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독립이 맞습니까?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지난 12일 오후5시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요즘은 손님 많은 개막식은 잘 안 가지만, 이 전시는 안 갈수가 없었다.

전시된 독립자료들이야 촬영할 때 여러 차례 보았지만,

선열들의 의연한 기상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더구나 전시 자료들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가

긴 세월동안 어렵사리 찾아 낸 유적들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으면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을 통해 전시를 알렸겠지만,

모임이 흐지부지 한데다 시절이 사람을 많이 불러 모을 때는 아니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통해서만 알렸는데, 대충 아는 듯 했다.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려 하루에 500여명은 찾아오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아는 체하면 웃거나 손을 흔들지만, 누군지 분간 안 되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코로나 방역이 생활화되었지만, 사람들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입에다 팬티를 걸치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숨이 차 못 견디겠다.

 

전시장에는 이성 구로구청장과 구로문화재단 허정숙대표이사, 김명성 독립투쟁사 추진위원겸 에술 감독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을 비롯하여 구중서, 방동규, 박기정, 무세중, 무나미, 정기범, 이정숙, 손연칠, 김규선, 김상환, 김연갑, 박동웅, 강찬모, 최효준, 박인식, 조해인, 김수길, 송일봉, 최유진, 조준영, 박윤호, 김상현, 권경일, 전인경, 전인미, 정영신, 서길헌, 노광래, 이만주, 전활철, 김 구, 임경일, 이상훈씨 등 알아챈 분은 이 정도지만, 10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행사에 앞 서 가진 국민의례는 다른 행사와 달리 꼭 필요한 의례였다.

그 자리에서 어찌 고개 숙여 묵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최 측과 내빈께서 차례대로 나와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전시된 갤러리 ‘구루지’는 미술관 사정이 열악한 서울 서남권의 대표 갤러리로

도약하기 위해 확장 공사를 가진  후 첫 전시라고 했다. 전시장 짜임새도 흥미로웠다.

마치 독립투사들의 밀회장을 연상할 수 있는 은밀한 전시 공간이 두 곳이나 있었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100여 년 전으로 세월을 되돌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안타깝고 분한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시원과 아우 이지원이 목숨을 끊기 전에

올린 절명시를 비롯하여 박열열사가 옥중에서 쓴 칠언절구 2수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철망 안에서 보내는 나날, 낙원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귀신이 베갯머리 나타나 신선 같다고 속삭인다."

 

그 유묵과 서찰들을 살펴보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이루었건만, 아직까지 친일세력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전시 제목처럼 ‘독립이 맞습니까?’란 물음이 절로 나왔다.

모두들 이 전시를 찾아보며 친일청산에 나서야 한다.

 

일본 놈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무참하게 죽인 백선엽 같은 인간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일제에 빌붙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왜놈 앞잡이들이 아직까지 깽판치는 세상이 아니던가?

 

다들 인근에 있는 뒤풀이 장소 ‘내고향 숯불갈비’로 자리를 옮겼다.

전시장에선 다들 방역규칙을 잘 지켰지만, 입을 가리고야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여지것 입막고 고생했던 일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신의 뜻에 맞길 수밖에 없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술을 퍼 마셨다.

이렇게 기분 좋게 어울려 대취할 수 있는 기회가 살아 생전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고기굽는 아주머니의 엉덩이가 내 옆구리에 부딪혔다.

이것도 미투 대상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 기분만 좋더라.

좋을 때는 넘어가고 나쁠 때는 미투가 되는 세상, 여성 혐오감만 짙어가니 이 일을 어쩔까?

 

문제가 되었던 박재동화백은 결백이 밝혀졌지만, 박원순 시장은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장 최효준씨는 아직까지 미결로 남았다.

당사자가 제거되면 누가 득을 보는지, 그걸 보면 알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 사람은 기획된 함정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맞은 편 자리에는 사진가 박윤호씨가 앉아 있었다.

오래 전 페북 사진 때문에 페친관계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미안했다.

올 년말에 사진전을 연다는 반가운 소식은, 한 사람을 모델로 찍은 표정사진이란다.

 

그 전에 문제가 되었던 것도 얼굴을 너무 가까히 찍어 혐오감을 일으켜서인데,

모델만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그 방법을 재연했다고 한다.

나 역시 사진을 찍지만 얼굴에 바짝 렌즈를 들이밀고 반복해서 찍으면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 사진으로 전시를 한다니 할 말은 없지만, 일단은 축하할 일이었다.

