다.

그 날 선생님 내외분의 행복한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네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기어이 끌어 앉혔는데,

이국자 선생님께서 끓어주신 된장국은 콧등이 시리도록 맛있었습니다.

문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어쩌면 행복이란 것 자체가 슬픈 것일까요


 

 

그리고 천상병선생 20주기 맞았을 때 일입니다.

인사동 봄 소풍 잔치 때도 오직 선생님만 걱정에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여 만들어 준 그 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없지만,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돌아 가실 때마다 선생님 뒷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아마 선생님은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못난 조문호가 큰 절 올립니다.


 

 강민 선생의 장례식은 지난22일부터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인장으로 열렸는데,

824일 오전 9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도 열었다.

8241030분에 발인하여 용인, ‘양주 장충동산에 안장되었다.




 

지난 23일 오후 4시경 정영신씨와 분당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김명성씨와 김상현, 김상윤, 전태수씨를 만났는데.

장례식장에는 정승재, 조준영, 서정란, 김가배, 이도연, 김이하, 정복수, 전활철, 노광래,

서정춘씨가 있었고 뒤늦게 구중서선생님도 오셨다.




- 강민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시-  


<이승의 간이역>

내 떠나야 할
인생의 간이역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꽃밭이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 난 강민 시인은 1962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 파도, 세월’,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공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도 있다.

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진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삶의 애환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 동인지 현실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학원을 비롯해 주부생활편집국장, 금성출판사 상무이사 등 출판계에 몸담았고

많은 문인과 교류해 걸어 다니는 한국 문단사로 불렸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람이 그리우면 인사동에 나간다.

어디엔들 사람이야 없을까마는 그곳에 가면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생각에서다.

그리운 사람들은 대개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 있어도 소식조차 없다.

사라져 그리운 것인가? 그리워라 사라지는 것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누군가가 그 자리를 다시 채울 것이다.

나 역시 다시 채워질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그리움의 보따리가 더 크지만...


 

그래도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인사동이라 눈에 익은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잘 모르는 사이라도 마음이 쉽게 통할 뿐더러, 전시가 열리는 구석구석에 예술가들이 박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인사동 나들이는 꼭 보아야 할 전시가 여럿 있어 작정하고 나온 것이다.


 

새로 개관한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초대전이 대표적이고,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과 마루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지난 6월에 개관한 베를린미술관이었다.


 

전시관보다 무슨 전시인지가 더 중요해 미루기도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잘 맞않았다.

마루지하에 자리 잡은 베를린 미술관은 본래 계절밥상’이 있던 자리로 엄청 넓은 공간이 아니던가?


 

그 자리에 돈 안 되는 미술관이 들어섰다는 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운영하는 지승룡씨를 만나 속내를 들어보고 싶었다.

돈에 중독된 야박한 세상에 예술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100여 평이 넘는 7개 층 전관을 갤러리로 만들어 운영하다

몇 년 만에 빈손 들고 나 앉은 아라아트의 김명성씨가 어찌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재기의 몸부림에 한 가닥 기대는 걸지만...



가끔은 돈만 마약이 아니라 예술 자체도 마약이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마약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바늘구멍보다 작은 희망에 온 몸을 태울 수가 있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떠 올리며 인사동에 들어섰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뜻밖에 만난 활로였는데, 마치 저승사자가 날 잡으러 온 것 같았다.

귀신같은 망또를 휘날리며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신창영씨가 무슨 바람이 불어 지리산에서 인사동으로 날아왔을까?

서각에 달마영혼을 불어넣는 그는 잡귀에 능한 양반인데,

지난 번 페북에서 실연의 애절함을 솔직하게 보여주어, 그 어울리지 않는 순정에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저녁에 술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병원의 금주령이 걸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 초대전을 열고있는 금보성씨와 심철민 관장을 만났고,

마루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도씨의 전시를 본 후, 베를린미술관에도 들렸다.



전시장을 내려다보니 누군가 손을 흔들었는데,

초점 맞지 않는 안경을 치켜세워 보았더니, 사진가 박옥수씨 였다.

베를린 미술관지승룡대표와 제주에서 활동하는 양상철작가도 함께 있었다.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각각의 전시관에 부스 전처럼 열리고 있었는데,

먼저 입구에 전시된 양상철씨의 작품을 돌아보며 작가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 전시장은 실험정신을 실천하는 기획전 위주로 운영한다는데,
곳곳에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좋았다.

작품들을 감상하며 사람도 만날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니겠는가?


 


박옥수씨와 함께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통인화랑이었다.

전시작가인 김정선씨는 자리에 없었으나, 이계선 통인화랑관장을 만났다.


 

박옥수씨가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저녁식사라도 하자고 했다.

가까이 있는 툇마루에서 된장비빔밥에 빈대떡까지 시켰으나, 술은 마실 수가 없었다.

내가 병원 의사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니라, 박옥수씨가 평생 술과 담을 쌓고 사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사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돌아가신 심우성선생과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 강민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심우성선생과는 살아 생전 각별한 사이기도 했지만, 강민선생은 주부생활편집장으로 계실 때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고 한다.


 

인사동 터줏대감이 한 분 두 분 떠나가는 빈자리의 쓸쓸함이 밀려왔다.

마침 오늘의 인사동을 대변하는듯한 작품이 떠올랐다.



베를린미술관에서 보았던 양상철씨의 오구동행이란 작품이었다.

가까웠던 친구들이 떠나버려 빈자리가 많아졌다는 그 쓸쓸한 식탁이

오늘의 인사동을 말하는 시어처럼 머리에 내려 꽂혔다.

 

사진, / 조문호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살아가니, 하루가 편한 날이 없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할 나이에 사진 찍다 두들겨 맞지를 않나,
주변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우환이 끝일 줄 모른다.


녹번동에서 개기는 지난 일요일,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심봉사 잔치처럼, 인사동 사람들 불러모아 풍류 자리 만든 김명성씨였다.

연신내 ’연서시장‘에서 소주 한 잔하자는 것이다.






‘인사동 백년을 걷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나갔더니, 응암동 사는 조해인씨도 와 있었다.
연서시장 ‘파주집’에서 세 사람이 둥지 튼 것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조해인 시인이 술을 끊었단다.
건강 때문인지 무슨 결심인지 모르지만, 이제 호탕한 그의 구라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까 걱정되더라.
잘 했다며 박수 쳐 주어야 할 일을 걱정부터하니, 나도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김명성씨는 인사동 잔치에 오백만원 쯤 들어갔다는데, 잘 했다 싶더라.
전국에서 몰려든 백 오십 명의 풍류객과 한데 어울릴 수 있는 날이 이제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얻은 마음의 덕은 얄팍한 돈으로 계산되지 않을 것이다.





조해인씨가 별 이야기가 없으니, 김명성씨만 썰을 풀었다.
이 친구는 ‘아라아트’ 건물을 날리고 빚더미에 앉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 하며 열심히 살았다.
본래부터 고미술 수집 전문가였으나, 이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미쳐 있었다.

재기를 위해 아내가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왔다는데, 그 돈을 독립운동 사료 모우는 데 써 버린 것이다.
고미술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운동사도 정확히 모르고는 대들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독립 운동사를 파고들었던지, 모르는 게 없었다.






술 마시며 제일 분개한 일은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조작된 사실이란다.
백년이 가까운 빛바랜 고서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난, 내일 새벽에 정선 가는지라 더 마실 수 없었다.
소주 반병으로 끝내고, 먹다 남은 생선조림을 비닐에 담아 먼저 일어났다.


동자동을 들려 정선으로 출발했는데, 양평을 거치는 국도로 장장 네 시간을 달렸다.
팽창농협에서 비료까지 실고 갔는데, 기절초풍할 일이 생겨버렸다.
집에 들어 갈 열쇠를 두고 온 것이다.
항상 자동차 열쇠에 달려 있었는데, 정영신씨가 폐차시킨다며 분리한 걸 모르고 차만 끌고 온 것이다.