 

먼 뒷자리에는 인연을 끊은 선배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전시장에서도 부딪히는 걸 의식적으로 피했으나, 후배의 도리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 준 모욕적인 험담은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렸다.

 

사진사가 사람이 싫다고 객관적인 기록을 않는다는 것은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 선배가 일어서니, 때 마침 '뮤아트'의 김상현씨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서럽도록 불렀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뛰어나가 그 선배 일행을 찍고 말았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노객의 뒷 모습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곳은 동자동도 인사동도 아닌 구로동이 아니던가? 은평방면으로 갈 사람을 모았다.

조해인, 김수길, 정영신, 박윤호씨 등인데 택시 한 대에 다 탈수가 없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라고 우겼는데, 다섯 명이 한 차에 탈 수 있도록 눈감아줬다.

 

얼마나 끼어 앉았으면 주굴 주굴한 얼굴이 땡겨 펴질 지경이었다.

스님들이 저지르는 불법도, 무임승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30여분 동안 곤욕을 치르고 끌려간 곳은 조해인씨 집 부근에 있는 ‘치킨호프 응암점’이었다.

 

내일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마시고 볼 일이었다.

정영신씨를 위해 김수길씨가 와인까지 사 왔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자기는 와인보다 소주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입에 털어 넣는 만용을 부리면서....

 

이미 술이 취해 술이 술을 마시는 격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사실은 박윤호씨가 술과 담배를 끊었단다. 그 긴 시간동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독립투사들 덕에 술 얻어마신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귀신 술이라 그런지 술은 술술 넘어갔지만,

그 이튿날 방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속죄해야 했다.

다시는 귀신 술에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사진, 글 / 조문호

 

'구로문화재단'에서 광복 75주년을 맞아 개최한 특별기획 ‘독립이 맞습니까?전이

지난 12일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의 3·1 봉기’(김의익), 통일무(이응노), ‘칼노래(오윤),

‘새야 새야’(김준권) 등 그림 7점을 비롯해 헤이그 특사로 활약한 이상설의 유묵,

그리고 양기탁선생에 대한 일제검찰의 심문조서, 독립군의 독립자금 영수증,

백범 김구를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다양한 유묵과 서지 자료 111점이 전시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불령사를 조직해 천황 폭살을 도모하다 투옥됐던

박열이 일본 운노에게 보낸 편지와 ’법학만초‘ 초고에 대한 이상설의 소개서,

구한말 항일순국지사인 류도발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쓴 서간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박은식의 <안중근 선생전>, 김두봉의 <조선말본> 등 143점의 서책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시물을 비롯한 도록에 게재된 300여점 대부분이 독립투쟁사기념관 추진위원으로 있는

김명성씨 개인 소장품으로,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거나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희귀본이 많다.

 

전시는 ‘동학혁명과 창의’, ‘순절과 순국’, ‘3·1대혁명과 임시정부’,

‘의열과 무장투쟁’, ‘교육계몽과 통일’ 등 5개 주제로 나눠 구성되었는데,

개화기에서부터 광복과 분단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의 자료를 통해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는 자리다.

 

“2017 문체부에서 발표한 국립한국문학관의 도서 구입 예산 내역을 보면, 총 예산 9억3459만원 가운데 친일파 이인직의 <혈의누> 구입가가 무려 1억7천만원이고, 이광수의 '무정'을 포함한 친일 문학인 8명의 저작물 가격이 전체의 38.3%인 3억6500만원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 300만 명이 넘는데 우리가 찾아낸 선열은 불과 1만 5689분으로 그마저 제대로 예우하지 않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그 당시 독립자금을 내면 독립군이 영수증을 끊어줬다. 이는 나중에 나라를 세우면 독립투쟁에 기여한 이들에게 빚을 갚겠다는 뜻이 아니었겠느냐”고 이 전시 예술총감독이기도한 김명성씨는 되묻는다. 바로 특별전시회의 제목을 ‘독립이 맞습니까?’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이 맞습니까?" /274면/ 가격 45,000원

 

이 전시는 8월29일까지 열린다. (전시문의 02-2029-1744)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관 없이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독립운동 주역들의 필묵과 역사적 자료들을 펼쳐놓은 “독립이 맞습니까?전이

오는 8월12일부터 29일까지 구로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립니다.

광복75주년 기념 구로문화재단 특별기획전인 ‘독립이 맞습니까“전은

한 개인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전시라 더 애틋합니다.