차에 실어 온 의자와 짐을 부려야 하지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즘 시골인심도 예전 같지 않아 좌물 통도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연장은 물론 장갑까지 집 안에 두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루 머물지 않고 밤중에 돌아 갈 작정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했다.
한 달 동안 잘 자란 상추와 부추, 고추는 거둘 수 있었지만,
작물을 휘감은 칡넝쿨이나 잡초 뽑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장갑이 없어 맨손으로 뜯다 보니, 날카로운 풀에 배어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니기미! 약은커녕 그 흔한 일회용 밴드조차 없어 휴지를 칭칭 감아 칡넝쿨로 묶었다.
이 장마철에 그곳만 비가 피해 갔는지 작물은 혀를 날름거렸다.
바가지 하나로 떠나르며 물 주느라 생 똥을 싼 것이다.





시간이 없어 울 엄마 산소도 들리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시간 낭비나 고생은 차지하고, 오고 가며 쏟아 부은 기름 값이 아까워 미치겠더라.
수확한 것은 상추 한 바구닌데, 너무 비싼 상추라 목구멍에 넘어갈지 모르겠다.






미련한 곰탱이 같은 나 더러, 강물에 묻힌 석양이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살고 싶어 사냐? 죽지 못해 산다.






저승길 이 되던, 천당 길 이 되던, 또 네 시간을 졸라 달렸다.
갈지자 졸음운전 깨우는 경적을 음악 삼아 기적적으로 살아왔다.

죽느냐? 사느냐? 그 것이 문제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아리랑’에서 “인사동 백년을 걷다”란 인사동 풍류객을 위한 큰 잔치가 열렸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과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명성씨가 초대한 자리로,

마치 심청전의 심봉사 잔치가 연상되는 그런 자리였다.



그동안 터줏대감이셨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풍류가 이계익선생, 극작가 신봉승선생,

음향의 달인 김벌레 선생은 세상을 떠난 데다 강 민, 신경림, 무세중 선생은 몸이 불편해, 나오실 원로 분이 몇 분 되지 않았다.

엉겅퀴 꽃을 쓴 민영 시인, ‘한국의 아이로 잘 알려진 황명걸 시인, 조선의 삼대구라로 불리는 협객 방동규 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소설가 김승환 선생, 철학자 신성준 선생 등 몇 분 남지 않은 원로께서 먼저 나오셨고,

제주와 부산, 사천, 남해, 단양, 전주, 광주 등 전국 방방곡곡의 풍류객들이 한 분 두 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오부터 오후 아홉시까지 온 종일 잔치를 열어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는데,

무려 15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예전에는 틈틈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으나, 그 비용을 혼자 감당해 온 김명성씨의 아라아트사업이 나락에 떨어져,

오랫동안 소식한 번 전하지 못한 것이다.


 

인사동 백년을 걷다라는 잔치를 마련한 취지는 친일 후손의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게 부끄러워 집을 나와 한 평생 거리를 떠돌며 독서회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 나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노촌 이구영 선생,

문필가이신 박이엽 선생의 노조에 대한 지조, 그리고 저잣거리 웃음거리로 잘 못 왜곡된 천상병시인의

올 곧은 정신을 제대로 알고, 그 분들의 무대였던 인사동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모처럼의 잔치 소식에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누는 정담에 인사동은 봄바람 같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그동안 소식도 듣지 못한 황명걸 시인의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라는 신간 시선집과

김신용 시인의 비는 사람의 몸속에도 내려라는 제목을 단 신간 시집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 어찌 풍류가 없을 소냐? 전주에서 올라온 음류 시인 송상욱씨의 열 두냥 인생을 시작으로

김상현씨의 아코디언과 장 군의 협연으로 부른  장소영씨의 진도아리랑으로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 갔다.

김상현씨가 애절하게 부른 '떠날 때는 말없이 봄이 오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슬픔에 빠져들었다.

봄이 오면으로 반복되는 절절한 후렴에서 내가 좋아하는 봄날은 간다와 겹쳐지며 설움이 북받힌 듯 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김진규 시인은 하모니카 연주에다 천상병선생의 시 강물을 낭송하기도 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시인의 눈에 비친 강물은 기쁨의 강물이 아니라 서럽게 흘러가는 강물이었다.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이지, 기계처럼 돈만 쫓고 살아가는 오늘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난데없는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모임에 참석한 원로 분에게 여비라도 챙겨드리기 위해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린다고 공지했는데,

한겨레에서 확인도 없이 기사화 해, 돈 얻으러 찾아 온 분이 여럿 생긴 것이다.

사정을 잘 말씀드리고 식사 대접해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참 돈이란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의 원로 분들은 오찬 후 곧 바로 귀가하셨으나, 뒤 늦게 위선으로 똘똘 뭉친 늙은이 한 분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사진 찍는 나에게 사진 찍지 말라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폭력을 저질렀다.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기에 휘어 잡는 위압에 멈추었으나, 사과하라고 겁박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치매증세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참았다.



무슨 억한 심정에 잔치 집 깽판 치려 작심한 모양인데, 언론이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든 불쌍한 노인이다.



 

내가 이 잔치를 기록하는 사진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찍혀 않될 일이 있으면 조용히 말을 하던지, 카메라 확인 후 지우면 그만이다

평생을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에게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니,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오래전 자선을 내 세워 사익을 취한 기획전을 문제삼은 적이 있는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은 일체 카메라에 담지 않으나, 보기 싫은 사람은 찍을 필요도 없다.

한 달 전에는 우연히 창성동 실험실갤러리에서 열린 이지녀씨의 무속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날은 노광래씨 흉사를 알리어 문상객을 모아준 일을 격려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마음이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좀 있다 다른 지인에게 들어보니, 나를 더 두들겨 패고 싶었으나 폭력 전과가 많아 참았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옛날에 저지른 폭력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들 떨어진 분이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봉변 당하지 않고 살았던 게 용하다 싶다.

여지 것 돈으로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내 한테 걸리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입구에서 분노를 삭이다 연회장으로 들어가 보니, 배평모씨와 김언경씨가 보였다.

그들을 향해 사진을 찍는데, 난데없는 지팡이가 또 나타난 것이다.

키가 작아 파묻혀 못 보았지만, 안 쪽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잔치 집에 어떻게 좋은 일만 일을 수 있겠는가?

다른 분들은 그런 불협화음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재건 문제는 회의를 진행할 자리가 되지못해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으나,

많은 분들의 자문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했다.


 

오후 아홉시가 넘어 인사동 풍류객의 아리랑연회는 끝났지만,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분을 위한 잠자리까지 준비해 두었으니, 이 좋은 날 어찌 그냥 갈 수 있을 소냐?

그 날 잔치는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돌아가신 인사동 터줏대감의 올 곧은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김명성씨가 모았지만, ‘아리랑'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도왔다.


 

자리가 파한 후 남은 소주 한 병을 챙겨들고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평화만들기로 찾아갔다.

개업 소식은 들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도 하지만, 벗들이 그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이다.

마침 배평모씨를 비롯하여 김언경, 하형우, 박상희, 임경일, 고선례, 편근희씨 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함께 어울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또 폭력배가 나타난 것이다.

나 더러 나가라고 고함 질렀는데, 설사 그 술집이 자기 집이라도 먼저 온 손님을 내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꾸도 않했더니 다른 분이 데리고 나갔지만, 별 개 같은 꼴을 다 본 것이다.


 

그 곳에서 나와 인사동 벽치기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찻집 유담에는 김명성, 최석태, 손연칠, 백남이, 공윤희씨 등 여러 명이 홍어회를 배달시켜 마시고 있었다.

그 날은 신경이 날카로워 그런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좀 있으니 정영신, 조경석, 서길헌씨가 나타나 그 것으로 인사동 백년을 걷다잔치를 마무리했다.


 

그 날 잔치에 참석한 분들은 아래와 같다.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성준, 황명걸, 채현국, 송상욱, 이인섭, 유재만, 한귀남, 정기범, 손연칠, 김신용, 배평모, 조경석, 김명성, 김상현, 장 군, 장소영, 신현수, 강찬모, 기국서, 조준영, 임계재, 김진규, 최명철, 전강호, 조해인, 백남이, 변순우, 김언경, 김민경, 이명희, 장경호, 황외성, 박상희, 김 구,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조두림,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고선례,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임경일, 전활철, 정복수, 이만주, 이지녀, 금보성, 김종근, 박 철, 김효성, 김이하, 공윤희, 고중록, 강선화, 홍석화, 편근희, 유진오, 서인형, 최석태, 김윤기, 황예숙, 김이하, 이승철, 이광군, 박윤호, 권양수, 민영기, 유근오, 김발렌티노, 임태종, 오치우. 최유진, 송일봉, 최근모, 박완규, 조명환, 나재문, 정현석, 김용국, 김상윤, 이상훈, 김병호, 김준태, 목영순, 조신호, 한슬기, 주영선, 김미란씨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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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명난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단, 음식준비를 위해 참가할 의향이 있는 분은 댓글이나 별도의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인사동 백년을 걷자” 잔치에 많은 참석있기를 바랍니다.