 

이런 독립자료 수집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립한국문학관’ 자료수집에는 친일파 문인들의 도서구입비로 몇 억을 들이지만,

독립투사들의 한이 맺힌 소중한 자료구입에는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 문경에 있는 '박열 의사기념관'에 가본 적이 있는데,

어마어마한 건물만 있을 뿐, 박열열사의 자료가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김명성씨는 정부가 해야 할 독립운동 자료 찾느라 모든 걸 다 바쳤습니다.

일본에 흘러들어간 필묵들도 숱하게 사들였습니다.

수 십 년 동안 독립운동 자취를 쫒아 온 다른 분들의 자료들도

사장되기 직전에 돈으로 보상하고 살려냈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이런 일도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일 아닙니까?

 

오랫동안 독립운동자료 수집과정들을 지켜보며 자료들을 촬영 해왔기에

그 귀중하고 방대한 자료를 잘 압니다. 이번에 선보이게 될 ‘독립이 맞는가?’전 뿐 아니라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자화상, 나를 보다”전에도

그가 수집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필묵들이 전시되어 있고,

‘은평한옥박물관’ 전시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한 곳에 모우기 위해 ‘독립투쟁사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시인으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합니다.

40여년 동안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원로 문인들 뒷바라지하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인사동만의 풍류와 낭만이 농익을 수 있도록 한데는 그의 기여가 컸습니다.

 

이젠 수많은 독립자료에 파묻혀 독립운동사를 추적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에서 독립운동을 가장한 친일파도 찾아냈다고 합니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우리 틈내어 그가 억척스레 수집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신채호, 박열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숨결을 느끼러 갑시다.

다시 한 번 독립을 되새겨봅시다.

 

개막식은 8월12일 오후5시지만, 편할 때 가시면 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소설보다 더 기막힌 일이 많아, 이젠 소설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찰총장이 자신을 임명한 정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지 않나,

대권에 뜻을 둔 유망 정치인들은 모조리 ‘미투’란 올가미에 걸려 잡혀 가거나,

목숨까지 잃는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다.

음모와 저주가 난무하는 드라마 같은 현실에 누가 소설을 읽겠는가?

 

느닷없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보를 접하며 한동안 멘붕 상태에 빠져 일손을 놓았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마지막 희망으로 지지해 온 

정의당의 망자에 대한 부도덕한 처신도 마음을 뒤집었다.

조문하기 싫으면 안 가면 될 것이지, 왜 나팔을 불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잘난 채 하고 싶었을까?

 

시장으로 재임하기 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할 때부터 존경해 온

박시장과의 첫 만남은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 시절이었다.

당시 ‘민예총’ 사무총장이었던 김용태씨 소개로 사진 5점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창녕군 장마면이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후배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친근감을 느꼈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한 호감에 금이 간 것은 2018년 여름 그가 동자동 쪽방 촌을 방문하면서다.

그 당시 쪽방 촌에 장관을 위시하여 여러 정치인들이 찾아 와

빈민들을 들러리로 정치 쇼를 벌이는 일이 잦아 심기가 불편했다.

더위에 지친 빈민들에게 수박화채를 나누어주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이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기자들 사진촬영을 위해서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을 정치판 들러리로 내 세우지마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이번에 나팔 분 정의당 철부지가 한 말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일은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보좌진들이 짜놓은 일정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사과드린다. 부디 용서하시고, 저승에서나마 못 다한 일 이루시길 바란다.

 

어저께는 동자동에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신호에 걸려 출발하려니 갑자기 변속이 되질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 시동을 끈 후 다시 걸었는데, 이젠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빵빵 그리는 뒤차의 성화에 정신이 없었는데,

호출한 견인차마저 일이 많다며 늦게 출동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삼일 전에도 밤 늦게 정선에서 돌아오다 타이어가 터져 서울까지 견인해 오지 않았던가?

그 때 폐차해야 했는데, 당장 차 쓸 일이 많아 중고타이어 두 짝을 구입한 것이다.

이번엔 엔진을 들어 올리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며 수리비만 40만원이 넘는단다.

노후경유차라 고장 나기 전에 폐차했더라면 백 오십만원이나 되는

서울시에서 주는 조기폐차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었다.

 

결국 애마를 폐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루 전에 구입한 타이어가 아까웠다.

좋은 타이어를 산 가격 그대로 준다던 주인 말이 생각나 다시 찾아간 것이다.

타이어 휠까지 끼워 줄 테니 산값의 반만 돌려 달랬으나 한사코 손사래 친다.

오히려 자기가 아는 곳에서 폐차시켜 줄 테니 차를 견인해 오란다.

아마 폐차장에서 주는 소개비가 탐나는 모양인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십여 년간 거래한 단골이지만, 돈 앞에서는 본색을 더러 냈다.

 

3년 전, 500만원에 사들여 끝 까지 운명을 같이 할 거라며 다짐했지만, 또 먼저 보내게 되었다.

장안평 중고차 장사꾼 말에 속아 탈 많은 고물차를 너무 비싸게 사, 수리비가 더 들어갔다.

이번 주말에는 울 엄마 제사도 있지만, 무덤 이장할 일로 정선 갈 일이 난감했다.

 

그동안 이십년 넘게 정선을 오갔지만,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은 없다.

정선에서 하루에 네 차례 다니는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귤암리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는 산길이라 차 없이는 힘든 곳이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구할까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김명성씨와 김상현씨가 와 있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꼼짝하기 싫어 머뭇거렸는데, 정영신씨를 통해 독촉이 빗발쳤다.

 

도살장 끌려가듯 나갔더니, 그날 강찬모씨 딸 결혼식에 갔다 왔단다.

왜 나 한데는 연락하지 않았을까? 거지라 봐 주는지 모르겠으나,

아들 햇님이 결혼 때도 축의금을 보낸 터라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결혼식을 축하하며,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뮤아트’ 김상현씨가 반겼다.

이 친구도 병원에 입원해 수술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요즘은 핸드폰을 멀리하며 사람 만나기를 기피하니, 사람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

사람 만나는 일은 커녕, 술 마시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지만, 이 날은 한 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술자리의 화제는 온통 비명에 떠난 박원순시장 이야기 뿐이었다.

김명성씨는 독립운동 자료전시 문제로 박시장이 만나자는 날짜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 왔다는데, 갑작스런 비보에 난감해 했다.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딸로부터 원망을 듣고 나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마음 여린 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다.

 

술 마시는 중에 최명철씨와 이인섭, 안완규 씨등 여러 명이 지나갔다.

너무 과음한 탓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눈물인냥, 비까지 하염없이 내렸다.

엎드려 있다 잠들기를 반복했는데, 김상현씨가 부른 노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란 슬픈 노래 소리가 빗물에 흘러내렸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엔 아침부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녹번동 정영신씨 다락방에 있는 대형 프린트기를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사무실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 기계가 인사동 '아트 온'에서 녹번동 다락방까지 온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정 몇 명이 달라붙었지만 좁은 방 턱에 끼어 힘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나갈 때는 '앱숀'사무실에서 온 젊은 분들이 쉽게 빼낼 수 있었다.

협동조합르로 옮겨 놓은 프린트기를 보니 지난 일이 생각났다.

우리 손에 들어 온 사연은 뜻밖이었다.

 

8년 전 영일만친구 최백호씨가 인사동에서 그림 전을 열었는데,

그 개인전을 아라아트김명성씨가 추진한 것이다.

전시를 끝낸 최백호씨가 전시경비 보태라고 천만 원을 내 놓았는데,

김명성씨가 기어이 받지 않은 것이다.

 

그 돈이 왔다 갔다 하다 결국 내 프린트기 사주기로, 뜻을 모은 것 같다.

후배들의 고마운 뜻에 앱숀 프린트기가 생겼는데, 원님 덕에 나팔 불게 된 것이다.

 

정영신씨의 손놀림에 의해 정선 산천이 줄줄이 펼쳐 나왔고,

전국 장터가 왁자지껄 난장을 만들어냈다.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 돈 쓰는 기계였다.

만만찮은 잉크와 종이 값 날려가며 어지간히도 떠벌렸다.

 

이제 그 기계도 8년차가 되니 내 몸처럼 골골한다.

얼마 전부터 컬러 사진이 안 되고 흑백만 된 모양인데,

문제 생긴 헤드를 수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단다.

이제 수리하던, 새로 사던, 주사위는 스마트협동조합에 넘겨졌다.

 

그 날은 스마트협동조합 식구들이 함께 밥 먹는 수요일이었다.

처음으로 차린 공동 밥상인데, 주방 일을 도운 게 문제였다.

밥에 물을 많이 부어 죽밥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책임질 주방장이 없어 그렇다며 혼자 변명해댄다.