일시 : 2019년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장소 : 인사동 ‘아리랑가든’ (전화 02-723-7311)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9-7


회비 :
60세 이하 : 회비 무료
60세 이상 : 회비 6,000원
70세 이상 : 회비 7,000원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립니다.
90세 이상은 100만원을 드립니다.
단, 지방에서 참여하는 분은 1박2일 동안 무료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고)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단합을 위해
김명성회장이 초대하는 자리로 ‘아리랑’의 유재만회장이 돕고, 

'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후원합니다.


그리고 80세가 넘은 분에게 돈을 드리는 건 무조건 다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인사동에 자주 출입하는 원로작가(전 창예헌 고문 및 자문위원)에 한합니다.
일부는 여비로 드리고, 일부는 생계가 어려운 유고작가를 돕기 위한 배려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주최 :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관 : ()천상병기념사업회, 농심마니

후원 : )엠에스오토텍, )광진상공, 이엘에스솔루션(), 아리랑가든







      





지난 토요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 들렸다.
사진가 양재문씨를 만나러 갔는데, 케냐의 사진가 김병태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더 페이스’란 제목의 케냐 사람들 얼굴을 찍은 작품인데, 검은 공간에 부조처럼 박혀 있었다.






전시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멀건 대낮부터 한 잔 하러 갔다.
인근의 전라도 음식점 ‘자희향’에 갔는데, 맛있는 홍어부침에 김병태씨 사진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뜻밖의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등 몇 분이 입성하더니, 뒤 따라 김명성, 김용국, 김상윤씨가 들어왔다.
이 집 음식이 맛있는 건 다들 알지만, 용케도 시간이 맞은 것이다.






몇 일전 이야기는 들었지만, 김명성씨가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잔치를 마련한다고 했다.
6월 28일 정오부터 오후9시까지 ‘아리랑’에서 여는데, 모처럼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좋은 자리다.






전 ‘창예헌’ 회장 김명성씨 제안으로 추진되는 이번 잔치에 ‘아리랑’ 유재만 회장도 후원한단다.




2013년 고)천상병시인 20주기에 맞추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인사동 소풍'의 한 장면이다. 



그 날 원로시인들로 부터 천상병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시 낭송회를 비롯하여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작은 음악회도 준비한다.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알리겠지만, 인사동 사람들은 물론이고 천상병시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페북이나 블로그에 신청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술자리가 끝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녹음 짙은 인사동 10길의 정취가 낯선 듯 아름다웠다.
토요일의 인사동 거리라 변함없이 붐볐는데, 오랜만에 만개떡 장사도 나왔더라. 






취기가 올라 ‘유담’ 커피숍에서 팥빙수를 시켰는데, 김명성씨가 두툼한 책 두 권을 선물했다.






한 권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이고
한 권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백년 편지’라는 소중한 사료집이었다.






김명성씨가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갖고 있던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가 책에 실려 있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조소앙선생이 작성한 글로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김교헌, 여준 등 주요인사 39명이 연서한 독립선언서였다.

제2선언서라는 ‘대한국민의회독립선언서’는 문창범선생께서 중심이 된 최초의 임시정부로 
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대한국민의회 직인이 찍혀 있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료를 홀대하는 나라인지, 대부분의 중요한 사료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짜로 기증받을 생각만 하지, 적극적으로 구입하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에 반가운 사람 만나 즐겁게 취하고, 좋은 선물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축구결승을 보아야 하는데, 어디서 볼지 고민되었다.
티브이가 없어 서울역 대합실에서 보면 되겠으나, 토요일은 녹번동 가는 날이 아니던가. 
녹번동에 들려 인터넷으로 볼 작정을 한 것이다.






여지 것 결승에 오르기 까지 축구 중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뉴스를 보지 않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기도 하지만, 내가 보면 지는 징크스가 있다.






꾸물대다 컴푸터를 늦게 켰는데, 이미 전반전이 시작되어 한 골 이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지켜보자 역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3대1로 지고 만 것이다.






난,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이다.
안 보던 축구 중계는 왜 보아 온 국민이 김빠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생에 무슨 죄가 많은 지, 되는 일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강민 선생께서 ‘백두에 머리를 두고‘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창비'에서 냈다.

용인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28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시선집 전달을 겸한 오찬회를 갖는다는 반가운 기별이 왔다.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에 갔더니,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씨도 나와 있었다.

선생께는 송구스러웠지만, 시집 때문에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밥 값은 김명성씨가 계산했고, 시집은 정영신씨가 받았으니 부담도 없었다.

원님이 아니라, 강민 선생 시집 덕분에 나팔 좀 불었다. 낯 술엔 쥐약인 놈이지만...





1962년 등단한 강민 선생께서 팔순이 넘은 연세에 펴낸 이 시선집은 4부로 나눠 98편의 시를 싣고 있었다.

시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지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의 문단사였고 역사라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선생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사적 심성을 늘 간직하고 살아온 서정과 우국의 적절한 조화”라고 했는데,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이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마다 광화문광장에 나타나 후배들을 격려해 주며 바른 세상을 염원하였듯이

인사동 또한 선생처럼 애착을 갖고 사랑하시는 어른이 드물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시 ‘광장에서’에 적혀 있는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소재로 한 시다.





그 때 80대 중반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아서 피가 끓어 나갔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이념이 아니라 양심과 죄책감에서 우러난 시여서 그대로 가슴에 사무친다.

보수 꼴통 노인이거나,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벙어리 노인들만 판치는 세태가 아니던가?





그리고 시선집에 있는 ‘꿈앓이’는 분단시대의 아픔과 북녁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6.25전쟁과 4.19혁명, 그리고 5.16쿠테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시대를 양심으로 지켜 본 체험에서 우러난 시다.





강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여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동안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그리고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 문학상도 받았다.





등단 이듬해인 1963년 김수영, 신동문, 고은 시인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활동을 펼쳤다.

5.16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의식적인 타이틀을 내건 시인이다.

1974년 진보적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한 이래, 꾸준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강민선생을 뵙게 된 인사동과의 인연이다.

시집에 나와 있는 ‘인사동 아리랑’의 유목민 이야기는 잊혀져 가는 그리움을 호출하고 있었다.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 그의 부인 목순옥 /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 방송작가 박이엽 /

그 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 (중략) 다시 한 세월은 가고 /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선생은 천상병시인과 함께 인사동 풍류를 노래한 인사동시대의 초창기 멤버였다.

거명했던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신경림, 민영, 황명걸시인 등 생존 작가마저 몸이 불편해 못 나오지만,

강민 선생만이 지팡이를 이끌고 인사동에 나타나신다. 만날 사람은 없어도 그리움에 배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냈고, 친구들도 대부분 떠나보냈다,

선생의 시에는 자신의 늙어감에 대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가자는 시인의 순정이 아직까지 뜨겁다.


의리도 지조도 인정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이 비정한 세상에 선생 같은 분이 계시니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예술을 빙자하는 그림이던 문학이던, 사기꾼소리 듣지 않으려면 선생처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날 오찬회에서 술 한 잔 마신 김에 선생께 감히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기억을 들춰, 못 다한 이야기를 페북에 좀 올려주십시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다른 원로 시인과는 달리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페북도 하니, 후진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남겨 줄 수 있는 분이다.

내가 듣고 옮길 수도 있겠지만, 선생께서 귀가 어두운데다 나는 말이 어눌하니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에 이르기까지 겪은 애환과 아픔을 시로 노래하셨지만,

돌아 가시면 묻혀버릴 시대적 역사를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민주주의와 통일,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사적 심성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노장이시다.

이번에 발표한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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