 

황경아씨가 가져 온 갓김치와 칼치구이,

정영신씨가 가져온 두룹나물에, 입만 가지고 간 나만 맛있게 먹었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는 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날 저녁부터 이틀에 걸쳐 정영신씨 집 환경미화작업이 펼쳐졌다.

방을 차지했던 프린트기가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아무리 코 구멍한 집이지만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변화를 즐기는 정영신씨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을 거다.

 

미화작업이라 해도 이쪽 책장이 저쪽으로 가고

저쪽 책장이 이쪽으로 오는 수준이지만, 여간 신경 쓰는 일이 아니다.

김명성씨가 가져가야 할 대형 작품 여덟 점이 남아 마무리를 못했으나

다락방 삼면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동안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책들을 버렸다.

일부는 정선으로 옮겼으나, 이젠 정선도 둘 곳이 없다.

그 날도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구분하는

정영신씨의 판단에 따라 많은 책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자의든 타의든 또 다시 책은 들어 올 것이다.

대개 버려지는 책은 사지 않고 얻은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지 않는다면, 공짜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자칫, 쓰레기 양산하는 일에 일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 버려지는 책이 아까워 고물상에 팔려고 모았는데,

정영신씨는 없는 사람 가져가게 그냥 밖에 내놓으란다.

세상에 니보다 없는 사람이 어딧노?”라고 했더니, 비시시 웃는다.

그래! 돈은 없어도 마음이 부자니, 니가 더 부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선가 우리가 만든 책들도 이처럼 버려질 걸 생각하니,

세상만사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끼던 책도 싫어지면 버리듯이 모든 것은 언젠가 버려진다.

결국 인간조차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던가?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터넷 뒤져가며 책을 주문할 것이다.

제 버릇 개 못준다.

 

사진, / 조문호

 

 

 



모처럼 반가운 벗들을 만났다.
출감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벼슬하고 온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전화 받기가 머쓱해 핸드폰을 없애버렸으나
정영신씨를 통한 쓰리 쿠숀으로 쳐들어 왔다.




사실, 구치소에서 작심한 것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핸드폰을 없애는 일과 페북을 끊는 것도 있는데,
전화 없애는 일은 간단했으나, 페북 탈퇴는 작심 삼 일을 못 넘겼다.




결국 출소 이틀 만에 글을 올리고 말았는데,
페북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차례만 접속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첫날은 정영신씨와 함께 일하는 ‘예술인협동조합’ 서인형씨가 찾아와
녹번동 ‘풍년집’에서 돼지 한 마리 잡아 몸보신 시키더니,
지난 주말에는 김명성씨 전화를 연결시켜주었다.




진관동 집 부근에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데,
시인 조해인씨도 와 있었고, 뒤 따라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뮤아트’에서 음악 하는 낭자들도 셋이나 등장했다.




북한산 아래 ‘북한산 메기탕’에서 메기탕을 끓였는데,
수제비를 뜨도록 밀가루 반죽까지 넘겨주었다.
쪼물락 쪼물락 만지는 촉감이 꽤 좋을 것 같았다.
“아~ 옛날이여!”




술자리가 끝난 후, 김명성씨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청운씨가 그린 석양 포구에서 듣는 음악이 그리워서다.



그 날은 보슬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 한 몫 한 것은
북한산을 휘감은 구름이 장관을 연출해서다.



어찌 이 분위기에 술이 없을소냐?
중국집에서 유산슬 시켜 또 한잔 걸쳤는데,
김상현씨가 선곡한 음악까지 죽였다.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비롯한 축음기 시절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코맹맹이 음색의 간 들어진 노래 소리가 봄비마저 울렸다.



그날은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여배우 전옥 노래까지 나왔다.
배우 최민수씨 외할머니였던 전옥의 창법은
가슴 속 가라앉은 슬픔을 끌어내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전옥이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항구의 일야' 레코드자켓

봄비와 노래가 작당하여 늙은 놈 가슴을 후벼 팠다.
재미있게 살기로 한 시작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김명성씨가 새로 나온 명함을 한 장씩 돌렸다.
주식회사 ‘아트해피니스’ 연구실장이라 적힌 명함인데,
‘행복’이란 글씨가 도드라졌다.
김구선생 필체라는데, 글체처럼 뭉툭한 행복이 찾아들었으면 좋겠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야 한옥마을에서 걸쭉한 잔치 한 판 벌일텐데...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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